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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나무는 바람이 많고
돌무더기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깟년이가 오지
않았다.
최사장은 애가 탔다.
기다리는 것이 이렇게 애간장타고 지루한 줄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알았다.
건너편 섬 산마루에 해가 걸리도록 최사장은
기다렸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얘. 머하는 거이여? 집에 가서 안자고? 그러다
감기든당께.”
깟년이의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난 최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깟년이를 와락 껴안았다.
“무섭소. 가연이누나!”
“오메, 아즉 대낮인디 귀신나올까봐
그라냐?”
“혼장께 그라재.”
“이제 됐다. 이손 빼라.”
더 오래도록 깟년이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최사장이 물었다.
“와 그리 늦었소?”
“거머리 같은 알라들 땜시
늦어뿌렀다.”
“와? 언제? 어디서? 거머리가 누군디? 누야가
벌써 얼라 낳았소?”
“야가 무신소리하는거이여? 얼라는 혼자 낳는
얼라가 어딧냐?”
“누님이 시방 안그랬소?
얼라들땜시라고라.”
“너거 친구들말이여. 고곳들이 자꾸만 점기 행방을
자초지종실토하라는디 내 힘 다 뺐다.”
“흐미, 본인 간이 다
증발해뿐졌소.”
“와? 간이 물이가
증발하게?”
“가연이 누나 기다린다고
쫄았재.”
깟년이 방그레 웃으며 시무룩한 최사장 손 한번
잡아 주자 최사장은 로또3등에 당첨된 놈처럼 흐물거렸다.
그날은 공기놀이는 불가능했다.
잔 햇살이 아직 바다에 남아 있었지만 큰
나무아래의 돌무더기는 벌써 어둑해지기 시작해서 깟년이의 치마 속을 들여다 봤자 사물이 분명하지 않을 것 같아 공기놀이를 포기한 것이다. 최사장이
먼저 돌무더기에 걸터앉았다.
공기놀이 개발한 이후 깟년이와 나란히 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뒤따라 깟년이가 최사장의 옆 빈자리에 앉자, 맞은편 섬 산꼭대기에 걸렸던 해가 깜빡하더니 온천지가 금세 노을로 붉게
물들었다.
깟년이의 치마 속을 관찰하지 못해 서운했지만 함께
나란히 앉는 것도 또 다른 기분이었다. 허지만 왠지 어색했다.
최사장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먼저
말했다.
“낼 송충이 잡아 오라
안하요”
“너거집에서는 송충이도
먹는디야?”
“흐미, 우리선생님이 잡아
오라안하요.”
“너그 선생님이 새새끼 키우냐? 몇 마리나
키우냐? 다 키우면 한 마리 줄랑가?”
“흐미, 대가리 까지겄소. 누나랑게 위찌 그리
공짜에 혼잡스럽소?”
“섬사람은 머이든지 다 내거니꺼 없는거이여. 근디
워쩐디야?”
“걱정마소, 다 생각이
있응께.”
“오메, 알았다. 낼 학교
안갈라카재?”
“와따. 누나랑게 무신 말을
그리한다요?”
“종아리 맞을거인디? 걱정되서
하는말이재.”
깟년이의 걱정에 최사장은 히히거리며 웃었다. 웃고
나서 다부지게 말했다.
“우미, 맞긴 왜 맞소? 인간이 생활하면서
머리통박을 잘굴리면 되는디.”
“어떠코롬 굴리는디?”
“선생님 오기 전에 한 마리씩 쌔비면 되지라.
십시일반十匙一飯잉께.”
“오메, 니 머리 참
좋네잉.”
“본인 머리만 좋으면 뭐한다요? 근본이
나쁜디.”
“아니어야. 내 보기에 점기는 야무지고 영특하고
단단하고 인정 많고 머하나 빠지는거이 없어야.”
“키가 안 작소.”
“아니어야! 아담하잖여? 고만한거이 제일
좋은거이여. 너무 크면 싱겁지라. 잘 넘어지고.”
“큰디 왜 넘어진다요?”
“오메, 작년에 태풍왔을 때 안봤냐? 땅바닥에
들어 누운건 큰나무 뿐이었잖냐? 큰 나무는 바람이 많고 큰 사람은 적이 많은 법이여. 긍께 작은거이 좋은거여. 너무 작으면 제구실 몬하지만
말이어라.”
“그럼 가연이 누나도 작은 걸
좋아하요?”
“하모, 큰거는 징거러워야. 작은거이 딱
좋재.”
“나도 작은디.”
“그래서 내가 점기하고 맨날 이렇게 세월보내재.
알았능가?”
최사장은 깟년이를 한참
쳐다봤다.
공기놀이하기 전엔 거들떠 보이지 않던 깟년이가
공기놀이 후 차츰 예뻐졌는데 지금은 너무 예뻤다.
최사장은 와락 깟년이를 끌어안았다. 깟년이의 말에
눈물이 나도록 감동했다.
“고맙소 가연이 누나. 이담에 본인은 가연이
누나한테 장가갈라요.”
“머시라고라? 내한테
장가든다고라?”
“이미 본인은 결심해뿐졌소. 열쇠 똥구멍 막았응께
인자 끝났소. 알았지라?”
“오메. 오메. 오메.”
깟년이는 너무 당혹해서 그저 오메만 연거푸 일곱
번 되뇌였다. 최사장은 입을 틀어막고 당혹해하는 깟년이의 오메 소리를 오네 로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결심에 너무 감동한 깟년이가 차마
심중의 뜨거운 말은 못하고 ‘오, 네’ 즉 ‘Oh, Yes’ 라는 표현으로 착각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최사장의 소망은 며칠 후 무참히 깨져
버렸다.
장독보다 더 무참하게 깨졌다. 아니 유리꽃병보다
더 산산조각 박살나버렸다.
며칠 후 깟년이는, 며칠 전처럼 돌무더기에 해가
지도록 오지 않았다.
노을이 재가 된 후에도 깟년이는 오지
않았다.
실망보다 분노가 더 크게 끓어 오른 최사장이
깟년이의 집을 전격 방문했을 때 깟년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첫댓글 기다리다 지처 버렸군요..
제미있게 잘보았슴니다.
새로운 주일입니다
이 주일 내내 행복하세요
아이들의 순수함을 말해주는 사랑 이야기 즐감 했슴니다.
인간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 사랑이죠.
마치 계속물의 일급수같은 사랑 말입니다
그 사랑 같은 마음으로 이번 주일은 행복하세요
가연이를 기다리는 최사장 그자리에서 망부석이 될번 했군요..
휴가 안가세요?
가시면서 자리 여유있으면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