연중 제7주일 강론 (마태 5,38-48) (신원식 신부)
수녀님들 연피정을 동반하고 있는 예수회 신원식 신부입니다. 오늘 복음은 거꾸로 읽으면 이해하는 것이 쉬울 것 같습니다.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입니다. 중간 부분에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 앞부분에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고 합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그 구체적인 행동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 뺨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왼뺨을 돌려대지 않았습니다. ‘왜 때리느냐’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성전 경비병이 예수님 뺨을 치면서 ‘대사제에게 무슨 말버릇이냐’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왜 때리느냐,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잘못이 없다면 왜 나를 때리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뺨을 맞으셨는데 빌라도의 병사들에게 끌려가 옷을 벗기고 가시관을 씌우고 뺨을 여러 대 아주 비참하게 맞았다고 전합니다.
우리가 성서 말씀을 이해할 때 그 말씀만으로 이해하기보다 예수님 전체 삶을 들여다보며 그 말씀을 이해하려고 해야겠습니다. 늘 착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어느 날 화를 내면 ‘저렇게 착한 사람이 얼마나 화가 나면 저렇게 화를 낼까’ 그러겠죠. 늘 못 때게 굴던 사람이 착하게 굴면 ‘저 사람이 또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의 패턴으로 사람의 말과 행동을 판단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도 그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오른뺨이라고 했을까요? 루카복음은 그냥 뺨이라고 했지만 마태복음은 오른뺨이라고 했습니다. 오른뺨이든 왼뺨이든 굳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왼뺨을 먼저 때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한번 상상해보세요. 앞에 있는 사람의 오른뺨을 치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됩니까? 일반적으로 10% 왼손잡이고 90%가 오른손잡이입니다.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오른손으로 오른뺨을 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팔을 꼬아 손을 뒤 짚어서 치든지 손등으로 치게 되지요. 물이 귀한 중동지방에서는 오른손은 항상 깨끗한 것을 다룰 때 씁니다. 음식을 먹든지. 왼손은 더러운 것을 다룰 때 씁니다. 뒤를 닦는 일. 만약 노예나 종이 있을 때 오른손으로 오른뺨을 치면 내 손을 더럽히게 됩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는 오른손등으로 치게 됩니다. 보통 오른뺨을 친다는 것은 손등으로 오른뺨을 친다는 말이 됩니다.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뺨을 때리는 행위는 뺨을 때린다는 것 자체도 모욕적이지만 상대방을 노예나 종이나 죄인의 수준으로 취급한다는 의미가 상징적으로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왼뺨을 돌려대라는 이야기는 내가 노예나 종이 아니라 똑같은 인간으로 싸우자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더러운 속옷을 가지려고 하겠습니까. 그 뜻은 나를 발가벗기려고 할 때 모든 것을 다 주라는 이야기입니다. 겉옷을 저당잡은 사람은 해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모세 율법에 있습니다. 일교차가 심한 그 지방에서는 겉옷이 이불도 됩니다.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로마 군인들에게 걸음을 세는 단위가 있는데 이때 한 걸음은 왼발, 오른발를 묶어 한 걸음이라고 합니다. 지금 단위로는 1마일이 천 걸음을 말합니다. 우리 식으로 계산하면 이천 걸음이겠지요. 1마일은 로마 군인들이 속국에서 점령지의 사람들을 징발을 해서 짐을 나르게 하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피지배민족에게는 굉장히 부당한 것이지요. 대표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로마 군인이 키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한 것이지요. 로마군인들의 징발법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법으로 가능합니다. 법이 엄격한 사회인 로마에서 법을 어기면 안됩니다. 2천 걸음, 2마일을 가주라는 것은 천 걸음, 1마일을 가는 것도 부당한 일이지만 2천 걸음을 가서 법을 어기게 하여 그 사람의 부당함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이지요.
인도가 영국 식민지였을 때 소금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소금을 전매하고 아무나 소금을 생산할 수 없도록 영국인들이 법으로 정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비싼 돈을 주고 소금을 사먹어야 했습니다. 이에 간디가 저항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수백 킬로를 걸어 바닷가에 가서 내가 소금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불법이지요. 부당함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이죠. 간디가 바닷가로 걸어가는 동안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함께 걸어갔습니다. 이때 바닷가에는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바닷가에 선을 그어 이 선을 넘어오면 체포한다고 했습니다. 간디부터 그 선을 넘어갑니다. 그러면 경찰들이 곤봉으로 머리를 쳐서 쓰러지면 옆으로 끌어내고, 그 다음 사람이 또 넘어가면 또 쳐서 끌어내고, 그 다음 사람... 그 다음 사람... 백 명, 천 명 결국은 소금법을 없앨 수밖에 없게 됩니다. 비폭력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저항을 하는 방식이지요.
오늘 복음은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원수를 사랑해야 되지만 어떤 부당한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부당함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아오셨습니다. 바라사이파나 사두가이파의 부당함에 대해서, 로마의 부당함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 부당함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간디를 따르는 사람들이 머리를 깨지면서 자기를 희생하면서 그 부당함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합니다. 미움을 가지지 않고 나를 희생하면서 불의와 부당함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비폭력적 자기희생을 통한 적극적인 저항, 불의에 대한 저항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행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면서 유다인들의 부당함, 로마인들의 불의에 대해서 분명하게 저항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다인들은 그 후 완전히 멸망을 해서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고 로마인들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희생을 통한 적극적인 저항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보게 됩니다. 시민들의 촛불집회를 보면 분면하게 알 수 있지요. 자기희생을 통한 불의에 맞서면서 미움 없이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당함과 불의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이고 그것이 완전하게 되는 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문제 뿐 아니라 수도공동체에서도 때때로 장상이나 윗사람들에 의해서 내가 생각 할 때에 부당한 불의한 요구를 받아들여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분노나 미움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되는데 장상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희생을 통해 그렇지만 당당하고 우아하고 품위 있게 장상에게 그 부당함을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자기희생을 통해 모든 사람을, 원수까지도 사랑해야한다는 완전으로 향하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기꺼이 그 길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피정하는 수녀님들께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식사가 끝난 다음 후식으로 사과가 나왔습니다. 광주리에 있는 사과중에 그중 한 개가 썩은 사과입니다. 누가 썩은 사과를 선택하는가? 아빠, 엄마, 아이들 한 가정에서 식사 후에 딱한 개가 썩은 사과가 있을 때 누가 썩은 사과를 선택합니까? 당연히 엄마이겠지요. 엄마는 의지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며 기쁘고 자연스럽게 썩은 사과를 선택하지요. 수녀님들이 공동체에서 매번 썩은 사과를 선택하려면 엄청난 노력과 의지를 발휘해야 되겠지요. 기쁘게 썩은 사과를 선택하는 것이 결국은 기쁨으로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고 예수님의 삶의 방식입니다. 오늘 우리는 완전으로 향하는 길, 사랑으로 자기희생 하는 방법을 깊이 묵상하고 그 삶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특별한 은총을 청합시다.
출처: https://cutt.ly/K3CKK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