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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 웨인 루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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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보면 베르캄프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와 데니스 베르캄프 얘기다. 사실 두 선수의 포지션은 다르다. 베르바토프가 타깃형이라면 베르캄프는 세컨드형 공격수다. 베르캄프는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고의 섀도 스트라이커로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바토프에게서 베르캄프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 닮은 플레이스타일 때문이다. 프리미어리그 베스트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타깃형의 베르바토프를 지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베르바토프는 전형적인 운동 가족 출신이다. 축구선수 아버지와 핸드볼선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남동생도 축구 선수 출신이다. 마르코 반바스텐, 알란 시어러를 동경하며 고향팀 피린 블라고에프그라드에서 꿈을 키워가던 소년 베르바토프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94월드컵 불가리아대표팀을 이끈 디미타르 페네프 감독의 눈에 띄어 자국 최강팀 CSKA 소피아에 입단했다. 18살에 1군 무대에 데뷔한 베르바토프는 그해(98-99시즌) 팀을 FA컵 정상으로 이끌었다. 팀 내 주포로 급부상한 베르바토프는 경기당 1골에 가까운 경이로운 득점력을 과시, 2001년 초 독일의 명가 바이에르 레버쿠젠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2001-02시즌 챔피언스리그와 FA컵 결승전에 출전하는 등 새 무대 적응기를 보낸 베르바토프는 2003-04시즌부터 본격적인 골 레이스를 이어갔다. 2003-04시즌 14골 4위, 2004-05시즌 20골 3위, 2005-06시즌 21골 2위 등 진일보하며 분데스리가 득점 순위 상위권을 고수했다. 2006년 여름, 빅 클럽들의 러브콜이 이어진 끝에 1090만파운드(214억원)의 이적료를 제시한 토튼햄에 베르바토프의 새 둥지가 마련됐다. 당시 금액은 불가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 이적료 기록이었다. |
"Remember the name, Wayne Rooney!" 2002년 10월 19일, 영국 리버풀의 구디슨 파크. 챔피언 아스널을 상대로 1-1의 팽팽한 승부를 펼치던 에버턴에는 투박한 외모의 소년 하나가 경기장을 누비고 있었다. 그리고, 경기 종료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그의 발을 떠난 공은,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 아스널의 골키퍼 시먼을 지나 골망을 출렁였다. 에버턴의 극적인 승리를 이끈 이 골은 아직 17번째 생일도 맞이하지 못한 웨인 루니가 전국적인 스타로 등장하는 순간이었고 당시 마이크를 잡고 있던 BBC MOTD의 캐스터 클라이브 틸데슬리는 잔뜩 흥분한 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이 이름을 기억하십시오, 웨인 루니입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의 부진으로 낙심한 잉글랜드 축구 팬들에게 루니의 등장은 오아시스였다. 시어러와 오웬을 제외하면 믿을 구석이 없다고 혼잣말을 되뇌이던 잉글랜드 사람들은 주근깨 투성이의 덩치 큰 소년의 벼락 같은 데뷔골에서 희망을 보았고, 곧이어 환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루니의 등장이 가장 반가웠던 사람들은 당연히 에버턴 팬들이었을 것이다. 저 오래 전 딕시 딘의 전성시대 이후 에버턴 팬들은 던컨 퍼거슨 정도의 골게터만 나와도 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골게터 기근에 시달렸다. 같은 도시 연고의 리버풀이 수 많은 스타들을 키워내고 데려오며 유럽을 지배하는 동안 에버턴은 늘 2인자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생이 '블루'인 에버턴 골수팬 출신의 이 거친 꼬마가 어린 시절 리버풀의 입단 테스트를 받을 적에도 에버턴의 푸른 옷을 입었으며 그의 가족 모두가 에버턴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흥분했다. 유소년 시절부터 주목받았던 루니의 급성장은 그렇게 에버턴 팬들의 자긍심으로 자리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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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얼굴을 가진 악마, 베르바토프의 애칭이다. 잘 생긴 외모에 파괴적 기량을 겸비한 데서 얻은 수식이지만 그의 플레이스타일과도 관련이 있다. 정적인 듯 하면서도 순간 시도하는 슛과 움직임이 혀를 내두르게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위치와 자세의 곤경을 딛고 연결하는 발리와 터닝 슛 등이 예측 불허의 놀라움을 안기곤 한다. 15골로 팀 내 득점 1위, 프리미어리그 득점 순위 5위다. 8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UEFA컵에서도 5골로 팀 내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베르바토프의 재능은 직접 골을 잡아내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너른 시야와 침착한 대응으로 동료의 골을 엮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로비 킨과의 빼어난 콤비네이션 플레이의 배경에도 베르바토프의 이 같은 팀플레이가 놓여 있다. 기록으로도 확인 가능한 베르바토프의 재능이다. 베르바토프는 11개의 도움으로 프리미어리그 어시스트 부문 3위에 랭크돼 있다. 세스크 파브레가스(아스날)와 애슐리 영(아스톤 빌라)의 뒤를 잇고 있으며 스트라이커 중에선 최다 포인트다. 저메인 제나스와 연결된 베르바토프의 역할 집중이기도 했으나 조력자 베르바토프의 능력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던 올 시즌이다. 포지션 구분이 모호해져 가는 추세다. 토털풋볼의 가속화에다 전술적 퓨전 현상이 탄력을 받으며 포지션과 역할 구분이 예전만큼 선명하지 않다. 맨유의 C.호날두를 FW와 MF 중 하나로 딱 꼬집어 설명하기 쉽지 않지 이유와 맞닿아 있다. 베르바토프의 시즌 흐름을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배경이다. |
하지만, 루니와 에버턴 팬들 간의 밀월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에버턴은 루니의 꿈을 충족시키기엔 너무 좁은 무대였다. 루니는 대표팀 경기를 위해 리그 정상급 동료들과 함께 훈련을 하고 에버턴으로 돌아올 때면 가슴 한 켠이 욱신거렸다. '빅4' 소속 형들이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했던 이야기를 주고받을 적마다 소외감을 느꼈고, 그들이 말하는 '빅 리그'의 감을 느껴보고 싶었다. 때마침 맨유의 입단 제안이 왔고, 루니는 자신을 보내지 않으려는 '은사' 모예스 감독에게 큰 소리를 버럭 질러대면서까지 이적을 원했다. 설상가상으로, '홍등가' 스캔들까지 겹치자 고향을 떠나려는 루니의 뜻은 더욱 강해졌고 결국 에버턴은 맨유에게 루니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루니는 에버턴 원정에 나설 때마다 팬들의 집중적인 야유를 받게 된다. 어찌됐든, 루니의 경력은 맨유 이적 이후 줄곧 상승세를 탔다. 출발부터 좋았다. 2004년 9월 28일, 페네르바체와의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홈 경기에 나선 루니는 해트트릭을 터뜨리며 화끈한 신고식을 치른다. 상대팀 감독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이 날의 활약으로 루니는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첫 해에 리그, 컵 대회, 유럽 대항전 등에서 도합 17골을 터뜨린 루니는 2005/06 시즌 19골, 2006/07 시즌 23골로 득점 수를 늘려가며 팀의 주축 공격수로 자리를 잡게 된다. 경기장 위에서의 폭발적인 득점력은 루니의 인기를 급상승시켰다. 2006년 3월에는 선인세만 5백만 파운드(약 100억원)을 받는 조건으로 영국 역사상 최고액의 자서전 출간 계약을 체결했고 나이키, 코카콜라, FIFA 게임 등 다양한 상업 광고 계약까지 맺어 돈방석에 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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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하트 레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토튼햄과 베르바토프의 계약은 2년 남아 있다. 하지만 올 초 재계약에 합의를 보지 못해 이별이 확실시 되고 있다. 후안데 라모스 감독은 팀 리빌딩에 꼭 필요한 선수라며 베르바토프의 잔류를 원했지만 몸값 등을 고려해 놓아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B.레버쿠젠 시절이던 2002년 5월 레알 마드리드와의 결승전 석패를 잊지 못하는 베르바토프도 다시 한 번 유럽 챔피언스리그 무대에 도전할 수 있는 클럽 이적을 희망하고 있다. 토튼햄이 올 시즌 첼시를 꺾고 칼링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운 베르바토프지만 심장은 이미 칼링컵 그 이상에서 뛰고 있다. 잉글랜드의 맨유와 첼시, 이탈리아의 AC밀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등과의 연결설이 끊이질 않고 있는 베르바토프다. 공격라인에서의 유틸리티성이 강한 까닭에 베르바토프의 합류를 원하는 구단이 여럿이다. 문제는 치솟은 이적료. 토튼햄측은 베르바토프의 이적료로 3000만 파운드(590억원)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 2006년 영입 금액의 3배에 달하는 거금이다. 오는 여름 소속클럽이 바뀔 가능성이 농후한 베르바토프지만 조국 불가리아는 변함없는 ‘나의 팀’이다. 유로2008 예선서 루마니아, 네덜란드에 밀려 본선행에 실패했지만 베르바토프는 대기록 경신을 눈앞에 두고 있다. A매치 63경기에 나서 39골을 터트린 베르바토프는 1970년대 불가리아 축구의 전설 흐리스토 보네프가 보유한 국내 A매치 최다골(47골) 기록에 8골 차로 근접했다. 대표팀 주장을 맡고 있는 베르바토프의 나이를 고려할 때 보네프의 기록 경신은 시간문제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베르바토프가 보네프와 스토이치코프의 확실한 후계자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기대 가득한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한다. |
루니의 미래는 밝지만, 무겁다. 아직 23번째 생일도 맞이하기 전이지만, 벌써 루니는 잉글랜드 축구의 미래를 책임질 재목으로 부담어린 시선을 받고 있다. 대표팀에서나, 소속팀에서나, 공격 전술은 늘 루니를 중심으로 짜여진다. 에릭손 감독과 맥클라렌 감독이 그랬고, 카펠로 감독과 퍼거슨 감독은 여전히 그렇다. 특히 맨유에서 루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루니가 뛸 때와 뛰지 못할 때의 경기력 차이가 크다는 것은 통계로도 입증된 바 있다. 하지만 루니가 이런 상황을 그리 만족스러워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잘 하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가 되는 셈인데, 본인은 자리가 고정되기를 바라는 눈치지만 대개의 감독들은 그에게 최전방 톱 자리를 맡긴다. 공개적으로는 불평한 적은 없지만 그 동안의 몇몇 보도는 루니가 최전방 보다는 조금 더 아래 위치에서 고정적으로 뛰기를 원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어떤 자리에서도 제 몫을 톡톡히 해내기 때문에 감독들은 계속 루니를 다방면으로 활용하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반 니스텔로이를 잃은 뒤에도 마땅한 타겟맨을 영입하지 않는 것은 사하의 존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루니의 전술적 효용 가치가 큰 덕분이다. 골 기록만 놓고 보면 '리그 최고'라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을 지 모르지만 눈에 보이는 도움과 보이지 않는 도움을 통틀어 말하자면 루니 이상의 팀 기여도를 가진 공격수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경기장 곳곳을 안 다니는 곳 없이 전부 휘젓고 다니는 루니의 마당발은 그의 골결정력 못지 않게 귀중한 재능이다. 경기장 밖에서도 약혼녀 콜린 맥룰린과의 '커플 인기'로 상종가를 달리는 웨인 루니. 그가 '90년대 재능'이던 개스코인을 넘어 20대 후반, 서른 너머 까지도 최고의 공격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지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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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형욱 얘는 너무 중계가 편파적...
좀 그런듯한 인상이 있지만 심하지는 않으므로
근데 서형욱 차분한 목소리 너무 좋음
개인적으로는 너무심한듯한..;; 그래도 최근엔 조금나아진느낌..이전엔 정말 ㅎㄷㄷ
04/05챔스 결승때 리버풀이 3:0으로 밀리자 서형욱 왈 "역시 리버풀은 챔스결승에 올라올만한 팀이 아니죠...." 그때부터 급비호감....죽여버리고 싶었음....ㅡㅡ;;;;
확실히 좀 편파적인건 있던데
베르바토프 189 / 77 신체조건 굉장하군요 ㄷㄷ 올시즌은 루니도 잘하고 있지만 베백작에 한표 ...
벨바톱이 189cm였구나;;
불가리아 사람들은 유럽인 중에선 유일하게 어렸을때 몽고 반점이 있다고 들었는데....부여(삼국지에 부여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있는데 부여 '불여'라고도 불렸다고...)의 귀족 중 하나인 고추가가 서쪽으로 이동해 만든게 불가리아 제1제국 이었다는 설이 있더군요 그리고 불가리아 제1제국이 멸망한후 첫째 아들이 세운나라가 고추불가국....금방 망하고 다른나라로 귀화 했지만...이후에 만들어진 불가리아 제2제국이 세워지기 까지 수십년이 걸렸고 그동안 노예로 쓰던 슬라브계 민족과 피가섞여서 제2제국의 왕족들은 제1제국 왕족들과는 다른 외모를 가지게 되었다고......'설'에 불과하지만요 ㅋㅋ
어느 학자의 '설'인가요 궁금하네요
몽골 아자씨들이 유럽 원정때 씨가 남은게 아닐까요? 헝가리 맨치로
몽골 원정이랑 헝가리의 기원이랑은 무관해요
베르비가 셰도우라...ㅡ,.ㅡ;;;;;;;;
ㅎㅅㅎ 흠.... 감독엔 누가 올라올까나?!;; 왼쪽윙도 궁금하고..ㅋ 중앙수비 하나 남은건 비디치 들어갈려나..?!;; 흠 암튼 궁금 하긴 하네요.. ㅎ ㅅㅎ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