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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대의 현자들은 삶에 대해 같은 결론을 내렸다:
삶이란 의미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언제 어디서든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 의심으로 가득찬 소리,
우울함과 권태감으로 가득찬 소리,
생에 적대적인 말. 소크라테스도 임종을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산다는 것 - 그것은 오랫동안 병들어 있었다는 뜻이지: 나는 구원자 아스클레피오스 신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졌다네." 소크라테스도 삶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우상의 황혼》
마누, 플라톤, 공자, 유대교 교사들과 기독교 교사들. 이들은 거짓을 지껄이면서 그것이 자신의
권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상의 황혼》
그는 삶에 적대적인 사상을 퇴폐적이라
규정짓고 이를 데카당이라고 불렀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소크라테스 등을
데카당으로 지목하여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플라톤 연구자로서
기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 사상에 불과하다." -《선악의 저편》서문.
신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가치를 가리킨다.
신의 죽음은 신앙의 종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최고가치의 상실을 의미한다.
종교적 신, 합리주의 신조, 학문적 진리(이데아),
공리주의, 노동자 천국 등의 신앙이 상실되어
사람들이 허무해진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 달리 말해,
신의 죽음이란
허무주의(니힐리즘)의 도래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의
죽음이 초래하는 허무주의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의 질문이다.
"삶의 최고가치가 상실된 상태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기독교와 불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 책에서 니체는 일견 불교에
대해 호평을 내리지만 이내 기독교와
불교 양자를 퇴폐적인(데카당트) 종교로 규정짓는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는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이며,
불교는 삶에 지친 노인들을 위한 종교이다.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는 자신을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소개한다.
"나야말로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마지막 제자이며 그에 관해 정통한 자이다.
그러므로 나의 친구들인
그대들로 하여금 이 비밀스런 신의
철학에 대해 얼마쯤은 알게 해도 좋을 것이 아닌가?" 여기서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그리스 비극'에 대한 상징으로 활용하고 있다.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해석 탓인지,
니체는 '성장'이라는 개념을 좋아했는데,
이는 그리스 비극 정신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도 그러난다.
니체에게서 그리스 비극 정신이란,
니힐리즘을 근본으로 하는
고통을 힘의지로 승화시키는 태도이다.
"나를 이해했는가? 디오니소스 vs 십자가에 매달린 자." 《이 사람을 보라》 말미.
니체는 탈아의 도덕을 뛰어넘는 인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를 위버멘쉬라 부를 수 있다.
위버멘쉬는 또한 종래의 안일한 인간을 뛰어넘은 인간유형이다.
이렇게 보면 위버멘쉬는 종래의 성(聖)과 속(俗)을 뛰어넘는 인간이다.
어원:'니힐'이라는 단어는 그 어원상 '없다'는 뜻이다.
허무주의: 목표가 결여되어 있으며
'왜?'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결여되어 있다. 허무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고 가치들이 탈가치화 하는 것. - 1887년 《유고》
허무주의는 병리적 중간 상태를 표현한다
(병리적이란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결론짓는 끔찍한 일반화를 말한다)
- 1887년 《유고》
허무주의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초인은 탈아의 도덕을 극복해내는 인간이다.
이를테면 극기복례
혹은 순교자 개념을 극복해내는 인간이며,
그럼으로서 창조해내는 인간이다.
초인 개념은 '풍습의 도덕'과 대립될 뿐 아니라,
'인간말종(Der letzt Mensch)'과도 대립되는 개념이다.
'인간말종(Der letzt Mensch)'란
현실에 안주하는 인간형 혹은 권력욕에 물든 인간을 가리킨다.
이 원숭이들을 보라. 이들은 권력을 원하며,
무엇보다도 권력의 지렛대인 돈을 원한다.
이들 모두는 높은 권좌를 원한다.
그러나 권좌 위에는 똥이 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초인은 초월적인
힘을 갖춘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종래의 탈아적 가치를 극복하고
새 것을 생성시키는 인간을 의미한다.
니체는 '생존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Was den beruhmten Kampf um’s Leben
“ betrifft, so scheint er mir
einstweilen mehr behauptet als bewiesen. 그 유명한 생존경쟁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내게 증명이라기보다 주장으로 보인다. - 《우상의 황혼》, 안티 다윈.
천재는 – 작업이나 업적에서
– 필연적으로 낭비하는 자이다 ;
전력을 다한다는 것.
이것이 그의 위대함이다...... 말하자면 자기 보존 본능이 풀어져 있다;
발산되는 힘의 압도적인 압력이
그에게 그러한 보호와 신중함을 금한다. - 《우상의 황혼》, 나의 천재 개념
선과 악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항상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양심, 좋은 평판, 지옥,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
역시 솔직함을 허용하지 않았고
지금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중략) 세계가 생겨난 이래,
자신을 비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권위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구나 도덕을 비판한다는 것,
도덕을 문제로 삼고 의문시한다는 것은
비도덕적인 일이 아니었을까?
니체에게서 도덕의 종류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적 개념의 족보를 다루며,
도덕과 그 부대개념들이 역사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어 온 것인지를 기술한다.
주인도덕은 좋음과 나쁨을 가려 물으며
이를 가치평가의 잣대로 삼는다.
노예도덕은 형이상학적 의미의 선과
악을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상정한다.
다시 말해,
주인도덕은 개인의 호오(好惡)를 기준으로 하고,
노예도덕은 사회적 선악(善惡)을 기준으로 한다.
주인에게 '좋음'이란,
자신과 타자를 고양시키는 것이다.
주인에게 '나쁨'이란,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노예도덕은 주인도덕과 대립된다.
주인은 자신을 기준으로
'선'을 상정하지만,
노예는 먼저 '악'을 떠올린다.
노예도덕에서는
'주인에게 복수하지 못하는 무력감'이,
'자발적 용서'로 둔갑한다.
노예도덕에서는 노예가
느끼는 무력감이 미덕으로 위장한다.
주인의 미덕이 약자의 눈에는 악덕으로 비쳐진다.
도덕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알기 위해서는,
《도덕의 계보》 이외에도 니체가 쓴《아침놀》이나
플라톤이 쓴《고르기아스》를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아침놀》에서 니체는 '관습의 도덕'이라는
개념을 거론하며 이를 비판한다.
《고르기아스》를 읽다보면 중간즈음부터
칼리클레스가 등장하여 자연과
규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칼리클레스는
'규범'이 약자 패거리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며,
규범이란 소수에 불과한 강자를
억압하는 도구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입장은 칼리클레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니체 윤리학에서 지칭하는 '주인'
혹은 '강자'라는 개념은
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계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는 상인계급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잉여인간들을 봐라!
그들은 재산을 원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가난해지고 있다.
그들은 권력을 원하며
무엇보다도 권력의 지렛대인 돈을 원한다.
이 무능력한 자들은.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미학의 고대적 발판.
음악 정신에서 태어난 비극의
탄생의 결정적 새로움은
한 편으로는 그리스 인들에게서
발견되는 "디오니소스적 현상"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소크라테스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한 "비극의 탄생"과
"소크라테스적인 것"을 통한
"비극의 죽음"에 니체의 마음이 쏠렸다.
니체에게 소크라테스는 기독교 종교의
예비자를 구현하고 있었으며,
그에 반해서 디오니소스는
"반(反)그리스도"이고 "예술가 신"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선악을 넘어선"
염세주의와 비도덕적인 디오니소스 신의
"예술-종교"를 통해서, 간단하게 말해서
현존재가 예술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되어서 나타나는
"예술가-형이상학"을 통해서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구현된 현존재에 대한 도덕적 해석에 반대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폴로적 명징성과 유쾌함,
"지식의 빛"과 자아 인식의 인간적 구현이다.
그에 반해서 디오니소스는
"바쿠스적 소동과 춤"의 "어두운 심연",
"사랑의 도취에서 생긴 자아망각"을 대표한다.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니체 미학의 두 가지 근본적 범주이다.
헤라클레이토스적 의미에서
조화롭게 대립된 두 예술 충동의
"접합"의 결과물이 니체에게는
단지 아테네 비극의 탄생만이 아니라,
예술 전체의 탄생이다.
첫 작품에서도 비극적-디오니소스적 상태인
"미학적 상태"의 특징과 아폴로적인 것이
지닌 소크라테스주의와의
친근성은 이미 후기 니체의
저서에서 점점 강하게 드러나는
아폴로적인 것에 대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우세를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 점과 연관된 디오니소스적
특성이 니체 미학이 지닌 독특한 새로움이다.
그것은 대립된 개념이고, 그것을 통해서
초기 니체는 반 고전주의적 미학의
전령이 되고 후기 니체는 영원 회귀의
반(反)기독교적 예술-종교의 선생님이 된다.
니체에게는 예술 신의 전형이 된
"아폴로적 디오니소스"는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이다.
그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이 탄생했다.
그는 비극의 탄생 속에서만이 아니라
비극적 후기 철학의 핵심 인물이다.
거인족에 의해서 갈가리 찢긴
디오니소스가 아폴로에 의해서
다시 맞추어지는 이야기가 들어있는
오르페우스교의 자그레우스 신화는
니체에게는 비극의 신비적 가르침이다.
그는 비극적 신화 그 자체이다.
이런 토양 속에서만 니체의 미래 미학이 성장하고,
젊은 니체의 예술가-형이상학이 자라난 것은 아니다.
신들의 황혼을 쓰는 후기 니체,
디오니소스의 최후의
제자도 결국 이 토대 위에 다시 서게 된다.
니체는 클레멘스 알렉산드리아누스,
크로이처와 라살을 통해서
오르페우스교 자그레우스 신화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아폴로적-디오니소스적"이라는
유명한 대립 쌍이 결코
니체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니체는 크로이처, 라살, 미슐레
그리고 포이어바흐 등등의
생각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자신의 독자적 미학 이론을 만들어냈다.
음악의 디오니소스적 정신에서
태어난 "비극의 탄생"이라는 환영 속에서
결정적인 것은 예술가, 예술 수용자
그리고 예술 작품의 분리를 해체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화해한 축제를 기리는
" 그리스 디오니소스 축제의 모습 속에는
생산자와 소비자 혹은 생산자와
생산품의 분리가 들어설 자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 음악극의 탄생 시기에 대한
중요한 근본 경험으로부터 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면서
니체는 하나의 발전을 미리 보게 된다.
그러한 발전은 전래의 "예술 작품의 예술",
즉 개인적 예술가들의 예술 작품으로부터
바그너가 생각한 의미에서의 "종합예술"인
"축제극"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바그너에 대해서 점점 거리감을 갖게 되는 것과
동시에 최종적 단계에서 세상을
보편적 예술 작품으로 보는
미학적 관찰로 이끈다.
바이로이트의 "축제극"에서
진정한 종합 예술작품인 "세계극"이 생겨난다.
더 이상 예술 작품은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관찰된다.
"모든 것이 유희다",
"모든 것이 예술이다".
"정오",
아폴로적 디오니소스가 현현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드러난다.
완벽하게 되고 미학적으로 정당화된
세계는 스스로를 잉태하는
예술작품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이 "힘의지"라는 마술적 공식을 해석하고
평가하기 위해서 애를 쓴지도 이미 100년이 훨씬 더 지났다.
1901년 부분적으로는 오늘날에도 규범적인,
세기적인 니체 유고의 편집 본이
권력 의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사람들은 이 책을 오랫동안
니체의 주요 저작으로 잘못 간주했다.
오래전에 표어가 되어버린
그리고 정치적으로 잘못 해석된
권력(쟁취) 의지 이론은 실제로는
결코 실행되지 못했던 니체의 계획을 표시한다.
그 계획은 니체의
미학 이론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쇼펜하우어와는 대조적으로
니체는 자유 의지를 "파국적인 철학자들의 고안물"로 비판하고
여러 번 "어떤 의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되풀이해서 말한다.
다른 한 편으로 그는 권력 의지를 "세상의 정수",
"존재의 가장 내밀한 본질"로 고찰한다.
그것은 권력 의지가 욕구가 없는 의지,
즉 원하는 자아가 없는 의지일 경우에만 서로 일치한다.
니체는 권력 의지라는 생각으로
분명 "나는 원한다."라는 문장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처럼 (힘이 넘치는 초인)의
개인적 의지라는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것은 특별히 차라투스트라의 첫 연설
("세 가지 변신에 대해서")에서 분명해진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난 다음에,
"너는 해야만 한다."는 명령이 낙타에게 내려진다.
정신이 사자가 되었을 때, 사자의 정신은 말한다.
"나는 원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정신은 아이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정신의 세 번째이고
가장 심오한 변화이다,
그 변화 속에서 기독교적 도덕
"너는 해야만 한다."는 말 뿐만 아니라,
영웅적인 "나는 원한다."는 말도 아이의 순진함,
창조의 유희 속에서 "자기긍정"을 얻기 위해서
극복되어야만 한다.
초인은 "금발의 야수"가 아니라,
사자의 정신과 "나는 원한다."는 것을
극복하는 인간이다,
그의 정신은 아이가 된다.
3번째 정신의 변화 후에 생기는
욕구 없는 의지를 지니고,
자아를 잊어버린 주체의
고대적 모범은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B52에 나오는 유희하는 아이다.
이 단편에서 삶의 유희 혹은 세계-시간,
즉 아이온Aion은 유희하는 아이로 묘사된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의 유희하는 아이는 정신의
세 번째 변화 후에 생기는
니체의 유희하는 아이의 선행 인물이다.
즉 그 아이는 초인의 선행 인물인 것이다.
이 단편과 니체가 자신의 생각 속에 재해석한 것은
접합점으로 드러나고,
그 속에서 비극의 탄생을 쓴 초기
니체로부터 차라투스트라를 쓴 후기
니체로 이끌고 영원 회귀와 권력 의지라는
두 개의 어려운 생각을 결합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여러 개의 결합선이 모여 있다.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를 해석한 것 속에
나타나는 세계-
시간의 “위대한 년도”인 아이온은
영원 회귀가 신적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세계-아이인 아이온이 벌이는
세계-놀이가 지닌 이름이 권력 의지이다.
아이온의 목적 없는 유희 속에서는
욕구 없는 의지가 지배하며,
아이온은 권력 의지의 신적 의인화이다.
권력 의지와 영원 회귀는 동일한 아이온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이다.
한 편으로는 아폴로적 디오니소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제우스의
특징들을 지니고 있는 아이온이 니체의
비극적 후기 철학에서 예술로서의 영원 회귀와
권력 의지의
예술가-형이상학을 주관하는 신으로 합쳐진다.
미학 이론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실,
니체가 고전 문헌 학자였다는 사실은
고대의 밑바닥에서부터
그가 신랄하게 비판한 현대의 꼭대기로
곧장 도약을 하게 된 한 가지 원인일 수도 있다.
이 같은 도약은 특히 니체의
미학적 성찰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니체의 말을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인들로부터
먼저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비극의 탄생에서
그는 모든 예술이 내적으로 그리스인들에게
의존되어 있는 상태를 강조한다.
그는 예술과 관련된 분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을 "우리 문하의 최고의 스승"으로 칭찬한다.
기독교 신은 죽었고
그와 함께 형이상학도 죽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형이상학 이전의 시대에서,
즉 비극적 그리스인들의 시대에 있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니체의 철학적 고생물학은 고대 토양의
점진적 재획득,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산재된 사유들을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에서
그보다 앞서 살았던 헤겔처럼
단순하게 임시적인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니체보다 나중에 살았던 하이데거처럼
모범적인 것을 보았다.
니체의 퇴행은 다름아니라 진보이다.
니체는 플라톤 이전-형이상학 이전의
철학으로 자신이 되돌아간 것을
미래 미학으로 도약을 하기 위한
도움닫기로 이해를 한다
("미래의 시간은 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는 비극 책이 쓰이던 시기에 미래의
미학이 바그너의 작품 속에서 미리 구현된 것으로 보았다.
그와 반대로 그는 나중에 자신이 꿈꾸었던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 음악 정신에서 태어난
사산(死産)으로 인식을 해야만 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신전을 발굴한 것과
헤라클레이토스의 비극적 철학의 재생을 위한
니체의 의지는 포스트모더니즘 미학 이론의
서곡으로 간주될 수 있다.
특별히 초기 형이상학 시기의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력에 기반을 두고 있는
미학적 "세계-유희"로서의 "삶의 유희",
대립되는 것의 조화와 추한 것 속에도 존재하는 미의
편재성에 대해서 느낀 경험을 통해서
니체는 후기형이상학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위대한 선조가 되었다.
그것으로써 니체가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의
특징Nachvorsokratismus은 동시에 존재하는
모더니즘 이전과 이후의
특징Vorpostmodernismus이기도 하다.
생전에는 학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다.
혹독한 비판을 받았으며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악의성 비방과 음해에 시달렸으나,
사후 유럽의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재에는 19세기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된다.
니체의 사상은 그 전복적 성향으로 인해
자주 오해되고 비판받았다.
이런 니체의 성향은 온갖 권위에
불복했던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니체에 대한 평은 극으로 갈릴 때가 많다.
그에 대한 평가는 종교인들에게서는 혹평으로,
포스트 모던 철학자들에게서는 호평으로 나타나는 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현대 철학사(특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끼친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근대철학을 전복시킨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다.
니체는 가끔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인종주의의 시초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는 나치정권과
니체의 여동생이 공동으로
니체의 사상을 왜곡한 결과 확산된 인식에 불과하다.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니체의
저서를 짜집기해서 나치정권에 유리하게 아부한 것이다.
이 때문에 후일 연구자들의 노고로 '비평판 니체 전집'이 출간되었다.
엘리자베스는 흩어졌던 그의 저서들을 모아 일종의 보관소까지 열었으며,
미쳐 있던 니체에게 흰 사제복을 입혀 전시하기도 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히틀러에게
'니체의 초인이란 당신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니체에게 붙어다니는 해괴한 이미지와는
별개로 실제 니체는 개인주의자였으며 반(反)국가주의자였다.
1961년 《니체》를 출간한 이후 달리 평가되어
오늘날 니체에 대한 이상한 오해는 거의 해결되었다.
실제 니체는 자국인 독일을 매우 싫어했고
민족주의 또한 매우 혐오했다.
니체 본인은 자신의 저서에 대한 반응을 갈망했지만 허사였다.
그가 정신을 잃기 몇 년 전에서야 그의 사상이 수용되기 시작했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니체는 철학이 이론에
그치지 않고 삶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학과 문체 그리고 삶의 양식을 통해서,
니체는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샤르트르 그리고 카뮈 같은 작가들,
프로이트와 융과 같은 심리학자,
슈펭글러와 슈타이너와 같은
비밀스런 종교의 스승, 벤, 게오르게,
지드, 헤세, 호프만슈탈, 말로,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모르겐슈타인, 무질, 오닐, 릴케,
쇼, 예이츠 등등의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20세기-예를 들면 조형 예술에서
"발견한 대상"(뒤샹)의 경우에
드러나는 "작품의 부재"와 같은 현상으로
특징지어지는-가 시작되기 직전에
니체는 현재의 대부분의
미학 이론보다 20세기 예술 정신을
생각으로 포착하고 드러내는 것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
쉽게 오해할 수 있는 “초인”과
“권력의지”라는 핵심 개념과
도발적인 문장 때문에 보이믈러의 해석에
나타나는 것처럼 최초의 나치로 쉽게 오해받았던
니체가 특별히 동구권에서는
오랫동안 파시즘의 예비자와
"파시즘 미학의 선구자"로 오해되고
왜곡되고 모함을 당한 이후에,
그는 현재 그 곳에서,
특히 구동독 지역에서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
니체의 전 저작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편집한 콜리와 몬티나리의 대단한 작업은
오래전부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현 시대에도 지속되는 지적 반향의 표시이다.
"세계의 유희에 대한 미학적 기본 지각"을 지닌
니체의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예술가-형이상학"의
수용은 프랑스에서는 오늘날까지
중단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카우프만의 니체 연구 이후로
미국에서도 니체에 대한 연구는 강화되었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더불어
동아시아에 많이 알려졌다
산책하던 중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이후 간헐적으로 제정신을 회복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상 죽기 전까지 정신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0.1888 ~ 89년 해가 바뀔 무렵 정신적 암흑에 빠졌다.
그의 저작들은 정본이라 할 만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부분적으로 예전 저작들은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판본으로 나와 있었으나,
두 저작은 — 니체가 잘못된 곳들을
지적한 가운데 — 인쇄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아울러 인쇄되지 않은 자료들이 다양한 마무리 수준 상태로 존재했다.
이 인쇄되지 않은 자료는
프란츠 오버베크([[Franz Overbeck|Franz Overbeck]])가
하인리히 쾨젤리츠([[Heinrich Köselitz|Heinrich Köselitz]])
(페터 가스트(Peter Gast))와 협의하여 처음으로 수집했다.
이들은 또한 니체의
최종 출판업자인
콘스탄틴 게오르크 나우만(Constantin Georg Naumann)과
함께 계속적인 출판작업을 두고 논의했다.
그리고 1890년 말에 처음으로 파라과이에서
귀향한 니체의 누이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Elisabeth Förster
-Nietzsche|Elisabeth Förster-Nietzsche]])가
가족을 대표하여 논의에 참견했다.
그간에 니체 저술의 판매고가 올랐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1892년 초에 처음으로 전집판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이 전집판은 나우만 출판사에서 간행되었으며,
쾨젤리츠가 이를 담당했다.
정부주의 등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사후 게오르크 헤겔과
함께 파시즘의 상징적 존재로 왜곡되고 악용되었다.
연결된 것은 그의 사후
그의 누이 엘리자베드 때문이었다.
엘리자베드는 광적인 국가주의자이며
반유대주의자였던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1889년 푀르스터가 자살한 뒤
엘리자베드는 니체를 푀르스터의 이미지로 개조하려 했다.
이무렵의 니체는 정신이 붕괴된
상태였기에 여동생의 멍청한 짓거리에 대처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드는 니체의 작품들을
무자비하게 통제하고 파괴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히틀러가 니체의 저작에 관심을 보이고,
시중에서 니체의 사상이
유행하게 되자 탐욕에 사로잡혔던
그의 누이는 니체의 버려진 글들을
짜집기해서 〈힘에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1901) 등을 출간했다.
엘리자베드는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는데,
그녀의 열렬한 지지 때문에 대중은
니체를 히틀러와 연결짓게 되었다.
1930년, 니체의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되었다.
니체는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13세 무렵부터 20세 무렵에 걸쳐 가곡과 피아노곡을 작곡했다.
그 후 작곡하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바그너와의 만남을 통해 자극을 받고,
바젤 시절에 몇 개의 곡을 남겼다.
작풍은 전기 낭만파적으로,
그가 후에 전혀 작곡을 하지 않게 된 것은
본업으로 바쁘게 보냈다고 하는 이유 외에,
자신의 작품인 《만프레드 명상곡》을
한스 폰 뷜로에게
혹평 받은 것이 이유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니체가
작곡가로서 인식되는 일은 전무하지만,
저명한 철학자가 작곡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일부 연주가가 녹음하게 되었고,
서서히 그의 '작곡도 하는 철학자'로서의 측면이 밝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모두 가곡이나 피아노곡이지만,
2인 연탄곡 작품 중에는
《맨프레드 명상곡(Manfred-Meditation)》
교향시 《에르마나리히(Ermanarich)》 등,
오케스트라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을 것이라 여겨지는 작품도 있다.
또, 오페라의 스케치를 남기고 있는데,
2007년에 지크프리트 마트스가
그의 스케치를 골자로 한
오페라 《코지마(Cosima)》를 작곡했다.
Wie wenig gehört zum Glücke!
Der Ton eines Dudelsacks.
행복을 위해 거창한 것이 필요하지는 않다!
백파이프 연주소리.
— Ohne Musik wäre das Leben ein Irrthum.
Der Deutsche denkt sich selbst Gott liedersingend.
- 음악이 없는 삶이란 잘못된 것이다.
독일인들은 신조차도 노래를 흥얼거린다고 상상했다. 《우상의 황혼》
"내가 문헌학자였던 것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아마 나는 여전히 문헌학자다.
즉 천천히 읽을 것을 가르치는 교사 말이다."《아침놀》, 서문 5번글.
니체는 개념의 형성사를 중시하고 있다.
<우상의 황혼>에 기술된 다음 텍스트를 참조하라.
역사감각의 결여, 생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증오심.
즉, 이집트주의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이 사람을 보라》
"Ich bin kein Mensch, ich bin Dynamit"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니체와 철학》, 들뢰즈
니체는 세계를 차안과 피안으로 구분짓는 전통적 이항대립에 반대하였다.
다비드 슈트라우스는 신학자이자
철학자로서 헤겔의 제자이었다.
그는 《예수의 생애》라는 책에서
예수 전승이 신화적으로 변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 그 당시 슈트라우스의 책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지탄을 받았으며,
출간 이후 슈트라우스는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생을 마감해야 했다.
도이쎈과 몬티나리를 포함한 일부 저자들은
니체가 스위스 시민권을 획득했었다는
잘못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주로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 지중해 근방에 장기간 요양하였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내게 있어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책이다."
즉 "비참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고통받는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
또한 유일하게 경건한 자이며
신에 귀의한 자이고,
오직 그들에게만 축복이 있다.
ㅡ이에 대해 그대, 그대 고귀하고 강력한 자들,
그대들은 영원히 사악한 자, 잔인한 자,
음란한 자, 탐욕스러운 자, 무신론자이며,
그대들이야말로 또한 영원히 축복받지 못할 자,
저주받을 자, 망할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유대의 가치 전환의 유산을
누가 상속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즉 유대인과 더불어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 시작된다 <도덕의 계보>
이 글귀에서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생의 긍정으로,
그리스도를 생의 부정으로 놓고 대조하고 있다.
디오니소스는 그 어원상
두번(Dio) 태어난 자(nysos)를 뜻하며,
예수보다 그 연대가 오래된 신이다.
다음 텍스트를 참조할 것.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3.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유교식으로 말하면 극기복례,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이기는 자(Wer überwindet), 계시록 21:7
뛰어넘는 인간
혹은 극복하는 인간. Übermensch.
독일어 Über + mensch.
영어식으로 옮기면 Over + man
혹은 Super + man.
이를테면 생의지를 주요한 가치판별기준으로
삼는 공리주의적 인간 혹은 부르주아.
Der letzte Mensch.
"nihil fit ex nihilo" "없음에서는 없음만이 나온다.", 파르메니데스
니체 연구자 고병권은 다음과 같이 평한다.
"니체는 가치들의 가치를 묻는 사람입니다.
" 기독교적 가치 중 하나는 육체 경멸이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스페인을 점령한 후 가장 먼저,
"코르도바에만 260개가 있었던 목욕탕을 폐쇄한다.
" 니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독교적 가치는 비위생적이다.
심리적으로도 그렇고, 신체적으로도 그렇다.
달리 말해 동정(同情)의 도덕.
니체에 따르면 철학자들은
동정심을 경멸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심지어는 "플라톤도 동정심을 경멸했다."
"고귀한 영혼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있다." ,
《선악의 저편》 Die vornehme Seele hat Ehrfurcht vor sich.
독일어 Gut und Schlecht.《도덕의 계보》
제1논문에서, Schlecht라는 단어는
그 어원상 천민의 어리섞음이나
열등함을 나타낸다고 해석된다.
이를테면 동정심.
니체는 동정심이 동정하는
사람을 의기소침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여
이 개념을 일관스레 비판하였다.
독일어에서 동정Mitleiden이란
고통을leiden을 함께한다Mit는 뜻이다.
풍습의 도덕이라는 개념. -《아침놀》,
제1권, 9번글. Begriff der Sittlichkeit der Sitte.
자연과 규범.
각각 그리스어 Physis와
그리스어 Nomos. Nomos는 규범, 관습, 법 등을 의미한다.
부르주아.
니체는 상인의 가치평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니체에 따르면 상인이란 수요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자이고,
그 스스로가 사물 속으로 가치를 불어넣지는 못한다.
이는 예술적이거나 창조적인 태도가 아니다.
힘의지 혹은 힘에의 의지[Wille zum Macht].
생존의지[Wille zum Leben]와 대립되는 개념.
"국가라는 새로운 우상이 무너진 저편을 바라보라.
무지개와 위버멘쉬에 이르는 다리가 보이지 않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편 말미.
플라톤과 대비되는 특징이다.
플라톤은 시인들을 도시국가에서
추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1889년 초에 정신이 붕괴되어
이후 1900년에 사망할 때까지 제정신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 추종자들에 의해서
그의 작품들은 보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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