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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73) 미래 사목의 중요한 방향은 IT 사목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는 복음화 위해 ‘클릭’
- 2008년 9월 24일 정진석 추기경이 ‘한국 천주교 사목행정을 위한 통합 양업시스템’에 접속, 그룹웨어를 통해 서울대교구와 의정부교구 전체 사제, 교구청 및 본당 직원들에게 통합 양업시스템 개통을 알리는 문자메시지(SMS)를 발송하고 있다.
현대를 흔히 정보화 시대라고 말한다.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발달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의 속도가 빠르고 정보의 공유화로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을 이루며 사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1990년대 이미 정보사회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한국 사회에서 한국 교회는 정보화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정진석 추기경은 비록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하나 그 효용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정 추기경 자신이 평생 쓴 책 수십 권의 원고도 손가락보다 작은 이동저장장치(USB)에 다 담고도 남는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많이 놀랐다고 주변에 웃으며 이야기하곤 했다. 정 추기경은 미래 사목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온라인을 통한 사목적 시도에 관심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움에 봉착한 한국 교회 정보화 사업
한국 교회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행정 전산화를 중심으로 교회 정보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 전체의 정보화 사업은 여건이 미비한 관계로 어려움에 봉착했다. 전산화, 정보화를 위한 초기 투자비가 엄청난 것에 비해 눈에 띄는 사목적 성과가 뚜렷할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교구별로 전산화, 정보화를 추진하기에는 재정이나 인력, 필요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컸고 준비도 부족해 한국 교회 정보화 사업은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정보매체의 급격한 발달은 하루가 다르게 삶의 형태와 질을 바꿔가고 있었다. 더욱 발전된 미디어는 인간 사회에 신속하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며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으로는 현세적이며 물질 만능주의 사조를 확산시키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새로운 문명의 이기인 뉴미디어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성 향상의 이기일 수도 있고 인간성 파괴의 흉기가 될 수도 있다. 역대 교황들은 미디어 내용의 생산과 보급에 종사하는 이들이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새로운 미디어 기술이 개인과 사회에 선익이 돼야지 인간의 품위를 손상하고 증오와 불화를 조장하며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착취하는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서울대교구는 인터넷을 선교 매체로 활용하기 위해 1998년 9월 20일 인터넷 굿뉴스 사이트를 개통했다. 굿뉴스는 교회의 다양한 소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이용자들 간에 서로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는 가톨릭 가상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 인터넷 선교 통신망인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는 몇 달 만에 총 접속 건수가 200만 건을 돌파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처럼 접속 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가 제3의 선교 매체인 인터넷 선교에 대비하는 가톨릭 선교 통신망의 모델로 자리를 잡은 데다 단순히 가톨릭 관련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하는 홍보에 그치지 않고 쌍방향 통신의 장점을 살려 회원들과 대화의 창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교회 전산망 하나로 이은 ‘통합 양업시스템’
2006년 4월 10일 정 추기경은 시중 은행과 ‘전국 통합 양업시스템’ 개발 조인식을 가졌다. 그리고 2008년 9월 24일 드디어 한국 교회 사목 행정 전반을 하나의 전산망으로 연계하는 ‘통합 양업시스템’이 개통됐다. 10여 년 전 시작한 ‘양업시스템’도 당시 국내는 물론 전 세계 가톨릭 교회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종합 정보시스템이었다.
한국 교회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이름을 딴 ‘양업시스템’ 개통으로 교구 내의 모든 본당과 기관이 네트워크로 연결됐다. 그 결과 신자 관리, 재정, 인사, 회계 등 각종 교회 행정 업무뿐만 아니라 구역ㆍ반별 신자 현황, 본당 신자 현황 등 다양한 사목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이후 정 추기경은 우리은행과 ‘통합 양업시스템’ 개발을 위한 업무 협약을 맺음으로써 세계 최초로 단일한 사목 행정 전산 프로그램인 ‘통합 양업시스템’을 바탕으로 국가 교회 단위의 통합된 사목 행정 전산망을 개통하게 됐다.
통합 양업시스템으로 한국 교회는 전국의 교구가 하나의 전산망으로 연결되는 통합 사목 행정 지원 시스템을 갖췄다. 이 시스템을 통해 전국 교구 본당의 행정 업무와 신자 개인의 신앙생활을 지원하고 사목자를 위한 맞춤형 사목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특히 교회 회계 업무의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었다.
전산화 작업은 비영리 조직인 교회로서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풍부한 전문 인력과 물적 자원을 보유한 기업체의 지원 없이는 추진이 어려웠다. 그래서 정 추기경은 우리은행과 업무협약을 맺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 교회의 정보화는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추진됐다. 하나는 교구와 본당에서의 행정 전산화이고, 다른 하나는 웹사이트를 중심으로 하는 사목 및 선교 정보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굿뉴스는 개통된 지 6년 만인 2004년 6월 6일을 기해 가톨릭 포털사이트로 개편했고, 2008년 6월 2일에는 휴대폰 시대에 발맞춰 모바일 통신사와 모바일 복음화 협약식을 가졌다. 이 사업을 통해 성경과 가톨릭 기도문뿐만 아니라 매일 미사와 기도문, 각 교구 주보, 가톨릭 성인, 성지 등 신앙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이용료나 통화료 없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교회도 최대한 변화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오늘날 정보화 인프라는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 어느 정도 구축된 셈이다. 정 추기경은 교회가 신자들에게 얼마나 좋은 콘텐츠를 제공하느냐에 미래 사목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교회 안의 보화들을 디지털화해서 신자, 비신자 구분 없이 웹 서비스를 통해 제공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추기경 정진석] (74) 마지막 숙제
무거운 십자가 내려놓던 날 목자도 울고 양도 울었다
- 서울대교구장 이임 미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눈물을 흘리며 신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정진석 추기경은 은퇴를 앞두고 한 가지 숙제를 남겨 두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명동대성당 재조성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서울대교구는 이미 1982년 명동성당발전위원회 발족을 기점으로 명동성당 종합계획을 시작했다. 지난 30여 년간 명동대성당 주변을 새롭게 단장하는 사업을 준비해 온 셈이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회의와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명동대성당 개발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계획과 숙고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정 추기경은 누군가는 마침표를 찍어야 하고 그래서 명동 개발이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큰 사업을 하면 후임자에게 또 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정을 미뤄도 후임자에게 역시 부담을 안겨 주는 셈이었다.
이제 어떤 방향이든 정 추기경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이룰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는 단계적으로 시행하는 명동성당 종합계획 4단계 계획을 승인했다. 그중 1단계는 2014년까지 완공을 목표로 하며 2∼4단계는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계획이었다. 2단계 이후에도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는 계획을 지시했다. 그리고 교구 사제평의회를 열어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결정했다.
교구 설정 180주년을 기념하며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11년 9월 16일은 성 김대건 신부의 순교일이었다. 서울대교구는 이날 명동 가톨릭회관 성모상 앞에서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기공식을 갖고, 한국 교회 300년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정진석 추기경은 기공식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교구 설정 180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대교구청을 건설하게 된 역사적인 날입니다. 명동성당 종합계획은 무엇보다 명동성당을 더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것이며, 교회가 세상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해 복음에 기초한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명동성당 앞을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제공해 신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명동성당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에 함께하는 길잡이로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는 특히 명동성당이 젊은이들과 외국인들에게 인생의 참 의미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명소가 되기를 기대했다. 이로써 서울대교구는 명동대성당 건축 초기인 1900년대와 같은 자연적 경관을 갖춘 성당의 모습을 되찾고, 교구 설정 이후 처음으로 독립된 통합 교구청사를 갖추게 됐다.
- 2012년 5월 10일 서울대교구 후임 교구장 발표 기자회견장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후임자로 임명된 염수정 주교의 손을 맞잡고 기뻐하고 있다.
이 사업은 한국의 역사ㆍ문화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명동대성당을 보존하고 명동 일대를 열린 문화공간으로 꾸미는 과정의 하나로 교회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관심을 모았다. 정 추기경은 명동 개발의 내용과 결과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올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손을 떠났으니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창 명동 개발 공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2012년을 맞이했다. 새해가 되면서 교회 안팎에서는 81세가 된 정 추기경의 후임자가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일간지에서는 여러 명의 주교를 거명하며 예측 기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정 추기경은 아무런 동요 없이 일상 업무를 계속해나갔다. 후임자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하느님께서 좋은 분을 보내주실 거예요”라면서 말을 잘랐다.
2012년의 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여름을 재촉하던 5월 초, 교황청에서는 염수정 주교를 정 추기경의 후임자로 발표했다. 정 추기경은 안도했다. 책상에 앉은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 사제로서 교구를 잘 아는 총대리 주교가 교구장이 됐으니 참 잘된 일이라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정 추기경은 깊은 상념에 빠진 듯 한참이나 눈을 지그시 감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뜬 정 추기경은 일어나 창밖을 보며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했다.
여름이 벌써 다 온 것 같네. 참 시간이 빨라….”
잡아놓은 시간은 빨리 간다더니, 정말 그랬다. 후임 교구장 발표 이후 6월 15일 이임 미사와 20일 숙소인 혜화동으로 이사하는 일정이 확정됐다. 정 추기경은 6ㆍ25 전쟁이 일어난 6월 25일을 새 교구장 착좌식 날로 계획했는데, 이는 서울대교구장이 평양교구장을 겸임하는 의미도 있지만 염 대주교가 6월 말 로마에서 대주교들이 교황에게 받게 되는 팔리움 수여식에 참석하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2012년 6월 15일, 드디어 명동대성당에서 정 추기경 이임 미사가 열렸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느낍니다. 여러 가지 힘든 상황 속에서도 각기 맡은 소임에 최선을 다해 사목활동을 하는…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정진석 추기경이 2012년 6월 15일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이임 미사를 마치고 서울대교구 사제단의 박수를 받으며 성전을 나서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정 추기경의 목소리가 울먹이듯 떨렸다. 정 추기경의 마음이 신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신자들도 이내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약한 모습을 전혀 보여 주지 않았던 정 추기경이었기에 많은 사제와 신자들은 마음이 아팠다. 14년간의 서울대교구장직을 내려놓고 사목 일선에서 물러나는 정 추기경을 배웅하기 위해 주교들과 사제단, 신자 등 1200여 명이 성당을 가득 채웠다.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들은 선 채로 미사를 함께했다.
사제품을 받은 지 벌써 51년, 주교로 추기경으로 수많은 미사에서 강론했던 그였지만, 이날만은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정 추기경의 목소리가 떨릴 때면 신자들도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추기경은 답사를 하며 두 번 눈물을 떨궜다. 그의 어깨도 조금 떨렸다. “신부님과 교우들의 협조와 기도와 격려 진심으로 감사했다. 모두가 제게는 하느님이 보내주신 천사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너무 과분했다”고 말할 때, 또 “성당 하나를 짓기 위해 신자들이 드리는 희생과 봉사를 생각할 때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하다”고 말할 때였다.
정 추기경은 본당 분할을 중요하게 강조해서 그가 교구장으로 있는 동안 본당 100여 곳이 신설됐다. 정 추기경은 교구장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며 만감이 교차했다. 그는 무엇보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그리고 또 미안한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추기경 정진석] (75 · 끝) 희망을 안고 다시 하느님께
“추기경님,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 정진석 추기경은 2012년 6월 20일 정든 명동 주교관을 떠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사제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사진은 혜화동본당 신자들과 혜화유치원생들이 피켓과 꽃다발을 들고 정 추기경을 환영하는 모습.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2012년 6월 20일. 정진석 추기경이 명동 주교관을 떠나 김수환 추기경이 머물렀던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신학대학 내 사제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날이었다. 이날따라 하늘은 맑고 높아 보였다.
이날 아침도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정 추기경은 교구청에서 교구청 사제들과 아침 미사를 지내고 아침 식사를 하고 숙소로 들어와 주교관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정 추기경은 오전 10시가 지나면서 정들었던 교구청 숙소를 나왔다. 교구청 마당에 교구청 사제들과 직원들이 늘어서서 마지막으로 명동을 떠나는 정 추기경을 배웅했다.
“추기경님, 건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정 추기경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으며 인사를 나눴다. 정 추기경과 오랫동안 정이 들었던 주교관 식당 직원들은 뒤돌아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정 추기경은 청주교구를 떠나던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다. 교구 한 해 예산의 10배나 되는 100억 원을 빌려 어렵게 병원 인수를 결정했는데, 얼마 후 덜컥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다른 곳으로 떠날 줄 알았으면 그런 큰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에게 대책을 세울 때까지 부임 일정을 늦춰달라고 요청까지 했지만 어렵다는 대답을 들었다. 결국 그는 그해 6월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청주교구에 100억 원이라는 큰 빚을 남겨 몹시 미안하고 착잡한 마음이었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던 그는 서울대교구청을 떠나는 이 순간에도 청주교구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미안하고 또 감사한 마음 뿐이었다.
정 추기경은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명동을 출발해 혜화동 대신학교로 향했다. 명동과 혜화동 사이를 그동안 수없이 오갔던 그였지만, 이날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듯 말없이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오전 11시경 대신학교에 도착한 정 추기경은 혜화동본당 신자들과 혜화유치원생들의 환영을 받았다.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피켓과 함께 꽃목걸이도 준비해 정 추기경의 목에 걸어주었다. “이 얼마나 좋은가~ 반가운 님 오신 이 날에~” 혜화유치원생들은 깜찍한 노래까지 준비해 정 추기경을 위해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사제관에 들어선 정진석 추기경이 선후배 사제들의 환영 속에 백민관 신부와 포옹하고 있다.
숙소에 가까이 이르자 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사제들과 같은 숙소에 거주하는 선후배 사제들이 마중 나와 정 추기경의 혜화동 전입을 환대했다. 신부들을 끌어안으며 정 추기경은 반가움을 표시했다. 마당 가득 넘치는 웃음소리에 싱그러운 녹음도 짙었다.
숙소는 사제관 2층의 작은 사무실이 달린 곳이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거처하셨던 장소였다. 숙소는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정 추기경은 전임자인 김 추기경이 은퇴 직전 한 인터뷰가 떠올랐다.
김 추기경은 당시 가능하면 운전 면허증을 따서 전국의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짧은 순간이라도 자유롭고 싶었던 김 추기경의 속 이야기였다고 생각했다. 정 추기경은 창밖을 바라보며 이제 본인도 새로운 삶을 맞게 됐다고 생각했다.정 추기경의 퇴임 후 생활도 사실 그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평생 시간표에 맞춰 생활해 왔던 터라 어려운 것은 없었다. 정 추기경은 젊은 시절부터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유지해 왔다. 보통 새벽 5시쯤 일어나 간단한 체조로 운동을 하고 아침기도와 묵상 후 7시 반에 숙소에서 같이 지내는 신부들과 아침 미사를 드린다. 8시에는 함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 오전에는 숙소와 붙어 있는 집무실로 나와 예방 손님을 만나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12시 낮 기도와 점심 식사 후 오후 일과도 오전과 비슷하다. 오후에 빼놓지 않는 일정이 있다면 신학대학 구내를 한 시간가량 걷는 것이다. 매일 산책을 하는 것은 오래된 그의 습관이다. 비가 와서 바깥마당을 걷지 못할 때는 실내 조금 넓은 공간에서 어떻게든 걸으려고 노력한다.
저녁 기도와 식사 후에는 평소대로 묵주기도 20단을 바친다. 그리고 아무리 늦어도 9시 반 이전에는 잠자리에 든다. 텔레비전은 필요할 때 뉴스만 잠시 보는 정도다.
정 추기경은 젊은 시절부터 계속해서 책을 쓰고 있는데, 특히 새벽에 하느님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책을 쓰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이처럼 정 추기경과 평생을 함께해온 오랜 친구이자 취미는 집필이다. 전에는 주로 영성과 교리, 교회법에 관한 글을 썼는데, 2000년도 초부터는 주로 성경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정 추기경은 어느 순간부터 성경에 맛 들이고 공부하는 데 큰 재미를 느끼게 됐다. 교구장 재임 중에는 꽉 막혔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성경에 매달렸다. 성경 속 인물에게서 가야 할 길을 찾았던 경험이 유독 많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긍정적인 성격에 감사하면서 정 추기경은 오늘도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려고 애쓰고 있다. 신학생 시절처럼 시간표대로 기도하고 공부하고 글을 쓰고 묵상을 하며 주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끊임없이 대화하려 노력하는 행복한 삶이다.
“추기경님,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 그동안 ‘추기경 정진석’을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회고록을 마치며>
한 사람의 일생을, 특히 교회와 역사의 중요한 인물을 회고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어쩌면 애초에 무리였습니다. 구술과 자료를 바탕으로 연재를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한 기자가 회고록 ‘추기경 정진석’을 읽는 소회를 정 추기경에게 질문했을 때, 정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나 자신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준비합니다. 회고록을 읽다 보면 내 무덤 앞에 모인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친 제 모습이랄까요. 마치 죽은 다음의 나를 미리 보는 것 같습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차분한 심정으로 일생을 돌아보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이상할 정도로 죽음이 두렵거나 아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감정적 동요도 없습니다. 회고록은 제가 생을 정리하고 죽음을 잘 준비하도록 돕는 좋은 벗입니다.”
정 추기경의 말씀을 전해 들으니 저는 부끄럽고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사실 정 추기경의 일생은 고스란히 우리 교회가 겪은 가슴 아픈 역사이며 근대사입니다.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나는 고단한 시대를 사셨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을 조금이나마 체험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특성을 하나의 표현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제 개인 체험에서 정 추기경은 인간적이며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는 분입니다. 그는 고통스런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근거는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신앙의 힘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매번 과거를 떠올리며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옛날이야기 들려주시듯 말씀해주셨던 정 추기경님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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