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핵개발
풍운아 박정희 (朴正熙) 는 어느날 홀연히 국민앞에 나타났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의 극적인 삶과 죽음을 두고 일본의 한 정치인은 '하늘은 영웅을 냈다
가 시대의 소임을 다하면 갑자기 거둬간다' 고 애도했다. 물론 그의 업적에 대해서
는 아직도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민족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킨 지도자였는지, 민주주의의 자생적 발전을 가로막은 독
재자였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은 여전하다. 그가 피살된지 26일로 18년.
그렇지만 김재규 (金載圭.사형.당시 중앙정보부장) 의 박정희 살해 동기에 대해서조
차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군 검찰관으로 이 사건을 수사한 A (변호사) 씨는
김재규의 성격과 취향을 들어 순간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그의 증언. "김재규는 일본 사무라이 소설을 많이 읽어서인지 수사중 사무라이
의 '앗사리한 자세' 와 '삶을 초개같이 버리는 생사관' 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
욱 하는 성질에 당시 심각한 간경화로 매우 신경질적이었죠. 아버지의 묘소가 제왕
이 날 자리라는 얘기도 있었고요. 수사과정에서 풍수지리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합디
다."
이 설명은 金의 당시 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시해 현장의 목격자였던 김계
원 (金桂元.74)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은 당시 차지철 (車智澈.작고) 경호실장의 지나
친 월권행위와 오만불손한 태도를 그 동기로 꼽았다.
운명의 그날 밤 궁정동 만찬장에서도 화제가 정치문제로 옮겨지자 김재규는 궁지에
몰렸다. 김계원의 증언.
. "朴대통령이 당시 국회에서 제명된 김영삼 (金泳三.70) 신민당총재를 구속 기소하
지 않은데 대한 불만등을 터뜨리며 중정을 나무랐어요. 그런데도 김재규는 계속 온건
한 정국 운영을 건의합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차지철이 '신민당이고 뭐고 까불면 전
차로 싹 쓸어버리겠습니다' 라며 金을 공격했어요. 바로 그때 일이 벌어진 겁니
다."
김재규 10.26前 CIA 만나
결국 차지철에 대한 김재규의 누적된 불만이 한순간 폭발해 옆에 있던 朴대통령까지
살해하게 됐다는 얘기다. 10.26직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제1국장으로 김재규를
직접 조사한 백동림 (白東林.61.한국국민의식연구소 소장) 씨 역시 두가지 이유를 들
어 10.26은 단순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김재규는 처음 만찬장에 들어갈 때 평소와는 달리 권총을 갖고 들어가지 않았어
요. 또 시해 직후 용산 육군본부로 차를 몰고 갔지요. 만약 치밀한 각본에 의해 결행
된 사건이었다면 당연히 남산 중정으로 갔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차지철에 대한 불
만이 朴대통령으로까지 비화됐을까. 박정희와 김재규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런 의문
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박정희는 1917년생, 김재규는 1926년생이지만 육사 2기 동기생이었다. 고향도 같은
경북 선산군이었고, 술자리에서 부르는 '18번' 도 '으악새 슬피우니' 였다. 박정희
는 김재규를 매우 아꼈다.
...
두 사람의 성격을 잘 아는 김종필 (金鍾泌.71) 자민련 총재는
"김재규는 제 방귀소리에 놀라는 사람처럼 차지철을 죽이는 총소리에 놀라 엉겁결에
朴대통령을 살해했을 것" 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김재규의 살해 행위가 계획적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
재규도 군 수사와 법정신문에서 "유신 이후 네차례 朴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 고 밝
혔다. 80년 2월21일 강신옥 (姜信玉.61) 변호사에게 한 구술유언에서도 "자유의 물
이 흐르는 강을 가로막고 있는 제방을 내가 제거했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군검찰관이었던 A씨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점점 그런 논리를 갖추어 가더
라" 고 전하면서 "죽음을 앞두고 이름이나마 역사에 남기고 싶었을 것" 이라고 일축
했다.
김재규의 주장과 행적 사이의 납득할 수 없는 괴리를 미국 개입설로 설명하는 사람
도 있다. 당시 미국 개입설이 나름대로 설득력있게 퍼진 것은 10.26 며칠 전 김재규
가 로버트 브루스터 미 중앙정보국 (CIA) 한국지부장을 만난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
다. A씨는 이 부분에 관심을 갖고 金을 신문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
"수사를 서둘렀기 때문에 충분히 파헤칠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金은 '시국 얘기
를 한 것은 사실이나 朴대통령의 살해와 관련된 얘기를 나눈 적은 없다' 고 말했어
요. "
美,大韓통제력 상실우려
미국 개입설은 당시 극도로 불편했던 한.미관계 때문에 더욱 소문이 꼬리를 물었
다. 76년 10월 박동선 (朴東宣) 사건을 시작으로 연이어 터진 미국의 청와대 도청
(盜聽) 사건, 특히 77년 1월 '인권외교' 를 표방하고 출범한 지미 카터 행정부의 인
권개선 공방과 주한미군 철수 논란등이 이어졌다.
10.26 발생 20여일전 김영삼 신민당총재 국회제명사건에 대한 항의표시로 미국정부
가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를 소환하면서 양국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다. 미국
개입설이 나돌자 글라이스틴은 "헛소리며 쓰레기같은 이야기" 라고 단호히 부인했
다.
그런데 70년대 중반 합동참모부에 근무했던 한 예비역 고위장성 Z씨는 주목을 끌만
한 증언을 했다.
"아마 78년 이후일 겁니다. 미군 고위관계자가 나에게 '박정희 이후를 생각해 본 적
이 있느냐' 며 '당신은 생각이 없는가' 라고 넌지시 묻더군요. "
70년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핵폭탄 설계연구 책임자였던 과학자 X씨도 비슷한 증언
을 했다.
"76년 여름 CIA관계자가 '박정희를 사라지게 하면 어떻게 될까' 라고 묻더군요. 그래
서 '내가 무슨 소리냐' 고 반박했더니 '박정희가 사라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물었
던 것' 이라고 얼른 말을 바꾸더군요. "
이러한 증언들 역시 미국 개입설의 직접적인 증거는 못된다.
하지만 한국에 있던 미 CIA요원과 주한미군, 미대사관 관계자등을 통해 이런 유의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박정희의 죽음이 미국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더라도 당시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 "미국은 박정희의 제거 내지는 하야 (下野)
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 는 메시지를 던져주기에는 충분했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재규가 1심 최후진술에서 박정희를 살해한 이유중 하나로 한.미관
계의 회복을 언급했다는 대목은 흥미롭다. 그의 진술. "혁명 (그는 10.26을 혁명이라
고 불렀다) 을 일으킨 목적은 혈맹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에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 "
그렇다면 미국은 박정희의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안들었을까. 예비역 장성 Z씨
는 "70년대 중반 이후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 가장 큰 쟁점은 한국의 핵무기 개발 문
제였어요. 카터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미 갈등이 첨예화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인권문제였지만 내면에는 핵문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라고 증언했다.
그 무렵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Y씨는 "79년 6월 카터의 방한 당시 들어온 CIA요
원 2백50명중 상당수가 귀국하지 않고 10.26까지 남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고
말했다.
한국의 지도자는 국제사회에서 독자행보를 시작하는 순간 미국과 마찰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이승만 (李承晩) 과 박정희.김영삼정권이 그 예다. 전두환 (全斗煥).노태
우 (盧泰愚) 정권이 미국과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한 것도 미국의 입장에 순응했기 때
문이다. 미국의 동북아전략의 핵심에는 일본이 놓여 있으며 한국은 그 보호장치에 불
과하다.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순간 미국의 대한 (對韓) 통제력은 사라지며, 일본도 미
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 핵무기를 보유하려 할 것이다. 미국이 한국의 핵무기 보유
를 결사 저지해야 하는 이유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당시 핵개발 관여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핵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으려 했다.
"기사가 나가면 나도 어떻게 당할지 모르지만 당신들도 다친다" 는등 대미 (對美) 공
포증을 토로했다. 물론 기우일 수도 있다.
핵개발 과정에서 미국의 엄청난 시달림을 받으면서 생긴 피해의식의 발로일지도 모
른다. 이들은 대부분 박정희의 죽음을 미국과 연결시키는 공통점도 갖고 있었다. 박
정희의 핵개발은 미국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는 폭발성 뇌관이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운명할 때까지 핵개발의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당대의 비밀
을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던 당시 핵심관계자들은 "있었던 사실을 없던 것으로 묻어 버
리는 것은 역사와 국민앞에 죄를 짓는 것" 이라는 취재팀의 오랜 설득에 마침내 18년
만에 입을 열었다.
29.핵개발2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가 아닌 실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가 있었다. 작
가 김진명 (金辰明.39) 씨가 국제적인 핵물리학자 이휘소 (李輝昭.77년 작고) 박사
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을 소재로 쓴 이 소설은 93년 8월 출간, 1년도 안돼 3백만
부가 팔렸으며 영화로까지 제작돼 박정희 (朴正熙) 시대의 원폭 (原爆) 개발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박정희시대의 핵개발을 지휘.감독한 청와대 경제 제2수석실의 김광모 (金光
模.64.테크노서비스 사장) 비서관은 이휘소 박사 관련설을 전면 부인했다. 핵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 역시 "이휘소 박사의 전공은 핵개발과 직접 관련이 없는 순수이론
물리학" 이라며 "그를 핵개발과 연관시키는 것은 난센스" 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이 소설과 유사한 사건들이 당시 핵개발팀 주변에서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
은 흥미롭다. 핵개발팀은 어떻게든 미국이라는 감시자를 피해 핵개발 사실을 숨겨야
했고, 미국은 핵개발의 단서를 잡아내려고 정보망의 촉수 (觸手) 를 곤두세웠다. 74
년 11월9일 한국의 핵과학자 3명이 극비리에 프랑스 파리 교외의 오를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하늘은 푸르렀다. 이들은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개선문 옆 쿠버보아가 (街)에 잡아놓
은 숙소로 향했다. 이들은 택시 안에서 깜짝 놀라야 했다. 택시기사가 "한국에서 온
핵과학자냐" 고 물었기 때문이다. 순간 이들은 바짝 긴장했다. 심상치않은 느낌이 들
어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일절 핵관련 얘기를 주고받지 않았다.
'한국원자력연구소 30년사' 에는 "74년 11월9일부터 12월10일까지 주재양 (朱載
陽.64.재미.전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 외 2명, 핵연료 가공및 재처리사업 추진차
프랑스 방문" 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프랑스를 방문한 그들의 구체적 목표는 물론 나
머지 2명의 이름조차 언급이 없다.
취재 결과 주재양씨 외에 원자력연구소 화공개발실장.한국핵연료개발공단 건설본부장
을 지낸 윤석호 (尹錫昊.68.전 충남대 교수) 박사와 원자력연구소 핵연료연구실장.한
국핵연료개발공단 핵연료 연구부장으로 일한 박원구 (朴元玖.65.인하대 금속공학과
교수) 박사가 바로 그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23년만에 비밀 털어놔
尹박사는 "23년만에 처음 공개한다" 며 그동안 가슴에 묻어 뒀던 비밀을 털어놓았
다. 尹박사 일행이 핵연료 성형가공 시험시설 도입에 관한 가계약을 서커사와 체결
한 직후부터 이들 주변에서는 심상치않은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尹박사의 증언.
"다음날 아침 재처리기술과 시설 도입에 관한 가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상고방 회사
에 갔더니 직원이 '어젯밤 서커사에 화재가 발생했다' 며 '절대 밤에 나돌아다니지
말라' 고 주의를 줍디다. 당시 우리는 이 말을 크게 유념하지 않았더랬어요. "
이때부터 상고방사는 이들에게 안내인겸 경호원을 붙였다. 그러나 가계약을 체결한
날 저녁 尹박사 일행의 기술협상 창구였던 상고방사의 궤세라는 인물이 차안에서 의
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사인은 심장마비. 그의 부인은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
해 며칠 동안 회사측에 납득할만한 해명을 요구하며 거칠게 항의했다.
尹박사는 "일련의 사건들이 서커사및 상고방사와 가계약을 체결한 날 발생했기 때문
에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이상했다" 며 "귀국 비행기에 올라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 회고했다. 더이상 파리에 있을 분위기가 아니라는 판단아래 떠날 채비
를 하는데 출발을 재촉하는 사건이 또 터졌다. 숙소 옆 건물의 항공회사 대형유리가
대낮에 굉음을 내며 폭발한 것이다.
일대에 수많은 경찰이 배치됐다. 물론 尹박사 일행이 느낀 불안감은 미국에 대한 피
해의식 의 발로일 수 있다. 파리는 테러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
나 尹박사 일행이 이들 사건을 '미국이 보내는 경고' 로 받아들일 정도로 핵개발을
둘러싼 미국의 방해는 집요했고 완강했다.
미국은 74년 5월 인도가 지하핵실험을 실시하자 세계 각국의 미 대사관과 정보 채널
을 총동원해 각국의 핵개발 여부를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또 원자력 수출
국들과 함께 '런던클럽' 을 결성, 핵기술 후진국에 대해 핵물질과 장비의 수출은 물
론 재처리.농축.중수 (重水) 제조등 소위 민감한 기술의 국제간 이전을 엄격히 제한
하는 핵확산 금지 조치를 강화해 나갔다.
이와 함께 당시 핵개발을 본격 추진하던 브라질.아르헨티나.파키스탄등과 이들 국가
에 핵기술을 제공하려던 프랑스.서독등에 압력을 넣어 핵기술 이전을 포기하도록 강
요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미국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갖은 정성을 쏟
았다.
尹박사는 "프랑스는 우리와의 협력사업을 최우선 국책사업으로 선정했을 정도였다"
며 "우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관련시설들을 샅샅이 보여주었다" 고 말했다.
佛선 경제적 이익에 관심
이들이 둘러본 시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핵개발 연구기지인 마쿨을 비롯해 라하구
의 재처리공장, 로망에 있는 핵연료 가공공장, 파리 근교의 원자력연구소등이었다.
심지어 프랑스 상고방사는 일본에 건설한 도카이무라 (東海村) 와 오아라이 (大洗)
센터의 재처리공장, 그리고 린교도게 (人形峠) 의 우라늄 농축시설등을 귀국 후에 시
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상고방사 직원들은 尹박사 일행에게 "당신들이 프랑스에 오기 쉽도록 73년 10월 서울
~파리간 직항로를 개설한 것" 이라며 은근히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우기까지 했다. 당
시 주불 (駐佛) 경제담당 공사였던 이희일 (李熺逸.66.전 농수산부 장관) 씨는 "프랑
스는 당시 미국이 주도하는 핵확산금지조약 (NPT) 을 지키기보다 재처리 기술과 시설
을 판매해 얻는 경제적 이익에 관심을 가졌다" 고 설명했다.
75년 4월 원자력연구소와 상고방사간에 본계약을 체결할 때에도 미국의 눈길을 피하
기 위해 '007작전' 을 펴야 했다. 상고방사에서는 포앙세 사장이 직접 방한, 윤용구
(尹容九.69.동원공전 학장) 원자력연구소장과 서명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尹씨의 계속되는 증언.
"일단 서명 당사자들이 원자력연구소장실에 모였어요. 그런데 소장실에 정체 불명의
불청객들이 계속 드나들었어요. 아무래도 꺼림칙했어요. 그래서 각자 뿔뿔이 흩어져
그 당시 시청 옆에 있는 원자력병원 회의실에서 2시간 뒤에 다시 만났지요. 미국이
눈치챌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재처리연구시설 공급및 기
술용역시설 도입 계약 체결' 은 이렇게 이루어진 겁니다. "
청와대에서 핵개발을 지휘.감독한 것으로 알려진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경제 제2수석의 가방 도난사건도 수수께끼다. 72년 5월 吳수석은 정부.군 관계
자들과 함께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이스라엘로 갔다.
함께 동행한 김광모 비서관의 증언.
"이스라엘 중개업자인 아이젠버그의 주선으로 주요 군수공장을 둘러보고 숙소로 정
한 텔아비브 한 호텔에 돌아와보니 吳수석의 가방이 감쪽같이 없어진 거예요. 아이젠
버그가 호텔측에 항의해 후하게 배상을 받긴 했어요. 사실 吳수석 가방에는 여행용
품 따위만 들어 있었고 스틱스.엑조세 미사일 관계서류들을 비롯해 진짜 중요한 방위
산업 관계서류는 내 가방 속에 있었거든요. 吳수석도 미국의 소행이 아닌가 의심합디
다."
“美서 눈치챌지도”불안
이스라엘.오스트리아 국적을 가진 아이젠버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여사
(李承晩대통령 부인) 를 통해 6.25 직후부터 한국 정부와 인연을 맺었으며 박정희 시
절엔 김성곤 (金成坤).장기영 (張基榮).김형욱 (金炯旭) 씨등 실세에 선을 대어 월
성 원전3호기 도입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따냈다.
이후락 (李厚洛) 정보부장을 이스라엘에 초청, 첨단무기 도입에도 개입한 인물이다.
핵개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재처리를 통해 핵폭탄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확보하
는 일. 이 작업의 실무 책임자였던 원자력연구소 연구실장 김철 (金哲.59.아주대 대
학원장) 박사 만큼 업무차 프랑스를 자주 드나들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의 증언.
"핵관련 기기 (器機) 를 구입하러 프랑스에 갈 때에는 직접 가지 않고 독일에서 기차
를 타고 갔어요. 우리가 프랑스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미국이 알기 때문에 프랑스 컴
퓨터 코드를 사용하면 도입하려는 시설이나 규모를 미국이 알아차릴 것같아 독일 컴
퓨터 코드를 사갖고 갔던 겁니다."
金박사는 프랑스에서 본국에 편지나 자료를 보낼 때도 반드시 우리 대사관의 외교 행
낭을 이용했다고 한다. 핵개발은 미국과의 숨막히는 숨바꼭질이었다. 박정희는 왜 목
숨을 건 도박을 감행해야 했을까.
30.미국의 일방적인 철수에 '핵보유' 결심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이 핵개발을 시작한 동기는 예기치 않은 미국의 주한미군 철
군 통보였다. 북한에 비해 군사력에서 절대 열세였던 시절이었기에 국민들은 위기감
에 사로잡혔고 박정희는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핵개발은 미국의 보호막에 안주해 있던 한국의 지도자에게 홀로서기의 필요성을 절감
케 했다. 69년 7월 리처드 닉슨 미대통령이 괌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아시아의 안보
는 아시아인의 손으로" 라는 선언을 했을 때만 해도 박정희는 반신반의했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전에 미군 다음으로 많은 5만명의 병력을 파견, 피를 흘리고 있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다. 1년 뒤인 70년 7월초 윌리엄 로저스 미국무
장관은 사이공에서 개최된 베트남 참전국 회의에서 최규하 (崔圭夏.79) 당시 외무장
관에게 '주한미군 2만명 철수' 를 통고했다.
다음달에는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방한, 朴대통령에게 직접 통보했고 대만으로 가
는 기내에서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할 것" 이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김
정렴 (金正濂.73) 대통령비서실장이 이 소식을 보고하자 朴대통령은 굳은 자세로 말
했다.
"임자, 일희일비해서는 안돼. 국방을 언제까지나 미군에 의존할 수는 없어. 이제는
스스로 나라를 지켜야 돼. "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철수 결정에 대해 박정희는 몹시 분노했다. 그는 문득 미
국 태도에 괘씸한 생각이 들 때면 측근들에게 여과없이 감정을 표출하곤 했다.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임방현 (林芳鉉.67) 씨의 증언.
"朴대통령은 미국이 자꾸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거론하자 '미국놈들, 걸핏하면 철군
한다고 협박한다' 며 아주 불쾌해 했어요. 대통령이 말끝마다 '미국놈들' 이라고 말
하니까 주한 미대사가 이것을 알아들을 정도였어요. "
그러나 미국은 박정희의 감정이나 한국민의 불안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정대로
71년 3월 주한 미7사단은 철수했다. 박정희가 핵개발을 결심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
다. 국방과학연구소 (ADD)에서 핵폭탄 설계 연구책임자로 일한 A씨는 71년 4월 임명
장을 받는 자리에서 박정희의 결심을 들었다.
"우리도 이제 초 (超) 무기를 만들어야겠어요. 이건 숨어서 해야 합니다. "
“숨어서 하라”지시
초무기는 화생방 무기를 뜻하는 것이지만, A씨는 "朴대통령이 '숨어서 하라' 고 일러
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핵무기였다" 고 증언했다.
핵개발은 71년 11월 청와대에 경제2수석실이 생겨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경제
2수석실은 방위산업을 전담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서였지만 이후 중화학공업 육성.행
정수도 건설 추진등 박정희시대의 굵직굵직한 주요 사업을 전담한 일종의 '태스크 포
스팀 (기동타격대)' 역할을 했다.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씨가 책임자였고, 김광모 (金光模.64.테크
노서비스 사장) 비서관이 핵심 참모였다. 金씨의 증언.
"吳수석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朴대통령이 경제2수석실이 만들어진지 얼마 안돼 吳수
석을 부르더니 '주한미군 철수로 한국의 안보가 대단히 불안해. 미국한테 밤낮 눌려
서 안되겠어. 언제는 도와준다고 했다가 이제 와서는 철군해버리니 언제까지 미국한
테 괄시만 받아야 하는지…. 이제는 좀 미국의 안보 우산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 약
소국가로서 큰소리칠 수 있는 게 뭐 없겠소. 인도와 파키스탄 같은 나라도 큰소리를
뻥뻥 치고 있는데 말이야. 우리도 핵개발을 할 수 있는거요' 하고 묻더랍니다. "
朴대통령의 의중을 알아차린 이들은 즉시 최형섭 (崔亨燮.77.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
문) 과학기술처장관에게 핵개발 가능성을 물어봤고, 구체적 사항은 崔장관의 양해를
얻어 윤용구 (尹容九.69.동원공전 학장) 원자력연구소장에게 조사시켰다.
그러나 당시 우리 과학자들은 핵개발의 기초지식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다고 한
다. 계속되는 金씨의 증언.
"처음에 尹소장 얘기가 핵탄두용 플루토늄을 얻기 위해서는 중수로에서 나오는 '사용
후 핵연료' 를 재처리해야지 경수로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 는 순도가 낮기 때
문에 안된다고 합디다. 우리는 그런줄 알았어요. 얼마 후에는 경수로에서 나오는 연
료를 재처리해도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하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왜 왔다 갔다 하
느냐' 고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국제원자력기구 (IAEA) 의 감
시 때문에 경수로든 중수로든 '사용후 핵연료' 를 재처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어
요. "
실제로 상업용 원전에서 타고 나온 핵연료를 재처리해 얻은 플루토늄은 핵폭탄 제조
원료로는 적합하지 않다. 원자력연구소 연구실장으로 재처리사업의 실무책임자였던
김철 (金哲.59.아주대 대학원장) 박사는 "경수로는 한번 핵연료를 집어넣으면 3년간
타기 때문에 순도가 낮아져 재처리해도 핵폭탄용 원료로 부적합하다. 중수로의 경우
1년 정도 탄 핵연료를 꺼내 재처리하면 가능한데 IAEA의 감시가 심해 '사용후 핵연
료' 를 확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고 말했다.
괴산 우라늄광 조사
金씨는 "70년대 후반 연구용 원자로 (NRX) 를 도입하려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
다" 고 배경을 설명했다. 인도는 캐나다로부터 사들인 연구용 원자로를 이용해 '사용
후 핵연료' 를 확보, 이를 재처리해 74년 5월 지하핵실험에 성공했던 것이다.
경제2수석실은 연구용 원자로의 원료인 천연우라늄을 확보하기 위해 자원연구소로 하
여금 충북괴산에 있는 우라늄광의 경제성을 조사케하는 한편 우라늄 광석을 캐
70~80%의 우라늄 함량을 지닌 우라늄정광 (옐로 케이크) 을 만들어 朴대통령에게 보
여준 적도 있다.
이 무렵 朴대통령이 사용하는 용어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미7사단 철군후
에 '자력방위' 의 준말인 '자위 (自衛)' 라는 단어를 많이 썼는데 72년 중반부터
는 '자위' 대신 '자주국방' 이라는 용어만을 사용했다.
오원철씨의 설명.
" '자위' 라는 용어는 북한의 공격에 대한 방위개념이에요. 그러나 '자주국방' 은 대
미 (對美) 관계까지 포함한 국방의 자주성을 말합니다. 국방의 자주화는 한국의 자주
화로 발전해 나가게 되죠. 단순한 용어상의 문제를 넘어선 매우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
朴대통령은 72년 7월20일 국방대학원 졸업식 치사에서 자주국방의 의미를 직접 설명
했다.
"우리나라는 우리 국민이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의연한 자
세로 강력히 추진할 때, 그리고 미국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끝내 해낼 수 있다
는 능력을 보여줄 때 비로소 미국은 협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국방입니다. "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일을 의연한 자세로 강력히 추진한다' 는 구절이 의미심장하
다. 이 말 속에는 방위산업 육성과 더 나아가 핵개발에 대한 박정희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국가안보문제를 미국에 구걸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핵개발 계획은 73년
겨울에 접어들면서 보다 구체화했다. 핵무기 개발 극비계획서가 보고됐다.
핵폭탄 설계 연구책임자였던 A씨의 증언.
"20장 분량의 차트 형식으로 만들어진 계획서에는 핵무기의 기본개념에서부터 소요예
산 (약 15억~20억달러).개발완료 예상기간 (6~10년)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朴대통령
은 보고에 만족, 기분좋게 차트 위에 사인을 해주셨어요. "
A씨에 따르면 81년 수출목표 1백억달러 (실제로는 77년 달성) 의 15~20%를 핵개발비
에 투자한다 해도 국민경제에 큰 부담이 안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A씨가 계획
한 핵폭탄은 2차세계대전말 일본 나가사키 (長崎)에 투하된 것과 같은 20㏏짜리 플루
토늄탄으로, 투하방식은 공중투하식이었다.
2백만명 살상 규모
"초기에 계획한 핵폭탄의 파괴력은 서울 광화문 네거리 상공 5백80m 위치에서 터뜨
릴 경우 교문리 일대까지 잿더미로 만들고, 최소한 2백만명의 인명을 살상하는 정도
의 규모였어요. 내가 75년초 국방과학연구소를 물러날 때 이미 핵폭탄 설계는 거의
끝마친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
이후 핵폭탄 제조와 기폭 (起爆) 기술은 우리 연구진이 프랑스 발둑에 있는 핵폭탄제
조연구소등에서 계속 연구했다. 그러나 핵무기 개발 계획은 78년 9월 사정거리 1백80
㎞의 '백곰'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함으로써 공중투하식이 아니라 미사일에 핵탄두
를 장착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인도의 네루, 프랑스의 드골과 같이 핵개발로 민족의 영웅이
되려는 박정희의 꿈은 무르익어갔다. 꿈을 실현시킬 두뇌가 절실히 필요했다. 박정희
는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핵과학자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3회분입니다.. 너무 길죠. 다음회가 잼(?)나드라구요 .말씀해 주셔여.
다음 부분은 핵무기 제조 전개과정입니다.보시고 글달아주셔여..원하시는분 계시면
바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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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상식
6년 전 쯤 중앙일보 ... 실록 박정희란 연재물 입니다..무궁화 꽃이 피었을가요?
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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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2.09 12:10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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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호~ 이런게 있는줄은 몰랐어요.. 진짜 재밌네.. ^^v 근데 전체를 어디서 구할 수 있죠??
저도 박정희의 핵개발설을 사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증거들이라 하면 모두 정황증거들이여서 설이라고 하고 있는데 위 연제에도 실명이나 정확한 증거라 할 수 있을 건 없군요.. 다음편 기다립니다
재미있네요^^ 다음회도 얼른 올려주세요
박통 무척 싫어하는데...
전 존경합니다...자주국방을 이룩하려는 그마음을 높이 평가합니다. 자주국방을 꾸준히 추진해왔다면 우리나라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아마 지금보다는 더 당당하게 국제문제에 자주적으로 대응하겠죠 이라크 파병도 하기싫으면 안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