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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묵상글 들 ( 대림 제4주일. - 내뜻이 아닐 때 하느님 뜻이라고 믿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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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뜻이 아닐 때 하느님 뜻이라고 믿는
대림 제4주일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상봉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두 분은 친척간인데 하나는 늙은이이고 하나는 아가씨입니다.
너무나 대조되는 이 두 분의 공통점은 애를 낳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고
그런데 지금 애를 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분의 상봉을 상상하면 저는 웃음이 나옵니다.
꼬부랑 할머니가 뒤늦게 임신하여 벌써 여섯 달이 되었고
마리아가 찾아올 때는 배가 제법 불러와 배를 내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마리아의 문안을 받는 엘리사벳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많이 부끄러웠거나 적어도 겸연쩍었을 것입니다.
늙은이가 주책바가지이지 애를 배고 있으니 말입니다.
옛날에는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어머니가 며느리와 같이 애를 낳았는데
그때 시어머니는 너무 부끄러워 애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며느리가 도련님 젖까지 먹이곤 하였지요.
저의 누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저의 누나한테 전화가 왔는데
"나 임신했어. 어떻게 하지?"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저는 "그래 신부한테 물으면 애 떼라고 얘기하겠어?"하고
저는 매몰차게 잘라 말하였습니다.
저의 누나는 자신이 부끄러운 것도 부끄러운 것이지만
그 아이가 태어나 할머니 같은 엄마를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그 때문에 잘못되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고
부모가 일찍 죽어 아이가 고아가 되면 어떻게 될지도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원하지 않는데도 이 아이가 임신된 것을 보면 하느님의 뜻이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누나의 실수인 것 같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누나의 실수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 아이를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야.
그러니 태어날 아기는 누나의 아이가 아니고 하느님의 아이야.
하느님의 아이를 누나가 어찌하면 안 되지.
하느님의 아이니까 이제 내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거야."
이렇게 얘기하고는 제가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 이름은 세속명도 요한이고 세례명도 요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오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때 우리는 뭐가 잘못돼서,
또는 내가 무엇을 잘못 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어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봐야 하고 생명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인간적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임신을 한 분들이고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임신을 한 분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두 분의 임신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에 의한 임신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 인간적인 부끄러움이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 차 우리가 매일 바치는 성모송을 기쁨에 넘쳐 부르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이라고 성모를 칭송합니다.
그러나 이런 칭송은 성모 마리아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벳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분이고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도 그렇게 믿고 받아들인 분들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싫고 두렵지만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성령이 임하고
그 성령으로 마리아처럼 주님을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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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 <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
2021년 12월 19일 대림 4주일
고 도미니코 ofm
오늘은 대림 제4주일이며 예수 성탄 대축일 준비의 절정에 이르는 시기입니다. 지난 대림 3주일의 복음이 기쁨에 대해서 얘기했다면 오늘 대림 4주일의 복음은 행복에 대해서 말합니다. 기쁜 성탄 준비를 위해 마리아와 같이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복음은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가장 복된 여인으로 칭송할 수 있었던 것은 마라의 순종적인 참된 겸손과 마음의 평화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리아의 마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겸손을 바라보면서 구체적으로 우리는 삶안에서 어떤 겸손을 지녀야 하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보호하려 하고 그 사람을 위해 책임을 지려하며 다른 사람의 약점을 참아주려하고, 특히 그와 함께 행복과 불행을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나와 다르고 낯선 사람을 위한 투신의 삶, 다른 사람의 힘든 처지를 받아들일 줄 아는 개방된 자세, 아무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의 삶을 긍정하는 마음가짐입니다.
또한 마리아의 기쁨안에 담겨져 있는 평화로운 모습속에서 복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평화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음은 행복에 이르기 위한 길입니다. 평화로움은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고 감사하는 힘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쁨과 슬픔이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평상심입니다.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동요하지 않고 순종하는 마리아의 평화로운 마음처럼 어떤 고통과 박해에 직면해서도 두려움을 갖거나 동요하지 않는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처럼 하느님과의 근본적인 사랑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행복의 가장 올바른 정의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완전한 자기실현의 결과이며 자기의 부족함을 먼저 각성하지 않고는 완전한 자기실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서 참된 행복에 이르지 못합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삶을 사는 길 말고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참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체험에서 이러한 행복을 발견합니다. 삶의 참된 행복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가장 완전하고 가장 행복한 구원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참으로 행복할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이미 와 계심을 말해 주는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마리아 처럼 모든 일을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겸손의 사람,
어떤 고난과 역경에속에서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
그리고 하느님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대하고 모든 일을 해 나가는 사람이 될 때
마리아처럼 진정 복된 사람이고 그 사람안에 아기 예수님이 잉태하게 됩니다.
✝️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12월 성령 열매성월 3주간 기쁨 / 선행☨ ✝️
금주간 성서읽기 묵시 7-14장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만자네다(Manzaneda) 의 전교 강론 중에 나타나신 아기 예수
북스페인 -1903년
1903년 4월 20일 성체 안의 아기 예수께서 현현하심으로써 냉담에 빠졌던 전(全)교구 신자들이 회개하게 되었다. 이 성체의 기적이 일어난 만자네다 마을은 북스페인의 주교구 아스토르가(Astorga)에 속하는 곳이었다.
주교의 명령으로 로메로(Romero) 신부와 함께 만자네다에서 시민 전교 주간을 맞았던 구세주 수도회 소속의 마리샬(Mariscal) 신부는 그 곳에서 겪은 그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성스러운 전교를 위해서 우리가 그 곳에 도착했을 때 마을의 주민들은 한탄스러울 정도의 정신 상태에 있었읍니다. 그들과 사제사이에는 심한 반목이 있었읍니다. 사제는 인접해 있는 작은 성당이 있는 산 마르티노(San Martino)로 되돌아 가기 위해 그 교구를 떠났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만자네다의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사제직에 대한 경외심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본당 사제나 또 다른 사제들이 거리를 다니게 될 경우 때때로 그들은 모욕을 당했고 종종 죽그릇을 뒤집어 쓰는 수난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아스토르가의 주교님은 전교를 하게 되면 흥분된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잘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시민을 위해 강론하도록 우리 구세주 수도회 회원들을 만자네다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착잡한 심정으로 그 곳에 갔었는지 누구도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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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에페소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난민을 위한 기도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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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대림 4 주일입니다. 성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오실 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며, <복음>에서는 오시는 분이 어떻게 오시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오실 분’에 대한 네 가지 정보를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분은 ‘보잘 것 없는 작은 고을 베들레헴’(미카 5,1)에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는 인간의 능력에 따라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오신다는 사실이요, 둘째는 “해산하는 여인의 아기”(미카 5,2)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셋째는 “목자로 나서리라.”(미카 5,3)는 것, 곧 그분께서 백성을 인도하고 먹여주고 보호해주고 안전하게 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넷째는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미카 5,4)는 것, 곧 그분께서는 평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평화이신 당신을 건네 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오시는 분’이 짐승의 피로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놓으실 대제사장으로 오실 것이요, 그것은 ‘당신의 뜻’이며 바로 그 뜻을 이루러 왔다(히브 10,7)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2독서>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라는 말씀의 실현을 보여줍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문장에 다 같이 들어있는 말은 “이루다”는 단어인데, 앞 문장에서는 능동형으로, 뒤 문장에서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오시는 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안에서 그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며, 우리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응답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이 당신의 뜻에 따라 일하시도록 수락하고 승복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이 주인이 되시어 일하시도록 허용해드리는 일이요,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신뢰의 극치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고 이해하고 명확하게 알고서 응답하려 합니다. 마치 “하느님의 뜻”을 확실히 알기만 한다면 그것에 응답할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마음이 불신에 가려졌거나, 그 뜻을 알아야 하는 자신을 앞세우거나, 자신이 그 뜻을 이루고 싶어서 “하느님의 뜻”의 불확실성을 탓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뜻”은 본질적으로 계시되어 있지만, 동시에 신비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한 뜻’(마태 11,26;루카 10,21)을 지니신 주님의 사랑과 호의에 의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마더 데레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영성 안내자로 살아가고 있는 존 캐버너가 자신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캘커타에 봉사활동 하러 갔을 때에, 수녀님께서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존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 되물었습니다. “무엇을 기도해 드릴까요?” 존이 ‘확실하게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당신이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존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또한 믿고 있는 분처럼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수녀님께서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한 번도 확실하게 알고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사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느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길은 우리가 이끌려가게 될 곳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 목적지를 알려주거나 지도를 마련해 주지도 않으면서 “떠나라”라고 하셨고, 그는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지만 신뢰로 믿음의 길을 갔었듯이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이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좋은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믿음의 길은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의 동행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의 선한 뜻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 모범을 보여주었던 샤를르 푸고의 기도를 함께 드려 봅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제 영혼을 바칩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이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알고 이해하기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행할 때 실현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밝혀주고 있는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뜻이나 바람을 이루어진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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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진정한 성탄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대림 초 4개 모두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빛이 밝아진 만큼 우리의 마음도 맑고 밝아지길 희망합니다. 이 시간 믿음으로 순명하는 삶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성탄준비를 잘 하셨죠? 시기, 질투, 분노, 미움과 원한을 품은채로 예수님을 맞이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기적이고 자만심이 가득 찬 마음이라면 아기 예수님께서 편안히 머물 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서는‘성탄준비 끝!’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장식을 달고 집을 꾸미는 것보다 더 중요한 마음의 성탄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선물을 주고 성탄트리를 장식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깨끗이 정돈된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궁전이 되어 성령께 대한 온전한 의탁의 모범이 되신 성모님처럼 성령께 귀 기울이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성모님이시라면 어떻게 처신 하셨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눈뜨는 성탄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데레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 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잘 표현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1729년에 지어진 미국 샌디에고 미션성당에 가시면 제단정면에 양 팔이 없는 십자고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1).는 천사의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마리아는“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반문했지만 결국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였습니다.
사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응답 없이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명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이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당시의 풍습대로 하면 돌팔매로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죽이고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아니 우리를 위한 구세주를 세상에 낳아드렸습니다.
성경은“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1,3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일을 혼자 하시길 원치 않으십니다. 인간의 협력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믿음과 순명의 모범이듯 요셉 성인은 이집트로 피하라는 명을 들은 즉시 깊은 밤에 일어나 조금도 불쾌한 마음 없이, 또 본국으로 돌아올 기약도 묻지 않은 채 즉시 거룩하신 아기를 안고 가셨습니다. 그것은 역경에서 순명 하라는 모범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앙은 어려울 때 증거 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예수님께 하신 어머니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그때 어머니는 이유를 달지 않고 사람들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이 술이 되는 기적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어부인 베드로가 밤새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했을 때 ‘주님이 시키는 대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고’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어부라는 자존심을 내세웠더라면 능력의 주님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계산을 하는 한 그만큼 주님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마땅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말씀대로 행하면 행할수록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어떤 처지가 되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도구삼아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종은 종입니다.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은 내 생각, 내 뜻을 접고 주인이 원하시고 기뻐하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주님을 흠승하라’ 하시면 흠승하고, ‘원수를 사랑 하라’ 하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나 핑계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예언자를 통해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큰 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자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그리고 아버지께 효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손발이 되고, 눈이 되고 그분의 몸이 되어 주님을 간절히 기다린 사람들의 기쁨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매번 정성껏 준비해 봉헌한 귀한 예물은 주님께서 크게 받아 주시고 또 큰 은혜로움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현세에서도 주시지만 하늘에 보화를 쌓는다는 기쁨이 더 큽니다. 이번 구유예물은 아니티에서 사목하시는 신부님께 전해져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사용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어렵고 힘든 일, 곤란하고 궂은 일에 지체 없이 나설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당신의 도구와 연장이 될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응답하십시오!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그곳에서 탄생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낳아드릴 방을 마련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하나의 예수, 구세주가 되어야 이웃이 구원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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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다
⒈ 말씀의 초점
우리가 묵주기도를 할 때 환희에서부터 빛, 고통, 영광의 신비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이 주어로나 목적어로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단이 있습니다. 바로, 환희의 신비 제2단입니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이 두 여인의 만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제1독서인 미카 예언서 5장의 말씀은 그 배경을, 제2독서인 히브리서 10장의 말씀은 그 의미를 밝혀줍니다.
⒉ 마리아의 방문 신비
마리아는 요셉의 청혼과 수락, 약혼식에 연이어 자신을 찾아온 천사에게서 성령의 은총으로 구세주를 잉태하리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전갈을 통보받았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혼인하기도 전에 아기를 임신하게 된 그가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린 사람은 사촌 언니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 알려졌던 그 언니가 아기를 가진지 벌써 여섯달이나 되었다고 천사가 알려주었으니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곧 해산하게 되면 도우미가 필요하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겠지만, 혼전임신이라는 이 놀라운 소식을 부모님이나 약혼자에게 알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서둘러 길을 떠나 유다 산악지방에 살던 엘리사벳에게로 찾아갔던 것입니다.
⒊ 엘리사벳의 인사말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맞이하면서 놀라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천사를 시켜 알려주셨으므로(루카 1,41). 그는 놀라움보다는 부러움과 기쁨으로 마리아에게 이렇게 인사하였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불과 며칠 전에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고 천사가 인사하면서 마리아를 한밤중에 느닷없이 찾아왔던 방문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구세주의 잉태.
⒋ 엘리사벳의 처지
엘리사벳도 늙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남편 즈카르야가 어느 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던 중에 천사의 방문을 받고 하느님께서 아이를 낳게 해 주시리라는 뜻밖의 전갈을 받은 후 임신한 지 여섯달이 된 처지였습니다. 자신도 자연의 섭리로는 도저히 임신할 수 없는 나이에 하느님의 섭리로 임신하게 되었으므로 태어날 그 아기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리라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오시기로 된 메시아께서 자신보다 더 특별한 방법, 즉 동정의 몸이라 하더라도 성령의 기운으로 오심에 대해서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엘리사벳의 믿음이 두드러졌습니다.
⒌ 미카 예언자가 내다본 아나빔들의 처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왕이나 사제들, 궁정 예언자들이 어떻게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게 처신했는지에 대해서는 재야에서 출현한 여러 예언자들이 이미 공개적으로 경고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카를 비롯한 많은 예언자들은 그런 거짓 목자들과 달리 하느님을 겸손하게 섬기며 살아온 이름없는 아나빔들과 영적으로 통공하며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아를 예고한 바 있었습니다. 이사야와 같은 시대에 활약한 미카 예언자 역시 메시아 시대가 오면 아나빔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새 역사가 펼쳐질 것을 내다보았으며, 그래서 메시아가 오시기 7백 년 전에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이라는 보잘것없는 마을에서 탄생하시리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이나 그의 남편 즈카르야, 마리아는 물론 그 약혼자인 요셉, 또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 등은 모두 미카와 같은 예언자들이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수백 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메시아를 기다려오던 아나빔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아니었다면 메시아는 세상에 오실 수 없었습니다.
⒍ 인사말에 담긴 축복의 의미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건넨 축복의 인사말은 히브리서 10장에서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마리아께서 잉태하신 아기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약속과 축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목자들로 말미암아 뒤틀려온 역사를 바로 잡으실 분이고,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가 되실 분이기 때문에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마리아께서 여인 중에 복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이나 속죄 제물 따위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시는 단 한 번의 제사로써 인류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서 인류를 거룩하게 하실 분이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⒎ 샤를르 드 푸꼬의 영성
젊은 시절 출세를 지향하며 몹시 방황하던 샤를르 드 푸꼬는 뒤늦게 복음을 깨닫고 회개한 후에 이 방문의 신비에 주목하여 일생을 낮은 자리에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가 주목한 바는 그 때 마리아께서 홀몸으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태중에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처럼 푸꼬는 예수님을 알리기보다 모시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기보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방문과 만남의 초점이 누가 누구를 만나는가 하는 인간관계에 있지 않고 그 관계가 모시고 있는 분에 대한 것이라고 푸꼬는 굳게 믿었습니다.
⒏ 인간 관계와 만남에 대한 성찰
우리도 무수히 많은 이들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모든 일이 만남에서 비롯되지요. 그런데 인간 관계도, 만남도 천차만별입니다. 지금은 시성을 앞두고 있는 복자 푸꼬 신부의 깨달음은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도 하나의 빛입니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인간 관계의 내용과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만남의 질에 대해서 눈을 돌리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나,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이나, 우리가 전하는 글 이전에, 우리네 삶이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찰이 귀한 이유는, 이미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모시고 살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내세우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네 삶을 보고 우리가 그분을 모시고 살고 있음을 알게 하는 일, 이 대림 제4주일에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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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키엣 대주교님.
성모님의 인사를 하자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기 요한은 기뻐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 역시 성령으로 가득차 주님의 어머니신 성모님께 축복을 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드린 축복의 의미를 되새겨보겠습니다.
축복을 받으신 성모님
성경에서 축복을 받은 여인은 야엘과 유딧 오직 두 명뿐입니다.
시스라가 물을 청하자 야엘은 우유를 주고 손을 뻗어 말뚝을 잡고 왼손에는 일꾼들의 장도리를 쥐고서 시스라를 죽임으로써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사람을 해방시킨 야엘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카인족 헤베르의 아내 야엘은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어라. 천막에 사는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어라.” (판관기 Tl 5,24-26).
아시리아 군대의 대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죽이고 이스라엘민족을 해방 시킨 유딧입니다. “딸이여, 그대는 이 세상 모든 여인 가운데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이요.” (유딧기13,18).
성모님은 예수님께 인간을 죽음과 죄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온전한 축복입니다. 영혼의 악령으로부터의 해방이 사악함의 근원을 없애는 것입니다. 축복받은 성모님은 저주받은 이브에게 화해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사악한 뱀의 말을 들은 이브는 세상과 인간에게 죄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에 순종한 성모님은 하느님의 축복을 다시 인간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성모님께 드린 엘리사벳의 두번째 축복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예수님을 잉태하셨기에 성모님은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축복의 원천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축복의 원천이신 예수님
태중의 예수님은 세상을 밝히시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태중의 세례자 요한 또한 원죄의 사함을 받았기에 기뻐하였고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찬양하였고 성령으로 충만한 성모님도 기쁨의 ‘Magnificat’으로 하느님과 조상과 민족을 칭송하였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목자가 나타날 것이다. 목자는 새로운 사람들을 모아 그 나라를 번영과 평안으로 이끌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이 바로 엘리사벳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태중의 예수님과 주님을 칭송하는 주님의 자녀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민족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맞이한 새로운 민족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기쁨에 충만한 사람들은 다시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행복의 원천을 전달하신 예수님
제2독서의 두루마리에 적혀있는 글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을 모으고 행복의 원천으로 인도하는 예수님 당신의 법을 볼 수 있는데 어떤 강력한 규제와 법이 아닌 단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효성스런 아들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항한 이브와 달리 예수님은 언제나 겸손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경배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브가 불화의 민족의 뿌리를 만들었다면 예수님은 하느님께 순종하고 따르는 효성스런 민족을 만드셨습니다.
성모님은 효성스런 주님의 백성 첫번째분이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이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열어주신 길로 들어섰습니다. 주님의 뜻에 순명하는 삶, 효성스런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 그로서 그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대림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지막 준비만 남았습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지난 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순결한 영혼을 준비해야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열어 주신 길, 주님의 뜻을 따르는 효성스런 자녀의 길로 들어가면 됩니다. 성모님께서 당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부른 것처럼,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이 내려주신 꿀과 메뚜기만을 먹은 것’처럼, 엘리사벳이 자신의 아들을 ‘주님이 지어주신대로 요한’이라고 짓고 천사의 지시대로 음식을 먹은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한다면 이 분들이 예수님을 맞이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기 예수님께서는 엘리사벳의 집에 큰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진실된 마음을 준비한다면 우리도 아기 예수님께서 오실 때 큰 축복과 행복의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드린 축복과 야엘과 유딧의 축복을 비교해 보세요.
2.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사람을 모으는 목자가 되셨고 주님의 길로 들어간 첫번째 자녀는 성모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3.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길을 어떻게 여셨습니까?
4.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효성스런 자녀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말씀의 실천
1. 이번 주 가능하다면 장례식에 방문하여 가신 분의 영혼과 육체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2. 예수님은 행복의 원천이십니다. 어떤 일을 하기전에 자문해보십시오. ‘만약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다면 어떻게 하실 것인지요?’ 그리고 그 대답을 실천해보십시오. 축복이 함께 할 것입니다.
3. 베트남의 바닷가 Bac Lieu의 Ganh Hao 성당에서는 코로나 19로 인해 야전 병원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베들레헴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사진을 보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와 코로나로 인해 희생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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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상은 공평한가요? 아니면 불공평한가요? 당연히 불공평합니다. 저의 자발적 선택 없이 삶의 시작부터 많은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국적, 성별, 부모 형제, 가정환경, 외모, 건강, 재능 등등…. 저의 선택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시작부터 불공평한 삶임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살아가야 하는 삶의 기본 조건이라는 것만 모두 공평할 뿐입니다.
여기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것입니다.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을 거부하고 불평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나만의 삶을 만들며 살 것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생의 변화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저 역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불평불만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서 제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고, 이로써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불평만 하기에는 자기 삶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성모님께 주어진 일 역시 성모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무조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불공평의 상황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모습은 우리와 너무 다릅니다. 불공평의 상황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일이기에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 기쁨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모님은 사촌인 엘리사벳을 찾아 기쁨을 함께 나누기로 결심하고 발걸음도 바삐 유다의 땅을 향합니다. 서둘러 가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기쁨이 넘쳐서 발걸음이 가벼웠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잉태해서 무거운 몸이었기에 다리도 아프고 무척 고생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마음은 기쁘기만 합니다. 기쁨의 성령이 인도하는 발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머니라 불릴 나이였던 엘리사벳이 앳된 동생 마리아의 방문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기쁨이 바로 성모님의 노래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기쁨은 어디에서 시작한 것일까요? 불공평해 보이는 하느님의 일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불평하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긍정적으로 바라봤기에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안의 불공평을 지금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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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라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이다(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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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불공평.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역사상 가장 끔찍한 테러 공격이 일어났습니다. 이 공격으로 자그마치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집단 혼란에 빠졌고, 정부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희생자 가족에게 주어지는 보상금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똑같이 보상금이 주어졌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과 달리 보상금은 25만 불부터 최대 700만 불까지 액수가 제각각이었습니다. 죽음의 가격이 다르게 책정된다는 것이 너무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나이, 경력, 교육 수준, 직군, 인종 등으로 그 차이가 생겼습니다.
최고의 지위에 있는 CEO의 죽음과 아무도 알지 못하는 행려자의 죽음을 하느님께서 다르게 보실 리가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공평이라는 이름으로 불공평을 만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세상에 만연된 불공평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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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은 한국에서의 운전면허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뉴욕에서 운전하기 위해서는 필기시험, 실기시험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필기시험은 영어와 한국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3번 정도 문제를 풀어보았고, 대부분 예상 문제에서 출제가 되었습니다. 한국어로 된 예상 문제가 있어서 필기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실기시험은 강사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평행주차가 중요했고, 공식을 배웠습니다. 한국에서 운전하는 습관은 버리고, 처음 운전을 배우는 마음으로 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다행히 감독관은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제게 강복을 청했고, 저는 감독관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실기시험을 보았고, 역시 한 번에 통과했습니다. 어느덧 뉴욕에서 면허를 따고 운전한지 2년이 되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의 기준인 성공, 명예, 권력은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나라에서는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감사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3주간 대림시기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신앙인은 두 가지 차원의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물리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우주의 역사는 150억년, 지구의 역사는 45억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며, 구세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다는 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떨어지는 낙엽에서 시를 만들어 냅니다. 가수는 흘러가는 구름에서 노래를 만들어 냅니다. 화가는 흔들리는 꽃을 보며 그림을 그립니다. 신앙인은 가난한 이들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깨어남입니다.
대림 제2주일의 주제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로 정했습니다. 사람은 성별, 이념, 세대, 피부색, 계층으로 차별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이, 가장 헐벗은 이, 가장 아픈 이, 감옥에 갇힌 이에게 사랑을 주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과 언덕은 평평해지고, 골짜기는 메워질 것입니다.’원의 중심에서 원의 둘레는 모두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같습니다. 지위도, 능력도, 업적도, 학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만, 욕심, 허영, 이기심이라는 언덕과 산을 깎아 내려야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나눔, 헌신, 희생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이 되신 후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람페투사’였습니다. 교황님이 이민자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 하신 후, 이민자들의 무덤이었던 람페투사는 이민자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대림 제3주일의 주제는 ‘자비’입니다. 자비의 또 다른 말은 ‘공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시는 이유는 바로 ‘죄, 악,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유도 나의 죄를 대신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넷째 왕의 전설’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동방박사는 4명이었다고 합니다. 3명의 박사는 별을 따라서 길을 갔지만 4번째 박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길을 가는데 강도를 당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가져간 보물을 팔아서 강도당한 사람을 구해 주었습니다. 헐벗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보물을 팔아서 옷을 사 주었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을 만났습니다. 보물을 팔아서 옥에서 풀어주었습니다. 보물을 모두 팔아버린 4번째 박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드릴 선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예루살렘 언덕에서 4번째 박사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박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내가 강도당했을 때 함께 했고, 내가 헐벗었을 때 함께 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 했습니다.” 네 번째 박사는 비록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강도당한 이들에게서, 헐벗은 이들에게서,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서 이미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공감의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쁜 꽃이 그 고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두운 땅속에서 끊임없이 양분과 물을 찾아 고생하는 뿌리의 수고와 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건강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기쁘게 생활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이렇게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한 고마운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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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만남의 기쁨, 만남의 여정
- 도반道伴과의 만남 -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하늘
초롱초롱한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 하늘 흰 구름 되어
임의 품 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황홀한 사랑 동녘 향해 마냥걷다가
사라진 이
첫눈 내리 하얀길
마냥 걷다가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대림 제4주일을 맞이하여 첫 눈다운 눈이 내렸고 마치 대림의 주님의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엊 저녁 눈 덮인 하얀 눈길을 보는 순간 아주 예전에 써놨던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란 시가 생각나 선물로 나눴습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을 노래한 시입니다.
대림 제4주일, 주님 오실 날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 촛불 4개가 희망의 빛, 기쁨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환히 밝힙니다. 주님은 전례로, 전례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구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죄의 멍에를 메고 구원을 기다려 온 저희가, 다시 맞는 성자의 탄생으로 옛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어제 미사중 본기도를 바치며 순간 깨달음처럼 다가온 ‘전례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진리였습니다. 대림2부 셋째날 오늘 12월19일의 저녁성무일도“오”후렴도 우리의 기쁨을 배가합니다.
“오 옛세의 뿌리여, 만민의 표징이 되셨나이다. 주 앞에 임금들이 잠잠하고 백성들은 간구하오리니, 더디마옵시고 어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대림시기의 모든 기도문은 한결같이 주님께서 오심을 간절히 청원하는 내용들입니다. 어서 오시어 우리를 만나 구원해 달라는 소망을 노래합니다. 참으로 간절히 찾을 때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 교회의 아름다움은 전례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를 정화합니다. 대림 제4주일, 아침 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도 찬미가도 우리 마음을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그대로 전례를 통해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주께서 이미 가까이 오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여기에 오늘아침 빛을 발하라/기쁨이 마음에서 끓어올라라
다가올 기쁜영광 미리알리는/진실되 예고소리 울려퍼지네
영원한 하늘의빛 떠올라있고/구원의 아침샛별 반짝이나니
찬란한 천상빛이 우리를불러/천국의 시민되라 초대하시네”
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도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영혼의 기도입니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기쁨중의 기쁨이 만남의 기쁨이요,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바로 이런 기쁨과 만남을 체험하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특히 대림시기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아주 오래 전에 제1독서에서 미카예언자가 예고한 주님입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 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는 주님의 능력에 임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우리의 착한 목자요 평화가 되시는 주님의 도래를 예고하는 미카 예언자요, 바로 우리의 가난한 베들레헴 삶의 자리에서 그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그 만남의 원형을 봅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 안에서 마리아와 엘리사벳 도반들의 만남입니다. 말 그대로 만남의 기쁨, 만남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 안에서 눈에 보이는 형제 도반과의 만남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 감동적입니다. 말그대로 구원의 만남, 참 도반과의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차 큰 소리로 외치니 그대로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 안에서의 만남임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우연한 만남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도반과 구원의 만남입니다. 수도원 피정차 처음 오신 분들에게 저는 주저없이 말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형제님을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초대해 주셨다고 말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대로 마리아를 구원한 엘리사벳의 고백이자 주님의 말씀입니다. 엘리사벳 도반을 통해 마리아를 만나 주신 주님이십니다. 오늘 구세주 예수님 탄생을 앞둔 복음의 주인공이 두 어머니 도반이란 사실이 참 인상적입니다. 모전자전입니다. 그 자식에 앞서 그 어머니임을 깨닫습니다.
엘리사벳 어머니에 세례자 요한이요, 마리아 성모님에 예수님입니다. 새삼 어머니들의 사랑과 믿음이 자녀들의 성장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습니다. 두 어머니들의 만남은 태중의 요한과 예수님의 만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참 좋은 도반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자 또 다른 나이기도 합니다. 정말 좋은 부부는 주님 안에서 이런 영적 도반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영원하신 도반이신 주님 안에서 복된 형제 도반들과의 만남이 가능할 까요. 기도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예수님의 거듭된 기도가 그 모범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거룩함에 힘입어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해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주님은 당신은 물론 좋은 도반 형제와의 만남도 선물하십니다. 제가 수도원 십자로의 예수님 부활상 앞에서 수시로 바치는 기도는 둘로 요약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제 뜻이 당신 뜻이 되게 하소서.”
이렇게 주님께 겸손히 바치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를 통해 영원하신 주님이자 도반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더불어 선사되는 좋은 영적 도반들이요 도반들과의 만남에 우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영원한 주님이자 도반인 당신과는 물론 우리의 영적 도반인 형제자매들과의 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보소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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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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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천사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친척 엘리사벳의
잉태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고
동정녀의 몸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격려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응답합니다(루카 1,26-38 참조).
그 응답으로 마리아가 날마다 겪어야 하는 죽음의 위험과
오해의 현실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며칠 밤낮을 걸어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밤길을 걷는 동안은 두려움의 시간이기도 하였을 것이고,
낮에는 빛이 있어 설렘의 시간이 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두려움과 설렘,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의 만남에 성령께서 함께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이 말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마리아가 응답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1,48).
혼자 견디는 시간이 고독할수록 만나는 시간의 친밀감은 더 커집니다.
어떤 관계에서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과 만남은 고요함 속에서 그분의 소리가
내 마음에 울릴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오래도록 함께하는 시간은 하느님을 통하여
모든 존재와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환한 빛이 솟아오릅니다.
이제 솟아오른 빛은 다른 빛을 찾아 나서고, 또한 그 빛을 알아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태중에 있는
말씀의 빛을 알아보고 그 빛 속에서 기뻐합니다.
말씀의 빛은 언제나 갇혀 있지 않습니다.
친구에게로, 이웃에게로, 세상으로 노래처럼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토록 기뻐하며 다가올 다른 세상을 노래합니다.
말씀의 길은 내 안에서 세상 밖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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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엘리사벳의 이 말은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의 느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의 전례는 깨어 기다림의 표본이 되시는 마리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복음 전 노래를 부른다. 이 마음의 자세는 새로운 강생의 기적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필요한 자세이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태어나시지 못한다면 이 성탄은 나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복음: 루카 1,39-45: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미가서는 유다의 땅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예언의 내용이다. 오늘 복음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벳 모두가 아기의 출산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내용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게 집중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태중에서 뛰었다는 것은 역사가 이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서둘러 간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29절)은 나자렛에서 150km 이상 되는 예루살렘 서쪽 6km 지점에 있는 ‘아인카림’(Ain-Karim)이다. 마리아가 이 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이 컸었음을 말해 준다.
마리아가 걸음을 서둘러 길을 떠난 것은, “그 예언을 의심해서이거나 천사가 알려준 내용이 불확실해서거나 그 증거에 대한 의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기뻤고 바로 그 내적인 기쁨에서 오는 열정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총으로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S. Ambrosius, In Lucam 2,19). 곧 해산하게 될 늙은 친척을 돕기 위한 이 먼 여행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강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보다 힘든 여정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41절)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마리아를 만났을 때는 이미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인식하고 있었다(43절). 그리고 성서는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를 구약의 계약의 궤와 같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엘리사벳은 자기 집으로 그 하느님의 현존이 옮겨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큰 소리로 마리아께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42절) 분이라고 찬양한다.
마리아가 이렇게 위대하게 된 것은 그녀의 신적인 모성(母性)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이 주어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완전한 신앙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신앙으로 ‘계약의 궤’가 되었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여기서 엘리사벳은 최초로 축복의 인사를 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아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5절). 이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언자를 거쳐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흘러 내려온 이 신앙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하느님의 위대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하신 대로’(루카 1,38)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그분께 온전히 맡겨드림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알고 또 그렇게 실천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보다도 더 온전히 당신을 아버지께 의탁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바치시기까지 하셨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뜻을 항구히 아버지께 봉헌함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희생을 실현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을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주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이 희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곧 다가오는 성탄의 축제를 통해 거행하게 될 강생의 신비는 근본적으로 파스카 신비에 정향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은 성금요일의 희생적 봉헌을 위한 것이며, 부활 날 다시금 그 몸을 둘러싸게 될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치 엘리사벳이 한 것처럼 마리아도 받아들이게 된다. 마리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삶을 본받을 수 있을 때, 즉 ‘길을 떠나 서둘러’(루카 1,39) 이웃으로 향할 수 있을 때, 비록 그 여정이 험하고 고통을 수반하겠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즉 사랑을 낳아줄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또한 십자가의 신비와 파스카의 기쁨도 아울러 충만히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쁨 때문에 우리는 더욱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릴 수 있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리아께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아 주실 수 있었던 그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그 삶을 본받아 실천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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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하얀
눈꽃송이
피어난
사랑의
새아침이다.
생명조차
아깝지 않은
사랑이 있다.
삶의 전부가
되시는 사랑이
있다.
소중하고
귀한 것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대림이다.
마리아는
여인에서
어머니로
탄생한다.
어머니의 탄생은
자식을 향한
최우선의 사랑을
아낌없이
실천하시는
삶의 탄생이다.
언제나
기쁜 사랑을
우리들에게
주신다.
어머니가
계시기에
자식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전부가
사랑이라는 것을
또 다시
가르쳐주신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은총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의
세월을 통하여
어머니를
빚어 만드셨다.
어떠한 시련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계시기에 삶은
기쁨이 된다.
그 사랑을
본받는
행복한
시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머니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하시는
말씀 그리고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사랑은
말씀을 믿는
사랑의 대화로
익어간다.
말씀을 믿는
그 가운데에
어머니가 있고
탄생이 있다.
탄생!
하나밖에 없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믿음의 시작이다.
마리아를 통하여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 탄생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사랑이
되신다.
이 말씀 안에
우리가 있다.
끝내
이루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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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성모님이 엘리사벳에게 간 것은, 엘리사벳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리고 엘리사벳의 출산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이루어진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라고 생각됩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에게 ‘어떤 인사’를 했을까?
아마도 엘리사벳의 임신을 축하한다는 말과 엘리사벳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사말과 함께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과 자신의 성령 잉태를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의 반응을 보면, 축하받는 사람의 일반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의 임신이 아니라, 성모님의 성령 잉태에 초점을 맞추어서
성모님이 받은 은총을 축하하고, 찬양합니다.
(그래서 성모님 입장에서는 축하하려고 갔다가 축하를 받게 된 상황입니다.)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라는 말은,
엘리사벳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태 안의 아기가 반응할 정도로, 엘리사벳이 큰 기쁨을 느꼈다는 것.)
엘리사벳의 기쁨은 ‘메시아 강생’에 대한 기쁨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라는 말은, 성령에 사로잡힌 로봇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선명하게 깨닫고, 믿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마도 엘리사벳은 ‘동정녀의 성령 잉태’ 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금방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큰 소리로 외쳤다.’ 라는 말도 엘리사벳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 라는 말은, 뜻으로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입니다.
(남자들을 제외하고 여자들 가운데에서만 복되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모님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인 이유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복을 온 인류에게 전달하는 통로로 선택되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입니다.)
성모님 태중의 아기가 복되신 분인 이유는,
온 인류에게 구원이라는 복을 가져다주시는 메시아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첫 번째 인물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 라는 말에는, 성모님 태중의 아기가
주님이신 분(메시아이신 분)이라고 믿는다는 신앙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태중의 아기가 주님이시니까 성모님은 ‘주님의 어머니’이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라는 말은,
‘메시아 강생’에 대한 큰 기쁨을 표현한 말입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방문해 주신 것에 대한 기쁨도 들어 있지만,
기쁨의 핵심은 ‘메시아 강생’과 ‘메시아의 방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라는 말은 ‘복되십니다.’ 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말은,
성모님의 ‘믿음’과 ‘순종’과 ‘응답’을 모두 칭송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 준
‘메시아 강생과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관한 말씀들’(루카 1,31-33)로 해석됩니다.
<성모님은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천사를 천사로 바로 알아보았고,
천사가 전해 준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로 알아듣고 믿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씀을 금방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루카 1,29).
그러나 믿었기 때문에 받아들였고, 순종했습니다.
사실 자신이 메시아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청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동정녀로서 성령의 힘으로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도 알아듣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정말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성모님도 당시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고대하고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자신에게서 직접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상한 적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순종과 응답은 놀라운 일이고, 위대한 일입니다.
믿음은 순종과 응답으로 이어져야만 가치가 있습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고 생각으로만 믿는 것은,
즉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성모님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일을 한
‘첫 번째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첫 번째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첫 번째 인물이지만,
신앙을 기준으로 하면 성모님 다음으로 ‘두 번째 신앙인’입니다.
두 어머니의 만남이 중요한 것은,
‘증언’과 ‘선포’가 그 만남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증인이 되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증인이 되어 주었습니다.
(두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 모르게 비밀리에 만난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에게 일어난 일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증언했습니다.
어쩌면 엘리사벳은 나중에 요셉이 성모님의 성령 잉태를 믿을 수 있도록
요셉을 도와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성모님도 엘리사벳의 임신이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고 증언해 주었을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엘리사벳의 임신이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성모님에게 알려 주었는데(루카 1,36-37),
성모님은 그 말을 그대로 엘리사벳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 증언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효력이 살아 있는 증언이고,
우리를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해 주는 증언입니다.
따라서 두 어머니의 만남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함께 기뻐하자고 지금 우리를 부르는 초대장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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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미카 5,1-4ㄱ)는 구세주의 탄생에 대한 결정적인 예언을 묵상하게 합니다.
수많은 민족들이 예루살렘을 거슬러 “시온이 망하는 꼴을 우리 눈으로 지켜보자.”라고 말하겠지만,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미카 예언자는 말합니다(4,11-12). 임금이며 목자이신 구세주께서 오시면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남북으로 갈라졌던 이스라엘(하느님의 백성)이 다시 뭉치고(2,12-13), 흩어진 이들이 다시 모여들 것이기(4,6-7)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을 바라보면서 이미 약속된 보편적이고 영원한 나라를 다스릴 다윗의 왕조가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시편 89,21-30). 다윗 왕조의 임금은 하느님의 능력과 위엄을 지니신 목자로서 그분 스스로 평화가 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구세주가 태어날 곳으로 예루살렘을 생각했는데, 미카 예언자는 예루살렘에 공급하던 빵(lehem) 공장(beth)이 많던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제껏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시골의 작은 마을이라서 당시에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다윗(1사무 17,12-54)의 후손과 혼약을 맺을 “여인”(이사 7,14: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아이는 주님의 능력과 하느님의 이름에 힘입어 영원한 목자로 나설 것입니다.
복음(루카 1,39-45)은 마리아가 사촌인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입니다.
대림절 3주간 동안 세례자 요한에게 집중했는데도 아쉬웠는지, 오늘은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행동을 묵상하게 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찰 아이의 어머니 엘리사벳과(1,15)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덮어 장차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하느님의 아드님의 어머니 마리아(1,35)가 만났습니다. 루카복음은 두 어머니와 더불어 태아들의 만남을 찬란한 노래로 표현합니다. 물론 옛 계약의 인물들(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보다 새 계약의 인물들(마리아와 예수님)이 더욱 특별하게 드러납니다. 옛 계약의 궤도 아름다웠지만(탈출 25,10-22), 새로운 계약의 궤가 훨씬 더 아름다우며, 주님의 종이지만(1,38.48) 모든 세대가 행복하다 일컬을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1,37)는 선언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새로운 계약의 궤이신 마리아는 석 달 가량(1,56) 엘리사벳의 집에 축복을 주시기 위해 머물렀습니다. 이 머무름 때문에(2사무 6,11-12), 그리고 “마리아의 인사말”로 인해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서둘러(탈출 12,11)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4일 정도의 여행길). 장차 해산할 여인들의 만남입니다. 유다 땅 아인카림이라는 엘리사벳의 동네로 가는 산악지방은 예수님의 인생여정처럼 험난하고 굽은 길이며, 장차 세례자 요한이 깎아내야 하고 평탄하게 해야 할 골짜기와 언덕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의 태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요한은 자신이 구세주께서 가까이 와 계심을 선포하는 예언자와 선구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음에 기뻐 뛰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뻐하는 엘리사벳과 그녀의 태속에 있는 세례자 요한은 아직 예수님의 처절한 운명을 알지 못합니다.
마리아가 유다 산악지방으로 간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와 계심을 세례자 요한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장차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수난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셨던 여행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이지만, 실제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갔다”(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운명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그런 예수님의 사명에 마리아가 동참한 것입니다. 그것도 “서둘러” 떠났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안에서 계속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창세 19,14; 22,3). 마리아라는 인간과 예수라는 하느님이 한 몸이 되어 구원을 위한 수난과 죽음의 여정을 미리 밟아본 것입니다.
어떤 말로 어떻게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했는지 모르지만, 마리아의 인사말은 사랑과 변화의 신호였기 때문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와 예수님께 건넨 축복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축복으로 마감됩니다(24,50). 그러나 “어찌 된 일입니까?”라는 인사말에서 엘리사벳은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기 전에는(6,41) 장차 예수님에게서 벌어질 일을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엘리사벳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신” 주님께(1,25) 대한 굳건한 믿음 때문에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구세주의 탄생이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임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2독서(히브 10,5-10)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구세주의 오심이며, 오래 전부터 예언되었던 하느님의 약속의 실현입니다. 그 약속은 옛 계약을 없애고 새 계약을 맺기 위한 것입니다(예레 31,31). 예수님의 탄생(먹힐 빵: 베들레헴)은 옛 계약을 어긴 죄 때문에 새 계약을 완성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야훼 이레) 희생제물(그리스도)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새 계약을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처음에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을 때에(요한 1,1) 나누셨던 대화처럼(시편 40,7-9) 미리 마련된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서부터(창세 15장) 수도 없이 계약을 어긴 인간이 죽어야 하는데, 사랑이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죽이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에”(10,4),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이 되게 하시어 하느님과 맺은 옛 계약을 어긴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새 계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느닷없이 드러난 유다 땅 베들레헴에 대한 예언은 아마도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던 모리야 땅(창세 22,2),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려는 이들에게는 거북한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전에 다윗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베들레헴에서 시작될 것이며(1사무 17,12), 예수님께서 스스로 먹힐 빵(희생제물)으로 봉헌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 하는 수난의 여정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감으로써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예수님의 탄생으로 구세주의 모습이 결정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구세주의 탄생이란 분명 축복의 사건이지만 머지않아 겪으실 죽음을 통하여 구세주께서는 땅 끝까지 위대해질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깊은 뜻을 알아차린 마리아는 “예” 하고 새로운 계약의 궤에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카 1,35)을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의 종, 마리아의 믿음 때문에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구약의 백성)처럼 우리도(신약의 백성) 역시 기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얼굴을 보여주시면 우리도 구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시편 80,4). 계약의 궤(마리아의 태)에 계신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확인시켜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시고, 다시 오시는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확인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미사를 마치고 마리아처럼은 아니지만 우리의 마음과 몸에 예수님을 모시고, 주님의 축복을 받고, 또 다시 수고와 희생의 여정을 걷기 위해 성당을 떠나갑니다. 왜곡된 마음의 굽은 길을 곧게 펴고, 미움의 골짜기를 메우고, 불통의 높은 산을 깎아내린 세례자 요한과 똑같은 사명을 등에 지고, 마리아의 겸손과 믿음을 가슴에 안고, 예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서둘러 각자 사는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축복은 사명을 동반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예수님처럼 사명과 함께 역경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겪는 역경을 기쁜 마음으로 이겨내면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이 외쳤듯이,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평화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광채와 함께 나타나시고, 권능을 떨치시어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화답송). 대림시기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하느님의 탄식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 그리하여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는 사라지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는 자취를 감추리라.”(이사 29,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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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과 사랑으로 꾸미는 구유 ♣
Mary visits Elizabeth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오늘 성경 말씀들에 비추어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남은 기간 잘 준비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을 주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몸을 전부 바치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히브 10,10). 이타적인 사랑, 조건 없는 희생의 태도를 지닐 때 내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탄의 기쁨은 수난과 희생을 품은 씨앗입니다.
마리아가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이렇게 메시아와 그분의 길을 준비할 선구자의 만남이 그 협조자들인 두 어머니들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만남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연대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그렇게 힘없고 가난하지만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는 이들의 연대를 통해 실현되어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태 안의 요한(1,15)은 마리아가 인사하자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즐거워 뛰놀았습니다(1,44). 태 안의 요한이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을 시작한 것이지요. 성령을 가득히 받은 엘리사벳은 깊은 믿음으로 마리아 태중의 아기가 메시아이신 주님이시고(1,43),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이시며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복되다고 말합니다(1,45).
두 여인의 만남에서 알 수 있듯이 성령 안에 머물 때 우리 가운데 오시는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서로의 만남이 세속적인 기쁨의 추구나 현세적 만족을 추구하고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육(肉)적인 만남이라면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구유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하느님을 회상케 하고 발생시킨다면 그 관계 자체가 구유가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메시아 주님을 품으셨고 주님의 말씀을 믿으셨기에 복된 분이십니다. 우리도 성탄의 기쁨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주님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내 안에 품어야 합니다. 주님을 잉태한다는 것은 그분의 진리와 사랑과 생명을 품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靈)을 품고, 경건하고 순수하며 거룩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나아가 세상의 온갖 잡다한 소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자신을 비워 하느님의 뜻을 사랑으로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복된 존재가 될 때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굳은 믿음과 따뜻한 사랑으로 연대하며, 먹히는 밥이 됨으로써 주님을 낳는 어머니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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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군가를 기쁘게 환대하고 배려하며 동반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인지...
피정 센터에서 사목하면서 새삼 깨달은 바가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환대하고 배려하며 동반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길고 지루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들 답답해하고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라도 작은 위로, 작은 기쁨이 되어드리자는 각오로 찾아오시는 분들을 기쁘게 환대하고 있습니다. 장거리 운전이 힘든 분들을 위해 단 한 분이라도 기쁘게 버스터미널까지 픽업 서비스를 해드립니다. 맺힌 사연들, 그 어디서도 털어놓기 힘든 사연들 훌훌 털어놓으시도록 기꺼이 배려하고 동반해드립니다.
꽤나 무거웠던 짐들을 훌훌 털어놓고 환한 얼굴로 돌아가시는 분들을 바라보며, 이 천 년 전 아인카림에서의 환대 장면이 제 머릿속에 겹쳐졌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까지는 직선거리로 120Km, 그나마 걷기가 나은 요르단강 옆길을 따라 우회하면 160Km, 나귀를 타고 갔을 경우 적어도 사나흘, 일주일 가까이 걸리는 여행길이었습니다.
힘겨운 여행 끝에 아인카림에 도착한 마리아였는데, 엘리사벳의 극진한 환대와 배려에 순식간에 여독이 풀렸습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 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은 이제 겨우 열 서너 살 먹은 소녀입니다. 더구나 정식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혼모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의 여인은 더 황당했습니다. 너무나 쑥스럽고 머쓱해서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산모인 엘리사벳의 나이는 가임연령을 넘어도 훨씬 넘어 이제 인생을 마무리지어야 할 그런 나이였는데 아기를 가졌습니다.
두 분의 만남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어이없고, 정말로 이해할 수 없고, 정녕 황당한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맞이하며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찬미의 송가,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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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삶에 지치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성모 마리아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끊임없이 도전하다 그 실패에 좌절하고 맙니다.
자아는 도전하게 만듭니다.
도전하게 하려고 항상 지금 불만족스럽게 만듭니다. 만족하는 사람은 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지칩니다.
“열심히 살다 보니 삶이 피폐해지는 느낌이다.”, “더 잘하고 싶은데 진도가 안 나간다. 모든 일이 힘들기만 하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등의 생각이 든다면 삶이 지쳤다는 증거입니다.
왜 지칠까요?
나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믿는 마음이 나를 지치게 만듭니다.
쉬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은 이성의 동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적당히 일하고 쉬며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올리버 색스의 『화성의 인류학자』란 책에 이런 사례가 나온다고 합니다.
순행성 기억 상실증 환자인 그레그에게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슬퍼할 사이도 없이 그는 이 사실을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레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리며 몇 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나오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만 갔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해도 나를 조정하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감정’입니다.
감정은 축적되어 나를 지배합니다.
나를 지배하는 것은 기억도, 지성도 아닙니다.
나의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실패했다는 기억도, 연인과 헤어졌다는 기억도 아니란 것입니다. 나의 감정입니다.
자아는 불만족의 감정을 주고 믿음은 감사와 기쁨의 기분을 줍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2001)에서 상우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사운드 엔지니어로, 강릉 방송국의 PD이자 DJ로 일하는 은수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집니다.
둘은 항상 라면을 먹는데 이는 둘의 사랑이 라면처럼 금방 끓고 라면처럼 금방 불어버리는 사랑임을 암시합니다.
은수는 이미 결혼 경력이 있는 여자이고 상우는 진지한 사랑이었습니다.
둘의 사랑이 식는 것을 느끼자 은수는 차갑게 돌아섭니다.
하지만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며 상우는 분노합니다.
홧김에 은수가 산 새 차를 긁어버리는 유치한 행동도 합니다.
그의 유일한 위로는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상우를 아껴주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십니다.
상우는 할머니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감정에 그리 매몰될 것이 없음을 깨닫고 현실로 돌아옵니다.
이때 은수는 다시 상우가 생각이 납니다.
상우와 화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드리라며 화분을 들고 상우를 만납니다.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하지만 상우는 할머니의 죽음도 모르는 은수와 다시 사귈 생각이 없습니다.
화분을 다시 돌려주고 헤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의 소리를 모읍니다.
그 소리 하나에도 행복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영화는 끝납니다.
영화에서 영원히 외로울 사람은 은수입니다.
감정에 치우치는 삶을 사는 여인이고, 상우는 이제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지금 있는 자연의 소리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감사할 수 있다는 말은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바람 소리, 새소리, 맑은 공기에 감사합니다.
가진 것에 감사한다는 말은 그것을 나에게 주신 분에 감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감사는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창조자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성모님께서 “믿으신 분”이 되신 이유는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믿게 되고 하느님을 믿게 되면 어린아이처럼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돈을 행복지수에 관여하지 않으면 부탄이란 작은 나라는 매우 높은 수준의 행복지수를 나타냅니다.
부탄 4대 국왕인 지미 싱게 왕축은 “국문총행복지수가 국내총생산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1729년에 만들어진 부탄 왕국의 법전에는 “백성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 이유가 없다”라고 쓰여있습니다.
부탄은 국민총행복지수(GNH)라는 부설을 따로 개설하여 부탄에서 행하는 모든 정책에 실제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부탄이 말하는 GNH 행복지수는 심리적 웰빙, 건강, 시간 사용, 교육, 문화적 다양성, 굿 거버넌스, 공동체 활력도, 생태학적 다양성 및 회복력, 생활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부탄은 400년 전인 150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동차와 도로는 전혀 없었고 대부분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국가에 의사가 단 2명밖에 없었으며 평균수명은 38세, 개인당 국민소득은 51달러로 최빈국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탄은 국민행복지수를 국가 기본 정책으로 정한 이후 전혀 다른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1인당 국민소득은 3천 달러가 못 되는 최빈국 수준이지만 국민의 삶의 질은 몰라볼 정도로 향상되었습니다.
국가에서는 실력에 따라 고등교육을 제공하며 현재 국민 기대수명은 69세입니다.
물론 현재는 TV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못사는 나라인지 알게 되어 젊은이들은 도시로 몰리고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여 청년 실업률이 증가했으며 외국으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었던 세계의 유일한 부탄도 이제 돈이 행복이라는 세상 물결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부탄처럼 행복을 위한 정책을 지금 바로 우리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나부터라도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지금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정책을 펴면 됩니다.
내가 나를 믿고 도전하다 보면 실패를 거치며 나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지만, 주님을 믿고 그 뜻을 따르다 보면 실패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나를 조종합니다. 지금 감사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은 나를 믿는 시간이고 분명히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우리가 지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를 지치게 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감사로 중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삶에서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의 종살이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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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대림 제 4 주일-묵상과 기도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한 주간 남은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면서 믿음과 희망을 갖습니다. 성찰과 함께 회개합니다. 지난날의 죄를 없애는 보속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도하며 사랑 실천을 잊지 않습니다. 미사와 성사 참여, 그리고 선한 지향으로 자선을 행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에프라타 베들레헴이 유다 부족 가운데서 보잘 것 없지만 이스라엘 다스릴 이가 나오고, 그는 하느님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가 된다. 그는 평화가 된다. 예언하고,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께서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고,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기꺼워하지 않으시고, 곧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전의 제물과 예물의 속죄행위를 대신한, 그분의 몸을 마련하시고, 그 몸을 단 한 번 바치심으로써 당신을 믿는 모든 백성을 거룩하게 하셨다. 고 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유다 산골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온 마리아와 태중의 아기에게, 당신은 여인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기도 복됩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자신의 태중에 아기가 뛰놉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분! 하고 찬미합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이웃, 그들과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그리고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미카 5,1-4ㄱ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히브 10,5-10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39-45
실천
곧 한 주일 앞에 세상을 구원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 평화를 전할 아기이십니다.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방문 인사를 받으면서, 그에게 여인 가운데 가장 복된 분, 태중의 아기도 복됩니다. '주님의 어머니'임을 고백하고 그의 방문을 기쁨으로 찬미합니다.
마리아의 방문과 그 인사가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아기 요한도 즐거워 뛰놀았다. '기쁨'을 고백합니다. 엘리사벳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하며 고백합니다.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말씀의 이룸의 고백.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가 그분, 마리아의 믿음의 응답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찬미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성탄을 준비하면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온전한 믿음, 그 응답으로 우리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영광을 드립니다.
지난 한 해에 베푸신 하느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그 경외 속에 찬미를 드립니다. 나와 공동체의 감사의 결실을 봉헌합니다. 또한 한 해의 허물과 부끄러움, 참됨과 사랑의 미숙을 반성하며 회개와 자선의 선업을 드립니다.
마침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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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 제4주일. 김 로마노 형제님.
대림 제4주일 제1독서 (미카예언서 5,1-4ㄱ)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 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
본절은 종말에 한 위대한 왕이신 메시아의 탄생과 그가 행하실 구원 사업에 대한 예언이다. 이를 시작하는 본문에는 그가 태어날 장소로 베들레헴이 언급된다.
여기서는 베들레헴의 연약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메시아가 오실 장소가 되는 그 땅의 영광스런 미래를 보다 강조하여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한다.
그런데 원문은 '너'에 해당하는 '웨앗타'(weathah)가 가장 먼저 나온다. 이것은 직역하면, '그러나 너는'(But you)이 된다. 여기서 '그러나'에 해당하는 접속사 '와우'(wau)는 앞선 내용과 5장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원문을 감안하면,앞선 4장의 마지막 구절은 이스라엘의 왕 혹은 오실 메시아가 모욕을 당할 것이란 내용이며, 본절은 메시아의 위대하심과 그 근본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 둘은 모두 메시아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지만, 4장 14절은 메시아의 구원 사업 말기에 당할 모욕에 관한 것이고, 5장 1절은 메시아의 기원 및 탄생에 관한 대조적 내용이므로 '그러나' 라는 접속사로 본절을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이 접속사에 이어지는 단어는 인칭 대명사이다. 이 인칭 대명사 다음에 이어지는 베들레헴과 에프라타라는 두 고유 명사가 동일 대상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은, 그만큼 가리키는 대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구체적인 대상을 분명하게 언급하는 고유 명사보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불분명한 인칭 대명사를 먼저 사용한 것은 예외적 어순이다. 이렇게 한 것은 독자로 하여금 여기서 가리키는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 관심을 증폭시키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렇게 강조된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 8km 지점에 위치한 유다 산골의 마을이다. '베들레헴' 즉 히브리어로 '베트 레헴'(beth lehem)은 '빵의 집' 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 땅의 토지가 비옥하여 각종 과일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토양 조건과 관련된 이름으로 풀이된다.
베들레헴은 지질학적으로만 아니라 신앙적인 차원에서나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읍으로 여겨졌다.
구약 성경에서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위해 이주하는 도중에 그의 아내 라헬이 벤야민을 출산하고 죽은 장소로 처음 공개된다(창세35,19).
이곳은 유다의 자손 페레츠 가문이 살았으며(1역대4,4), 구약 성경의 여덟 번째 정경인 룻기에서 다윗의 증조부 보아즈가 살던 곳으로(룻기2,4), 구약의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며 메시아를 예표하는 왕으로 일컬어지는 다윗의 고향으로도 소개된다(1사무16,1;17,12).
그런데 본문에서는 베들레헴이라는 지명과 함께 에프라타라는 지명이 같이 열거된다. 이 두 지명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있다.
먼저 베들레헴은 작은 성읍을 언급한 것이고, 에프라타는 베들레헴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야곱이 유언중에 베들레헴을 에프라타와 동일한 장소로 정확히 동격으로 언급하는 것을 보면(창세48,7) 이 견해는 받아 들이기가 힘들다.
그 다음 베들레헴은 지정학적 지명이라고 한다면, 에프라타는 사회학적 지명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실제로 에프라타의 이름은 칼렙의 두번째 아내의 이름이고(1역대2,19) 칼렙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다(1역대2,52). 따라서 베들레헴 지역을 이들의 이름을 반영하여 칼렙 에프라타라고 부르기도 한다(1역대2,24).
하지만 에프라타를 반드시 이런 사회학적 의미를 갖는 지명으로 보아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이 '빵의 집' 이라는 풍성함의 의미를 갖는 지명인 것처럼, '에프라타'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프라타'(ephratha)도 '열매를 맺는' 이라는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에프라타를 베들레헴의 옛 이름으로 보는 견해이다.
한편 이 두 지명에 대하여 잘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보잘것없지만' 이라는 서술어가 사용되었다. 이에 해당하는 '차아르'(tsair)는 '둘째의','작은'(창세19,38),'미천한'(시편119,27) 이란 의미이다.
이 단어는 후반절의 '아득한 시절'(영원) 이라는 의미의 '올람'(olam)이나 '옛날'(태초)이라는 의미의 '케렘'(qerem)이라는 단어와 대조를 이룬다.
다시 말해서 본절은 풍요로움과 미천함이라는 두 이미지가 대조를 이루고 또한 영원함과 보잘것 없음이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대조는 몇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이스라엘이 죄와 불순명으로 인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나, 이후 베들레헴에서 나신 메시아에 의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메시아의 출신지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장소이지만, 그가 다스릴 곳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전 우주적 장소가 될 것임을 나타내는 곳으로도 볼 수 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낮은 곳으로 육화하시지만, 궁극적으로 그의 구원 사업과 승리로 인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것임을 나타낸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 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 위해 오시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여기서 '다스릴 이'에 해당하는 '모셸'(moshel)이 하느님을 주어로 사용될 경우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된다(창세1,18).
그러나 이 단어는 하느님에 대해서보다 오실 메시아에 대해 더 많이 사용되었는데 자신의 어깨에 왕권이 놓인 분으로(이사9,5),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으로(2사무23,3), 이스라엘을 다스릴 통치자(예레30,21) 등으로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다.
한편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 분이 누구로부터 올 것인지를 명시적으로 밝힌다.
여기서 '너에게서' 에 해당하는 '밈메카'(mimmeka)는 '분리','이탈','기원' 등을 나타낼때 사용되는 전치사 '민'(min)과 2인칭 단수 접미어가 부착된 것으로,'너로부터' 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너'는 베들레헴을 가리킨다.
즉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너에게서 나올 것이라는 표현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복음서의 진술을 통해 확인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으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를 위하여' 로 번역된 '리'(ly)는 '~에게' 혹은 '~을 위하여' 라는 의미를 갖는 전치사 '레'(le)에 일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경우 '나'는 본절의 화자이며 메시아를 보내신 파견자이신 하느님이 된다.
그렇다면, 본문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출생할 것인데, 그분께서 세상에 오시는 목적이 하느님을 위해서 즉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임을 강조하는 예언이 된다.
또한 본문의 '나오리라' 는 표현은 메시아의 출생 혹은 세상에 오실 때와 관련된 본절의 문맥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해당하는 '예체'(yetse)의 원형 '야차'(yatsa)는 밖으로 나간다는 장소적 이동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생물의 번식이나(창세1,24), 사람의 출생을 표현할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창세38,28.29). 여기서는 '탄생하다' 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절에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실 메시아 탄생과 관련하여 베들레헴이라는 장소적 배경을 강조하였지만, 본문에서는 오실 메시아가 탄생 이전 태초부터 존재하셨다는 시간적 배경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서로 대구를 이룬다.
또한 앞절은 메시아의 인간 세상에서의 강생이라는 제한된 현현에 대하여 국한하여 묘사한 것이라면, 본문은 메시아의 우주적 기원에 대한 설명이라는 보다 더 큰 존재 규명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본절이 그리는 메시아는 한계를 갖는 인간이면서 한계가 없는 권능한 신적 존재이기도 하며, 또한 인간 세계의 시간에 의해 제한을 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모든 시간 개념을 뛰어넘는 영원한 존재임을 나타낸 것이다.
오늘 우리가 메시야 탄생에 관한 비밀을 예언한 미가서를 묵상하는 것은 영원으로부터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메시야를 보낼 하느님의 계획이 다윗의 가문안에서 구체적으로 성모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대림 제4주일 제2독서 (히브10,5-10)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5~7)
히브리서 10장 5~7절까지는 시편 40장 7~9절을 인용한 것이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로 번역된 '튀시안 카이 프로스포란 우크 에텔레사스'(thysian kai prosphoran uk ethellesas; sacrifice and offering you did not desire)에서 서술어 '에텔레사스'(ethellesas; you desired)라는 2인칭 단수 부정(不定) 과거에 '우크'(uk; not)가 붙었다.
구약 성경에는 본문과 유사한 표현들이 있다. 호세아 예언자의 입을 빌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6,6)라고 말씀하셨다.
사무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임의로 제사를 드린 사울 왕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15,20) 라고 지적하였다.
제사 제도를 제정하고 허락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었다. 그 제사 행위를 통해 당신 백성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범죄하지 않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다.
무수한 제사를 드리면서도 죄에서 떠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이사1,11~13)라는 충격적인 책망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제사 자체를 목적으로 착각하고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제사드리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서간의 수신자들 역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믿음을 버리고, 구약의 제사 제도로 회귀하려는 유혹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소마 데 카테르티소 모이'(soma de katertiso moi; but a body you prepared for me)는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과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오즈나임 카리타 리'(oznaim karitha li)로 표기되어 있고, 새 성경 시편 40장 7절에는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본래 '순종하도록 했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는 히브리인들의 관습에서 나왔다. 즉 유대인들은 종을 부릴 때 6년 동안만 일하게 하고, 일곱째 해에는 자유로이 놓아주어야 했다(신명15,12). 그러나 종이 주인을 평생토록 떠나지 않겠다는 자유의지를 밝히게 되면, 주인은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어 평생 종이 되게 할 수 있었다(신명15,16.17).
따라서 종이 자발적으로 자기 귀를 뚫도록 주인에게 맡기는 것은 그가 평생 기쁨으로 주인의 뜻을 받들어 섬기겠다는 표시였다. 이런 측면에서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뚫으셨습니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 다음으로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한 70인역(LXX)의 경우를 살펴보면,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이 '주님의 뜻을 기꺼이 복종하겠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이런 측면에서 이 말이 '귀를 열어 주셨다'라는 표현과 같다는 견해를 가진다.
이러한 뉘앙스를 살려 본문을 설명하면, '내가 주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고 순종하도록 주님께서 그 수단으로써 한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가 될 것이다.
한편, '마련해 주셨습니다'에 해당하는 '카테르티소'(katertiso)는 2인칭 단수 동사로서 그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여 속죄의 제물을 드리도록 새 계약의 제물, 곧 '몸'을 준비하신 분은 구속 사업의 경륜을 주관하시는 성부 하느님이신 것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번제물'에 해당하는 '홀로카우토마타'(hollokautomata)는 '전부'를 뜻하는 '홀로스'(holls)와 '불사름'을 뜻하는 '카우토스'(kautos)의 합성어인 '홀로카우토마'(hollokautoma)의 복수형으로서 '모두 태워 드리는 번제물'을 의미한다. 이 제사에 대한 규정은 레위기 1장 8절, 9절, 12절, 13절 등에 잘 나와 있다.
또한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로 번역된 '우크 유도케사스'(uk eudokesas; you were not pleased)는 '만족하지 아니하신다' 또는 '동의하지 아니하신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구약의 제사 제도에 대해 나타내시는 반응이다. 구약의 제사는 모두 동물을 제물삼아 드린 제사였다. 이 제사들로는 인간의 죄를 제거할 수 없었다. 종교 혹은 예배의 본질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인데, 구약의 제사들은 한 사람도 하느님께 인도하지 못했던 것이다(히브10,1).
사실 구약의 제사 제도를 제정하신 분은 하느님이신데, 바로 그 하느님께서 제사 제도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제사를 미워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약 제사로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제사의 한계성을 밝히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을 완전하게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구약 제사와 다른 그 무엇이 요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 구속 성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이다. 이것만이 완전한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엄중한 죄의 결과를 경계하며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측면에서, 그리고 장차 올 새 계약(신약)에 대한 일시적인 예표를 삼고자 하는 측면에서 제사 제도를 명한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제사 자체보다는 그 이면에 담긴 순종을 원하셨고 (1사무15,22.23; 시편51,18.19), 백성들이 그 제사 제도를 통해 죄에서 떠나는 것(이사1,11~17; 호세6,6)과 장차 올 온전한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두루마리에'
'두루마리'로 번역된 '엔 케팔리디 비블리우'(en kephallidi bibliu; in the volume of the book; in the scroll; the roll of book)는 '두루마리 책'을 가리킨다. 본절에 언급된 두루마리 책은 임금이 지켜야 할 규정을 기록한 신명기 17장 14~20절, 또는 순종에 대해 기록한 신명기 28~30장을 지칭한다는 견해들이 있다.
이 견해를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모든 성경의 중심이라고 말씀하신 점에 비추어 볼때(요한5,39), 이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사실 몇몇 성경 구절들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께로 집중되어 있다.
성경의 어떤 책, 어떤 장이든지 그것을 해석할 때에 그리스도를 배제하고서는 구원사를 전개해 가시는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필리2,8).
따라서 '이루러'로 번역된 '포이에사이'(poiesai; to do)는 '포이에오'(poieo)의 부정사이다. '이루다','행하다', '만들다'를 뜻하는 '포이에오'(poieo) 동사는 모든 활동을 포괄하여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측면에서 하느님의 '뜻'에 해당하는 '텔레마' (thellema; will)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께서 아버지와 갖는 관계의 일면을 본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셨다. 특히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번민에 싸여 기도하신 내용 가운데도 그분의 이러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마태26,39).
2021.12.19. [대림 제4주일] 사제의 묵상 (서철 바오로 신부)
천사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친척 엘리사벳의 잉태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고 동정녀의 몸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격려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응답합니다(루카 1,26-38 참조).
그 응답으로 마리아가 날마다 겪어야 하는 죽음의 위험과 오해의 현실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며칠 밤낮을 걸어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밤길을 걷는 동안은 두려움의 시간이기도 하였을 것이고,
낮에는 빛이 있어 설렘의 시간이 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두려움과 설렘,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의 만남에 성령께서 함께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이 말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마리아가 응답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1,48).
혼자 견디는 시간이 고독할수록 만나는 시간의 친밀감은 더 커집니다.
어떤 관계에서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과 만남은 고요함 속에서 그분의 소리가 내 마음에 울릴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오래도록 함께하는 시간은 하느님을 통하여 모든 존재와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환한 빛이 솟아오릅니다.
이제 솟아오른 빛은 다른 빛을 찾아 나서고, 또한 그 빛을 알아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태중에 있는 말씀의 빛을 알아보고 그 빛 속에서 기뻐합니다.
말씀의 빛은 언제나 갇혀 있지 않습니다.
친구에게로, 이웃에게로, 세상으로 노래처럼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토록 기뻐하며 다가올 다른 세상을 노래합니다.
말씀의 길은 내 안에서 세상 밖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때로 슬픔도 힘이 됩니다.>
언뜻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 같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면 수긍이 되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이 때로 인생의 약이 될 수 있다는 말, 슬픔이 때로 힘이 될 수 있다는 말...
아쉽지만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모든 것으로부터의 애착을 끊어버리는 순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대 자유’의 기쁨을 만끽할 가능성도 있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출가(出家)를 감행합니다. 사서 고생을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걸어오던 탄탄대로를 벗어나서 일부러 가파른 언덕길을 선택합니다. 안락함과 따스함을 포기하고 신산(辛酸)하고 고독한 삶을 선택합니다.
때로 훌훌 한번 털어버리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 바닥까지 완전히 내려가 보면 얼마나 편안한 느낌이 드는지 모릅니다. 때로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생의 가장 밑바닥에 서보면 그리 나쁜 기분만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완전히 비운 우리 안에 성령께서는 너무도 쉽게 임하십니다. 편안하게 당신 거처를 마련하십니다. 그때 우리 삶은 다시 한 번 영적으로 수직상승할 좋은 기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현실적인 눈,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기구한 두 여인의 만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너무나 이상한 만남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만남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만남입니다.
한 여인은 노인인데 해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이상한 나머지 뒤에서 말들도 많습니다.
다른 한 여인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졌습니다. 정식으로 혼인도 하기 전에 아기를 가졌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 안에서 큰 일 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일은 이런 기막힌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어이없는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두 여인의 만남은 기쁨과 감격, 행복에 찬 분위기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솟아 오르는 환희의 기쁨을 억제할 수 없었던 나머지 두 여인은 부둥켜 앉고 노래를 부릅니다.
인간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한편의 코미디 같은 장면이지만, 하느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더할 수 없는 은총의 분위기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육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너무나 이상하고, 다른 한편으로 안쓰러운 만남이겠지만 성령의 눈으로 바라보니 더 할 나위 없이 소중한 만남으로 변화되는군요.
구세사의 가장 큰 두 주역이 될 두 사람의(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모친들의 만남.
요즘은 이제민 신부님께서 쓰신 ‘수동의 영성’을 영적독서로 읽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옥같은 묵상들을 모아놓으셨네요.
“수난은 인생의 완성이며 목표이다. 우리 인생은 수난의 의미를 깨닫고 동참할 때 완성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예수님의 인생 마지막에 전개된 수난사 때문이다. 수난을 당하시는 그분의 얼굴에서 우리가 희망해왔던 것이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나무가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듯이 내 힘을 죽인 곳, 모욕과 침 뱉음과 폭력을 다 참아 받아들인 곳에서 인생은 꽃을 피우게 된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 얼굴은 비록 고생으로 주름이 깊게 패였을지라도 평온하다. 아름답다.”
인고의 세월을 잘 견뎌낸 두 나무-엘리사벳와 마리아-는 마침내 선구자였던 세례자 요한과 구세주였던 예수님을 활짝 꽃피워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오랜 의혹과 안타까움의 세월을 끝까지 잘 견뎌내었으며,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구세사 안에서 큰 역할을 하신 분으로 길이 기억에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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