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암살사건(朴正煕暗殺事件), 박정희 사살사건(朴正煕射殺事件), 박정희 총살사건(朴正煕銃殺事件), 궁정동 사건(宮井洞事件)은 1979년10월 26일에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함께 박정희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총살한 사건이다. 십이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9년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염동진의 아지트가 있던 자리)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았고 곧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김재규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독재자 박정희를 처단하였다고는 하였으나, 권력 암투 과정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이에 김재규가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편,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챌 정도로 박정희에게는 적대적인 반면 민주화에는 큰 열망을 가진 의인이었다. 이 살인 사건을 7년간 준비해왔다는 설이 있고,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과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김재규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 2인자'라고 불리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를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박정희가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한 안가로 오라는 박정희의 명령을 전했다.
10.26과 관련된 인물들. 박정희를 중심으로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재규, 오른쪽 끝이 차지철이다. 사진은 10.26 사건 4년 전 사방공사 시찰 때의 모습이다. 사진에 나와 있는 좌우 두 인물의 위치가 박정희의 왼팔과 오른팔의 위치와 같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건의 진행
김재규는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라고 알렸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총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긴 채 박정희와 대면했다.
박정희는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 등과 함께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앉아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박정희는 정치 및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재규를 질타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도 질타하였다. 평소 학생 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보다 확실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차지철도 지나치게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더욱 확산됐다고 주장하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 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저녁 7시 10분경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갔고 문 앞에서 총 점검을 하는 순간 차지철이 나타났으나, 김재규는 총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었고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이 경호원들이 있는 주방으로 내려갔다가 연회장에 다시 들어온 시점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가 나가 저녁 7시 30분에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아래와 같이 말했다.
“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
”
다시 돌아와보니 시간이 저녁 7시 38분이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사건의 순간
1979년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가 발터 PPK를 꺼내 쏘아 차지철의 오른손목을 맞혔고 이어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박정희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쏘아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역시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들을 죽였다.
김재규가 총구를 차지철에게 조준했고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계속 저항하는 가운데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격발불량을 일으켜 고장났다. 그때 정전되었으며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는 고장난 발터를 박선호의 스미스 앤 웨슨 M36 치프 스페셜 리볼버와 맞바꾸었다.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는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심수봉과 신재순이 총에 맞아 쓰러진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은 화장실에 숨었다 다시 나와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 다시 김재규가 들어왔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장을 던져 총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는 이를 피한 후 차지철의 폐와 복부를 향해 총을 쏘아 차지철이 맞고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쳐 어디엔가 숨었다. 김재규는 쓰러져 있는 박정희의 후두부에 총을 쏘았다. 오른쪽 귀 윗부분에서 들어간 총알은 지주막을 꿰뚫은 후 박정희의 왼쪽 콧잔등 밑에서 멈추었다. 머리의 총격 또한 치명상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다. 연회가 열린 '나'동이 아닌 '가'동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도 20여 발의 총소리를 듣고 의아하게 여겼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 본부로 갔다.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체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金桂元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 본부로 가서 정승화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라고 말했다.
박선호의 명령을 받은 경비과장 이기주는 경비원 김태원을 시켜 쓰러져 있는 사람 모두를 확인 사살하였고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차지철 역시 확인 사살했다.
10·26과 관련해 중요한 의문 중의 하나는 김재규가 왜 그렇게 박정희를 단호하고 냉혹하게 확인사살 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후에 군사법정에서 중정요원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박정희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것을 알았으면 제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박정희가 사라져야 할 권력자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쏜 총알은 딱 두 발이다. 첫 발은 가슴을 관통했으나 치명타가 아니었다. 재차 발사하려 했을 때 김재규의 콜트사 제품 권총은 찰칵 소리만 낼 뿐 불발이었다. 김재규는 고장난 권총을 들고 밖에 나가 박선호가 서 있자 그의 권총과 바꾸어 갖고 다시 방에 들어간다.
박정희는 모 대학 재학 중인 패션모델 정혜선(가명)양의 무릎에 상반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다가가 머리 뒤통수에 권총을 겨눴다. 군사법정 진술과 현장검증에서 확인한 바로는 50cm 이내의 거리였다. 정혜선은 비명을 지르며 실내 화장실로 튀어 들어 피신했고 동석했던 가수 손금자(가명)양은 밖으로 뛰쳐 나갔다. 김재규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최후의 일발을 가격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확인사살이었다.
김재규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박정희와 동향이고 육사 2기 동기생으로 군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핵심 자리를 맡길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사이에 확인사살이란 인간적 환멸과 증오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김재규의 그런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옛말에 "소인은 혁면(革面)하고 군자는 표변(豹變)한다"고 했다. 혁면이란 얼굴, 즉 안면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변덕 부리는 사람을 소인이라 하고 그 변덕의 한 단면을 혁면이라고 묘사했다. 그에 비하면 군자는 말이 없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번 마음 먹으면 얼굴 표정 바꾸는 변덕에 그치지 않고 몸 전체를 돌려버리는데 그것이 '표변'에 해당한다.
박정희는 김재규가 자신의 속마음까지 잘 헤아려 주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내치지는 않았다. 일종의 변덕으로 신임을 거두어들이는 혁면이지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는 표변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김재규는 유신 이후 박정희의 무자비한 인권탄압과 함께 "미국 놈들 갈테면 가라고 해" 등의 반미 발언으로 국가안보 위기를 절감했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와의 관계에서 혁면에 그치지 않고 표변하기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박정희가 권력자로서 변덕과 주색에 빠진 사생활 문란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환멸을 느꼈고 그것이 그의 '야수'와 같은 표변을 불러 일으켰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술자리 여자를 구해오던, 그 시절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유신독재의 문제와 한미관계의 파탄을 주로 비판하면서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비밀스런 마음 속 창고에는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에 대한 환멸감이 쌓여 있었다. 녹음테이프에 담긴 군사법정의 문답내용을 분석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것을 처음 감지한 사람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담당한 변호인이었다. 박선호 담당 변호인인 강신옥 변호사는 그의 사건 가담 동기와 그날의 행적 등을 정리하다가 처음부터 품었던 의문이 풀려감을 느꼈다. 유신체제의 핵심권력자들이 모인 술자리에 동석했다는 여인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바깥에서 술자리 여자를 구해 오는 '채홍사' 역할을 고정적으로 해야 할 만큼 박정희의 주색은 병들어 있었다.
김재규의 체포와 사형 집행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 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를 인계받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동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김재규는 "너, 각하와 차지철에게 무슨 짓 했어? 어?! 너 쇠파이프 맞아야 될려나 보다. 너 미쳤니? 네가 장애인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고, 쇠파이프로 맞았으며,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했다.
김재규는 10월 유신으로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거사를 7년간 준비해 왔다는 설이 있다. 재판 중 '내 뒤에 미국이 있다'는 말도 했다.
1심 최후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응
류병현
한미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류병현 장군은 10월 26일 자정 무렵에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을 찾아와 "박대통령에게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류병현 역시 사태 파악이 안 된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글라이스틴은 통신보안이 철저한 전화선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워싱턴에 있는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 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건의 여파
전두환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군부 내 파벌 갈등으로 인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정승화를 신속히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국회의사당 폐지로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군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식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10·26 사건 목격자 가수 심수봉은 1980년 가수 활동을 금지당하다가 1984년 복귀하였고, 사건 목격자 모델 신재순은 미국으로 이민간 후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신재순씨
심수봉은 2월14일 방송된 KBS 2TV '승승장구'에서 박정희 대통령 서거 사건인 10.26 사태 이후 정신병원에 감금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10.26 사태는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 모처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전(前) 대통령과 경호실장 차지철을 총으로 살해한 사건으로, 당시 함께 있었던 심수봉은 뜻하지 않게 역사의 증인이 돼 방송금지 조치를 당했다.
심수봉은 그때 그사건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답하기를 꺼려했지만 힘들게 그 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고백했다.
심수봉은 10.26 사태 이후 요주의 인물이 됐다. 그 와중에 첫번째 남편을 만났다.
심수봉은 "그 사건 이후에 나를 만났다는 이유로 내가 아끼던 사람이 어디론가 끌려가서 고문을 심하게 당했다"며 "그 분이 고문당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나는 바로 옆방에서 들어야만 했다. 그 이후 나는 정신병원에 감금을 당했다"고 밝혔다.
이어 "한 달 가까이 정신병원에서 지냈고 아무리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말해도 그들은 나를 가둬두고 약물 주사까지 놨다"고 덧붙여 충격을 안겼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별 상관없는 얘기지만, 이 안가는 백의사의 단장 염동진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
1972년에 시작된 유신체제는 경제적으로 70년대 후반 누적된 성장 드라이브 정책의 후유증과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1인 장기집권에 의한 강압통치,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불화 등 정치 및 경제적 모순이 반정부 시위로 폭발하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나자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이 부마민주항쟁의 처리문제로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의 만찬 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우선 박정희가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이 내세우던 강경노선 쪽으로 손을 들어 주었고, 이에 기가 산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라는 임무를 넘어서서 중앙정보부의 영역까지 손을 대려는 월권행위를 일삼았다. 이에 대통령 측근들이 차지철의 월권을 경계하는 충언을 했지만 그때마다 박정희는 "차지철이 국회의원을 해 봐서 정치를 잘 안다" 라고 오히려 두둔했다고. 그로 인해 입지가 좁아져 거세 위기에 놓인 김재규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음모라는 설도 있으며, 김재규가 순간적인 분노를 못이겨 충동적으로 저지른 우발적 살인이라는 설 또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3가지 설명은 모두 김재규 개인의 의사에 크게 기대거나, 음모론에 그치고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당시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전국의 대도시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높은 민란으로 파악하여 박정희에게 보고했지만, 박정희와 차지철은 북한 간첩의 개입 내지는 김영삼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불순한 사건으로 호도하고, 대형 학살을 예고하는 언행을 보였다. 즉 부마항쟁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될 경우, 군부대를 동원하여 강경진압에 의한 유혈사태가 터질 확률이 높았다. 이런 사실들을 보았을 때 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열망이 김재규라는 방아쇠로 나타났을 확률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당시 김재규가 민주화 운동 자체를 지지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민주화 세력에 대해 온건한 대응을 검토하는 수준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부마민주항쟁 항목 참조.
아무튼 이 10.26 사건은 유신체제가 붕괴되는 교두보였으며, 한편으로 전두환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전말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삽교천에서
1979년 10월 26일. 당일 대통령 박정희는 충남당진에서 열린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완공식에 참석한 후 오후 2시 반경 청와대로 복귀하였다. 이 당진 송신소 건물은 중앙정보부 에서 관리하는 건물인 바, 부장인 김재규가 당일 아침 완공식(삽교천 포함)에 참석할 의사를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전화로 밝혔지만, 차지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 인데 중정부장 까지 자리를 비우면 어쩔 것이오? 김부장은 그냥 서울이나 잘 지켜 주시오" 라면서 단칼에 끊어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이날 김재규가 빡돌은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4시 경, 박정희로부터 대행사, 즉 대통령과 중정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경호실장 등이 참석하는 연회 를 준비하라는 명을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통해 중정 안가측에 대행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대통령과 시중드는 여성 단 둘이서 하는 연회는 소행사). 한편 친구인 정인형에게 대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정인형과 해병대 간부후보생 동기였다)는 주방에 연회 준비를 지시하는 한편으로 대행사를 도울 여성을 섭외했는데, 이 날 섭외된 여성은 당시 모델 겸 배우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이었다.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정 집무실에서 차지철로부터 이날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가로 오라는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도착한 후, 안가 집무실에서 오후 4시 40분 정승화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궁정동에서 저녁이나 하면서 조용히 시국 얘기 좀 나누자"며 그를 초대했고, 중정 제2차장보(국내담당) 였던 김정섭을 저녁 6시 30분까지 궁정동 안가로 오도록 했다(이날 저녁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가 대행사에 호출되었다는 핑계로 연회장 옆의 본관 식당에서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을 같이 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놓았다. 김재규의 살의(殺意)는 이때부터 발동된 것으로 생각된다.
발터 PPK
오후 5시 20분,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이 먼저 안가에 도착했다. 김재규는 김계원과 안가 앞마당에서 부마항쟁 때 부산에서 직접 확인한 민심을 얘기하며 "부마항쟁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이다" 라고 강하게 부르짖었다. 그리고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차지철이 부마항쟁을 신민당이 개입한 일부 불온세력의 주도로 벌어진 사건이라 호도했기 때문이라고 그를 심하게 비난하며 "차지철 이 자식 오늘 해치워 버릴까요?" 라는 등 격한 반응을 보였다. 평소 김재규를 친동생처럼 아끼던 김계원은 "나도 중정부장을 해봐서 알지만 김부장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내일 민정수석의 대통령 보고 때 차지철의 월권에 대해 각하께 보고하도록 하겠다" 면서 김재규를 달랬다.
오후 6시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맞이하여 대통령을 나동의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운명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대통령 수행차 안가로 온 청와대 경호실 직원 중 김용태 특수차량 운행계장, 박상범 경호계장, 김용섭 경호관은 나동의 주방에서 안가 직원들과 같이 맥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고, 정인형 경호처장과 안재송 부처장은 경호원 대기실에서 따로 저녁식사를 했다. 당시 중정 안가에서의 행사 시, 대통령 경호는 안가 경비원들에게 맡기고 경호원들은 별도 장소에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이 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이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으로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하였다. 연회 당시 술 이외의 만찬 메뉴는 꿀에 재운 인삼과 송이버섯 구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도라지나물, 전, 생채, 편육 등으로 의외로 평범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해당 사건을 다룬 매체에서는 비쥬얼이나 의미 부여를 위해서 일부러 만찬상을 호화롭게 묘사하는 편이다.
한창 연회가 진행되는 와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신민당 공작(김영삼을 총재직에서 몰아내고 정운갑을 총재 대행으로 올리려던 정보부의 공작) 어떻게 되었는가" 라고 묻자 김재규는 "당직에서 사표 내겠다던 의원들이 강경하게 돌아서는 바람에 다 틀렸다" 라고 답했다. 이에 박정희는 부마항쟁과 김영삼 제명건을 들먹이며 "김영삼을 구속시켜야 했다" 라고 강한 어조로 몰아붙였고 김재규는 "이미 제명당한 김영삼을 구속시키는 건 그를 두번 죽이는 셈이다.
이 사건이 벌어졌을때, 박정희는 4.19 혁명과 곽영주 운운하며 총기사용을 허가했다. 그리고 차지철은 여기에 덧붙여서 캄보디아를 언급하며, 부산·마산 시민 100~200만명 쯤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망언을 했기 때문이다.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셔야지요" 라면서 진언하자 짜증이 난 박정희는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야당 놈들 비리만 쥐고 있으면 다가 아니다" 라며 김재규를 심하게 질책했다. 게다가 옆에서 차지철은 "야당 놈들 중 국회의원 하기 싫은 놈 하나도 없다. 까불면 학생이고 신민당이고 전부 탱크로 싹 깔아뭉개야 한다" 며 맞장구를 치고 혼잣말로 "요새 정보부는 부마사태 처리도 그렇고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 며 비아냥 거리면서 김재규를 계속 코너로 몰고 갔다. 이런 살벌한 상황을 무마시키려 김계원 비서실장이 김재규에게 위스키로 칵테일 만드는 방법을 묻기도 하고 오늘 삽교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는 등 화제를 전환하려 했지만 무소용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저녁 6시 30분 쯤 신재순과 심수봉이 연회장에 들어오면서 조금 누그러졌지만 이미 뚜껑이 열린 김재규는 연회장을 나와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식사 중이던 정승화 총장에게 가서 "갑자기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중이다. 김차장보가 국내 정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와 시국 얘기좀 나누고 계시라. 끝나는 대로 곧 오겠다" 라며 해명을 한 후, 집무실 책장에 숨겨놓은 자신의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이던 의전과장 박선호(김재규가 체육교사를 하던 시절 김재규의 제자)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대령(김재규의 6사단장 재임 당시 전속부관)을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어 아래와 같이 명령을 내렸다.
김재규: (호주머니의 권총을 보이며)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일이 잘못되면 자네들이나 나나 죽은 목숨이다. 오늘 저녁 내가(차지철을) 해치우겠다.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 지금 본관에 육군 참모총장과 2차장보도 와 있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박선호: 부장님, 각하도 포함됩니까?
김재규: 그래.
박선호: 오늘은 경호원이 일곱 명이나 와 있고 날이 좋지 않습니다. 다른 날을 고르시지요.
김재규: 안돼, 오늘 해치우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된다. 똑똑한 녀석 세 놈만 골라 나를 지원하라. 다 해치워 버려. 믿을 만한 놈 세 놈 있겠지.
박선호: 예,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장님 30분만 여유를 주십시오.
김재규: 30분은 너무 길다.
박선호: 30분이 필요합니다. 30분 전에는 절대 행동하시면 안됩니다.
김재규: 알았다.
그리고 김재규는 박흥주를 향해 "자유 민주주의를 위하여" 라고 중얼거리고는 권총이 든 호주머니를 탁 치면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엔 크게 놀랐지만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고,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예비역 해병 하사 출신. 평소 박선호의 신임이 깊었다)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을 암살조에 합류시켰다(참고로 유성옥은 육군 중사 출신으로 제대 후 중정 운전사로 취직했다가 박선호의 도움으로 1급 근무지인 안가로 배치되었으며, 그는 그해 11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현장에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은 안가 나동 주방 근처에 세워둔 승용차 내부에 숨어서 연회장에서 총소리가 나길 기다렸다. 한편 박선호는 경호원 대기실에 있던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할 준비를 했다. 사실 박선호는 이 둘을 사살하기 보다는 잘 설득하여 어떻게든 살려볼 속셈이었다. 정인형은 앞서 말했듯 해병장교 동기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고 안재송 또한 해병대 후배였으니...
박선호의전과장
저녁 7시 38분경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재규는, 7시 40분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발터 PPK를 꺼내어 차지철을 향해 "차지철 이 새끼, 넌 너무 건방져!!" 라고 외치며 제 1발을 발사,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시켰다. 김재규의 당시 발언엔 두 가지 설이 존재했는데, 이것은 소수설이었으나 지금은 이것이 정설이다. 흔히 알려진 다수설은 신재순의 진술에 의거한 것으로, 김재규가 사격 직전 김계원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 라고 충고한 후 박정희에게 "각하, 차지철 저 버러지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라면서 발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때 논란이 되었고, 이로 인해 의자매까지 맺으며 친밀했던 신재순과 심수봉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결국 신재순의 버러지 발언을 포함한 다수설은 합동 수사본부 측의 강권으로 거짓 증언한 것임이 최근에 밝혀졌다.
갑자기 저격당한 차지철은 총탄에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김 부장, 왜 이래!" 라고 외쳤고, 박정희가 "지금 뭐하는 짓들이야!" 라며 일갈하자, 김재규는 3~4초쯤 후 엉거주춤 일어선 상태로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에 2발째를 발사했다. 뒤이어 당황하는 차지철에게 김재규는 제3발을 쏘려 했으나 발터 PPK가 격발 불량을 일으켜 발사되지 않자 밖으로 뛰어나갔고 차지철은 화장실로 피신해 버렸다. 그리고 우측 흉부 관통상을 입은 박정희는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정좌하고 있다가 신재순이 "각하, 괜찮으십니까?" 라며 부축하려 하자 박정희는 "난 괜찮아" 라고 중얼거리며 옆으로 스르르 쓰러졌다.
김재규의 제 1발을 신호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 일행은 소지한 권총과 소총으로 주방에서 식사중이던 김용태 경호실 운행계장과 김용섭 경호관을 사살했고, 그 과정에서 안가 요리사 이정오가 허리에,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이 어깨에 총을 맞는 등 안가 직원 몇명도 부상을 입었다. 그 난리중에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계장 박상범은 허벅지 관통상만 입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총을 맞고 쓰러질 때 주방 조리대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완전히 의식불명이 되어 죽은 것으로 오인되었고, 안가 경비원인 김태원의 확인 사살시 박상범 옆에 안가 직원 김용남이 부상을 입고 누워있어 사격을 포기한 행운도 따랐다. 게다가 청와대 경호원 들은 대, 소행사 때마다 안가의 중정 직원들과 얼굴을 부딪히다 보니 친분이 두터웠고 막역한 친구 사이인 경우도 많았던 바, 김태원으로선 친하게 지내던 경호원에게 쉽사리 총구를 들이대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박상범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에도 계속 경호실에서 근무했고, 김영삼 정권 출범 때,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어 최초의 민간인 출신 경호실장이 되었다.
같은 시각 경호원 대기실에서 마른 안주를 먹으며 AFKN TV 방송을 보고 있던 정인형과 안재송이 총소리를 듣고 뛰어나가려 하자 박선호가 권총으로 제지하며 "움직이지 마라, 제발 우리 같이 살자!" 라고 애원했지만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했고, 어쩔 수 없이 박선호는 안재송을 사살한 데 이어서 친구인 정인형도 살해하고 말았다.
밖으로 나온 김재규는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하고 나온 박선호의 리볼버를 넘겨받아 연회장으로 돌아왔고, 화장실에서 나와 경호원을 찾던 차지철은 김재규와 맞닥뜨리자 문 옆의 문갑을 치켜들고 거세게 저항했으나, 김재규는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발사하여 치명상을 입혔다. 차지철을 거꾸러뜨린 김재규는 쓰러져 있는 박정희에게 후두부를 향하여, 마지막 탄을 발사해 그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김재규의 오판, 그리고 파멸
거사를 마친 김재규는 복도에서 공포에 떨고 있던 김계원에게 "나는 한다면 한다.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해주시오" 라고 언질한 후,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고 있던 정승화 총장을 차에 태워 김정섭 차장보와 같이 안가를 빠져 나오면서 "각하가 돌아가셨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정승화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내 안정을 찾고 남산(중앙정보부)으로 갈지 육본으로 갈지 우왕좌왕 하던 김재규에게 병력 동원 차원에서 용산의 육군 본부로 가는 것이 좋다고 권유했다. 이에 김재규는 정승화의 의견을 받아들여 육본으로 차를 돌렸다.
그러나 이날 김재규의 판단은 아직도 김재규 최대의 실책이었다고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오죽하면 김진명의 소설 '한반도(10.26으로 개작)'가 이걸 떡밥으로 썼겠는가. 그러나 떡밥은 떡밥일 뿐이라는 것이 중론인 듯. 자신의 영향권인 중정으로 가서 그곳에서 훗날을 도모하던가 했어야지(더구나 조작과 은폐의 달인 중앙정보부가 아니었던가?), 당시 군부 내에서의 평가가 높지 못했던 김재규가 육본으로 간 것은 '나 잡아잡수' 하고 그대로 호랑이굴에 뛰어든 셈이었다. 이 때문에 김재규가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우발적으로 일을 저질렀다는 설이 적지 않은 지지를 얻고 있다. 이 당시 김재규가 매우 당황하고 행동을 서두른 증거 중의 하나로, 육본으로 차를 타고 오면서 그는 아예 신발도 신고 오지 못했다. 이 때문에 박흥주의 신발을 빌려 신었고, 박흥주는 차량 운전수의 신발을 가져다 신었다.
김재규 일행이 육본에 도착했을 당시 에피소드 중 하나. 정승화 참모총장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육군 본부의 초병은 "총장님? 어느 대학 총장님이십니까?" 하며 정승화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게 당시 정승화는 옷차림이 군복이 아닌 사복 정장이었고, 타고 온 차도 자신의 관용차량이 아니라 김재규의 차였다. 이후 다른 인원들이 정승화의 신분을 알아채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대통령 살해 사건이라는 중대한 상황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어서 10.26을 다루는 매체에선 이 에피소드 또한 넣는 편. 이 에피소드는 정승화의 회고록에도 나오는 실제 이야기이다.
육본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김재규는 박정희가 죽었다는 사실은 숨긴 채 "각하가 지금 유고 상태이다. 이 사실을 최소 48시간 동안 보안에 붙이고 빨리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 김일성이 알면 큰일난다" 라고 길길이 뛰었지만, 법무장관 김치열이 "이런 중대한 사태를 이유없이 48시간이나 보안으로 숨길 수 없다. 미국에도 이 사실은 알려야 한다" 며 반박했고, 뒤늦게 육본에 도착한 고향 선배인 부총리 신현확이 "밑도 끝도 없이 계엄령이 말이 되느냐. 어떻게 된 일인지 전말을 밝히라"며 버럭하는 통에 김재규는 깨갱한 채 버로우 해버렸다. 박정희의 면전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던 강직한 성격의 신현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현확이 육본에 도착하기 전, 다른 장관들은 김재규의 기세에 밀려 전전긍긍 하고 있던 상태였다.
한편, 박정희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김계원에 의해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실려갔고 주치의인 병원장 김병수 공군준장이 시체를 검안하는 과정에서 하복부의 피부병 자국에 의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보안사 참모장인 우국일 준장과의 통화 시에 옆에서 권총으로 위협하고 있던 안가 경비원 몰래 "코드 원이 돌아가셨다" 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에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을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가장 먼저 포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박정희를 병원에 안치하고 육본으로 온 김계원에 의해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이란 사실이 들통났고, 결국 김재규는 전두환의 보안사 수사요원에 의해 체포당하며 거사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더불어 박선호와 박흥주를 위시한 암살조도 그 다음날 전부 체포되어 김재규와 함께 보안사 분실로 연행되었다.
보안사 분실로 끌려온 김재규를 처음엔 군과의 밀약을 통한 쿠데타 시도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수사관들이 쉽사리 심문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전직 보안사령관 으로서의 전관예우로 다들 부장님 부장님 하며 쩔쩔맸다고 한다. 김재규를 체포하여 호송해온 수사관 신동기도 그전에 중정에서 실시한 보안사 수사요원 집체교육 때 우수요원으로 부장인 김재규에게 직접 표창을 받았던 지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시해가 김재규의 단독범행 임이 밝혀지면서 안면몰수 하고 강력하게 수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서는 김재규에 대해 바로 폭행과 고문을 동반한 심문에 돌입했다. 심문 도중 김재규는 수사관의 주먹에 맞아 눈 밑에 피멍이 들기도 했는데, 위 현장검증 사진을 보면 김재규의 오른쪽 눈 밑에 거무스름한 상처가 눈에 띈다. 그러므로 당시 김재규의 수사를 담당했던 이학봉이 "김재규를 고문하지 않았다" 라고 한 증언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재규의 탄원서에 의하면 군용 전화기 전선을 발가락에 묶어 전화기를 돌리는 전기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이 때 지병인 간경변으로 인해 간기능이 거의 마비된 김재규는 고문으로 인한 내출혈이 멎지 않으며 초죽음이 되었고, 당황한 보안사 수사관의 보고를 받은 전두환이 대통령 주치의이던 국군서울지구병원장 김병수 준장을 불러 김재규에게 응급치료를 하게 하였다.
계획적 거사인가? 우발적 살해인가?
전후 정황을 살펴볼 때, 적어도 김재규가 특정 인물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은 분명하다. 자신이 권총을 준비하고, 수행원들에게도 관련 지시를 내려둔 점, 선배이기도 한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사건 직후 "난 한다면 한다"고 말했던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다만 본래 김재규의 살해 계획은 박정희가 아닌 차지철만을 겨냥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건 직전 김재규가 김계원에게 "형님, 오늘 이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라고 말했던 바 있다. 여기서 '이 자식'은 차지철을 지칭한 것. 그러다가 사건 당일 박정희가 지나칠 정도로 차지철을 두둔하고, 김재규 자신을 질책하자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박정희에게 까지 총탄을 날린 것.
정리하자면 김재규에게는 차지철을 죽일 계획만 있었을 뿐, 박정희까지 겨냥한 '국가원수 암살'과 이후의 '신정부 수립'은 당초 계획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차지철을 죽인 것은 계획적이었지만, 박정희를 죽인 것은 우발적이었던 것. 이는 박정희, 차지철의 피살 이후 김재규가 저질렀던 일련의 치밀하지 못한 행동을 설명하는 데 충분한 배경 요인이 된다.
이 사건의 전말은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된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수사 보고에 의해 10월 28일 세간에 알려졌다. 그 후 재판을 통해 주모자인 김재규, 그리고 박선호와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안가 경비원으로 이날 피해자들에게 M16 소총으로 확인사살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 전원이 사형을 언도받고,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도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가 떨어졌으나, 그 이전 총살된 박흥주와 감형된 김계원(1982년 형집행 정지로 석방)을 제외한 5명은 1980년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중앙정보부장이였던 김재규와 박흥주대령의 현장 재현
김재규의 말대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총탄은 철옹성 같던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의 공백기를 잽싸게 파고든 자가 바로 전두환이었고, 그는 12.12 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최규하를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임을 알면서도 육본에 갔다는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허수아비로 만들었고, 계엄사령관 정승화 또한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란음모죄 라는 혐의를 씌워 체포해 버리면서, 결국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권력에 꼭지점에 서는 데 성공, 또다른 군사정권이 집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쿠데타 성공하는 과정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이다.
덧붙여, 이 사건의 목격자였던 심수봉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면서 무려 2년 동안이나 가수활동을 정지당해야 했고 신재순 또한, 더 이상 한국에서는 살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사건 현장인 궁정동 안가는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3년에 철거하여 시민공원인 무궁화동산으로 바뀌었다.
김재규 묘소
김재규는 아래와같은 말을 남겼다
저의 10월 26일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첫댓글 지난 독재의역사를 우리는 망각이라는 단어속에 잊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뷰끄럽고 치욕스런 군부독재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자존심과 자긍심마져 송구리채 무너져내린 민족의 암흑기였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민족정기로 밝은 조국의미래를 열어가야합니다.
이들은 국민들을 고통과 절망그리고 불안정국을조성하여 만중을탄압하고 독재장기집권을획책한 범죄자들이었습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총으로 정권을 탈취한자 총으로 망하는법이 만고불변의 역사의진리입니다.아직도 그잔재의 후손들이 마지막발악을하고있느모습이 처량합니다.
다녀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