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5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
살전 5:25~28
<목사가 대형 콘테이너 트레일러 운전자로 나섰습니다>
<우리 교회 등록 성도 가정 중 한 분이 과거에 뇌졸증으로 쓰러져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지금도 가끔 건강 상태가 완전치 못한 상황에서 울산에서 충남 예산까지 일주일에 3-4차례 트레일러 컨테이너 운송을 하기 위해 운전을 하십니다. 우리 교회 오시기 전에는 다른 교회에 출석하셨는데, 딸과 사위가 저희 교회에 등록하게 되면서, 집사님의 가정도 함께 오셨는데, 지금도 가끔 몸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큰아들에게 연락하여 운전을 맡기는 경우가 있음을 알고, 목사인 제가 교인의 위급한 상황이 왔을 때, 그 어려움을 돕고자 하여, 과거에 대형 버스운전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 대형 트레일러 면허와 화물운행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하는 집사님을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울산에서 밤 12시에 출발하여, 충남 예산 어느 공장에 컨테이너 짐을 풀어주고, 다시 울산으로 내려오니 오후 5시쯤 되었네요~ 너무나 보람이 되고 참으로 기쁨이 넘칩니다. 종종 도울 수 있으니 더 기쁩니다>
위 글은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자유게시판에 최근 올라온 내용입니다.
제목은 “목사가 대형 콘테이너 트레일러 운전자로 나섰습니다”
이 글을 올리신 목사님은 실제 트레일러 화물차 핸들을 잡고 있는 사진,
고속도로를 운행하는 사진과 함께 글을 올리셨습니다. 그 글을 제가 그대로 읽어드렸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레알?’ 실제 상황이란 말인가? 목사가 이렇게까지 성도를 섬겨야 하나?
교단의 목사님들이 칭송의 댓글을 올렸습니다. 거기에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인들은 교회를 위해, 목사님을 위해, 더 섬기는데, 거기에 비하면 작은 거지요!>
제가 정작 놀란 것은, 저는 감히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올라온지 일주일쯤 됩니다. 일주일 동안 이 내용을 곰곰 되새겼습니다.
그리고 저의 지난 15년 목회를 이 기준에 비추어 봤습니다.
이 기준에 비추면 저의 목회는 감히 흉내조차 내지 못한 목회였음을 고백합니다.
다시 시작한다면, 그 목사님처럼 저도 해 보고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진심입니다.
☞ 저의 목회는 어땠는지 반성하면서 오늘 설교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시리즈 설교>
저는 세는나이 쉰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집사였습니다.
신학대학원 3년, 박사과정 3년으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쉰에 이르도록 교회에서 경험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실 저는 교회에 나간다 하면서 목회자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저 스스로 일정한 거리를 두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다가오는 목회자를 차단했습니다.
‘이것은 내 사생활이니 목사님의 간섭은 여기까지입니다.’라는 경계를 설정했습니다.
저의 신앙생활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그 설교를 저의 삶에 적용하는 것까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과장입니다. 사실 꾸벅꾸벅 졸면서 설교들었습니다.
참 엉터리였습니다. 신앙이 엉터리였으니, 삶이 엉터리였고, 인생이 엉터리였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신학을 하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저 스스로 성도의 삶에 간섭하는 경계를 적용했습니다. 제가 평신도때 설정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15년간, 목회자는 오로지 설교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았습니다.
성도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여기에는 핑계 거리가 또 있습니다.
개척 초기 성도의 집에 심방 하려다가 문제가 생긴 적이 있습니다.
목사로서 심방을 하겠다는데 한사코 거부하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그 성도가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기 집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요즘 젊은이들은 아무도 자기 집에 들이지 않습니다. 심방 포기해야 합니다.”
곁에서 이렇게 조언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말 듣고 그렇겠다 싶어서 포기했습니다.
이 포기는 성도의 사적인 영역에 침투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럼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나? 설교로서 성도의 삶에 침투하는 방법외에는 없지않은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오로지 설교에 올인했습니다.
오늘로서 20회 설교로서 데살로니가전서 시리즈설교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지난 4월 30일 주일에 데살로니가 전서 설교를 시작한 이래 5개월 반만입니다.
저는 지난 15년간 대략 80% 이상의 설교를 시리즈로 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호세아, 스가랴,
마태, 마가,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베드로전서, 후서, 히브리서, 데살로니가전서,
대략 20권을 시리즈 설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는 것이 목회의 최선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해가 저물어왔습니다. 책을 8권 펴낸 일도 작은 것은 아니지만, 아쉬움이 큽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형트레일러 운전자로 나선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대단원>
어쨌든 오늘 또 한권의 책, 데살로니가 전서 대미를 장식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첫 번째 보낸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마무리에는 바울의 3가지 당부가 나옵니다.
첫째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25절)
둘째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26절)
셋째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주라”(27절)
이를 간명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압축됩니다.
첫째, 기도하라
둘째, 문안하라
셋째, 읽어주라
첫째 “기도하라”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기도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무슨 뜻이라고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의 물고기가 되어라”
“하나님이 건져올린 그물 속에 있는 물고기가 되어야 한다. 그물 밖에 있으면 안 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물고기입니다.” 그리고 외쳐야 합니다.
“형제여 이리 와서 하나님의 물고기가 됩시다!”
“자매여 이리 와서 하나님의 물고기가 됩시다!”
둘째 “문안하라” 문안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읽어주라”를 먼저 하겠습니다.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주라”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결국 “모든 형제에게 성경을 읽어주라”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는 신약성경이 되었습니다.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사도 바울의 편지가 13통입니다. 모두 성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형제에게 성경을 읽어 주어라!”
세계에는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중에 기독교는 무엇보다 성경을 읽는 종교입니다.
불교를 보십시오, 해인사에 8만대장경이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어떻게 읽겠습니까?
극소수 전문가만이 불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불교신자들은 불경, 읽을 생각을 안합니다.
☞ 기독교는 다릅니다. 성경은 신구약 딱, 66권입니다. 기독교는 성경을 읽는 종교입니다.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성경은 거들떠도 안 보고 기도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매우 잘못 된 신앙입니다. 한 시간 기도했다면, 한 시간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선포합니다.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주라”(27절)
오늘 설교 제목을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라고 정했습니다.
첫째, 기도하라, 둘째, 문안하라, 셋째, 읽어주라
이 모두가 중요하지만, 오늘 설교에서는 “입맞춤으로 문안하라”에 초점을 맞춰봅니다.
입맞춤 하면, 우리는 흔히 외설스러운 생각부터 합니다.
요즘 저희 부부는 날마다 ‘입맞춤’을 합니다. 여러번 합니다. 언제하냐고요?
유채 바울이 녀석 저희 엄마 딸려서 보낼 때 합니다.
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먼저, “뽀뽀하고 가야지!”했는 데, 요즘은 아이들이 먼저 “뽀뽀”
“뽀뽀” “입맞춤” 참 좋은 겁니다.
입맞춤이 없었더라면, 손주 녀석들에게 사랑 표시를 어떻게 했을까?
이렇게 짙은 혈연 관계에서 입맞춤을 하고,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입맞춤은 필수입니다.
입맞춤은 암튼 서로 간에 합일을 의미합니다.
너와 나, 그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입맞춤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과 경계를 두고 싶지 않다면, 그때 하는 것이 입맞춤입니다.
부부간에 사랑이 뜨거울 때, 거리를 없애고자 할 때, 입맞춤을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경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입맞춤을 합니다.
너무 귀여우면 이마에, 볼에, 입술에 뽀뽀를 합니다. 심지어 엉덩이에도 합니다.
이렇게 입맞춤을 하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와 입맞춤을 하는 이유는, 원래 자녀는 부모와 한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가 점점 멀어집니다. 이것이 아쉽습니다.
원래 자기와 한몸이었는데, 자기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쉬워 뽀뽀를 합니다.
입맞춤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의례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입니다.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이 확인이 입맞춤입니다.
사도 바울이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와 입맞춤 하시는 하나님>
바울은 왜 교회 안에서 지체들끼리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생각할 것은 “예수님은 우리와 입마춤하고자 하시는 분일까?” 이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수시로 입맞춤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입맞춤은 일반적인 인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과 입맞춤하는 것은 인사의례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하나가 되고자 하셨습니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이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가 될 때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기에게 붙어있기를 간절히 바라시면서 성례전 하나를 창설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만찬’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마 26:27)
이렇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우리와 하나가 되십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하는 것은 다름아닌 주님과의 거룩한 입맞춤입니다.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고, 교회 안에서 믿음의 형제자매가 하나가 되는 의식,
여기서 ‘거룩한 입맞춤’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거룩한 입맞춤으로 하나가 된 우리, 이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거룩한 입맞춤으로 하나가 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제가 설교 시작하면서 “목사가 대형 콘테이너 트레일러 운전자로 나섰습니다” 읽었습니다.
목사가 성도를 위해 이렇게 대형콘테이너 운전자가 되는 일, 이것이 교회의 입맞춤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렇게 문안하는 것,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꿈꾸시는 길>
첫째, 기도하라, 둘째, 문안하라, 셋째, 읽어주라
기도, 문안, 성경입니다.
이 당부를 한 다음,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에게 축도를 합니다.
(28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축도입니다. 오늘날 예배는 목사의 축도로 마칩니다.
목사가 축도하고 예배를 마치는 의례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주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첫째, 기도하라, 둘째, 문안하라, 셋째, 읽어주라
세 가지로 함축합니다. “기도, 문안, 성경”입니다.
바울은 기도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이후 그는 기도했습니다.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바울에게 갈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너는 너의 안목에 따른 길을 가지 말고 내가 너를 보내는 길로 가거라!”
바울은 당시 대단한 엘리트였습니다. 출세가도를 달리기로 하면 부러운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했더니, 바울이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길을 보여주십니다.
바울이 꿈꾸던 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은, 하나님이 꿈꾸시는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꿈꾸시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바울은 자기가 꿈꾸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이 꿈꾸시는 길로 들어섭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꾼꾸시는 그 길을 평생 따라갔습니다.
그 길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꿈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교회를 개척한 일, 하나님의 꿈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에게 편지를 쓰는 일, 하나님의 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말미에 첫째, 기도하라, 둘째, 문안하라, 셋째, 읽어주라는 당부도,
바울의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꿈입니다.
교회는, 성도는, 자기의 꿈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꿈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