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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문화 온돌
철기 시대부터 사용해 온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 장치이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열기가 방바닥 아래의 빈 공간을 지나면서 구들장을 덥히고, 따뜻해진 구들장의 열기가 방 전체에 전달되는 과정을 통해 난방이 된다. 여기서 구들장은 방바닥 아래에 깔아두는 넓적한 돌을 가리킨다.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 장치인 온돌은 아궁이와 구들장, 부넘기, 방고래, 개자리, 연도, 굴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 방 한쪽에 구멍을 뚫어 만든 아궁이는 장작에 불을 붙여 열기를 만드는 곳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열기가 전달되어 방을 덥히게 된다.
② 아궁이에서 방고래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부넘기’를 만들었다. 이곳에 턱을 만들면 열기가 치우치지 않고 골고루 퍼지며 아궁이의 재가 방고래로 넘어가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③ 구들장 아래에 만들어 둔 공간을 ‘방고래’라고 한다. 아궁이에서 만들어진 열기가 머물며 구들장을 데우며, 연기는 이곳을 따라 연도와 굴뚝으로 나가게 된다.
④ 개자리는 열기가 방고래에 머물러 구들장에 잘 스며들게 하도록 만들어 놓은 고랑이다. 보통 온돌방의 윗목 쪽에 방고래보다 더 깊이 파둔다.
⑤ 연도는 연기가 빠져나가는 길을 뜻하는 말로, 방고래를 거쳐 온 연기가 굴뚝으로 잘 빠져나가도록 만든 공간이다.
⑥ 아궁이에서 장작을 땔 때 나온 연기는 방고래와 연도를 거쳐 굴뚝으로 나간다. 굴뚝은 보통 방 옆에 세우지만 연도를 길게 만들어 뒷마당에 세우기도 한다.
온돌은 중국에는 없는 한국의 전통적인 난방법이다. 온돌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중부 지방에 있는 철기 시대 초기의 집터 유적에서 구들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 시대에도 온돌을 사용했다. 고구려 살림집에는 온돌 시설이 있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고구려 초기의 집터 유적에서 온돌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고구려를 이어받은 발해에서도 온돌을 사용했으며, 백제와 신라의 여러 유적에서 구들의 흔적이 나왔다. 다만 백제와 신라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에 비해 난방 시설을 한 집이 많지 않았다.
고려 때는 온돌이 더 널리 보급되었다. 남부 지방의 일반 백성들도 집에 온돌을 설치하면서 보편적인 난방 방식이 되었다. 이후 온돌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옥의 주된 난방 방식으로 사용되다가 최근에는 보일러 시설로 대체되고 있다.
온돌은 과학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먼저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그 열기가 방 바닥에 깔아 놓은 구들장으로 전해지는데, 이것은 열의 전도 원리이다. 또한 데워진 구들장에서 나온 열기가 방 전체에 퍼지는 것은 열의 복사 현상이며, 방 안의 공기가 위아래로 순환되면서 훈훈해지는 것은 대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열의 전도와 복사, 대류 현상이 알맞게 조화되면서 추운 겨울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온돌은 열의 효율이 높고 위생적인 난방법이다. 또한 여간해서는 고장이 나지 않으며 잔손질이 별로 필요 없어 경제적이다. 다만 방바닥과 윗면의 온도차가 심하고, 방을 따듯하게 하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다. 또한 온도를 유지하려면 환기를 할 수 없어 방이 건조해지기 쉽다.
온돌의 역사
주거양식을 변화시킨 따듯하게 데운 돌
온돌은 따듯하게 데운 돌이란 뜻으로, 한국 고유의 난방 방식이다. 온돌을 빼고는 우리 역사 속 주거문화를 말할 수가 없다. 온돌과 그로 인한 우리 역사의 변화를 살펴보자.
온돌이란
온돌은 방바닥에 돌을 깔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돌(구들)을 달구어 방을 데워 난방하는 구조를 뜻한다. 온돌은 장갱(長坑), 화갱(火坑), 난돌(暖堗), 연돌(烟堗), 구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다가, 19세기 이후 온돌이란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온돌은 불을 때는 아궁이, 아궁이에서 나온 열을 전달받은 구들, 그리고 열기가 빨리 빠져 나가는 것을 막는 개자리, 연기가 통하는 연도, 그리고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으로 구성된다. 보통 뜨거운 열이 바로 전달되는 아랫목의 구들은 두껍게, 열이 늦게 전달되는 윗목의 구들은 얇은 돌을 놓기 마련이다. 방의 구들 밑으로 만든 고랑인 방고래에 불길과 연기가 잘 통하여 구들 전체에 고루 열을 전달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온돌은 꾸준히 개량되어, 최근에는 온돌 대신 온수 파이프를 묻어 바닥을 덥히는 방식으로 아파트의 난방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최초의 온돌은 쪽구들
최초의 온돌은 방안 전체를 난방하는 것이 아니라, 방의 일부분에만 구들을 놓고 난방하는 쪽구들이었다. 쪽구들을 처음 만든 사람들은 옥저인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4〜기원후 1세기 시기 연해주 남부의 크로우노프카 문화(옥저 문화)에서 이미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당시의 쪽구들은 1자 혹은 ㄱ자 형태다. 옥저인들이 쪽구들을 발명한 것은 추운 겨울을 효과적으로 보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주변의 말갈인들은 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주거지를 땅 깊이 파서 만들었다. 반면 농사를 짓고 정착생활을 한 옥저인들은 쪽구들을 만들어 땅을 깊이 파지 않고도 집을 지을 수 있었다.
동북아시아에 널리 퍼진 쪽구들
문헌상 온돌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서기 500년 초에 역도원(酈道元)이 쓴 [수경주(水經注)]에 포구수(鮑丘水)란 강물의 수원을 적은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계사(觀鷄寺)라는 절에는 큰 법당이 있는데, 방바닥을 돌로 고이고 돌 위를 흙칠하여 갱(坑)을 만들어 불을 지펴 방을 덥히는데 이 지방이 별나게 춥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온돌은 중국의 보편적인 난방구조는 아니었다. 관계사가 있던 지금의 베이징 인근 지역은 온돌문화의 서쪽한계라고 할 수 있다. 온돌은 발전시키고, 가장 널리 사용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구당서]에는 고구려에 온돌문화가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겨울에는 모두 기다란 구들(長坑)을 만들고 그 아래에서 불을 태워 따뜻한 열기로서 난방을 한다.”
고구려 초기 유적에 해당하는 환인시 오녀산성에서는 쪽구들을 설치한 주거지가 다수 발견된 바 있고, 씨름무덤(각저총) 벽화에서도 쪽구들로 난방을 한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 또한 집안시에 위치한 동대자 유적에서도 ‘ㄱ’자 형태의 쪽구들이 발견된 바 있다. 아울러 아차산의 고구려 군사유적지에서도 쪽구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쪽구들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난방문화로 알려져 있지만, 쪽구들을 사용한 흔적은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된다.
고조선 시대의 유적인 요령성 무순시 연화보 유적을 비롯해 북한 지역에 위치한 영변 세죽리 유적, 무산 호곡동 유적, 백제 지역인 파주 주월리 유적, 서울 풍납토성, 춘천 율문리 유적, 부여 쌍북리 유적, 여수 고락산성 유적에서도 쪽구들이 발견된 바 있다. 또한 경남 사천의 늑도 유적, 진주 평거동 유적, 함양 화산리 유적 등에서도발견되었다.
쪽구들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에서도 사용되어, 연해주 추카노프강 건너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온돌 쌍구들이 나왔으며,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궁궐 유적에서도 온돌이 발견된 바 있다. 심지어는 바이칼 호 근처의 이볼가 성지(城地), 버러 성지 등 흉노(匈奴)인이 남긴 유적지에서도 대거 발견되기도 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한 난방시설로 쪽구들이 동북아 지역에 널리 분포했던 것이다.
쪽구들에서 온돌방으로
삼국시대에 온돌은 방안의 일부에만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실내에는 의자, 좌상 등의 가구가 있었다. 사람들은 신발을 신고 방에 들어와 의자 등에 앉아서 일을 보는 입식생활을 했다. 실내에는 휘장이 쳐 있어 외부의 바람을 막았고, 온돌로 난방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실내에 화로나 아궁이를 들여왔다.
[신당서]의 ‘신라전’에는 “겨울에는 집 안에 부엌을 만든다.”고 하였다. 신라시대의 집에는 부엌이 방과 별개로 떨어져 있었으나, 겨울철에는 조리를 하기 위해 피우는 불의 열기를 실내의 난방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부엌이 방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 기록은 신라에서 쪽구들을 사용했다고 볼 수는 있어도, 방바닥 전체에 난방을 하는 온돌방은 아직 사용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시대로 접어들면, 쪽구들이 여러 줄의 고래가 있는 형태로 발전하며, 마침내 방 안 전체를 데우는 온돌방이 탄생했다. 고려시대의 문신 최자(崔滋:1188〜1260)가 남긴 [보한집(補閑集)]의 기록을 살펴보자.
“평안북도 구성(龜城) 지역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수행자가 추운 겨울에 방안 구들에 앉아 조금도 추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가 얼어 죽을까 염려해 그가 나가고 난 후 시동을 시켜 급히 나무를 때서 방을 데웠는데, 수행자가 돌아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돌을 주워 다가 아궁이를 메우고 회를 이겨 틈을 막아 버리고 들어가 앉아서 참선을 하였고, 처음처럼 방을 데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 기록은 13세기경에 아궁이가 방 밖으로 나가는 완벽한 형태의 온돌방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온돌방의 확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가 자주 들러 머물렀던 양주 회암사 에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구들시설이 발견된 바 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 온돌방이 널리 보급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 관청이나 부잣집에서만 볼 수 있을 정도였고, 병자나 노인의 방에 주로 설치되었다. 조선 초기 임금들 또한 온돌방에서 생활한 것이 아니었다.
1563년 2월 4일자 [명종실록]에는 이날 왕의 침실에서 화재가 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왕의 침실은 침상 아래에 으레 화기(火器)를 넣어서 따스하게 한다. 그 때 반드시 먼저 네모반듯한 벽돌을 침상 아래에 벌여놓은 다음 화기를 넣어야 하는데, 내관(內官)이 4일에 벽돌을 벌여놓지 않고 이글거리는 불을 넣고는 다시 살펴보지 아니하여 불꽃이 세어져 화기를 뚫고 침상의 판자에 닿아 불이 붙었다. 밤 이경에 이르러 불꽃과 연기가 치솟았으니 겨우 끌 수 있었다.”
위의 사료에서 알 수 있듯 임금의 침상은 침상 아래에 숯을 담은 화로를 넣어 덥히는 형태로, 온돌이 아니었다. 임금이 온돌방에서 생활하지 않았던 만큼, 궁궐 안에도 온돌방은 거의 없었다. 경복궁의 전각들은 마루방이었다가, 차츰 온돌방으로 개조된 것이었다. 1624년 영의정 이원익이 인조(仁祖)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이 전에 듣건대, 선조(先朝)의 나인(內人)들이 모두 말하기를 ‘사대부 집 종들도 온돌에 거처하는데 나인으로서 마루방에 거처해서야 되겠는가.’ 하므로 이로부터 대궐 안에 온돌이 많아졌다 하니, 마루방으로 바꾸면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원익의 말에 따르면, 궁녀들이 생활하는 방이 온도로 변화한 것은 16세기말 선조 시대부터였던 것이다.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와 서재 또한 본래 마루방이었다. 1417년에 병자를 위해 온돌방 하나를 설치했었고, 전체가 온돌방으로 바뀐 것은 1528년이 되어서였다.
온돌의 장점과 폐해
온돌은 방바닥을 고루 덥혀주기 때문에 습기가 차지 않고 화재에도 비교적 안전하다. 한번 뜨거워진 구들장은 오랫동안 방바닥을 따듯하게 해주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연기와 재 등이 방에 남지 않으므로 청결한 생활이 가능하며, 특별한 가구 없이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실내 공간 활용에도 장점이 있다. 따라서 과거의 많은 전통문화가 사라졌음에도 온돌만큼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온돌을 가장 이상적인 온방 시스템이라고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온돌이 빠르게 확산되지 못했던 것은 몇 가지 문제 때문이었다. 먼저 방안 전체에 열기가 고루 전달되도록 고래를 놓고 구들장을 만드는 것이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쉽게 전해지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방을 뜨겁게 가열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온도 조절이 어렵다는 점도 단점이 될 수 있다. 아울러 온돌방은 열효율이 30%에 불과해 열손실이 큰 난방시설인 만큼 많은 연료를 소비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성대중(成大中:1732∼1812)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온돌이 유행하게 된 것도 김자점(1623년 인조반정의 1등 공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옛날에는 방이 모두 마루여서 큰 병풍과 두꺼운 깔개로 한기와 습기를 막고 방 한두 칸만 온돌을 설치해서 노인이나 병자를 거처하게 하였다. 인조 때 도성의 네 산에 솔잎이 너무 쌓여 여러 차례 산불이 나서 임금이 근심하자, 김자점이 이에 오부(五部)의 집들에 명해 온돌을 설치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솔잎을 처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따뜻한 걸 좋아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명령을 따라 얼마 안 가서 온 나라가 이를 설치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 온돌의 폐해가 심하니, 젊은 사람들이 따뜻한 데 거처하면 근육도 뼈대도 약해지며, 습지나 산이 모두 민머리가 되어 버려 장작과 숯이 날이 갈수록 부족해지는데도 해결책이 없다.”
성대중의 말처럼 온돌은 많은 연료를 소비하게 되어 산에 나무가 고갈되게 만들었다. 땔나무가 부족해져 양반들조차 추위에 떠는 경우도 생겼다. 19세기말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들은 조선의 산에 나무가 없음을 신기하게 여길 정도였다.
기후 변동과 온돌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온돌이 전국적으로 급격하게 퍼진 것은 16〜17세기의 기후변화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는 전세계적으로 추위가 닥친 시대였다. 겨울의 기온이 급격하게 낮아져 화로와 휘장만으로는 추위를 감당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온돌이 널리 퍼져 보편화되었다. 이에 따라 온돌방을 만드는 기술도 함께 발전하면서, 17세기 말에는 온돌방이 주택의 중심이 되었다.
온돌방의 확산으로 인한 변화
온돌방의 확산은 주거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마루방이 감소한 것은 물론, 안방에 난방을 하기 위해 남쪽에 아궁이를 놓다보니, 안방이 어두워졌다. 아울러 아궁이를 이용해 취사를 하기 위해 부엌을 설계하다 보니 부엌이 방보다 낮아져, 주부의 생활 동선이 나빠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쓰이던 의자, 침상, 휘장 등이 퇴출되었다. 대신 온돌 바닥에 앉아 생활하기 쉽도록 문갑, 탁자 등 가구의 높이가 낮아졌다. 휘장의 퇴출은 섬유의 소비를 줄여, 여성들의 베짜기 일거리를 축소시키는 결과까지 낳았다. 성대중의 말처럼 활기차게 몸을 움직이며 돌아다니기 보다는 온돌방에 앉아서 생활하느라 사람들이 게을러지기도 했다. 또한 난방을 위해 산에서 나무를 베다 보니, 가뭄과 홍수에 취약해져 농업 생산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좌식생활은 조선 후기의 모습
쪽구들에서 온돌방으로의 변화는 우리나라 주(住) 생활사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크게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뜨듯한 아랫목에서 좌식생활을 하던 사람들과, 그 이전 시기 입식생활을 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은 많이 달랐던 것이다.
참고문헌 : 주남철, [온돌의 기원과 변천], [한국민속문화의 탐구], 국립민속박물관, 1996;류제헌, [중국역사지리], 문학과지성사, 1999;김용만,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바다출판사, 1999; 한국고문서학회 저,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역사비평사, 2006; 강인욱, [춤추는 발해인], 주류성, 2009; 서지은, 홍승재, [백제의 영역확장과 온돌 유적에 관하여],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한국건축역사학회, 2006;공복석, [경남 서부지역 삼국시대 수혈건물지의 구들 연구], [한국고고학보]66집, 2008.
한국사에서 20세기는 대단한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한국인들이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생활방식을 거의 버리고 서양식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집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예부터 한반도에 거주해 오면서 한번도 한국식 집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옥에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대부분 아파트와 같은 서양식 집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격변 속에서도 한국인들이 고집하는 오래된 관습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보게 될 온돌, 혹은 구들은 대표적인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과거의 좋은 관습 가운데 현대 문화를 사는 데에 거추장스러운 것이 있으면 가차 없이 버렸습니다. 한복을 버린 게 그런 예에 속합니다. 그러나 온돌은 어느 누구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은 아무리 초현대적인 아파트를 지어도 온돌에서 살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또 아무리 서양식 주거 형태를 좋아해도 신발을 신은 채로 생활하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온돌, 구운 돌로 바닥을 데운다
전통문화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한국인들이 온돌은 왜 버리지 않았을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온돌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온돌은 순수 우리말로 ‘구들’이라고 합니다. 구들은 ‘구운 돌’의 약자입니다. 그러니까 온돌은 구운 돌로 바닥을 데우는 온방법을 말합니다. 바닥을 데우는 게 왜 좋은 온방법일까요? 사람은 손발을 따뜻하게 하고 머리를 차갑게 하는 게 건강에 좋습니다. 온돌은 바로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온방법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집에서 신발 벗고 사는 것을 극히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신발을 벗는 게 건강에 좋다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발은 하루 종일 신발 안에서 옥죄여 있어서 집에 오면 풀어주는 게 좋습니다. 한국인들이 집에서 신발을 벗을 수 있는 것은 바닥이 따뜻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아울러 온돌이 대단히 경제적인 온방법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서양의 벽난로는 전 열량 가운데 약 5분의 1만 방 안으로 전달된다고 하니 아주 비경제적입니다. 이에 비해 온돌은 열량을 구들에 저축해 오랫동안 열을 뿜어내게 할 수 있습니다. 구들만 잘 깔면 열이 며칠을 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게다가 벽난로는 연기가 방안으로 들어와 방안의 공기를 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돌은 그럴 염려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온돌은 방을 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밥 같은 음식을 조리하는 것도 가능하게 하는 등 요리와 온방을 동시에 하니 일석이조입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과학적인 난방법
그럼 온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이렇게 훌륭한 온방법이라고 하는 걸까요? 원래 온돌은 방 전체를 데우는 온방법이 아니라 부분만 데우는 ‘쪽구들식 온방법’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구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보이지요. 그러다 고려 중기가 되어서야 방 전체를 데우는 방식이 나옵니다. 이 온방법이 한반도 전역에 퍼지게 된 것은 조선 초기, 그러니까 15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합니다. 온돌은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거쳐 발달해왔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나름대로 과학적이고 복잡한 구조를 갖게 됩니다.
온돌의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뜨거운 연기가 지나는 (구들)고래입니다. 구들은 이 고래 위에 놓는 것이지요. 불과 뜨거운 연기는 아궁이에서 ‘부넹기’라는 구멍을 통해 고래 쪽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부넹기는 부넘기 혹은 불목이라고도 하는데, 불이 넘어가는 고개 혹은 목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이 구멍은 작기 때문에 열기가 바깥으로 새지 않고 고래로 잘 빨려 들어가게 해줍니다. 열기가 그 다음에 도달하는 곳은 ‘구들개자리’입니다. 이곳에서 열기는 속도가 늦추어지고 고래로 균등하게 공급됩니다. 이 고래에서 구들이 데워지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이 고래 전체에 골고루 가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고래와 구들장을 제대로 놓아야 하는데 온돌을 만들 때에는 이 기술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아랫목에는 두꺼운 돌을 놓고 윗목에는 그보다 얇은 돌을 놓습니다. 윗목은 아무래도 열이 덜 가기 때문에 빨리 달구려면 돌이 얇아야 합니다.
온돌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과학적 장치
고래에서 뜨거운 열기가 굴뚝으로 빨리 빠져 나가면 열의 손실이 심하겠죠? 그래서 고래가 끝나는 부분에 ‘고래개자리’를 만듭니다. 여러 개의 고래를 통과한 뜨거운 공기가 여기서 다시 모아집니다.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숨을 고른 다음 열기는 이곳에 남게 하고 연기만 굴뚝으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고래개자리입니다. 마지막까지 열기를 잡아 방을 더 데울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온돌이 효율적이라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고래개자리를 떠난 연기는 굴뚝으로 갑니다. 연기는 이 굴뚝으로 나가기 전에 그 밑에 있는 ‘굴뚝개자리’를 만납니다. 이것은 찬 공기나 빗물이 굴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 온돌에는 개자리만 3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들개자리, 고래개자리, 굴뚝개자리가 그것이지요. 이것들은 모두 온돌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과학적인 생각 끝에 만들어낸 장치입니다.
구들을 잘 깐 다음에는 그 위에 연기가 위로 새지 않게 황토 진흙을 바릅니다. 황토는 인체에 아주 좋은 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전에는 배탈이 나면 황토를 물에 타서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황토는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도 막아줍니다. 이렇게 진흙을 두 번 정도 바른 뒤 잘 고른 다음에 불을 지펴서 말립니다. 그리고 이 위에 사람이 생활할 수 있게 종이나 장판을 까는 것이지요. 사실 고래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원리는 다 같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온돌에는 이러한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온돌은 일단 구들이 데워지면 열기가 오래 가지만 구들을 데우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런가 하면 구들을 잘못 깔면 아랫목만 뜨겁고 윗목은 차가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웃풍’이 세져 춥게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무의 과소비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전력 에너지가 발달한 요즘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온돌이 좋다는 것은 이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온돌 난방법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말로는 좋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파트에서 항용하는 바닥 난방법은 정확히 말하면 온돌 난방법은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바닥 난방으로 구들을 놓고 열을 저장해서 오랫동안 열기를 뿜어내는 온돌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온돌 난방법에 대해 말로만 좋다고 했지 그다지 발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우리가 온돌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이나 서구에서는 온돌의 효용성을 눈치 채고 온돌에 기반을 둔 새로운 난방법을 개발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이런 새 기술을 역수입해서 쓰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앞으로 온돌 혹은 구들의 종주국답게 우리의 온방법인 온돌을 현대에 맞게 발전시키는 일에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