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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영원한 신라인 윤경렬
윤경렬 평생 이야기
<호떡 사건>
나는 어릴 때 내성적이라 싸우면 얻어맞고 울며 집에 오는 아이였다. 서당으로 가는 길 옆에 농가가 하나 있었는데 여러 마리 개가 언제나 무서웠다. 사실 개보다 더 무서운 것이 그 집 사내아이였다. 굴렁쇠를 굴리면서 놀다가 나를 보면 공연히 트집을 잡아 굴렁대로 두들기고 가갔다. 그 집은 과수원집이라 때때로 인부를 고용했다. 한때는 중국인들을 고용했는데 거기 갔더니 밀가루 호떡을 주었다. 그 자리에서 먹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아까워 학교에 가지고 갔다. 주먹이 센 학생이 호떡을 빼앗아가니 그 다음 주먹 센 학생이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냐며 위협하여 내일 갖다 주마고 했다. 저녁 때 다시 사랑채로 갔으나 중국인들이 또다시 호떡을 주지 않아 다음날 빈손으로 학교 갔더니 약속 안 지킨다며 눈을 부라렸다. 내일 2개. 3개로 불어나서 10개로 불어 학교 갈 용기가 없어 다음 날 책보를 싸가지고 학교 뒤 산에서 꽃을 따며 놀다가 학교 파할 무렵 먼저 집에 와서 학교 다녀온 것처럼 부모님을 속였다.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결국 선생님이 집으로 와서 추궁을 받았다. 눈물 흘리며 호떡 이야기를 했더니 선생님이 웃으며 “못난 놈 같으니, 내일부터 학교에 오너라.” 하고 가셨다. 내성적 성격을 잘 아는 어머니는 이튿날, 학교 가는 큰길까지 배웅 나와서 종이 꾸러미를 주며 “사람이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 이속에 호떡 50개가 들어 있으니 약속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이제부터 지키지 못할 약속은 죽어도 하지 말아라.‘ 당부하셨다. 새알 같은 호떡을 2개씩 먹고 난 아이들은 이후로는 다시 괴롭히지 않았다. 아마 선생님의 꾸중을 들은 모양이었다.
<꼬마 이야기꾼>
공부 마치고 돌아올 때 배가 고파 1전짜리 동전이라도 떨어진 게 없나하고 땅바닥을 살피곤 하다가 길바닥에 1전짜리 동전을 그려놓기도 했다. 중국인 채소밭에서 오이 한 개를 훔쳐 먹었는데 그 옆을 지나다니며 붙잡히지 않으려고 두려움에 떨며 다녔다.하교하면서 하급생들에게 <어린이> 지에서 읽은 이야기르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나머지 이야기는 학교를 파하고 돌아가는 길에 들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부터 아이들은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학교에 갔다. 내가 청소 당번인 날에는 청소도 같이 도와주었다. 어떤 아이는 자기 집을 지나치면서까지 이야기를 다 듣고 되돌아갔다. 소눔이 나자 상급생들도 따라오며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놀림도 덜 받게 되어 더욱 열심히 동화책을 읽었다. 나는 쌀 한 말 값에 해당하는 동화책 값을 만들기위해 새끼를 꼬아 팔거나 장에서 도토리나무를 얇게 저민 띠를 사다가 과일주머니르 엮어 팔기도 아ᅟᅧᆻ다. 모아서 하본 책이 방정환 선생의 <사랑의 서물> 고정환 선생의 <세계 명작 동화집> 일본어로 쓰여진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 말로의 <집 없는 천사> 등이었다.
<형님의 유성기> 형님이 돌아가시자 내가 갖고 싶다고 해서 물려받은 후 6.25 동란으로 이산가족이 되어 지금껏 끌고 다닌다. 전쟁 중에도 신주단지처럼 끌고 다녀 고물이 됐지만 소리 내는 데는 지장이 없어 150여 장 음반과 함께 통일이 되면 충렬 형님 큰딸 정희를 찾아 물려줘야 한다느 사명감으로 정성껏 닦아 끌고 다니고 있다. 한 판에 한곡씩 둘어있어 엣 판을 올려놓고 곡마다 새 바늘을 끼워 손잡아를 돌려 가며 태엽을 감는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지난 세월이 직직거려 콧등이 시큰해온다 형님, 어머니, 누님, 동생들, 아내의 얼굴이 유성기판 노랫가락마다 따라나와 웃다가 가곤 한다.
<처음 본 태극기>
1929년 전남 광주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2월쯤이리라. 상급학생이 내일 만세를 부른다고 일러주었다. 아침에 ‘오늘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만세를 부른답니다.’ 했더니 어머니가 ‘그러면 기다려라.’ 하더니 기다란 노끈 두 줄을 주며 “신이 벗겨지면 뛸 수 없으니 이 노끈으로 신발을 단단히 동여매고 열심히 싸워라. 비겁해서는 안 된다.”하셨다. 또 발랫방망이도 챙겨줬다. 농촌 아낙네가 어디서 그러너 용기가 나서 검쟁이 나르 그렇게 격려해주셨을까 두루마기 속에 방망이를 감추고 학교 부근에 도착하니 경찰들이 새까맣게 학교를 둘러샀다. 틀렸구나 싶어 방망이는 던져버리고 노끈은 바짓가라이 속으로 집어 넣엏다. 학교에 다다르니 책보를 일일이 풀어 검사하며 혐으 없는 사람만 통과시켰다. 나도 통과되었다. 우리는 일체 밖으로 나가지 몫했다. 하교 뒤에 묻어 두었던 태극기 수백 장과 유인물 천여 장이 다 발각됭ㅆ고 지난 밤 사이 배후 사상가들까지 조다 붙잡혀 간 것이다. 실패하고 겨울 방학 지나 개학한 2월 초순 눈싸울을 하는데 보통 때와 달랐다. 동쪽 서쪽 편 갈라 눈싸움을 하는데 그날 "조선 독립 만세. 광주 학생 석방하라 조선독립만세!‘ 등의 구호가 적힌 유니물이 보엿고 태극기를 처음 보았다. 교문은 무장 경찰이 에워싸고 쫓긴느 핫생들은 장바닥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그냥 밟고 지났고 달걀장수 아주머니는 며칠을 굶었을 것이다. 아주머니 들은 학생들을 응원해주고 숨겨 주었다. 우리 민족이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 있구나 그때 나는 처음 민족을 생각하게 되었다.
<꿀 장사>
보통학교을 졸업한 나는 러시아 촌으로 꿀을 팔러 단야했다. 우리집 과수원에서 나는 꿀을 러시아 촌에서 보내 달라 했기 때문이다. 15리 길ㅇ르 걸어 촌으로 가면 늑대만한 호견들이 40~50 마리나 았었는데 마을에 들어서면 코를 씰룩거리며 으러렁거리는 통에 오금이 저렸다. 가만히 앚아 기다리면 주인이 나와서 꿀값을 치러주면 한숨을 돌리도 돌아왔다. 러시아 촌에 가면 여자들이 풍금을 타면서 노랠ㄹ 불렀는데 합창하는 모습이 다정하고 활달해서 일본 사람들을 잘 살아도 저렇게 멋있게 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내가 6.25 동란 시절에 풍금을 사서 노래 부르고 지냈ㄷ건 것도 꿀장사 시절 러시아 촌에서 받은 영향이리라.
<서당 선생이 되어>
보통학교 졸업 후 목욕탕 청ㅇ소를 하러 갔다가 장부를 적으라 했지만 원래 계산에 둔하고, 정거장에 나가 손님을 글어올 수도 없자 쫓겨났다. 아버지는 “네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일도 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했다. 그 다음 제지 공장에 다니며 인부 감독을 하는데 감독이 아니라 심부름꾼처럼 지냈다. 어느 날은 달구지에 나무 싣고 장터 가다가 같이 공부하던 처녀들ㅇㄹ 보고 부끄러웠다. 그러다 어릴 때 다니던 오중서당에서 저학년 학생 가르칠 서당 선생이 도이어달라 해서 그곳에 갔가. 싸리나무 씨를 모아 팔아 조그만 풍금도 샀다. 산골아이들과 풍금에 맞춰 노래 부름이 큰 기쁨이었다.
<다미 여사의 장인 정신>
커다란 흑덩어리는 그래도 구울 수 ㅇ벗듯이 인형을 만들 때도 흙 속에 있는 가스가 발산핮디 못해 흙덩어리를 깨뜨리고 아오게 되면 작품은 폭발한다. 그래서 가스가 조금?씩 발산 할 수 잇도록 톱밥을 섞는다 톱밥이 타념서 작은 구멍이 생겨 가스가 증발할 수 있게 된다. 형체가 만들어지면 그늘에 말려야 두?거운 흙덩어리라서 말리는 일도 조심스럽다. 하루 몇ㅇ 번이고 방향을 바꾸어놓아야 한다. 마른다는 것은 수분이 증발되는 것으로 수분이 증발되면 그 수분랼만큼 부피가 줄어드는 것이다. 수분이 천체적으로 줄어들어야지 어느 한 부분만 부치가 줄면 그곳에 금이 가기 때문에 전체를 잘 말리는 것이 중요. 그 작품을 밖에 내놓고 방향을 바꾸고 들여놓은 일이 내 책임인데, 어느 날 작품이 세 토막으로 깨져버렸다 두달이나 걸려 만든 작품이었는데. 선생 다미 여사가 불경 외는 조시라 들렸다. 그후 다미 여사 음서은 조용했다.
“이번 일은 두 달 걸린 일인데 2년, 3년 걸린 일이 이렇게 됐다면 어쩌겠는가? 그러기에 만일에 대비하여 널빤지에 받치라 한 것이다. 그 말- 불 붙은 나무에는 새가 둥지를 틀지 못하는 것처럼 화가 났을 때 하는 말은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한 걸음 물러섰다가 대화하라. 수양으로 쌓인 다미 여사의 인품가 자세에 존경심이 더해갔다.
※ 반역의 야심을 품은 이성계는 개성의 뒷문으로 들어와 고려 왕조를 무너뜨렸다. 그래서 개성 사람들은 북쪽 문을 내지 않고, 정월 초하루에는 이성계의 목을 조르는 시늉으로 만든 조랭이떡국을 먹는다고 했다.
※조선인이 흰옥을 입는 이유
오지호 선생의 말씀
일본은 섬나라라 태양 광선이 순도 높게 바칠 수 없어 일본에서는 중간색이 어울리고, 중국은 대륙이니까 인력이 강하여 주위 환경에 있는 티끌을 모은 입장이니 청색과 어울리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이나 일본과 비슷하지만 대륙에 인접한 반도라 바다에서 증발된 수증기와 티끌들이 대륙의 인력으로 중국에 흡수되어 하늘이 맑은 거야. 태양 광선이 순도 높게 반사되니 흰옷을 입는 거야. “저뿌연 수중기 속에 사는 일본 놈이 이 맑은 공기 속에 사는 우리 그림을 심사해? 저놈들이 심사하는 한 우리 그림이 우리 그림답게 되지 못할걸세.”
‘아름다움에도 국경이 있구나. 우리 아름다움은 우리 하늘에서 찾고, 우리 기후와 우리 강산에서 찾아야 하고, 우리 생활에서 찾아야 하는구나. ’
비로소 막혔던 마음이 열리는 것 같았다.
※ 목조는 예리한 칼로 깡아야 하고, 석조는 단단한 끌로 직어내야 하는데, 흙은 피가 도는 손가락으로 직접 만드는 것이다. 그 때문에 토우에서는 따뜻한 촉감을 느낄 수 있다. 신라시대 토우가 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하는 것은 그런 힘 때문이다.
조흥 토우가 나생산되려면 그 고장에서 좋은 재료가 나와야 한다. 경주는 신라 때부터 많은 토기와 기와가 만들어졌지만 아직도 땅 밑에 찰흙이 풍부하다. 그런 면에서 경주는 행복한 곳이다. 만드는 방법은 모래 섞인 흙으로 빗어서 굽는 것과 흙을 물에 푼 다음 체에 받쳐 갈아 앉은 고운 앙금 같은 흙으로 만드는데 모래 섞인 흙으로 빚은 것응 투박하면서도 구수한 것들이다. 앙금 같은 흙은 섬세한 작품 만드는데 쓰인다. 성형이 끝나면 반드시 그늘에 말려 가마에 굽1는데 처음에는 불기운을 약하게, 점점 온도를 높여야 한다,. 약 5~6시간 불을 피우면 600~700도까지 올라가나 이때 불을 끄는 것이 좋다. 이럭게 구운 것을 초벌구이라 하는데 구워진 작품 위에 채색을 입혀도 좋고 그냥 그대로 둬도 좋다.
머리 없는 부처가 있는 곳은 심수골이라 하는데, 바위 구멍에서 물이 많이 나와서 상당히 넓은 논밭이 있다고 했다. 탑이 허물어진 곳에는 얼마 전까지 양조암이라는 암자가 있어 앙조암골이라 부른다.
펄벅여사가 성덕대왕신 종의비천상을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사라 하며 미소 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국 말로 제일 좋은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데. 두 손을 마주대고 앞에 든 것을 ‘한아름’이라 하니 아름답다‘는 결함 없이 둘글다는 뜻이다. 즉 원만하다는 말인데 우리나라가 기와집의 추녀선이라든가 장독이나 김칫독의 윤곽선을 길게 연장하여 그어보면 아름답지 않은 게 없다.
※ 6.25 동란 때 상원사 절이 남아 있는 이유:
당시 상원사에 법명이 송경(고향 개성(송경)이 그리워 고향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 방한암 스님이 계셨다. 국군이 후퇴하여 남으로 내려오면서 적이 이용할만한 모든 것을 불태웠다. 월정사도 1.4 후퇴 당시 작전상의 이유로 10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는데, 그때 월정사에는 셋밖에 없는 신라 종이 있었다. 땅에 묻지 않고 같이 태워버렸으니 안타깝다. 월정사에 불 지른 군인들은 상원사 방한암 스님께 절에 불을 놓을 터니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스님은 태연히 앉아 ‘당신들도 상관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상관이 있소. 우리 상관은 부처님이오, 부처님을 두고 어딜 가란 말이오. 원래 중은 죽으면 화장하는 법이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 죽어 불에 타면 간단하지 않소.“
하자, 군인들은 “내일은 불지를 테니 비워주시오,”하고 가서 다음 날 와서 보니 스님이 앉은 채로 입적하셨다. 무지한 군인들도 스님의 지극한 불심 앞에 차마 불지르지 못하고 문 두 짝만 태우고 돌아가 상원사를 태웠다고 보고해 지금까지 상원사가 남아 있다.
※경주 남산의 부처들
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대개 몸체는 바위에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석굴암의 본존 부처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주위 보살상, 나한상 들은 본존보다 작게 조성했다. 현대인들은 그런데도 석굴암 입구에 어울리지 않는 목조 기와집으로 현관을 만들었다. 석조미술에 목조가 방해된다는 점과 단청의 화려한 색깔은 조각품의 아름다움에 해가 될 거라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 석굴암 감실 불상 옛 사람들은 동짓날을 두렵게 생각했다. 낮이 자꾸 짧아지자 낮이 없는 밤만의 세상이 올까봐. 그런데 동짓날부터 다시 낮이 점점 길어져서 세상이 순환되어 설날보다 동짓날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일본에는 동짓날 해 뜨는 방향의 신사가 많다. 그곳 지명은 대개 도키(한국 말로 도지,돋이)라 생각된다. 일본 서 온 하세가에게 신라 때 해신 연오랑과 달신 달신 세오녀가 일본으로 가버린 후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어우워진 일이 있다고 삼국유사에 전합니다. 설화를 들려주었다. 놀란 신라 왕은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 세오녀가 짠 비단을 가져다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되찾았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은 하늘ㅇ에 재사 지내는 곳을 ‘도지들’ 이라 했는데 한문으로 표기하면 ‘도기야’가 된다.
※ 인왕산 동남산 부처골 감실불상(보물 198호)은 늘 얼굴이 어둡다. 동짓날 해 뜰때는 밟지 않을 가 싶어 어두운 산길을 걸어 부처골로 가 나침반을 놓아보니 정남에서 30도 동쪽으로 향해 앉아 있었다. 아침 해 가 솟아오라면서 부처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자 시골 마음씨 좋은 할머니를 닮은 듯 감실불상 얼굴에 미소가 어려 화사한 모습이었다. 지금은 감실불상 앞에 솔숲이 가로막아 동짓날도 부처님 얼굴이 밝아지지 않는다.
※ 석굴암에 대한 새로운 이해-불국사에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습니다.
다보탑은 화려하고 석가탑은 소박합니다. 이 두 탑은 둘이 하나입니다. 다보탑은 눈에 보이는 물질의 아름다움이요. 석가탑은 하늘 위의 꿈을 지상에 펼쳐놓은 느낌입니다.
다보탑은 눈에 보이는 물질의 아름다움이고 석가탑은 마음에 비치는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으로 두 탑이 균형을 이룹니다. 고유섭 선생은 다보탑은 지상의 꿈을 하늘에 전하는 느낌. 석가탑은 하늘 위의 꿈을 지상에 펼쳐놓은 느낌이라 했어요. 다보탑은 사방에 계단을 가설한 사각 기단 위에 쌓은 3층탑이다. 3층은 둥근 연꽃 누각으로 솟아 인간들이 도를 닦아 부처님 세계에 이른 과정의 형상이다. 석가탑은 석가 여래가 이 탑 속에 영원히 진리를 설법하고.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 증명탑이니 다보여래가 어려운 석가여래의 설법을 증명하고 있다는 뜻으로 세운 두 탑이다. 석가탑의 기단 둘레에 여덟 개 연꽃 방석은 하늘에서 비천들이 내려와 음악을 연주, 향 올리는 자리다.
무량수전에 의하면 지성으로 부처님을 믿은 사람은 극락세계 앞에 있는 구품연못의 연꽃 봉오리 속에 영혼이 잉태된다고 한다. 꽃봉오리가 피면 영혼은 극락 사람으로 태어나 발을 옮길 때마다 연꽃이 솟아나와 발을 받쳐주니 그것을 연화교라 하고 금,은, 유리, 산호, 호박, 마노 등의 보배로 된 일곱 개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다리들을 칠보교라 한다. 칠보교를 건너면 안양문, 안양문은 극락 세계정문으로 안양문을 지나 극락전에 들면 극락의 아미타 부처님을 뵙는다.
설명을 들은 청년이 “신라는 백제 문화를 말살하지 않았습니까?”
했다.
“통일신라의 문하는 백제문화의 연장입니다. 석굴ㅇ마 조각을 보면 남차처럼 엄격하면서도 여자처럼 부드럽습니다. 부드러운 건 백제 요소이고 엄격한 건 고구려 요소입니다. 신라인들은 그런 요소들을 합쳐 젖체적을 짜임세 있게 구성했으니 삼국 문화가 조화된 것입니다 또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은 백제 아사달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사는 순 한국어입니다. 현진건은 <무영탑>에서 백제 사람으로 썼습니다. 미적 감각으로 보아 백제인이 적절하다. 이처럼 통일 신라 문화에는 단순히 신라만이 아닌 삼국 요소가 함께 녹아 있다.
“신라는 이민족인 당나라를 끌여들여 같은 민족인 백제를 멸망시켯지 않습니까?”
“백제가 멸망했습니까? 660년에 막을 내린 것은 온조 왕조이지 백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권력이 바뀌었다고 민족이 멸망한다면 지금 지구상에 남아 있을 민족이 있겠습니까? 935년 신라가 막을 내린 다음 고려시대, 고려청자가 신라를 이어벋았습니까 백제를 이어받았습니까? 고려청자는 백제 뭄화의 연장이비다. 고려 시대 탑을 봐도 백제 시대 연장입니다.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숨쉬고 있는데 권력이 바뀐 것으로 민족이 멸망했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 소쇄원은 개울이 있으면 다리를 놓고, 사색할 함난 자리이면 정자를 짓고 오직 자연을 따라 만든 정원이었다. 여인들의 공간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담을 쌓아 토담이되었다. 언덕이면 언덕을 따라, 계곡이면 계곡을 따라 담은 자연스러이 이쪽과 저쪽을 차단하였고 계곡 물은 그 담 밈츠로 난 물길을 따라 흘렀다. 조금도 으스대지 않는 자연스러운 정원이었다.
상감청자 술병은 몸통이 동그랗고 목이 기름하니 가늘게 빠져 살짝 휘었고 몸통과 목을 연결하는 부위가 대마디처럼 볼록해서 맑은 숲속 계곡물이 문득 만난 바위샘 위로 떨어지며 내는 듯한 ‘꼴꼴꼴’ 맑은 소리가 났다.
어머님께- 오늘 경주신문에서 고향에 보내는 표지를 쓰라기에 그리웁던 어머님 전에 편지를 띄웁니다. 살아서 길이 열리지 않으면 죽어서 혼이라도 땅 속으로 헤매며 찾아갈 것입니다 .(4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