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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도데체가... 기가 막혀서 말문이 다 막히네...
님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시는거 아닙니까? 이렇게 비겁하셔도 되는 것입니까?
님이 여기저기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다니신다는 것도 불과 엊그제야 알았습니다만, 우연찮게 들어온 미대사관 공식 까페에서 까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글 남기려고 가입해서 글 남깁니다.
여러말 할 것도 없고, 님의 유언비어를 보고 오해하는 분들이 없도록, 제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두 반론글을 이곳에 게시하고 물러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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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장토론 22 이데아]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중요한 반론들에는 답변도 못하시면서 끝없이 영양가없는 말꼬리잡기만을 시도하시는 역사학도님과, 더이상의 논쟁은 무용하다. 충분히 의견을 나누었다고 생각한다. 이 토론은 관전자들을 위한 것이다. 라고 이미 수차례 밝혔었습니다.
그래서 더이상은 영양가없을 시간만 낭비되는 이 끝장토론을 마무리하고자, 반론글을 써놓고도 제가 물러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한발 양보해서 더이상의 반론을 중단했습니다만... 참... 가만히 있자니 보고만 있을 수 없는 행동을 역사학도님은 계속 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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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은 "고 김경철님은 18일 금남로에서 공수에 끌려가신게 맞고,"라고 하시길래, 제가 병원으로 끌려갔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광주에서는 병원 후송을 "끌려간다"라고 말하는지 궁금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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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말꼬리 잡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생명이 위태롭지 않았다면 다른 연행자들처럼 상무대로 끌려갔겠으나, 생명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적십자병원에 후송되었다고 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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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밝혔다며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당했다. 부상당한 그는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를 인용하셨습니다.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라면 종종 거짓말 지어내어 허위 주장하는 단체 맞는가요? 군 과거사위의 허위주장이 여기서 또 한번 들통나는군요. 군과거사위가 새로운 사실 밝혀낸 것이 아니라,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27.html 에 있는 자료를 근거로 또 하나의 픽션소설을 쓴 것뿐입니다. 제가 아래 일부 캡쳐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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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와~ 님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도 님의 소설에 부합하지 않으면, [종종 거짓말 지어내어 허위 주장 하는 단체]로 규정해버리시는군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요즘애들 말로 님 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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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명확한 사건 시간 확인을 위해 제가 몇 문장 인용해 드립니다:
<그날, 그러니까 80년 5월 20일 오전 10시께 전남 청각 장애자 복지회'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광주 적십자 병원 에세 그곳으로 '김형렬'이란 농아가 입원해 있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영안실이 어딘지도 모르고 물어서 찾어 갔지요. 근디 김형렬이란 사람이 어제 저녁에 죽어서 시체로 있다가 밤9시쯤 국군 통합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그럽 디다. 근디 이름은 틀린디 거기 사람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생김생김이 우리 아들하고 비슷 하드란 말이오.">
<어머니는 며느리와 함께 국군통합병원으로 달렸다. 차츰 내 아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김형렬'의 시신을 보여 달라는 어머니를 군인들은 면회소에 앉혀 놓고 기다 려라고만 했다. 며느리는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속마음에도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윽! 윽!'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쿨쩍 쿨쩍 흐느끼기만 했다. 그렇게 한시간이 가고 두 시간. 세시간이 지났다. 어머니는 종이 조각 팔락거리는 소리에도 불침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놀랄 만큼 숨막히는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 있었다. 흐느끼던 며느리의 눈시울은 언새 퉁퉁 부어 올랐다.
"따라 오세요."
면회소에서 3시간 여를 기다리던 끝이었다.>
자, 이 증언대로라면 김경철군 유가족이 김경철군 사망을 확인한 시각은 5월 20일 오후였습니다. 여기서 정확한 시간 판정의 잣대는 "80년 5월 20일 오전 10시께 전남 청각 장애자 복지회'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입니다. 분명하게 객관적 사실은 전남 청각 장애자 복지회가 김경철군 집으로 오전 10시에 전화를 걸었다는 것, 그리고 그날 오후 김경철군 사망이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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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참... 애시당초 근본부터가 틀려먹은 근거를 가지고 장황한 소설을 써대시는군요.
고 김경철님의 사망시각이 19일 03:00 라는 것은, 제 주장도, 5.18단체의 주장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주장도 아닌, 바로 보안사 505보안부대의 [광주사태 사망자 검시결과 보고 408쪽 383-1980-100]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3시라는 것도 이미 사망한 것을 확인한 뒤에야 군이 기록한 것이니, 실제로는 그보다 이른 시간에 사망하신 것이죠.
인용하신 그 기사의 종결부에 [경철씨의 제사는 작년 1988년 5월 18일에야 처음으로 제대로 한번 지낼 수 있었다.]라는 대목은 보셨습니까?
왜 제사를 18일에 지낸다고 생각하십니까?
유가족의 사망확인시점이 19일이건 20일이건, 분명한 것은 김경철님은 18일 오후 공수에 붙들려 구타당한 후 군트럭에 실려갔으며, 생명이 위태롭자 18일 저녁 적십자병원에 후송된 후, 19일 새벽 3시에 사망을 확인하였음을, 다름 아닌 보안사 505보안부대와 광주지검 검시조서가 밝히고 있습니다.
아래는 망월동 묘역의 고 김경철님의 비석입니다.
이와같이 19일 졸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아래는 제가 작년 5.18 기념일에 묘역을 방문하여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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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그러면 누가 때렸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즉, 김경철군을 광주 조폭이 때렸느냐, 시위대가 때렸느냐, 공수부대가 때렸느냐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공수부대가 때렸다는 군 과거사위의 주장은 오로지 위 사이트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27.html 에 있는 농아 박인갑씨의 주장에 의거합니다. 님이 인용하신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서 친구들이란 박인걸과 황종호를 말합니다.
자, 위 증언에서는 임금단씨가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 귀가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은 21일 오후 4시였습니다. 그렇다면, 공수부대가 김경철을 때렷다고 주장한 박인갑이 김경철군 죽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점도 그날 오후 4시 이후였습니다. 이것이 팩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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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참... 거짓말하는 기술이 기가막힌 분이시군요.
그 기사에는 유가족이 사망을 확인한 날짜를 실제로 몇일이건 20일이라 쓰고 있는데, 그마저도 또 거짓 소설을 쓰기 위해, 어디서 21일 오후 4시라는 난데없는 시간을 만들어내시는군요.
박인갑님이 말하는 오후 3시에서 4시란 18일 김경철님이 공수에게 끌려간 것을 목격한 시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초딩도 알 수 있습니다.
님이 그런 새빨간 거짓말들을 만들어내거나 말거나, 19일 새벽 3시 사망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가해자인 계엄군인데, 유가족이 사망확인을 19일에 했건 20일에 했건 님의 거짓말데로 21일에 했건 대체 무슨 소용이지요?
또한, 공수대원들과 시위대가 한창 대치중인 그 아수라장 한복판에서, 한가하게 조폭이나 시위대가 김경철님을 때렸을 것이라는 망상을 하는 님은, 정말이지 구제불능이로군요.
김경철님이 뭔 공수대원 군복이라도 입고 있어서 조폭이나 시위대가 오인이라도 했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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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자, 김경철이 공수부대원에게 맞는 것을 보았다는 유일한 목격자는 박인갑입니다. 5.18측과 군과거사위는 오로지 이 사람의 주장에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5.18민주화유공자로 포함시키며 이 즈언을 하고 있는데, 몇가지 수상한 점이 있습니다. 아래 캡쳐해 드렸듯이 박인걸은 자신을 5.18시위에 동참한 유공자임을 나타내며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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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사람들이 모두 님처럼 단순한 줄 아십니까?
군기록, 검찰기록, 목격자, 유가족 등의 각종 근거가 김경철님이 18일 오후에 공수에 끌려가서, 18일 저녁에 적십자병원에 후송되어, 19일 3시에 사망하였음을 기록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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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그런데, 과연 박인걸이 시위에 참가하였을까요? 그가 시위에 정말로 참가하였느냐의 여부가 공수부대가 그를 때렸다는 그의 주장의 신빙성 여부를 결정할 것입니다.
"김경철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농아들도 거리에 나섰다." 김경철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때가 언제인가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앞서 그는 경철이가 의식을 잃은 채 트럭에 실려 광주천 쪽으로 실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경철이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1988년에야 5.18측 월간지에 그렇게 증언하였습니다. 20일 오후 4시 넘어 귀가한 김경철 군 어머니 임금단도 전혀 언급 안합니다. 설사 박인걸이 5월 20일 오후 4시 이후에 김경철군 사망 사실을 김경철군 가족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해도 그가 그 소식을 듣고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시외버스 공용 정류장으로 달려갈 수 있는 시간은 오후 5 시 이후입니다. 상식적으로 유가족을 찾아가 위로하는 것이 순서였을텐데요.
그런데, 5월 20일 오후에 그가 시위에 참가했다는 주장은 사실 성립이 불가능합니다. 그때 공수부대는 도청 분수대를 최후저지선으로 밀려 있었으니까요. 시외버스 공용 정류장에는 그날 군인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이데아님은 박인걸이 5월 19일 오후에 시위에 참가했다고 주장하시려 할지 모르는데요. 그런 주장 또한 불가능합니다. 시위대와 계엄군간에 시외버스 공용 정류장에서 충돌이 있었던 유일한 날은 5월 18일이었습니다. 5월 21일 정오까지 도청을 점령한다는 일정에 따라 5월 19일의 시위대 주 공격목표는 금남로였습니다. 더욱이, "김경철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농아들도 거리에 나섰다." 이 주장은 그가 5월 18일에 시위에 참가하였다는 주장이 불가능하게 합니다. 김경철군 사망일자를 5월 19일로 본다 하더라도 "김경철씨가 5월 19일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농아들도 그 하루 전인 5월 18일 거리에 나섰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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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참... 치유가 불가할 정도로 심각한 병이 있으신 님이로군요.
애시당초 어처구니없는 자의적인 근거 해석으로 모든 역사적 증거들을 확 뒤엎어 버리려고 시도하시는 님이시로소이다.
당시의 공용터미널은 지금의 대인동 롯데백화점 자리로서, 불과 1백미터 정도 옆에 금남로5가가 있고, 금남로5가를 사이에 두고 광주일고와 대각선 위치에 서로 수백미터 이내에 인접해 있으며, 금남로5가를 거슬러 올라가면 카톨릭센터를 지나 금남로1가 즉 도청이고, 공용터미널에서 광주일고의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광주역입니다.
금남로 옆 골목 즉 광주일고쪽에서 도청쪽으로 직선방향으로 충장로가 5가부터 1가까지 이어지고, 광주일고에서 공용터미널 반대쪽으로 광주천변 너머에 광주공원이 있습니다.
즉, 모두 도청에서 가까운 곳들입니다.
박인갑님의 시위참여가 18일입네 19일입네 20일입네 공용터미널입네 백날 님이 망상을 하셔도, 모두 계엄군이 몰려있던 도청 주변 수키로 이내의 장소들인대다가, 이중 님의 소원대로 공용터미널을 언급하며 기록된 일지만 굳이 발췌해보아도, 아래와 같은 무수한 기록들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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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16:00
- 태평극장 부근의 시위대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진출. 여기에서 공수부대와 충돌함.
- 계엄군이 시내에 나타나기 시작. 전시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을 연행하기 시작. 반항하면 구타. (월간조선, 1985. 7)
- 33대대 금남로 이동. 35대대 충장로 이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광주일고 입구 금남로상 횡단보도, 진압봉과 총검으로 무장한 공수부대, 해산 방송과 함께 무자비한 진압 개시. 체포명령과 함께 도망가는 행인까지 무차별 구타 체포. (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사계절(1988). 이하 10일간의 취재수첩이라 약칭)
19일
04:00
- 35대대는 11특전여단의 작전통제하. (전교사 교훈집)
- 11여단 61대대에게 33대대 및 35대대의 거점 인계. (특전사 전투상보)
- 제31사단 병력의 재편성
1) 제7공수여단의 임무를 제11공수여단이 맡는다.
2) 제7공수 제33대대는 사단 예비병력으로 운용한다.
3) 제7공수 제35대대는 제11공수에 배속시켜 진압작전에 출동시킨다.
4) 제11공수여단의 시내배치 내용
가. 제11공수여단 제61연대:공용터미널
나. 제11공수여단 제62연대:장동지역
다. 제11공수여단 제63연대:계림동지역
라. 제7공수여단 제35대대:고속터미널 (전교사 작전일지)
14:50
화염방사기를 시위진압에 사용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 운집한 시민들이 소방서 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공수들에게 돌을 던졌다. 계엄군들이 달려오면서 화염방사기를 공중을 향해 쏘아 댔다. 총구에서 불이 뿜어나오는 살상용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는 것을 보자 한편 두렵기도 했지만 공수들의 잔악함에 치가 떨렸다. 소방서 뒤쪽에는 장갑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 공수들과 시민들이 있었다. 시민들이 욕설을 퍼붓고 야유를 보내도 처음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던 놈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갑자기 최루탄을 쏘며 시민들을 무작위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 민가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그곳으로 들이닥친 공수들에게 온몸을 구타당하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그들이 나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우리는 트럭에 실려 조선대학교 체육관으로 갔다. 오후 3시경이었다. 몇 시간 동안 그곳에서 살인적인 구타와 기합을 받은 후 저녁 6시경 전경버스에 실려 상무대로 갔다." (구술 : 최충용, 현사연 조사)
16:40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학생 2천여 명 소요중. 제11공수 제61대대 (27/172), 진압중. 전교사 11병참 정비대대(11/360, 방위병), 노동청, 수협도지부, 대성학원, 전신전화국, 대인슈퍼체인 부근 4차로에 배치 완료. (육본 상황일지)
16:50
* "청년 3명을 태우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을 지나는데 공수들이 달려들어 차를 세웠다. 그들은 청년들을 차에서 끌어내려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나를 향해 '이 자식도 데모하고 다니는 놈들을 실어다주니 똑같은 놈이다'면서 상스런 욕을 내뱉고 곤봉으로 후려쳤다. 나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 병원이었다. 상처를 치료받은 후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갔다. 동료기사들이 한쪽에 모여 공수들의 만행을 이대로 보아넘길 수 없으니 우리들도 힘을 합쳐 시위를 하자고 했다. '내일 무등경기장에서 기사들이 모여 대대적으로 차량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했으니 모두 참석하자'고 말했다." (구술 : 정영동, 현사연 조사)
17:30
- 광주일고 앞 광주공과기술학원에서 2층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는 학원생, 교사, 사무원 등 40명을 특전대원들이 연행.
- 현재 5백여 명이 대인동 소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 모여서 군병력과 대치중(민간인 1천여 명 관망).
- 금남로 2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재운집한 시위군중 2백여 명의 강력한 저항으로 장갑차 2대 출동하여 분산시키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 있는 소방서 앞에서 5백∼1천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시내 진출을 시도하다 최루탄을 뿌리며 저지하는 계엄군에 밀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로터리까지 밀려났다. 공수 중대병력이 소방서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는 공중전화 박스와 가드레일을 부수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후문 쪽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우리는 보도블럭을 깨서 공수들을 향해 무수히 던졌다. 몇몇 청년들이 공중전화 박스 뒤에 몸을 숨기고 서서히 공수들을 향해 접근하자 최루탄이 날아왔다. 다시 시내를 향해 전진하자 공수들 뒤쪽에서 장갑차가 정면으로 돌진해 와서 바리케이드를 부숴버렸다. 이런 진압과정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시위 군중이 점차 불어나자 광남로에서 군용트럭 10여 대가 들이닥쳤다. 공수들이 시위대의 앞뒤에서 포위하면서 최루탄을 수없이 발사했다. 완강히 버티던 우리는 거의 질식상태에 이르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구술 : 이재의, 현사연 조사)
17:40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민간인 1천여 명 완전히 분산시킴. (계엄사 상황일지)
18:00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시체 쌓여
- 시외버스 공용버스터미널 주차장에는 7, 8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무등경기장 스탠드 아래쪽에는 10여 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날 공수대원의 대검에 찔리거나 몽둥이에 맞아죽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주차장의 시체는 시외버스 공용버스터미널 로터리 광장에서 시위하던 군중들이 차량으로 수송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이같은 시체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부녀자나 노인들에게까지 무차별 난타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머리통을 때려 즉사시켰다', '임신부를 죽였다'는 풍문들을 사실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물이 된 셈이다.
K씨(40)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저는 이날 낮 시골에서 올라오는 어머니를 마중하러 공용터미널에 갔었읍니다.
그러나 시외버스들이 제대로 운행되지 않아 돌아오려고 광남로 쪽으로 나 있는 문을 나와 걸어오는데 시외에서 버스가 들어오는 입구 안쪽에 시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어요. 아마 7, 8구는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 제가 놀란 것은 맨 위 시체가 엎어져 있었는데 등에 X표로 칼자국이 나 있더군요.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18:30
- 광주공원 광장에서 특전대원들이 대학생 8명을 팬티만 입힌 채 '원산폭격'이라는 기합을 주고 있음. (시청 상황일지)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1천여 명 운집, 제11공수 61대대와 대치. 19:30 완전 해산(육본 상황일지)
19:20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2천 명의 학생 해산. (육본 상황일지)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시위군중 5백 명 군경과 대치. (전교사 작전일지)
19:40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시위중이던 학생, 시민 5백여 명은 군경의 강력한 진압으로 완전 분산. (계엄사 상황일지)
21:20
- 35대대 광주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점령. (특전사 전투상보)
20일
16:00
- 한일은행 앞 시위대 2백 명 운집. (계엄사 상황일지)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도 공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지하도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는 공수들의 동태를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지하도로 도망가는 여학생을 보고 공수 한 명이 쫓아가는 것이 보였다. 공수는 여학생을 끌고 지하도 위로 올라온 뒤 곤봉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여학생은 미친 듯이 소리쳤지만 공수는 더욱 악랄하게 굴었다. 대검을 들고 여학생의 옷을 갈기갈기 찢었다. 순식간에 옷은 모두 찢어져 흘러내렸고 팬티만 입혀져 있었다. 여학생의 몸은 이곳저곳을 대검에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다. 공수는 여학생의 가슴에 대검을 들이대고 '찔러 죽여버려야 해, 너는 간첩이야!'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 여학생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공수는 한 손으로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젖혔다. 여학생은 반항도 못 하고 내팽겨쳐졌다. 이 광경을 본 나는 온몸이 부르르 떨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세상에……. 세상에' 할말을 잃고 서 있는 나에게까지 공수들이 쫓아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뛰어 전남대 정문까지 도망갔다." (구술 : 김연태, 현사연 조사)
20:10
- 금남로에 버스 2대와 군중 1만여 명이 군경의 제지로 후퇴, 분산.
- 노동청 앞 3천여 명은 도청을 향하여 진입 시도중.
- 일부는 MBC 방송국 앞을 통과하면서 화염병을 MBC에 던지며 MBC 방송국 셔터 를 파괴.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의 5천여 명은 화학탄 발사로 분산.
- 전남매일 앞 2천 명은 애국가를 부르며 군경과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21:00
* "밤늦게 시위군중과 함께 월산동 파출소로 갔다. 경찰은 이미 도망가고 한 명도 없었다. 이날 낮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데모를 했을 리 만무한 어린 아이의 손을 묶어 탱크의 총신에 매달아놓고 빙글빙글 돌리던 공수의 만행에 치를 떨었던 나는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 기물을 부수고 서류에 불을 질렀다." (구술 : 김결, 현사연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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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인근지역들을 모두 배제하고 굳이 공용터미널로만 한정해봐도 이와같이 무수한 기록들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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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우리는 장갑차 속으로 끌려 들어갔어요." 이 말 또한 거짓말이지요. 7공수에 무슨 장갑차가 있습니까? 그리고 시민군 장갑차가 시민들을 장갑차 속으로 끌어당기는 일은 있었을지언정, 군인들이 그렇게 한 적은 없었어요. "어깨에 무궁화 하나를 단 군인이 쌍안경을 들고 진두 지휘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 말 역시 새빨간 거짓말이쟎아요. 7공수에서 장갑차 타고 시위진압 지휘한 소령이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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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참... 7공수에 장갑차가 있건 없건, 지원병력인 전교사(상무대) 기갑학교, 31사단 등은 자대내에서 손가락만 빨아먹고 있었답니까?
장갑차가 기록된 자료만 한정해봐도 아래와 같이 무수히 많은 기록들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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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10:50
- 무력시위를 감행중이던 군용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광남로 사거리에서 장갑차 4대씩을 앞세우고 금남로 시위대를 포위 압축.
- 학생, 시민 등이 금남로 사거리에서 5백여 명의 경찰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 시위군중 5천 명으로 늘어남.
- 광주은행 본점과 광주관광호텔 앞, 각 3백여 명의 시위대, 경찰과 투석전(화염병 투척). (신동아, 1985. 10)
11:10
- 관광호텔 앞에서 시위학생 3백여 명, 돌과 각목으로 군경과 대치, 장갑차 2대로 군경이 방어(107명 검거, 외신기자 5, 6명이 취재). (전교사 작전일지)
12:00
* "금남로 양쪽 인도에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운집해 있었고, 차도에 선 공수대가 이끄는 장갑차가 서서히 운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밀어버려!' 하는 지휘관의 외침이 들렸다. 순간 공수들이 인도의 시민들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거리에 서 구경하던 시민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수들은 도망치다 넘어진 사람을 붙잡아 곤봉으로 실신할 때까지 때렸고 골목으로 도망친 시민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피투성이를 만들어 끌고 갔다." (구술 : 장막동, 현사연 조사)
14:50
화염방사기를 시위진압에 사용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 운집한 시민들이 소방서 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공수들에게 돌을 던졌다. 계엄군들이 달려오면서 화염방사기를 공중을 향해 쏘아 댔다. 총구에서 불이 뿜어나오는 살상용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는 것을 보자 한편 두렵기도 했지만 공수들의 잔악함에 치가 떨렸다. 소방서 뒤쪽에는 장갑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 공수들과 시민들이 있었다. 시민들이 욕설을 퍼붓고 야유를 보내도 처음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던 놈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갑자기 최루탄을 쏘며 시민들을 무작위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 민가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그곳으로 들이닥친 공수들에게 온몸을 구타당하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그들이 나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우리는 트럭에 실려 조선대학교 체육관으로 갔다. 오후 3시경이었다. 몇 시간 동안 그곳에서 살인적인 구타와 기합을 받은 후 저녁 6시경 전경버스에 실려 상무대로 갔다." (구술 : 최충용, 현사연 조사)
15:14
- 조선대에서 전차 1대, 장갑차 1대, 트럭 22대에 병력을 싣고 도청 쪽으로 내려옴. (시청상황일지)
16:50 최초의 발포
-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 동원빌딩 앞에 고장난 장갑차 1대에 학생 150명이 접근하자 장갑차에서 발포. 초중고생 4명 중상. 일부는 계엄군이 싣고 감.(시청 상황일지)
* "전신전화국 앞에서 계엄군 진압에 밀려 계림극장 앞으로 갔다. 장갑차 한 대가 시민들 사이에 포위되어 있었다. 가까이 접근해 보니 장갑차의 눈 역할을 하는 양옆의 감시경이 깨져 있었다. 한 시민이 볏단에 불을 붙여 장갑차 바퀴에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주어 다시 불을 붙이고 장갑차 뚜껑에 올려놓았다. 그때 뚜껑이 열리더니 총을 쏘아댔다. 총소리에 놀란 시민들이 순식간에 흩어지자 '공포탄이니 놀라지 말고 모이라'고 소리쳤다. 잠시 후 귀청을 찢는 듯한 총소리가 나고 옆에 있던 조선대부속고생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총에 맞은 학생을 보고 시민들이 당황해 있는 틈을 타서 장갑차는 총을 겨눈 채 사라졌다." (구술 : 위성삼, 현사연 조사)
* "군용 장갑차 한 대가 계림동 동원예식장 건너편 도로에 정지해 있었다. 시민군들이 지푸라기에 불을 붙여 장갑차에 올려놓자 갑자기 해치가 열리더니 M16 총구가 나왔다. 그와 동시에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 총소리에 놀란 나는 도망치다, '시민 여러분! 공포탄입니다. 속지 말고 다시 모입시다'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아스팔트 위에 불꽃이 파다닥 튀었다. 나는 도망가려고 애를 썼으나 하체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총알이 복부를 통해 좌측 엉덩이를 뚫고 나갔다. 주위에 있던 시민들이 계림파출소 부근의 병원으로 나를 옮겨줬다. 그때 밀려온 공수들이 우리가 병원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 병원으로 최루탄을 쏘아댔다. 나는 배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과 최루탄가스 때문에 실신해 버렸다." (구술 : 김영찬, 현사연 조사)
17:30
- 광주일고 앞 광주공과기술학원에서 2층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는 학원생, 교사, 사무원 등 40명을 특전대원들이 연행.
- 현재 5백여 명이 대인동 소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 모여서 군병력과 대치중(민간인 1천여 명 관망).
- 금남로 2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재운집한 시위군중 2백여 명의 강력한 저항으로 장갑차 2대 출동하여 분산시키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 있는 소방서 앞에서 5백∼1천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시내 진출을 시도하다 최루탄을 뿌리며 저지하는 계엄군에 밀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로터리까지 밀려났다. 공수 중대병력이 소방서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는 공중전화 박스와 가드레일을 부수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후문 쪽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우리는 보도블럭을 깨서 공수들을 향해 무수히 던졌다. 몇몇 청년들이 공중전화 박스 뒤에 몸을 숨기고 서서히 공수들을 향해 접근하자 최루탄이 날아왔다. 다시 시내를 향해 전진하자 공수들 뒤쪽에서 장갑차가 정면으로 돌진해 와서 바리케이드를 부숴버렸다. 이런 진압과정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시위 군중이 점차 불어나자 광남로에서 군용트럭 10여 대가 들이닥쳤다. 공수들이 시위대의 앞뒤에서 포위하면서 최루탄을 수없이 발사했다. 완강히 버티던 우리는 거의 질식상태에 이르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구술 : 이재의, 현사연 조사)
- 가톨릭센터 부근에서 시위대 2백 명 군경에 강경히 대치. 장갑차 2대를 출동 시켜 강력대치.
- 금남로에서 시위군중 1천5백-2천여 명 재결집. (전교사 작전일지)
18:00
- 금남로 2가 가톨릭센터 앞에 운집한 시위군중 2백여 명은 장갑차 2대와 완강한 군경의 진압으로 분산되었음. (계엄사 상황일지)
20일
16:25
- 가톨릭센터 앞의 시민, 학생이 장갑차 1대와 군의 최루탄에 의하여 중앙극장까지 밀려 일부 고등학생 합세. (시청 상황일지)
19:00
- 계엄군은 장갑차 1대를 앞세우고 도청 앞에서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19:45
- 공수부대는 전남일보 앞에 장갑차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다는 듯이 버티고 있었다. 차량행렬도, 시민들도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20미터쯤의 간격을 두고 대치했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금남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청 쪽과 학동 쪽, 충장로 입구에서도 길을 가득 메운 시위군중이 도청 광장으로 진출하려 하고 있었다. 공수부대원은 금남로만 맡고 있었다. 다른 길은 경찰이 맡아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수없이 쏘아대면서 도청 광장으로의 전진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러니까 도청 광장을 둘러싼 네 길목에서 군경과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어 도청 광장과 군경은 시민들에게 포위된 셈이다. (10일간의 취재수첩)
21:40
*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장을 지나 계림동파출소 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몽둥이, 연탄집게, 삽 등으로 무장한 수천 명의 시민이 있었고, 선두에는 네 명의 어린 아이가 태극기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청년들이 계림동 파출소에 돌을 던지자 어른들이 말렸다. 우리는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 언론사는 자폭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MBC 방송국 앞으로 갔다. MBC 방송국 앞 도로에는 장갑차를 앞세운 군인들이 버티고 있었다. 시민 대표 몇 명이 계엄군 책임자에게 가서 평화적으로 시위하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돌아서 가려는데 장갑차가 돌진해 왔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 오자 나는 재빨리 골목길로 뛰었다. 잠시 후 전신전화국 앞으로 갔다. 장갑차에 꼬마 2명이 깔려죽었다고 아우성이었다. 직접 확인해 보려고 MBC 방송국 앞으로 갔다. 시체는 없었으나 배에서 튀어나온 내장이 피에 젖어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나서 속이 확 뒤집혔다. 흥분한 사람들은 '도청으로 가자. 망할 놈의 MBC 방송국을 불질러 버리자'며 제각기 외쳐댔다.
사람들이 MBC 방송국 건물로 들어가려 하자 '그러면 진짜 폭도로 몰리니까 경고로 유리창만 깨자'고 누군가 만류했다. 사람들이 돌을 던져 MBC 방송국의 유리창을 산산조각냈다. 그런 뒤 노동청 쪽으로 갔다. 그곳에도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버티고 있어 MBC 방송국 쪽으로 되돌아왔다. 그때 갑자기 '펑' 하는 소리 가 나면서 MBC 방송국 건물이 불타기 시작했다. 내가 봤을 때는 MBC 방송국 건물 바로 옆에 위치한 변전소에서 불길이 솟았다." (구술 : 박중렬, 현사연 조사)
21일
01:00 31사 화염방사기 소대 출동
. 인원 : 2/31명
. 발연기 4대
. 화염방사기 10대
. 차량 6대 (전교사 작전일지)
- 광주세무서 뒤의 노동청 반소.
- 새벽 1시 15분 전후해 광주세무서에 불길이 올라. 광주세무서 곁에 2개 주유소가 있는데 여기의 휘발유와 경유를 빼 불을 질러. 노동청에서 국세청 사이 현장에서 남자 1명 여자 1명이 죽었다는 말이 있음. 계속 함성. 발포. 도청 주변에서 계엄군이 장갑차로 밀어붙이고 있다. (월간조선, 198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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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장갑차를 기록한 자료들만도 이처럼 무수하게 많습니다.
아래는 참고사진으로 5.18 당시 7공수와 함께 배속된 M-113 장갑차의 광주시내 진입사진입니다.
아래는 기종 확인을 시켜드리기 위한 참고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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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자, 박인걸이 이런 증언으로 어떤 포상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의 증언은 허위증언입니다. 확인되었지요? 인정하십니까? 박인걸이 시위에 참가하였다는 증언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럴진대 김경철군 가해자가 군인들이었다는 그의 증언은 결국 허위주장이었던 것입니다.
김경철군 사망 후에 자기가 시위에 참가했다는 박인걸의 위의 주장은 김경철군 사망 후에는 시외버스 공용 정류장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충돌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허위주장임이 드러났는데요. 오후 3시나 4시경 의식을 잃은 사람들이 상무대로 연행되었다는 증언 또한 거짓말입니다. 김대중의 인맥이었던 광주향토사단 사단장 정웅 소장이 7공수33, 35 대대에 시위자들을 상무대로 연행해 오라고 명령을 내린 시간은 오후 4시 40분이었습니다. 실제로 연행이 가능했던 것은 오후 6시 이후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후 3시에 김경철군이 연행되었다는 주장은 사실성립이 불가능하고요. 정웅 소장 명령은 과격시위자들과 주동자들을 연행해 오라는 것이었지, 의식잃은 사람들을 연행에 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무대가 무슨 병원입니까? 그 어느 지휘관이 의식잃은 사람들을 상무대로 연행해 갑니까? 5.18측 사주를 받은 박인걸이 픽션소설을 써서 오랫동안 국민을 속여왔지만, 그의 픽션소설은 사실성립이 도저히 불가능해요.
김경철군을 공수부대원이 죽였다는 주장은 결국 아무런 목격자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런 주장이 사기꾼들의 주장이었다면 이제 남은 가능성은 김경철군에 대한 가해자는 광주조폭이나 시위대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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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자! 이와 같이 역사학도님이 앓고 있는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김경철님은 18일 오후 3~4시경에 공수에 붙들려 구타당한 뒤 군트럭에 실려 끌려가셨고, 생명이 위독하자 18일 저녁 적십자병원에 후송되었으며, 19일 새벽 3시에 군이 사망을 기록하고 있으며, 유가족이나 박인갑님이 그의 죽음을 19일에 확인했건 20일에 확인했건, 위에서 이미 자세히 알아본 바와 같이 19일이나 20일 내내 공용터미널은 물론이요 도청부근 수키로 이내에서 장갑차와 공수대원들이 맹활약했음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이제라도 님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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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자, 다음 주제로, "헬기 기총소사 유언비어"에 대한 주제로 넘어갑시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37.html 에 있는 흑색선전 " "헬리콥터의 기총소사로 온몸이 벌집이 되어 죽은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이 흑색선전이 아니라고 우기시는 이데아님이 이렇게 인용하셨습니다.
<* "도청 쪽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이동하는 헬기에서 지축을 울리는 기관총소리와 불빛을 내는 것을 봤다. 헬기는 지상 1백30미터 정도의 높이로 날아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동교(불로동다리) 주변을 향해 쏘았다고 들었다." (구술 : 조비오, 현사연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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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제가 달랑 그것만 제시했었던가요?
끝장토론 20에서 헬기기총 소사와 관련하여 제가 제시한 기록들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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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09:00
- 전교사 무장헬기 지급 건의. (전교사 작전일지)
09:45
- 전교사 무장헬기 10대 지원 승인 접수. (전교사 작전일지)
10:00
- '광주시민 단결하라' 외치고, 여고생들도 태극기 들고 앞장. 주부, 꼬마들도 각목, 갈쿠리 등을 데모대에 건네주고, 도청 도경이 고립돼 군, 경은 헬기로 진압 화기 공급, 고속버스 시내에 못 들어오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13:25
- 헬기 이동보고
1. 보안요원 3명 수송
. 일시 : 용산 출발 11:02, K-57 도착 12:55
. 기종 및 대수 : UH-1H 1대
2. 작전지원 헬기 이동
. K-16 11:15, CAC 도착 13:10
. 기종 및 대수 : UH-1H 10대 (육본 상황일지)
14:00 월산동 로터리 헬기 기총소사
* "우리가 탄 차가 월산동 로터리에서 백운동 쪽으로 달리는데 도청 쪽에서 헬기가 날아왔다. 헬기에서 총을 쏘며 지나갔다. 그 총에 맞은 여학생 한 명이 가로수 아래로 픽 쓰러졌다. 나는 얼른 차에서 뛰어내려 그 학생에게로 갔다. 어깨에서 피가 흘러 헝겊으로 팔을 동여맸는데도 계속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상처를 지혈하고 학생을 차에 태워 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 (구술 : 이광영, 현사연 조사)
* "도청 쪽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이동하는 헬기에서 지축을 울리는 기관총소리와 불빛을 내는 것을 봤다. 헬기는 지상 1백30미터 정도의 높이로 날아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동교(불로동다리) 주변을 향해 쏘았다고 들었다." (구술 : 조비오, 현사연 조사)
* "서석병원 담에 기대 있는데 양동 쪽에서 계림동 쪽으로 날아가는 헬기에서 총을 쏘며 지나갔다." (구술 : 김정기, 현사연 조사)
17:00 헌혈하고 나오던 여학생,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즉사
* "기독교병원에 피가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고, 시민들이 헌혈한 피를 각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수거하여 기독병원에 보급했다. 우리가 탄 차가 양림동을 지날때 한 여학생이 차를 세웠다. '헌혈하러 가는 길인데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주세요' 라고 말했다. '어른들이 헌혈을 많이 하고 있으니 학생은 그냥 집으로 가라'고 해도 한사코 헌혈을 하겠다고 하자 기독교병원까지 태워다주었다.
우리는 차를 돌려 전남대 부속병원으로 갔다. 병실이 부족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복도에 방치되어 있는 환자를 급히 기독교병원으로 옮겼다. 기독병원에 도착해 보니 한쪽에서 사람들이 울부짖고 있어 그쪽으로 가봤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조금전 헌혈하겠다고 조르던 그 여학생(박금희)이 머리에 총을 맞아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곳에 있던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 학생이 헌혈을 하고 집으로 가려고 병원 마당을 지나갈 때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고 했다." (구술 : 이광영, 현사연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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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보안사가 제출한 전교사 [전투상보(충정작전결과)] 기록에 의하면, 18일에서 21일 동안 UH-1H 11대, 500H 7대가, 22일과 23일 UH-1H 10대, 500H 7대, G-1기 5대, 코브라 2대가 동원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단 그렇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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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그런데, 위의 1989년 2월 24일자 광주청문회 영상물에서 우리는 광주사태 "당시 항공여단장이었던 송진원 씨 등 6명은 오늘 광주에서 헬리콥터 기총 소사가 있었다고 주장한 조비오 신부와 이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어머니의 노래’를 방영한 최창봉 문화방송 사장, 김윤형 프로듀서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습니다"라는 뉴스를 듣습니다. 기총 소사는 본래 조비오 신부가 기관총 사격이라고 표현한 사건을 말하는데요. 그런데, 실제로는 기관총을 쏜 쪽이 시민군이었으며 아래 사진이 바로 5월 21일 시민군이 헬기를 향하여 사격할 때 사용했던 그 기관총입니다. 이렇게 큰 기관총은 정찰용 헬기 안에 들어갈 수 없어요. 조비오 신부가 아주 무식한 유언비어를 퍼뜨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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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당시 투입된 기종은 UH-1H로서 제원상 조종사 1명 외에 병력 11~14명을 태울 수 있고, 무장은 7.62mm 기관총2정, 12.7mm 기관총, 2.75인치 로켓발사기 등을 탑재 가능합니다.
베트남전 영화 한번도 못보셨는지요. UH-1H가 베트남전에서 맹활약한 바로 그 기종입니다.
아래는 참고 사진입니다.
님은 조비오 신부님이 무식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 하셨는데, 이것만 놓고 보자면 조비오신부님보다 님이 더 무식하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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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5월 21일 오후에 도청광장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그러나 그 요란한 총성은 시민군 기관총이 내는 소리였습니다. 그날 시민군이 발사했던 기관총 사진이 위에 있는바, 그 사실을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屋上에서 LMG 2정을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軍헬기를 향해 사격을 했다.
14시 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 남도청 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對空 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다. 15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放送 을 하던 같은 機種의 61 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 (http://blog.daum.net/sionvoice/11045264 )
즉, 진실은 시민군 편에서 헬기를 향하여 기관총을 쏜 것이었음에도 광주청문회 때는 거꾸로 말한 사기꾼의 큰 목소리가 이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조비오 신부의 엄청난 사기극이 출발이었던가요? 5.18측은 "민족과 역사의 심판"이란 제목의 그들의 증언록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렇게 그때 나는 우선 도청 앞 분위기를 살펴보려고 밖으로 나왔다. 사제관을 나와 성당 앞 철문에 막 이르렀을 때이다. 헬기가 기수를 광주공원 쪽으로 향해 가면서 광주천 불로동 다리쯤의 상공에서 불빛이 50센티미터에서 거의 1미터 정도로 쭉 뻗으면서 '드드득 드드득 드드득' 세 번이나 갈기는 기총사격 소리가 들렸다.
혼비백산한 나는 반사적으로 담벽에 바짝 붙어서서 헬기를 응시하였다. 순식간에 헬기는 공원을 넘어 월산동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너무도 놀라 가슴이 뛰고 다리가 후들거려 성당을 나서지 못하고 사제관으로 되돌아갔다. 다른 신부들도 기관총소리에 매우 놀라 밖으로 나오면서 웬 기관총소리냐고 겁먹은 표정으로 묻는 것이었다. 나는 헬기에서 기총사격을 한 소리라고 말했다.> (5.18기념관 DB에서 자세히 보기 )
조비오 신부는 헬기에서 기총사격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단지 시민군 기관총이 헬기를 향하여 사격하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헬기 조종석에는 그 큰 기관총이 들어있을 공간이 없다. 그 기관총은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屋上에 설치된 시민군 기관총이었던 것입니다. 조비오 신부는 그의 거짓말을 1989년 2월의 광주청문회 때까지 끌고왔을 뿐만 아니라, 1995년 검찰 수사로 조비오 신부의 거짓말이 전부 들통이 났는데도 여전히 "金永三정부는 광주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며 차기 정권에 그 처리문제를 기대하고 있었다"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1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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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뭐 투입된 UH-1H기종이 LMG(라이트 머신 건, 경 기관총)를 충분히 무장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아셨을테고요.
음... 나름대로 각종 자료를 신중히 검토해 보았는데, 비전문가인 제가 섣불리 판단할 문제는 아니나, 이것 만큼은 님의 주장에도 신빙성이 있다고 보입니다.
다만, 조비오 신부님이 목격한 발포가 정녕 전대의대 옥상에서 발포한 것을 오인한 것이라 가정 하더라도, 보안사가 제출한 전교사 [전투상보(충정작전결과)]의 기록을 보면, 21일까지 무장헬기인 UH-1H 11대와 500H 7대가 동원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위 제가 제시한 기록 중에도 목격자의 기록을 제외한 군 기록만을 발췌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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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 전교사 무장헬기 지급 건의. (전교사 작전일지)
09:45
- 전교사 무장헬기 10대 지원 승인 접수. (전교사 작전일지)
13:25
- 헬기 이동보고
1. 보안요원 3명 수송
. 일시 : 용산 출발 11:02, K-57 도착 12:55
. 기종 및 대수 : UH-1H 1대
2. 작전지원 헬기 이동
. K-16 11:15, CAC 도착 13:10
. 기종 및 대수 : UH-1H 10대 (육본 상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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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UH-1H 무장헬기가 11대나 동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과연 발포가 없었을지는 충분히 의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위에 제시한 목격자들의 증언들이 조비오 신부님이 목격한 시간대와 대략 앞뒤로 3시간 가량의 갭이 있는데, 일단 동일한 것을 목격한 것으로 간주해보더라도, 이외에 24일에 송정리에서 무장헬기의 공격을 받았다는 아래와 같은 증언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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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15:00
송정리에서도 헬기 기총소사
* "21일 남평으로 가서 무기를 탈취해 22일 새벽 광주로 들어오던 중 효천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받고 되돌아갔다. 3일간을 광주에 들어오지 못하고 시위대들과 함께 남평, 나주 등지에서 보냈다. 24일 송정리를 거쳐서 가기로 합의하고 송정리 비행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계엄군과 우리측 대표가 한참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나는 차에서 내려 주변 마을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조그만 냇가를 따라 걷고 있을 때 헬기가 나타나 나를 향해 총을 쏘아댔다. 나는 그때까지도 총을 메고 탄띠를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헬기는 계속 나를 따라오면서 총을 쐈으나 다행히 적중시키지는 못했다." (구술 : 이정섭, 현사연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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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투입된 무장헬기 11대 중 용산에서 11:02에 보안요원 3명을 싣고 12:55에 도착했다는 1대의 UH-1H 무장헬기는 특히 주목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착했을 그즈음이, 도청 앞 집단발포가 시작된 바로 그 시간이니까요.
과연 그 보안요원 3명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요?
더이상의 분석은 전문가들에게 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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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자, 조비오 신부는 시민군 기관총이 헬기를 향하여 발포하는 소리를 듣고, 헬기에서 쏜 것으로 오해하고 거꾸로 말해 이른바, 헬기 기총소사 유언비어를 퍼뜨렸던 것이며, 그 유언비어가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37.html 유언비어 대자보에서는 "헬리콥터의 기총소사로 온몸이 벌집이 되어 죽은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이란 유언비어로 뻥튀기기 되었던 것입니다.
헬기 기총소사로 온 몸이 벌집이 된 민주열사가 있는가요? 없다면 그 대자보의 그런 문구들은 흑색선전입니다. 그럼에도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37.html 유언비어 대자보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겠다는 것인가요? 광주망신, 나라망신 시키는 일을 기여코 하겠다는 것인가요? 일단 그런 유언비어 대자보들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 그 내용이 영문으로 공개되기 시작하여 그 유언비어의 사실들이 폭로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광주사람들이 그토록 세계적으로 사기꾼의 명성을 날리고 싶다 하더라도, 조국의 명예 또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2010년 1월 24일 역사학도
http://cafe.daum.net/issue21/3Fdk/4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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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그것이 실제 헬기의 발포였건 아니었건, 발포를 목격한 사람은 조비오 신부님만 계신 것이 아니라 위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많은 목격자분들이 계십니다.
즉, 설령 그것이 진정 전대의대 옥상에서 쏜것을 오해한 것이었다고 단정하더라도, 당시를 목격한 시민들은 실제로 헬기가 쏜것이라고 오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그러니 그렇게 소문이 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님의 주장대로 그것이 유언비어라고 치부해버린다 하더라도, 24일 그 대자보를 만든 시민들 입장에서는 그것을 실제라고 생각하고 쓴 것이지, [상무대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식의 전혀 얼토당토 않은 고의적인 거짓말을 쓴 것이 아니므로, 절대로 흑색선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아래에는 광주시민들에 대한 지독한 악담들을 늘어 놓으며 글을 마무리하셨는데, 그 대자보가 선정이 될지 안될지는 모르나, 선정이 된다면 이와 같이 전후사정을 자세히 설명해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조국의 명예요?
님과 같은 분들을 제외하면, 이미 세계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으며, 또한 6.25 이후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입니다.
저또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내나라에 자부심을 갖고 사랑하고 있으며, 또한 저를 포함 내 부형제 모두가 군필자로서 우리 군을 사랑합니다.
불운한 시대에 우리 군이 한 야심가의 야망 성취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여,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자국민들을 용공으로 몰아 총부리를 겨누었던, 결국 일부 시민들의 무장봉기까지 유발했던 불행한 역사는, 미화해야만이 명예로운 것이 아니라, 잘못을 반성하고 참회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가져야 참으로 명예로운 것입니다.
더 이상의 반론은 사양합니다. 이것이 직업이 아니기에 더이상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또한, 포털에서 우연히 검색해보니, 님이 역사학도.쥬넥 등의 닉네임으로 동아일보 게시판이나 노노데모 등 여기저기에 글을 퍼트리신 것을 보았는데, 저를 5.18측의 대표논객이라 소개하시며 제 반론글들은 죄다 빼버리시고 님의 글들만 몽땅 게시하셨더군요.
너무하시는거 아닙니까?
저는 5.18측의 대표논객이 결코 아니며, 제가 그렇게 주장한적도 없거니와, 5.18측도 저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님의 글을 의기양양 퍼나르는 사람들이 많아, 보다 못해 의협심이 발동하여 끝장토론을 제의한, 광주시민들 중에서 좀 별종인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 제 의사와 달리 님의 임의로 저를 5.18측의 대표논객이라며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행위를 당장 멈춰주시고, 정히 글을 퍼트리시려거든 제 반론글들도 빠짐없이 함께 게시하실 것을 당부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