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보내는 김정희의 편지
- 이천 리 대해 밧게 잇난 마암
세한도를 그리는 밤 오늘따라 대정바다는 참으로 고요합니다. 부인. 지난 달 초사흘 가복을 통해 보내주신 서책과 편지를 이 달 하순 늦게야 반가이 받아 읽으며, 이순 나이에도 천 리 뭍길과 천 리 물길 큰 바다를 건너온 그리운 묵향 내음에 그만 울컥 눈물이 솟아올라 한참이나 바다에 나가 망망한 제주바다 끝을 바라보며, 그 끝 너머 지붕과 흰 옷 입은 사람들과 낯익은 길들이 하마 뵐까 돋움 발을 하며 오래오래 서 있었습니다.
대저 그리움이란, 불시에 찾아와 대정마을 마른 풀 한 포기, 버려져 잠든 돌멩이 하나 남김없이 흔들어 깨워 윙윙윙 울리다가 바다로 달아나는 붙잡을 수도 없는 무형의 저 겨울바람만 같아, 문득문득 지난날들이 찾아올 때면 참으려 참으려 해도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들을 이제는 오랜 버릇인양 어찌할 수 없습니다.
부인 오늘 저녁도 더운물에 찬밥을 말아 먹고 내 배소 앞 늙은 소나무에 기대어 서서 날 저물고 샌다한들 내 이름 부르며 찾아올 이 없는 위리안치, 이보다 이천 리 밖 더욱 쓰리고 아픈 마음으로 외로울 그대를 생각하였습니다.
일찍이 정치와 당을 멀리하고 시와 글씨에 열중하였더라면 뜬구름 같은 한세상 은은한 묵향과 힘찬 시문으로 경영하며, 이렇게 늙어 서로 쓸쓸하고 등 시린 이 나이에 작은 초가 한 칸으로도 넉넉할 것을, 마주 대는 한 뼘 등덜미로도 치운 겨우살이 또한 지극히 따뜻할 것을, 이 밤 늦도록 홀로 먹을 갈아 세한도를 그리며 언뜻언뜻 덮쳐오는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죽음의 아득한 예감들을 애써 떨치며, 뒤돌아보노라면 내 배소 뒤 대밭 사이로 쏴쏴 몰려가는 겨울바람 소리보다 더욱 허허로운 지난 세월들을 하얀 여백으로 비워 봅니다. 우리가 다시 만나 사랑하며 살아갈 날들 또한 하얀 여백으로 묵묵히 남겨 둡니다.
- 정일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