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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신학기 준비 특강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말씀 / 요나서 3,4장
요절 / 요나서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신학기 준비 특강입니다. 니느웨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요나의 자세,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그 사랑을 전하는 새 봄학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요나서 3장은 1장에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주신 메시지와 동일한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3: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는 1장에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을 거절했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훈련받게 되었습니다. 말을 잘 안 들으면 혼도 내고 책망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람의 겉 행동은 바뀔지라도 사람의 내면까지 쉽사리 바뀌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발감을 더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포기하고 내버려두기 쉽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요나에게 두 번째도 동일한 명령을 통해 다시금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했던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은혜와 훈련으로 그를 다시 부르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두 번째 부르심에 이제는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첫 번째 부르심 때와는 다른 반응입니다. 이것은 물고기 뱃속에서 변화된 요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어느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 마음속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생각을 앞세우려는 고집과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던 과거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택하신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조금씩 변화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니느웨 백성들에게로 나아갑니다. 요나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상황이 좀 다릅니다. 3:4절을 읽겠습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성은 둘레가 대략 100km 정도로, 둘러보기만 해도 사흘이나 걸리는 큰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단 하루 동안만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게다가 그의 메시지는 단 다섯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이 말 속에는 회개하라는 촉구도 없었고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전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마치 “이제 너희는 끝났어!”라고 선언하는 것 같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이끌기보다는 그들에게 다가올 심판을 암시하는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그는 변화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몸은 억지 순종, 마음은 불순종, 이런 상태처럼 보입니다. 회개한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으로부터 100%의 회개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도 돌이키기는 해도 적당히 돌이키기, 회개하기는 해도 적당히 회개하기, 몸은 순종해도 마음은 냉랭하고, 몸은 순종하는데 뒤에서는 불평하기 쉽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순종으로 나아갑니다. 이런 요나의 모습이 삶 속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그러면 성의 없는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3:5-6절을 보십시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요나의 간절함 없는 외침에도 니느웨 백성들은 지금 어쩌고 있습니까? 니느웨 백성들뿐만 아니라 왕까지도 보좌에서 내려와 자신을 낮추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습니다. 그들은 요나가 전한 말씀을 듣고, 단순히 말로만 하는 회개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부터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회개를 한 것입니다. 마음에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온 것입니다. 이 모습은 요나의 대충 전하는 메시지와는 분명히 상반됩니다.
3:7-9절을 보면,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서 니느웨 백성들과 짐승, 그 누구도 먹지도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을 선포했습니다. 왕의 명령으로 인해 온 백성이 철저한 회개 운동이 이루어집니다.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이방 땅 니느웨 가운데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3:8b절을 보면,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강하고 포악스럽게 삶을 살아왔습니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죄악된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온전한 회개로 나아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예상하지 못했던 회개의 역사입니다. 대 부흥회에서나 있을법한 일인데, 요나가 마지못해 잠깐 하루 나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대” 한마디 했을 뿐인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요즘 우리에게도, 진주 캠퍼스 가운데도 이런 역사가 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번 경상대 바람쐬러 돌면서 잠시 말을 걸었을 뿐인데 그들이 회개하고 교회로 나아오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러면 정말이지, 목자 생활할 만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 캠퍼스 현실을 보면, 전도가 쉽지 않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를 바라볼 때는 어땠을까요? 물론 요나가 니느웨를 싫어하기도 했지만, 요나가 니느웨를 전도하려고 바라봤을지라도, 죄악과 강포가 가득해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전도해봤자,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 요나에게도 가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캠퍼스 영혼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을 전하고, 전도용품도 나누지만, 좀처럼 반응하지 않는 양들을 보면서 낙담이 됩니다. 복음을 전해도 안될 것이라는 실패의식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마지못해 하루 정도 짧은 한마디 던지며 다녔을 뿐인데, 그들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요나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게 하나님의 방식대로 전도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열심히 노력하니까 니느웨가 회개했습니까? 오늘 본문만큼은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의 이 같은 놀라운 회개의 역사는 요나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이었습니다. 물론 요나의 하루 동안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는 한마디도 필요했겠죠. 저는 여기서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의 역사가 누구의 공로인지를 논하기보다,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가지도록 요나를 인내하며 섬세하게 돕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인 판단을 앞세우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제 마음 가운데 전도가 잘 안된다는 실패의식이 자리잡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캠퍼스에 나가서도 얼굴이 어두워 보이니까 안될 것같고, 소원이 없어보이니까 안되고, 담배 태우는 학생들은 꺼려지고, 여친 남친 있는 학생들은 연애에 빠져 있을 것이기에 잘 안될 것같은 선입견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실패의식과 이래저래 안되는 이유만 싸여 갑니다. 이런 것들이 저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중심의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에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느 누구에게라도 열린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캠퍼스에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실패의식과 선입견들을 떨쳐버리고 어느 누구에게라도 힘써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니느웨 백성들의 진정한 회개 앞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릴 마음을 거두어들이셨습니다. 결정했던 것을 스스로 번복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신뢰와 위신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셨을까요? 니느웨 백성들을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정당하고 당연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들의 악행과 강포는 심판받아 마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자존심과 위신보다도 더욱 니느웨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아끼는 마음 때문에 당신의 뜻을 돌이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죄악되고 허물진 우리 인생들을 심판보다는 사랑으로, 재앙보다는 은혜로, 우리 죄를 감당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회개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던 니느웨 백성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셨고, 그들을 용서하셨고, 그들에게서 재앙을 거두어들이셨습니다.
니느웨의 변화 사건은 우리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캠퍼스 가운데도 일어날 수 있는 은혜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니느웨가 변화된 것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의 특별한 예일 뿐이지,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마지못한 순종을 통해서조차 변화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던 니느웨 사람들을 진정으로 돌이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심판보다는 사랑과 긍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진주의 대학 캠퍼스 영혼들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가 그 마음을 알고 순종해서 캠퍼스에 다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길 원하십니다. 요즘 캠퍼스를 보면, 복음 전하기가 정말 어려워 보입니다. 요즘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무신론, 인본주의, 물질주의가 팽배한 이 세상에서 과연 캠퍼스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니느웨 같은 캠퍼스 가운데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변화된, 또 변화될 청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확신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배워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긍휼하심 가운데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였고 그들은 재앙을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은 일 아닌가요? 그러나 요나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아무리 원수의 나라일지라도, 싫어하는 민족일지라도 이것은 선지자로서는 좀 그런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를 원했는데 아직은 아닌 모양입니다. 요나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이 상황을 싫어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4:2절을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그는 하나님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생각, 감정, 선입견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민족뿐만 아니라 개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와는 생각과 스타일, 성격, 취향도 완전 다릅니다. 이렇게 다르면 좋아지는 마음이 들기 쉽지 않습니다. 요나는 ‘나의 하나님(우리 민족의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하나님(다른 민족의 하나님, 특히 원수 나라의 하나님)’이신 것을 보니 울컥했습니다. 그는 나에게는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다른 사람, 특히 원수에게는 ‘심판의 하나님’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는 니느웨의 죄악은 알았지만, 자신의 죄악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머리로는 잘 알았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고, 사랑과 긍휼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도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캠퍼스 영혼들에게도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사랑 베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아직 이런 마음을 품지 못하고 코를 씩씩 불며, 니느웨 백성들과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고 하소연합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은 요나가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를 위해 박넝쿨 사건을 준비하셨습니다. 4:6-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더위로부터 가리게 하셨습니다. 니느웨는 낮 기온이 무려 45도까지 올라가는 뜨거운 곳입니다. 그곳은 먼지와 모래바람이 많아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 않은 환경이라고 합니다.
이런 뜨거운 날씨 속에서 요나는 어땠을까요? 숨 막히는 더위 때문에 짜증이 더해졌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30도만 넘어도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으면 덥고 땀나고 짜증이 나는데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예비해주셨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박넝쿨로 된 시원한 그늘을 만나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하나님은 다시 벌레를 시켜서 그 박넝쿨을 다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박넝쿨은 금새 시들어버렸습니다. 시원한 그늘이 사라진 요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아니나 다를까 요나의 18번이 또 터져 나옵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8).” 요나서를 보면, “죽는 게 낫다” “죽여 달라” 이런 말이 4번이나 나옵니다. 끈떡하면 죽는 게 낫다고 합니다. 일만 생기면 죽는 게 낫다고 합니다. 박넝쿨 그늘 없어졌다고 죽느니 사느니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나가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면서 죽는 게 낫다고 말하는 고질적인 태도를 보게 됩니다. 요나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생각에서밖에 바라볼 줄 모르고, 원망 불평이 가득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직도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말이 선지자이지, 선지자다운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요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런 요나의 고집과 자기 생각을 비롯한 연약함과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인내하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품게 하려는 크신 사랑으로 요나에게 다가가십니다.
4: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나님은 요나의 태도가 정말 옳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물으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요나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집도, 고집도, 이런 소고집이 없습니다. 생각이 완고합니다. ‘죽을지라도’라는 말이 또 나옵니다. 끈떡하면 ‘죽음’을 걸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그만큼 나의 자존심, 나의 생각, 나의 고집, 나의 위신 이런 것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사람이 그만큼 변화되는 게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요나는 여전히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니느웨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기는커녕, 자신의 성질 부리는 것을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요나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박넝쿨 사건을 통해 요나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도록 도우십니다.
10,11절을 함께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박넝쿨과 니느웨 사람들’을 대조하면서, 요나의 마음이 잘못되었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요나는 자신이 수고하거나 키우지도 않은 박넝쿨에 애착을 두고, 그것이 사라지자,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12만 명의 니느웨 백성들과, 또 가축들을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 역시 사랑과 긍휼의 대상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되고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을 버릴 수 없을 만큼 크고 깊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죄악으로 가득했던 니느웨도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아끼시는 하나님은 우리도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기에 합당한 존재였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거짓, 교만, 이기심, 위선, 시기, 질투, 정욕, 탐심 등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셔도 변명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끝까지 인내하시며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가 박넝쿨을 아꼈듯이 다른 영혼들도 아끼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도 과거 니느웨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모르고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 그늘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그 십자가 그늘 밑에 피하게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예수님의 십자가 그늘 밑에 나아오기만 하면, 어느 누구도 죄 사함을 받고 진정한 쉼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까지 하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를 아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 우리가 이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다시 한번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로서, 아는 자로서, 자기중심성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선을 캠퍼스와 우리 주변으로 넓혀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캠퍼스 영혼들, 우리 주위의 영혼들 또한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 또한 하나님은 아끼시고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영혼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늘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가 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목자님들을 통해 복음을 듣게 하시고 우리를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받고 알게 되었다면, 이제 우리가 다른 영혼들에게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악되고 강포했던 니느웨 백성들이 변화되었던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복음의 수용성이 현저히 낮아진 진주 캠퍼스도 분명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 다만 우리가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마음, 긍휼의 마음,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간절히 만나주기를 원하는 마음을 품고 주의 사랑을 깨닫고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나서는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을 맺습니다. 여러분! 요나는 과연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코를 씩씩 불며 고집을 부렸을까요? 죽는 게 더 낫다는 18번을 계속해서 불러댔을까요? 어디까지나 전승이지만 전승에 의하면, 요나는 결국 회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평생 니느웨 성읍의 목자요, 선지자로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아끼시고 회개하는 자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적극적으로 우리 주변과 캠퍼스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아끼시는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나의 생각과 고집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