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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詩 한 수, 양귀비의 죽음
冀馬燕犀動地來(기마연서동지래),
북방의 말과 무소 갑옷으로 무장한
반란군이 지축 흔들며 쳐들어오자,
自埋紅粉自成灰(자매홍분자성회).
황제는 양귀비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자신 또한 결국엔 재가 되었지.
君王若道能傾國(군왕약도능경국),
군왕으로서 진작 그녀가
나라 망칠 줄 알았더라면,
玉輦何由過馬嵬(옥연하유과미외).
황제의 가마 굳이 마외(馬嵬) 언덕을 지나
피란 갈 일 있었겠는가.
―‘마외(馬嵬)’ 제1수·이상은(李商隱·812∼858)
안녹산(安祿山)의 난(亂), 피난을 가는 현종
-755-763년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녹산과 사사명 등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
당(唐) 현종(玄宗)이 총애한 양귀비(楊貴妃)가 죽음을 맞은 건 안녹산의 난 직후 피란길에서였다. 그녀의 죽음에 얽힌 역사의 기록. 피란 이틀째, 황제 일행이 마외(馬嵬) 언덕길에 다다르자 호위하던 금군(禁軍)이 ‘반란의 화근’인 귀비를 죽이지 않으면 발길을 떼지 않겠노라고 했다. 이에 황제도 어쩌지 못하고 귀비와 결별을 고했고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귀비를 불당으로 데리고 가 목을 졸랐다.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시인은 마외 언덕에서의 변고를 떠올리며 미색에 취해 국사를 망친 현종을 호되게 질타한다. 군주(君主)로서 경국지색(傾國之色)을 경계했다면 난리를 초래하지도, 또 피란길에 나설 필요도 없지 않았냐는 것이다. 연작시로 된 제2수의 풍자는 더 신랄해서 ‘왜 사십여 년이나 황제 노릇을 했으면서, 아내 막수(莫愁)를 챙겨준 평민 노씨보다도 못한가’라고 했다.
海外徒聞更九州(해외도문경구주),
바다 건너 다시 구주가 있다고 헛되이 들었는데,
他生未卜此生休(타생미복차생휴).
이생에서 끝났으니 저승에서의 생은 예측할 수 없다네.
空聞虎旅傳宵柝(공문호려전소탁),
황궁 경비대의 딱딱이 소리도 쓸쓸하게 들리고, (虎旅: 황실경비대)
無復雞人報曉籌(무부계인보효주).
새벽 시간을 알리는 계인은 이곳에 다시 없네 (雞人: 시간을 알리는 관리)
此日六軍同駐馬(차일육군동주마),
그날 황제의 금군이 다같이 말을 멈췄지만, (同駐馬... 양귀비를 죽이라고 한 것을 의미)
當時七夕笑牽牛(당시칠석소견우).
그때 칠석날엔 견우를 비웃었다네.
如何四紀爲天子(하여사기위천자),
어떻게 사십 여 년을 천자(현종) 옆에 있으면서 (紀: 12년, 현종 재위 45년을 말함.)
不及盧家有莫愁(불급노가유막수)!
노씨 집안의 막수보다 못하게 되었는가? (莫愁... 민간의 여자를 뜻하며 ‘근심이 없다’는 뜻의 중의어로 쓰임)
―‘마외(馬嵬)’ 제2수·이상은(李商隱·812∼858)
한편 양귀비에 대한 시인 묵객들의 찬사, 황제와의 비극적 사랑을 안타까워한 노래도 넘쳐나는데, 그중의 백미(白眉)는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장한가(長恨歌)’. 시인이 장장 840자를 할애하여 저들의 사랑을 동정하고 찬양한 장편 서사시다. 양귀비를 ‘후궁 미녀 삼천 명이나 되지만, 삼천 명 받을 총애를 한 몸에 다 받았다’라 묘사했고, ‘하늘과 땅 장구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이들의 한(恨) 면면히 이어져 끊일 날 없으리라’며 그 애틋한 사랑을 못내 아쉬워했다.
✵ 이상은(李商隱, 812~858)의 자 의산(義山). 호 옥계생(玉谿生). 허난성[河南省] 친양[沁陽] 출생. 처음 우당(牛黨)의 영호초(令狐楚)에게서 변려문(폿儷文)을 배우고 그의 막료가 되었으나, 후에 반대당인 이당(李黨)의 왕무원(王茂元)의 서기가 되어 그의 딸을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불우한 생애를 보냈다. 그의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 경향은 이 소외감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그는 변려문의 명수이긴 하였으나 그의 시는 한(漢)·위(魏)·6조시(六朝詩)의 정수를 계승하였고, 당시에서는 두보(杜甫)를 배웠으며, 이하(李賀)의 상징적 기법을 사랑하였다. 또한 전고(典故)를 자주 인용, 풍려(豊麗)한 자구를 구사하여 당대 수사주의문학(修辭主義文學)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작품에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시킨 서사시, 또는 위정자를 풍자하는 영사시(井史詩) 등이 있으나, 애정을 주제로 한 《무제(無題)》에서 그의 창작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의산시집(李義山詩集)》 《번남문집(樊南文集)》이 있으며, 《이의산잡찬(李義山雜纂)》도 그의 저작으로 전한다.
◦ 「금슬(錦瑟)」/ 이상은(李商隱, 813~858)
錦瑟無端五十弦 금슬은 까닭 없이 왜 오십 현인가.
一弦一柱思華年 현 하나 기둥 하나에 빛나던 시절 그려 본다.
莊生曉夢迷蝴蝶 장자(莊子)는 새벽꿈에 나비에 홀렸고,
望帝春心托杜鵑 망제(望帝)는 춘심을 두견새에 붙였지.
滄海月明珠有淚 푸른 바다에 달처럼 밝은 구슬 눈물로 떨구고,
藍田日暖玉生煙 남전(藍田)에 햇살 따뜻하자 玉山은 안개를 피우네.
此情可待成追憶 이 정 어찌 추억되길 기다렸을까.
只是當時已惘然 다만 그때에 이미 망연했던 것이지.
◦「화하취(花下醉)」 꽃밭에서 취하여/ 이상은(李商隱·唐)
尋芳不覺醉流霞(심방부각취류하) 꽃 찾아 나섰다가 나도 몰래 流霞에 취하여
依樹沈眠日已斜(의수심면일이사) 나무에 기대어 잠이 든 사이 해가 저물었네
客散酒醒深夜後(객산주성심야후) 손님 다 가고 술 깨고 보니 오밤중
更持紅燭賞殘花(갱지홍촉상잔화) 다시 촛불 밝혀 남은 꽃 구경하였네.
✺ <長恨歌> (긴 아쉬움의 노래)/ 백거이(白居易, 772-846) (806년)
漢皇重色思傾國(한황중색사경국) 한나라 황제가 미색을 중히 여겨 경국지색을 찾는데,
御宇多年求不得(어우다년구부득) 다스리는 오랜 동안 얻지 못하였도다.
楊家有女初長成(양가유녀초장성) 양씨 가문에 딸이 있어 갓 장성했는데
養在深閨人未識(양재심규인미식) 깊숙한 규방에서 자라니 누구도 알지 못했소.
天生麗質難自棄(천생려질난자기) 하늘이 내린 아름다움 그대로 묻힐 리 없어
一朝選在君王側(일조선재군왕측) 하루 아침에 간택되어 군왕 곁에 있도다.
回眸一笑百媚生(회모일소백미생) 눈웃음 한 번에 온갖 교태가 나와
六宮粉黛無顔色(육궁분대무안색) 여섯 궁궐 화장한 후궁들이 낯빛을 잃었다오.
春寒賜浴華淸池(춘한사욕화청지) 봄 추위에 화청지에서 목욕을 하니
溫泉水滑洗凝脂(온천수골세응지) 매끄러운 온천물에 기름진 때를 씻는다.
侍兒扶起嬌無力(시아부기교무력) 시녀들 부축해 일어나니 귀엽게 힘이 없는 듯
始是新承恩澤時(시시신승은택시) 이때부터 새로이 황제의 승은을 입었네
雲鬢花顔金步搖(운빈화안금보요) 구름 같은 머리, 꽃 같은 얼굴과 흔들거리는 금장식.
芙蓉帳暖度春宵(부용장난도춘소) 부용휘장(연꽃을 수놓은 휘장) 안에서 봄 깊은 밤을 헤아리니
春宵苦短日高起(춘소고단일고기) 짧은 밤을 한탄하나 이미 해 높아 일어난다.
從此君王不早朝(종차군왕부조조) 이를 좇는 군왕은 조회를 돌보지 않았고
承歡侍宴無閑暇(승환시연무한가) 연회를 벌이느라 한가할 틈이 없어,
春從春游夜專夜(춘종춘유야전야) 봄이면 봄놀이 따라가고 밤이면 밤시중을 독차지했네.
後宮佳麗三千人(후궁가려삼천인) 후궁에 빼어난 미녀 3,000인이 있지만
三千寵愛在一身(삼천총애재일신) 3,000의 총애가 한 사람에 머무르니
金屋粧成嬌侍夜(금옥장성교시야) 금빛 방에서 단장하고 교태로 시중들고
玉樓宴罷醉和春(옥루연파취화춘) 옥루 잔치 끝나면 춘정에 취한다.
姉妹弟兄皆列士(자매제형개렬토) 자매와 형제 모두가 봉토를 갖게 되니,
可憐光彩生門戶(가련광채생문호) 아리따운 광채가 가문에 나는구나.
遂令天下父母心(수령천하부모심) 비로소 천하의 부모들이
不重生男重生女(부중생남중생녀)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겼네.
驪宮高處入靑雲(려궁고처입청운) 여궁(당나라 시대의 화청궁(華清宮)은 여산(驪山)에 있었기 때문에 '여궁'(驪宮)이라고도 불렀다.) 높이 솟아 푸른 구름 모여들고,
仙樂風飄處處聞(선악풍표처처문) 신선의 풍악은 바람 타고 곳곳에서 들려온다.
緩歌慢舞凝絲竹(완가만무응사죽) 느린 노래 오만한 춤이 비단결과 피리에 맺히니
盡日君王看不足(진일군왕간부족) 군왕이 종일 넋 잃고 보아도 부족하다.
漁陽瞽鼓動地來(어양비고동지래) 어양에서 북소리가 땅을 울리며 오는데,
驚破霓裳羽衣曲(경차예상우의곡) <예상우의곡>의 소리도 끊기었다.
九重城闕煙塵生(구중성궐연진생) 구중궁궐에 연기 먼지 솟아오르고
千乘萬騎西南行(천승만기서남행) 1,000대의 수레와 10,000명의 기병이 서남으로 떠났다.
翠華搖搖行復止(취화요요행부지) 화려한 깃발 흔들리며 가다가 서곤 하는데('復'은 보통 '복'이라 읽지만, 여기서는 '다시'란 뜻이라 '부'라 읽었다.),
西出都門百餘里(서출도문백여리) 도성 문에서 서쪽으로 나와 100여 리
六軍不發無奈何(육군부발무내하) 6군이 아니 움직이니 어쩔 수 없이(여기서 '6군'은 당나라 황제의 친위대를 가리키는데 금군(禁軍)이라고도 한다. 안록산의 난을 피해 당 현종이 친위군과 궁인들을 이끌고 피난할 적에, 6군의 병사들은 '지금 이런 환난이 닥침은 오직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들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벌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면서 행군을 멈추었다. 황제가 명령해도 소용이 없었으므로 병사들을 달래고자 현종은 결국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에게는 자살을 강요했다. 이때 양귀비는 마외역 근처에 있는 불당에 들어가 목을 매었다고 한다(마외병변馬嵬兵變).)
宛轉蛾眉馬前死(완전아미마전사) 눈썹 긴 미인도 군마 앞에서 죽어야만 했지.
花鈿委地無人收(화전위지무인수) 땅에 떨어진 꽃비녀 거두는 사람 없고
翠翹金雀玉搔頭(취교금작옥소두) 취교, 금작, 옥소두도 그러하네
君王掩面救不得(군왕엄면구부득) 군왕이 얼굴 가리고 구하려 해도 어쩔 수 없고
回看血淚相和流(회간혈루상화류) 차마 돌린 두 눈에 피눈물이 흐른다.
黃埃散漫風蕭索(황애산만풍소삭) 누런 흙먼지 일고 바람 쓸쓸히 부는데
雲棧縈紆登劍閣(운잔영우등검각) 구름 걸린 굽은 사다리, 검각(중국의 지명.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를 넘는 험준한 고갯길이다. 군사적 요충지라 관문이 있었다.)을 오른다.
峨嵋山下少人行(아미산하소인행) 아미산 아래에는 오가는 이도 드물어
旌旗無光日色薄(정기무광일색박) 어기(御旗)는 빛을 잃고 햇빛도 희미하다.
蜀江水碧蜀山靑(촉강수벽촉산청) 촉강 맑게 흐르고 촉산은 푸르건만,
聖主朝朝暮暮情(성주조조모모정) 황제의 마음은 날로 저물어간다.
行宮見月傷心色(행궁견월상심색) 행궁에서 달을 보니 마음 절로 상하고
夜雨聞鈴腸斷聲(야우문령장단성) 밤비에 들리는 방울소리 애간장이 끊어진다.
天旋地轉回龍馭(천선지전회룡어) 하늘 바뀌고 땅이 돌아 황제 돌아오는 길에
到此躊躇不能去(도차주저부능거) 여기 이르러 머뭇거리매 떠날 수가 없었다.
馬嵬坡下泥土中(마외파하니토중) 마외역 언덕 아래 진흙더미 속에는
不見玉顔空死處(부견옥안공사처) 고운 얼굴 보이지 않고 죽은 자리만 남았다.
君臣相顧盡沾衣(군신상고진첨의) 임금 신하 서로 보니 눈물이 옷을 적시고,
東望都門信馬歸(동망도문신마귀) 동쪽 도성문 향해 말에 길을 맡겨 가니
歸來池苑皆依舊(귀래지원개의구) 돌아와 본 황궁의 정원은 예전과 같아
太液芙蓉未央柳(태액부용미앙류) 태액지의 연꽃도 미양궁의 버들도 다름이 없다.
芙蓉如面柳如眉(부용여면류여미) 연꽃은 얼굴이요 버들은 눈썹.
對此如何不淚垂(대차여하부루수) 이런 정경을 보고 어찌 아니 눈물 흘리겠는가!
春風桃李花開日(춘풍도리화개일) 봄바람에 복숭아꽃 만발하고
秋雨梧桐葉落時(추우오동섭락시) 가을비에 젖어 오동잎이 떨어진다.
西宮南內多秋草(서궁남내다추초) 서궁과 남원에 가을 풀 우거지고
落葉滿階紅不掃(낙섭만계홍부소) 낙엽이 섬돌을 덮어도 쓸지 않네
梨園子弟白發新(이원자제백발신) 이원의 자제들은 백발이 성성하고
椒房阿監靑娥老(초방아감청아노) 초방의 젊은 시녀들도 늙어 버렸다.
夕殿螢飛思悄然(석전형비사초연) 저녁 궁궐에 반딧불 나니 더욱 처량하여
孤燈挑盡未成眠(고등도진미성면) 외로운 등불 심지 다 타도 잠이 오지 않는다.
遲遲鍾鼓初長夜(지지종고초장야) 더디고 더딘 종과 북소리에 처음으로 긴 밤을 보내는데
耿耿星河欲曙天(경경성하욕서천) 은하수 반짝이며 새벽 하늘을 넘어간다.
鴛鴦瓦冷霜華重(원앙와랭상화중) 원앙기와 차가워 서리가 겹겹이 쌓이는데,
翡翠衾寒誰與共(비취금한수여공) 비취금침 싸늘하니 누구와 함께 덮겠는가?
悠悠生死別經年(유유생사별경년) 생사를 달리한 지 아득하니 몇 년인가
魂魄不曾來入夢(혼백부증래입몽) 꿈속에서 혼백마저 만나볼 수 없다.
臨邛道士鴻都客(임공도사홍도객) 임공(장안 근처의 지명. 현재의 쓰촨성 충라이시(邛崃市)이다.)에서 온 도사가 서울에 머무는데
能以精誠致魂魄(능이정성치혼백) 정성을 들이면 혼백을 불러올 수 있다 하니
爲感君王輾轉思(위감군왕전전사) 그리워 잠 못 드는 군왕을 위해
遂敎方士殷勤覓(수교방사은근멱) 방사로 하여금 남몰래 찾게 해보았지.
排空馭氣奔如電(배공어기분여전) 허공을 가르고 번개처럼 내달아
升天入地求之遍(승천입지구지편) 하늘 끝에서 땅 속까지 두루 찾아
上窮碧落下黃泉(상궁벽락하황천) 위로는 하늘 끝, 아래로는 황천까지.
兩處茫茫皆不見(양처망망개부견) 두 곳 모두 망망할 뿐 찾을 길이 없는데
忽聞海上有仙山(홀문해상유선산) 홀연 바다 위에 선산 있다는 소문 들어
山在虛無縹緲間(산재허무표묘간) 그 산은 아득한 허공 먼 곳에 있고,
樓閣玲瓏五雲起(누각령롱오운기) 누각은 영롱하고 오색 구름이 일어
其中綽約多仙子(기중작약다선자) 그 곳에 아름다운 선녀들이 사는데,
中有一人字太眞(중일 유일자태진) 그중 '태진'(당현종이 양귀비를 여도사로 변장시켰을 때 '태진'(太眞)이란 이름을 쓰도록 했다.)이라 하는 선녀 하나 있으니
雪膚花貌參差是(설부화모삼차시) 눈 같은 피부와 고운 얼굴이 닮았다고 했지.
金闕西廂叩玉扃(금궐서상고옥경) 황금 대궐 서쪽 방의 옥문을 두드리고
轉敎小玉報雙成(전교소옥보쌍성) 소옥에게 일러 쌍성에게 말 전하니(소옥(小玉)과 쌍성(雙成) 모두 서왕모를 모시는 선녀들이다.)
聞道漢家天子使(문도한가천자사) 한나라 천자의 사자 왔다는 말 전해 듣고
九華帳里夢魂驚(구화장리몽혼경) 꿈에 깨어 놀라는 화려한 장막 안의 혼백.
攬衣推枕起徘徊(남의추침기배회) 옷을 들고 베개 밀고 일어나 서성이더니
珠箔銀屛迤邐開(주박은병이리개) 주렴과 은병풍이 스르르 열렸다.
雲髻半偏新睡覺(운빈반편신수교) 구름 같은 머리 한쪽으로 드리우고 막 잠에 깬 듯,('覺'자는 '깨달을 각'이지만, '잠에서 깬다.'는 뜻으로는 '교'라고 한다.)
花冠不整下堂來(화관부정하당래) 머리장식 안 고친 채 집에서 내려오니.
風吹仙袂飄飄擧(풍취선몌표표거) 바람 부는 대로 소맷자락이 나부낀다.
猶似霓裳羽衣舞(유사예상우의무) 예상우의무를 추는 그 모습인 듯한데,
玉容寂寞淚欄干(옥용적막루란간) 옥 같은 얼굴 수심 젖어 눈물이 난간에 흐르니
梨花一枝春帶雨(이화일지춘대우) 활짝 핀 배꽃 한 가지 봄비에 젖은 듯하다.
含情凝睇謝君王(함정응제사군왕) 정 어린 눈길 돌려 군왕에게 사뢰니
一別音容兩渺茫(일별음용량묘망) 한번 이별 후 소리와 모습 다 아련하여
昭陽殿里恩愛絶(소양전리은애절) 소양전에서 받던 은총도 끊어지고
蓬萊宮中日月長(봉래궁중일월장) 봉래궁에서 보낸 세월이 오래건만
回頭下望人寰處(회두하망인환처) 머리 돌려 저 아래 인간세상 보아도
不見長安見塵霧(부견장안견진무) 장안은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와 먼지뿐.
唯將舊物表深情(유장구물표심정) 오직 옛 물건으로 깊은 정을 표하려 하니
鈿合金釵寄將去(전합금채기장거) 자개 상자와 금비녀를 보내겠다 말했지.
釵留一股合一扇(채류일고합일선) 비녀는 반 쪽씩, 자개함은 하나씩.
釵擘黃金合分鈿(채벽황금합분전) 비녀와 자개함을 반으로 나눴으니
但敎心似金鈿堅(단교심사금전견) 두 마음 이처럼 굳고 변치 않는다면
天上人間會相見(천상인간회상견) 천상과 인간세상 사이에서 다시 보게 되리라.
臨別殷勤重寄詞(임별은근중기사)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 하는 말이
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량심지) 두 마음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비녀와 자개함만으로는 도사가 정말로 양귀비의 혼령과 만났다고 보증할 수 없으니, 현종과 양귀비만이 아는 대화를 알려주어 참임을 보증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 만난다면 비익조(암·수의 눈과 날개가 각각 하나씩이라, 암·수가 몸을 서로 의지해야만 하늘을 날고,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한다.)가 되기를 원했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련리지) 땅에서 만난다면 연리지(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가 맞닿다가 엉켜, 하나로 합쳐진 것을 뜻한다.)가 되기를 바랐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이 장구해도 끝이 있건만,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이 한은 끝없이 이어져 다함이 없네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806년(35세)에 지방의 관리로 임명되어 장안 지역에 부임했다. 어느 날 함께 술자리에서 대작하던 지인이
"장안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담긴 지방이니, 이런 역사적인 이야기는 명시인들의 손길이 닿은 시가 있어야만 후대에 널리 알려진다."
고 제안하자, 백거이가 이를 받아들여 위대한 명시 <장한가(長恨歌)>를 썼다.
당 현종은 712년에 즉위하여 성실하게 국정에 임했으나(개원성세開元盛世) 740년 양귀비를 만난 뒤 나랏일을 멀리하다가(천보난치天寶亂治) 755년 안사의 대란이 일어났고, 이듬해 756년에는 황제도 쓰촨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근위병과 신하들이 화근인 양귀비를 죽여야한다고 간하자 결국 당 현종도 사랑하는 양귀비에게 죽으라고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마외병변馬嵬兵變) 이런 역사적 일화에 백거이가 상상을 가미해 쓴 서사시가 <장한가>이다. 후반에는 죽은 양귀비가 슬퍼하는 모양새까지 그려 당 현종과 양귀비의 드라마 같은 사랑을 잘 표현한, 백거이의 대표적인 명시이다.
물론 당대의 벼슬아치이자 시인인 백거이가 전 황제를 대놓고 소재로 삼을 순 없으니, 공식적으로는 한무제와 이부인(李夫人)의 고사를 바탕으로 썼다. 그래서 첫머리부터 대뜸 '한나라 황제'(漢皇)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양씨 가문의 딸'이라고 하질 않나, (양귀비가 자결한) 마외(馬嵬)를 언급하질 않나, 양귀비의 도사 시절, 도호인 '태진'(太眞) 운운에 장안까지 이야기하니, <장한가>의 실제 모델이 누군지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수준이다.
백거이가 지극한 어조로 <장한가>에서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했음에도 불구하고, 풍자하는 뜻을 집어넣었다고 보기도 한다. 황제를 가리켜 '군왕'(君王)이라고 격이 낮은 말로 표현하고, 첫 구절에 다짜고짜
"황제가 미색을 중히 여겨 경국(지색의 미녀)을 찾는데"
하는 구절이, 그로써 나라가 기울어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군왕(현종玄宗)이 양귀비와 밤을 보내느라 조회도 보지 않고 해가 높이 뜬 뒤에나 일어난다고 하는 등, 아름다운 구절로 사랑을 표현하면서도 부정적인 면을 집어넣었다. <장한가>가 마냥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아름답게만 묘사하는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문신 장유(張維, 1587~1638)는 백거이가 <장한가>에서 침실에서 오간 은밀한 대화(연리지連理枝가 되고, 비익조比翼鳥가 되겠다는 마지막 구절을 가리킨다.)까지 서술했으니 참으로 외설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20세기 초 중국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여 2005년에 홍콩의 뉴웨이브(New wave)감독인 관금붕 감독이 정수문, 양가휘 주연으로 한 영화 장한가를 연출했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 〈이준식의 漢詩 한 수(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3년 11월 03일.(금)〉,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