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의 본질(창 15:1-7)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나'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할 때 자라갑니다.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가지 어려운 일을 만나기도 하고 갈등도 겪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인내하면 믿음은 점점 더 성숙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광야와 같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보면 매우 어둡고 캄캄합니다. (사 60:2-3)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그러나 여기 희망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빛으로 우리 위에 임하시고 영광으로 우리위에 나타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마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라고 말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러한 세대에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토마스 칼라일은 "별빛은 어둠이 깊어질수록 빛을 밝게 발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어느 분야를 돌아보아도 믿을 것이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될 때가 바로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만 할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하박국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믿음의 본질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에 대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성도가 믿음이 약해지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이 바로 두려워하는 마음과 원망과 불평하는 마음입니다. 반면에 은혜를 받고 나면 자신의 처한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다 해도 그 가운데서 감사하는 마음과 담대한 믿음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맨 처음 갈대아우르에서 부르실 때 75세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약속의 땅으로 갔습니다. 이것만 봐도 아브라함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아브라함도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믿음이 항상 좋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연약해지고 흔들릴 때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부족에 속한 군사 318명으로 메소포타미아 4개 연합국을 기습공격하였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각오한 전쟁이며 또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함게 하심으로 그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군대에 비해 거대한 부족들이었습니다. 이제 주변에 많은 적들을 갖게 된 것입니다. 언제 그들이 쳐들어 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아브라함을 매우 큰 두려움에 빠트렸습니다. 세상일은 진 자만이 불안한 것이 아니라 이긴 자도 얼마든지 불안할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창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내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는 성도에게도 얼마든지 큰 어려움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때가 바로 인내의 기간이고 연단의 기간인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진정한 믿음으로 거듭날 때요, 정금같은 믿음으로 연단받는 기간입니다. (약1:2-3)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 때 우리의 믿음속에 있는 불순물이 제거되고 온전한 믿음으로 세워지는 기간인 것입니다. 야고보사도는 바로 그 시련을 믿음의 시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묵상하는 고린도후서에 보면 사도바울의 고백도 바로 그런 고백입니다.
(고후 4:7-10)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 어떠한 상황이 다가와도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 예수와 함께 사는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란이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시련이 다가와도 주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앞에 가로막혀 있을 때 뒤에는 애굽군대가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출 14:10-12)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그 때 믿음의 사람 모세가 이렇게 외칩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앞뒤 좌우가 가로막혀 있을 때 그 때가 바로 위를 바라볼 때인 것입니다.
(시 3:6-8)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믿음의 사람,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온갖 위협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모가 없는 고아와 부모가 있는 아이와의 차이점은 외형적으로 얼마나 좋은 옷을 입었는가? 아니라 부모님이 계시다는 그 자체가 그 아이의 행복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가장 귀한 선물은 하나님의 어떤 축복 이전에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다윗에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기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본질은 아브라함처럼 남에게 선을 베풀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상급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2. 끝까지 인내(충성)하는 믿음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미 사라는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순종했는데 십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젊었을 때 잉태하지 못하였었다면 나이를 먹을수록 그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져 믿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인내라고 하는 신앙적인 방법보다는 당시 근동 지방의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집안에 있는 젊은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아 대를 이을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으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창15: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였습니다.
양자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서 태어날 후손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가능성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비록 더딜지라도, 인간의 가능성이 희박해 보일지라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 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인간은 약속을 철석같이 하고서도 지키지 아니하고 핑계하고 책임을 전가하지만 하나님은 (시 40:1-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성도들을 실망시키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연약해져서 기다리는 대신에 양자를 삼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더하시기 위해서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을 밖으로 이끌고 나가셔서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지금은 늙은 아브라함 내외 뿐이지만 그 몸에서 날 후사를 통해서 하늘의 별들처럼 번성케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을 재확인하였습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의 가능성을 떠나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그 후손이 번성할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변함없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결과를 확인하고 믿는 믿음이 아니며, 이성으로 이해하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결과를 보기 전에, 이성으로 잘 이해되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흔들리지않는 믿음인 것입니다.
나이 많고 무자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하늘에 별과 같이 번성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나 홍해가 갈라지고, 38년된 앉은뱅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5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고, 죽은 야이로의 딸이 살아났다고 하는 성경 말씀이 모두 다 인간의 이성으로 믿기 어려운 황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과연 어떻게 믿어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처럼 그 모든 일들을 능히 하시고도 남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때 그 모든 약속들과 그 모든 하신 일들은 다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믿음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볼 때는 그같은 믿음이 황당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아니하고 그 후로도 더 오랜 세월이 지나 인간적인 가능성이 전무하게 생각되는 100세에 마침내 아들 이삭을 낳았으며, 그 이삭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12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가족들이 애굽에 들어갈 때는 70명에 불과하였으나 400년 후에는 60만 장정이 되어 애굽에 나왔으며,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마침내 이스라엘나라를 건설한 것입니다.
3. 온전한 믿음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오직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는 구체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이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천지는 변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 인격자가 아닙니다. 높은 학문을 쌓은 사람이 인격자가 아닙니다. 사회적인 신분이 높거나 인기가 많은 사람이 인격자가 아닙니다. 인격자는 자기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가 신용이었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명하시매 빛이 창조되었습니다. 말씀이 실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람은 믿었습니다.
“하늘의 별을 봐라,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다메섹의 엘리에셀이 네 후손이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다”하는 말씀에 그는 아멘! 여호와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그를 의롭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몹시 불완전했습니다. 이후에 보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먼 훗날에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기 아내에게 누이라 하라고 거짓말을 교사합니다.
앞으로도 그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실수도 저지릅니다. 연약한 믿음입니다. 불완전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불완전하고 연약한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의로 여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적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분 계십니까? 나는 어쩌면 이렇게 연약하게 믿는가? 내 믿음은 왜 이렇게 초라한가? 그래서 내게 구원이 없고 하나님께서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신 분이 있으십니까?
몸에 열이 납니다. 90세가 된 노인은 원래 힘이 없기 때문에 아스피린을 입에 넣을 때 손을 덜덜 떨면서 간신히 입에 넣습니다. 젊은 청년은 아스피린을 힘차게 입에 집어 넣습니다. 그러면 힘들여 넣은 노인의 아스피린은 효과가 없습니까? 무엇이 능력입니까? 아스피린 자체가 능력입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데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능력입니다. 이 믿음이란 말은 내 믿음을 믿는 것 아닙니다.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믿음대로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연약한 믿음이라도 됩니다. “너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 적다고 할지라도 네가 이산을 명해서 바다에 빠뜨리라고 하면 그리될 것이요” 믿습니까? 우리 믿음에 힘이 있는 것 아닙니다. 약속의 하나님 그분이 능력이십니다.
로마서 5장을 보겠습니다. (롬 5:1-5)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생애를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감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영광이 우리 속에 온전해지기 위해서 우리의 껍질을 깨는 환난이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녀를 낳기 위해서 어머니의 산고가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 생애에 진정으로 좋은 것은 아픔이 없이 오지 않습니다. 그냥 만사가 형통해서 성숙한 인격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승승장구하는 사람 쳐놓고 교만의 시험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에 살면서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하지 않고 위대한 사람이 된 경우는 역사상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환난이 있습니까? 아파서 지난 밤에도 부여잡고 잠을 못 이루셨습니까?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승승장구로 그냥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4백년 동안 기나긴 고통을 지나 저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표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한 소망이 있습니다. 기대가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빚으시는 과정에서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정을 맞기 전까지는 그냥 평범한 바위였습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정을 맞을 때마다 그 바위는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빛나는 멋진 작품이 그 바위덩어리에서 튀어나온단 말입니다.
이처럼 하루아침에 번쩍 정금같은 믿음으로 돌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시련의 과정을 통해 그 믿음이 단련되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장은 광야와 같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이 종종 다가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요. 야고보의 증언처럼 그것은 믿음의 시련입니다. 이 믿음의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어떤 상황이 다가와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성도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연약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루어 온전케 되는 믿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상황이 와도 끝까지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전부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고 어떤 상황속에서도 오히려 견고하여져서 정금같은 믿음으로 끝까지 주님만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