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나해 연중 제30주일(전교 주일)
<초대 교회 전교의 패러다임: 특별하면서도 오를성싶은 나무가 돼라!>
복음: 마태오 28,16-20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전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내가 먼저 믿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좋은 것은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대부분 더 믿는 사람에게서 옵니다. 사제가 이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렇다면 전교는 이 ‘믿음’을 갖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는 전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보면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요? 믿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을 주려는 것이 전교는 맞지만 바로 믿음을 주려고 하면 사람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납니다.
‘최고의 스타들은 왜 키가 작을까요?’ 『언씽킹』이란 책에 나온 소제목입니다.
2008년 미국에서 수입이 가장 많았던 10명의 배우를 봅시다.
1. 해리슨 포드, 2. 애덤 샌들러, 3. 윌 스미스, 4. 에디 머피, 5. 니컬러스 케이지, 6. 톰 행크스, 7. 톰 크루즈, 8. 짐 캐리, 9. 브래드 피트, 10. 조지 클루니
배우로서 ‘주연’이란 말을 떠올리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키가 크고 조각처럼 잘생긴 외모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여기에 거론된 주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중에서 키가 180cm가 넘는 사람은 니컬러스 케이지뿐입니다.
그런데 니컬러스 케이지가 조각 미남인가요? 조각 미남이라 한다면 톰 크루즈나 조지 클루니를 많이 말씀하십니다. 조지 클루니는 178cm이고 톰 크루즈는 176cm입니다. 물론 저보다야 다 크지만, 서양인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키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말론 브랜도, 멜 깁슨, 로보트 드니로, 알파치노, 실베스터 스탤론, 숀 팬, 맷 데이먼 등의 평균 키는 175cm입니다.
우리나라의 BTS 평균 키가 177.3cm입니다. 유일하게 RM만 181cm이고 나머지는 평균 175cm인데 모두가 사랑합니다. 우리나라의 배우들도 보면 키가 크면 소위 얼굴이 좀 만만하고 얼굴이 좀 부담스러우면 키가 만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180cm인 송강호 씨는 키가 크지만, 얼굴은 조각 미남이 아니고 이병헌 씨는 미남이지만 키는 좀 작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어떤 여자에게 매력을 느낄까요? 분명 솔직해서 자신을 다 드러내는데 또 뭔가 신비감을 감춘 여자입니다. 그냥 한 번 만났는데 다 알 것 같은 여자는 매력이 없습니다. 남자도 특별한 것을 꿈꾸고 누군가를 만날 때 특별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신 부담스러우면 안 됩니다. 오르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면이 있으면서도 단순한 아름다움까지 있다면, 그래서 ‘가능할 거 같은데?’라는 마음을 주는 여자가 가장 매력 있습니다.
종교는 분명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르지 못할 나무만 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오르지 못할 나무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만 강조하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것만 강조한다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불친절한 복음 전파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살기 부담스러운 나라에서 내 아이도 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매우 특별합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나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화해서 우리나라에 살려면 어떨까요?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그냥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게 낫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살기 부담스럽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스스로가 엄청난 경쟁을 시키며 한국인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이상한 의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열등감이 있으면 자신 안에 있는 하나의 특징만을 강조하며 그것만을 부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 매력적으로 되려면 큰 사고 안 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그런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부자가 아니면 무시당하는 문화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매력적인 나라가 되면 자녀도 많이 출산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저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그냥 어울려 사는 것을 ‘친교’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럽지 않은 공동체가 무엇일까요? ‘가족’입니다. 가족이 부담스러우면 그 사람은 어디에도 속할 용기를 얻지 못합니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이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불가능하리만치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아버지!”란 믿음만 강조할 게 아니라 우선은 모든 사람이 어울려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어머니, 형제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게 우선입니다. 이것이 오를성싶은 나무가 되는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서로 친교를 이루며 사랑하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이 당신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때 사람들은 성체성사를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가진 것을 나누고 주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 했을까요?
성경에서 초대 교회 선교모델을 한 번 살펴봅시다.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사도 2,43-47)
일단 성직자들이 ‘놀라운 일과 기적’을 일으켜야 합니다. 물론 성사 거행보다 더 큰 기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친교’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모아 친교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사제들의 몫입니다. 그 친교는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이 바탕이 됩니다.
이를 위해 성사가 존재합니다. 성사는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위해 자기의 피를 흘리게 해줍니다. 이런 친교의 행복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공동체가 교회여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맺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세상에 ‘매력을 발산’합니다. 누구나 친교의 행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겸손해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보고 들어와 ‘신도들의 모임이 커집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전하는 선교 방법이었습니다. 현재 성당에서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형제들 간의 친교를 이루는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교적 인원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냉담자를 말할 때 3년에 한 번 ‘고해성사’ 한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고해성사하고 성체성사 하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기적을 통해 ‘친교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사의 목적이 친교입니다. 형제간의 친교를 지향하지 않는 성사는 어쩌면 방향을 잃고 무조건 달리는 자동차에 기름을 계속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전교하지 않는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 있을 수 없듯, 믿는데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서 형제간의 친교로 참으로 행복하고 그 공동체가 구원의 백성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너지를 채우는 것에만 목표를 두며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면 열심히는 하는데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먼저 특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성사입니다. 성사가 있기에 교회는 특별합니다.
하지만 성사만 강조한다면 교회의 특별함보다는 오르지 못할 나무로 보일 수 있습니다. 특별하게 만드는 것과 특별함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할 수 있어도,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누가 부담스러운 사람과 사귀고 싶겠습니까? 자신을 성장시켜 줄 특별함은 갖추어야 하지만 성사만 강조하며 부담을 주는, 그냥 특별함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960년 펜실베니아 중부에 있는 로제토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단 것을 좋아하고 기름기 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며 술과 담배를 즐기고 녹초가 되도록 일했으며 비만도 흔한 이 마을에서 거의 심장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수 마을은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사람들의 정착촌이었습니다. 그 마을은 계층이 없는 소박한 사람들이었으며 따듯하고 친절한 가족과 같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바로 건강과 장수에도 직결된다는 의미로 ‘로제토 효과’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 중의 하나는 냉담자를 정할 때, 성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닌 공동체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해야 합니다. 적어도 한 성당 공동체에서 친교를 나누는 사람에게 신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가야 합니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가 없다면 어쩌면 교회도 우리나라 인구가 줄어들어 결국에 사라지는 길로 가는 것과 같은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성체가 아닌 공동체가 선교하게 해야 합니다.
- 전삼용 요셉신부님 -
https://youtu.be/gchR88FOv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