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유리문 너머 구순 노모의 얼굴엔 희로애락의 감정이 파노라마처럼 교차한다. 당신의 분신, 피붙이들의 살 내음을 맡아보고 싶어, 얼굴을 유리창에 바짝 붙이신다. 얇디얇은 유리 벽이 철벽처럼 육중하게 느껴진다. 문 하나 사이로 모녀가 각기 다른 세상에 있으니 말이다. 5남매를 키우느라 일생을 전투병처럼 살아온 어머니가 어쩌다가 저 문 안에 갇히신 걸까?
어머니가 부산의 요양병원에 들어가신 지 어언 6개월이다. 가까이 사는 세 딸은 자주 면회를 오지만, 오늘은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멀리서 아들과 막내딸까지 왔다. 말 그대로, 5남매와 노모의 이산가족 상봉이다. 그런데 아직 코로나 사태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서 이렇게 유리 벽 너머로 얼굴을 보고 있다.
어릴 적에 내가 본 어머니는 전천후 앞으로 돌진하는 무적함대였다.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누워계셨지만, 5남매의 생존과 미래를 등에 진 여가장은 언제나 밝고 당당했다. 결코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은 철벽 문도, 어머니에겐 시간이 지나면 통과하게 될 하나의 여정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러니 어머니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어머니는‘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을 하늘처럼 믿고 따르며, 그걸 몸소 보여준 증인이다. 마음이 따뜻해서 항상 힘든 이웃을 챙기면서도, 목표를 향해선 물불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들의 삶의 멘토였다. 덕분에 흙수저로 태어난 우리 5남매 역시, 세상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배짱과 기개를 키우며 자랄 수 있었다.
문門은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다. 그러니 원하는 목적지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문을 통과해야 한다. 쉽게 열리는 문도 있고, 죽음 힘을 다해도 넘기 어려운 문턱도 있다.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넘는 문이 있고, 가슴 저리며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하는 문도 있다. 종교에선 사후死後에도 이승에서 행한 업보에 따라 천국 문과 지옥문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문은 공간과 공간을 구분하는 가리개이자, 바깥 세계를 차단하는 방어벽이다. 필시 산야에서 노숙하던 원시인들이 맨 처음 집을 짓고 문을 만들 때의 목적은 맹수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문이 인간의 기술문명이 발달할수록 더 견고하고 웅장하게 발달해 갔다. 게다가 인간은 자신들이 속한 조직과 단체를 관리하고 보호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문을 자꾸 만들어 나갔다. 단체의 위상을 드높인다는 명분으로 문으로 진입하는 문턱도 높아지고, 벽과 문의 두께도 경쟁적으로 가중되어 갔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이 만든 문 속에 스스로가 갇혀서 살아가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문은 인간사회에서 필요악必要惡이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긴 마라톤으로, 휴식과 달리기를 반복해야 한다. 휴식을 취할 때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방어벽과 가리개가 필요하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달려온 길을 돌아보며 기氣와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나의 문에 갇혀 있으면 더 이상 발전이 없다. 적당한 휴식 뒤엔 과감하게 그 문을 박차고 나와 다음 문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삶은 끊임없이 문을 여닫는 과정이다. 탯줄을 자르고 모체의 자궁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인간은‘가족’이란 사회의 문으로 들어간다. 그리곤 성장하면서 거미줄처럼 얽힌 수많은 문을 거쳐야 한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 학업의 문도 쉬지 않고 여닫아야 한다. 성인이 되면 자신의 미래를 담보할 취업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려야 하고, 직장에 들어가선 다시 승진의 문턱을 넘나들어야 한다. 그리곤 나이가 들어 문을 여닫는 힘조차 고갈되면, 세상의 뒤안길로 내몰려 마지막 죽음의 문을 기다리는 게 인생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한 생生은 문과의 전쟁인지도 모를 일이다. 닫힌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며 들어가려고 용을 쓰고, 때가 되면 그 문에서 쫓겨나와 또 다른 문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반복하니 말이다.
문의 기능은 닫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열기 위해서도 존재한다. 자신만의 안락을 위해 문고리를 자꾸 걸어 잠글 게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선 때때로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하는 이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태어날 때부터 불완전하게 창조되어 결코 혼자선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이다. 문을 연다는 건, 이웃을 위해 자신을 개방한다는 의미다. 아무리 잘 살아도 100년이다. 내 걸 고집하며 앙탈 부리고 살아도 언젠간 빈손, 맨몸으로 이승을 떠난다. 세상을 잘 사는 건, 자신의 정원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아름다운 꽃을 가꾸며, 이웃을 위해 작은 안락의자를 하나씩 만들어 놓는 게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세상과 벽을 치며 문을 걸어 잠그고 잠적하던 날이 있었다. 세상은 내가 똑똑해서 내 힘으로 돌리는 거라며 자만하고 으스대다가 무참히 무너진 때였다. 기氣와 에너지가 소진되어 나 스스로 일어설 힘도, 문을 열고 나갈 기력조차 없었다. 누에고치처럼 웅크리고 세월을 삭히고 있을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오거라!”라는 엄준하고 다정한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하늘의 소리인 듯 거역할 수 없는 그 목소리에 나는 다리를 끌며 일어나 다시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렇게 위대하던 나의 우상, 하늘 같은 어머니가 지금 내 눈앞에 저렇게 작고 왜소한 모습으로 앉아 계신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요양보호사의 손을 꼭 잡고 연신 눈웃음을 치신다. 정신이 온전치 않으니, 당신이 벽 안에 갇혀 스스로는 저 문을 열고 나올 수 없다는 사실도 모르시는 게다. 되레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가족처럼 잘해주셔서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우리더러 감사 인사를 드려라.’라고 하신다. 요양원 원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순간, 여기가 유치원이란 착각마저 든다.
어머니는 정말로 저 문을 열고 나올 힘이 없는 걸까? 아니면 자식들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일부러 짐짓 행복한 척 연기를 하고 계신 건 아닐까? 어쩜 어머니는 이승의 모든 벽을 다 허물고, 이미 천상의 문을 향해 들어가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요양보호사의 손을 잡고 노모가 서서히 안으로 사라진다. 어머니가 사라진 문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눈물로 투명한 유리 벽이 흔들리더니, 이내 아른거린다. 머지않아 내가 들어가야 할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