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력을 지닌 불상
유골이나 미이라에 대한 신앙은 불상을 향한 불교예식안에 집중된다. 불상 역
시 미이라, 유골, 유골함(산무덤)과 똑같이 생명력을 갖고 있는 '영광스러운 육
체'이다. 불상에 생명력을 주는 의식은, 붓다의 눈에 눈동자를 적거나 주문으로
생기를 부어넣는 등 여러 방법으로 행해진다. 불상 안에 유골을 집어넣는 것도
이런 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불상은 스투파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유골함
이다. 그런가 하면 기능상으로는 미이라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7세기와 10세기
사이의 중국이나 그 이후 일본의 불교사를 살펴보면ㅇ, 미이라를 불상으로, 불상
을 미이라로 변환시킨 과정을 추저해 볼 수 있다.
불교의 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지 말고 매장했다가 3년
후에 장례식을 치러달라는 지시를 남긴다면, 이는 분명히 스승과 제자드 ㄹ모두,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그 시신이 저절로 미이라가 되어 있길 이대한다는 뜻이
다. 때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고인으 사후 명서오
가 그 종파의 번영은 확실한 보장을 받게 된다. 미이라를 모신 사원은 순식간에
순례의 중심지가 되며, 미이라의 주술적인 능력에서 오는 은총을 조금이라도 받
으려고 도처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큰 덕
을 보는 것은 사원이다. 관광이나 포교의 차원에서 수많은 혜택과 기증이 쏟아
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이라가 되길 기대한 스승과 제자들에게 항상 이렇듯 좋은 결과만 나
타나는 것은 아니다. 3년이 지나 무덤을 열었을 때, 부패했거나 부로안전한 미이
라가 되어 전시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스승의 불완전한 영적 능력
을 보충하기 위해 손질을 가하려는 유혹이 커진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8세기부
터 미이라에 래커 칠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연적으로 미이라화함으로써
영적 능력이 일단 증명된 고인의 미이라를 보존하기 위해 래커 칠을 했다. 그러
나 그것을 보고싶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단 하나의 미이라로 채워주기
에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래커 칠을 함으로써 미이라는 불상처럼 보여
단순히 래커 칠을 한 불상과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사람
들은 죽은 자를 화장하고 난 뒤에 생긴 재와 점토를 섞어 불상을 제작하자는 생
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은 매우 경제적인 해결책이었다. 진품인 미이라는 아니었
지만, 단순한 전시물 이상인 고인의 분신을 가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단 한 번
의 화장에서 나온 재와 뼛조각들을 이용해 여러 개의 불상을 만들 수 있었던 까
닭이다. 그러나 이 해결책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래커칠으 ㄹ한 미이
라와 불상을 구분할 수 없게 되자, 미이라가 굳이 필요치 않게 된 것이다. 그러
자 더 경제적인 방법이 등장했는데, 고인의 형상대로 아예 목상을 만들어 그안
에 고인의 재를 집어넣는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불상은 기능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미이라화한 고인의 육신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 주로 사용된 것이
바로 이 방법이다. 일본에서는, 예를 들어 선종Zen 스승들의 조상들에서 볼 수
있는 소위 '리얼리즘'은 미술사가들에게 종종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리얼리
즘에는 전혀 예술적 의도가 담기지 않았으며, 문제의 불상의 고인의 분신, 즉 미
이라처럼 여겨진다는 사실과만 관계를 갖는다.
그리하여 선종Zen의 스승인 이큐 선사의 불상마다 '생명력을 주기 위해' 머리
와 얼굴에 머리카락과 수염을 심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른 상들과 마찬
가지로 유리로 만든 눈동자를 박아 넣었다. 제단 위를 비추는 어슴푸레한 빛 속
에 반짝이는 눈동자는 불상이 흡사 '살아 있는듯한' 느낌을 갖게 하므로, 그 앞
에 서면 마치 미이라 앞에 선 듯 오싹해진다. 실제로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서
구적 의미에서의 초상화가 아니고, 분신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조상들은 살아
있으며, 기이한 힘을 소유했다고 간주된다. 그런데 이 힘은 정확히 말해, 의식을
통해 행하진 '점안식'과 불상 내부에 들어 있어 생명을 부여하는, 고인의 잔재물
에서 비롯된다.
결과적으로, 신들이나 붓다가 불상 안에 존재하게 되는 것은 불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식을 통해 가능해지는 셈이다. 이렇게 불어넣어진 생명력은 단순한
불상에 '힘'을 부여하여 '영적인 불상'으로 변화시킨다. 그러나 '점안'을 비롯한 다
양한 의식에 의해 실현되는 이 '생명불어넣기'는 약간 모순된 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밀교에서는 불상의 봉헌이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뜻하는데, 이는 봉헌식을
통해서 불상이 삼매에 빠져들어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때 '생명력이 정지되
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불상의 삼매는 곧 미이라의 삼매를 생각하게 한
다. '생명력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는 그것이 죽음으로 여겨진든(미이라의 경우)
탄생으로 여겨지든(불상의 경우) 간에, 집단을 쇄신시킬 수 있는 힘을 축적한다.
그리하여 미이라를 본떠 만든 불상 역시 삶과 죽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중간매체가 되는 것이다.
선종Zen에서는 고인이된 스승의 초상화가 '불법의 본질적인 형상'으로 여겨진
다. 중국의 전통적 장례식에서 사용되는 초상화와 여러 변에서 유사한 불교 성
자의 초상화는 육신으 ㄹ대신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분신의모
습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은 분명코, 고인이 아직 관 속에 누워 있는데도 불구하
고 그를 대신하여 초사오하가 장례식의 대상(그보다 주체)이 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것은 바로 이 초상화를 위해서이다. 이는 왕의 장
례식 때 '관 속에 누워 있는 시신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진행되는 장례식이, 실
물 같은 고인의 초상화에 집중되고 있는 것'과 마찬갖이다. 로마의 황제들이나
기독교 국가의 왕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과 똑같이, 선종(Chan/Zen)지도자들
의 육체도 썩어 없어지는 물리적 육체와 썩지 않는 사회적 육체로 분리되어 인
식되었던 것 같다.
이처럼 초상화는, 죽은 스승이 화장이나 미이라화를 통해 정화된 육체(사리,
또는 실물 같은 미이라)로 나타나게 될 때까지 그의사회적 육체를 지탱하는 기
능을 갖는다. 이렇게 하여 정화된 육체는 '집단에 소속된' 조상 가운데 한 명으
로 환생의 근거가 된다.
불교의 장례식은 인간의 육체가 죽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불멸성을 지니고, 개
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확증해 준다. 정확히
말해서 불교의 장례식은, 유한하고 개인적인 육체를 불멸하는 사회적인 육체로
변환하거나 혹은 전자에 있던 생명력을 후자로 보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유골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의식을 위한 불멸
의 육체를 강조한다는 데 있다.
불상은 살아 있는 자들과 고인(붓다) 사이, 혹은 산 자와 그의 불멸하는 본성
사이에 있는 중간 매체이기도 한다.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볼 수
있는 붓다왕의 형상도 이렇게 설명된다. 왕은 신격화된 자신의 형상을 중간매체
로 하여 신과 관계를 맺는다. 왕의 상을 붓다의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를 붓
다로 만드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7세기에 쇼토쿠 태자느 ㄴ자신을 붓다의 모습
으로 표현케 한다. 여기서 굳이 교만의 흔적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불교 의식과 불상의 능력에 대한 믿음의 표징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다. 이 능력에 의해 산 자는 다소 마술적으로 자존자 속에서 하나가 되어 투
영된다. 마찬가지로 스리랑카의 왕들도 붓다의 유골을 붓다 자신으로 여기는 동
시에 그들 자신 유골의 마술적인 분신으로 여겼다. 심지어 왕좌에 자기들 대신
유골을 모셔놓기도 할 정도이다. 불상이나 유골과 마찬가지로 스투파 역시 붓다
와 왕 자신을 대신한다. 그러나 평민들은 자신의 형상을 붓다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사후의 유골을 중간 매체로 삼아 투영하는 방식을 택해야 했다. 그래서
붓다의 상 안에다 자신에게 속해있던 물건, 말하자면 자신의 분신이 될 만한 유
품을 안치했다. 죽은 자의 분신인 유품은 마수ㄹㄱ으로 붓다와 동일시됨으로서,
이로움을 가져다 주는 힘을 얻어낸다. 이 힘은 역시 마술적으로 사자의 생전에,
혹은 죽은 뒤에 그 유품의 소유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간혹 불상 속에서 골동품
이 발견되는 것은 십중팔구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불상, 무덤, 그
리고 유골응ㄴ 신성한 에너지의 '변환기들'인 셈이다.
많은 붓다와 신들, 사자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를 주시한다. 하
지만 이들이 다시 생명력을 가족 존재 하기 위해서는 의식에 따른 중간매체가
필요하다. 그 중간 매체는 보통 유골, 스투파, 불상이며, 그뿐 아니라 각인된 물
체, 바위에 새겨진 음각, 혹은 (성전 안에 기록한) 스승의 말씀도 이에 속한다.
이들 대용 신체들은 하나같이 자체의 힘을 지닌다. 아니, 그보다는 스승이 깨달
았던 지고의 진리들이 이제 이러한 물체들 속에 전이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이런 관저멩서 생각하면, 붓다 자신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초상화, 산
불상이며, 최상의 실체인 불법, 즉 다르마의 재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물체
들을 기능상 붓다와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은, 불교 재례에서 본질적인 요소를 이
루는 탑돌이라는 의식에서 증명된다. 탑돌이란,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살아 있는
붓다의 주위를 돌 듯이 스투파나 불상, 유골의 주위를 시계 바느 ㄹ방향으로 도
는 의식을 말한다. 이것은 스투파, 불상, 유골을 이들이 나타내는 (더 정확히 말
해서 이들이 '존재케 하는')우월한 실체와 동일시하려는 의식이다. '절대적인 존
재와 비존재ㅔ 대한 철학을 깨달은 붓다들은 제단이라 할 수 있는 시간에 매인
육체와 동시에, 그들의 무덤이었던 단 하나의 장례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잊
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