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서 출간된 '2017 제 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젊은 작가들을 널리 알리자는 취지에 따라 출간 후 1년 동안은 보급가인 5,500원에 판매되고 있어.
이번에 수상한 작품들의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작가가 한명을 제외하고 모두 여성이라는 점.
여성작가답게 여성의 시선과 레즈비언들의 이야기,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남성의 폭력등이 적나라하게 서술된 작품들이 많아.
<임현 - 고두(叩頭)>
... 다만 연주가 떠나간 학교에는 이상한 시선만 남았단다. 어딘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정답게 도란거리다가 일순간 멈춰버렸지. 그런 자리라면 절대 끼워주지 않는데도 나는 그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겠더구나.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안 잤어요. 섹스고 사랑이고 나는 진짜 하나도 안 했어. 아무도 묻지 않는데 거기에 대고 변명할 수는 없는거 아니겠니. 그랬으므로 그렇게 쳐다보도록 나도 보고만 있었단다. 그렇게 되더구나. 떠나던 날, 유복했던 그 여학생만이 나를 배웅해주었다. 모두가 애써 모르는 척하는데도 복도에서 마주치자 허리를 숙였단다. 안녕히 가시라고. 고생하셨다고. 고마웠지. 악수를 하고 싶었다. 그애가 그러더구나. "손 치워. 이 개새끼야." 떨리는 목소리로. 끝까지 예의가 바른 학생이었지. "아, 죄송해요. 부모님께서 위급할 때 그러라고... 그래도 된다고. 그런데 제발 손 좀 치워주세요."
<최은미 - 눈으로 만든 사람>
...하지만 강윤희가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엄마는 어떻게 세상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인지 강윤희는 궁금했다. 어떤 믿음이 열한 살 딸과 스물세 살 시동생 둘만 남겨놓고 여행을 갈 수 있게 했던 것인지. 강윤희는 살아생전에 그런 얘기들을 엄마와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생각했다. 외음부의 면역 체계에는 이상이 생겼고 백아영을 임신중일 때 빼고는 소염진통제와 항생제를 달고 살아왔다는걸 백은호조차 알지 못했다. 이 세상에 강윤희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정신과 의사밖에는 없을지도 몰랐다.(74p)
... 강중식은 그렇게 말하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벤치 끝에 걸터앉은 늙은 강중식이 몸을 공벌레처럼 만 채 울고 있었다.
"그 때 내가, 그때 내가 너한테..."
강윤희는 '그때'라는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윤희야."
강중식이 강윤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도 나는..."
"..."
"손가락밖에는 안 넣었다." (78p)
<강화길- 호수ㅡ다른사람>
..."아, 씨발!"
뒷자리에서 어떤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민영은 돌아보지 않았다. 앞의 여학생도, 건너편의 여자도 뒤를 보지 않았다. 그들 모두 약속한 것처럼 계속 앞을 바라보았다. 버스기사 아저씨만 룸미러를 통해 뒤쪽을 힐끔 봤다. 그러나 모르는 척했다. 민영은 룸미러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여학생과 여자가 동시에 내렸다. 남은 승객은 민영과 남자뿐이었다. 남자는 계속 욕을 했다. 고함과 짜증이 민영의 귀에 박혀들어왔다. 버스기사도 그에게 아무 말 안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민영은 음악을 들을까도 생각했지만, 귀에 이어폰을 꽂지는 않았다. 그 상황에서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않는건 현명하지 못한 선택처럼 느껴졌다. 두 정거장만 더 가면 되었지만, 민영은 결국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벨을 누르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가, 버스가 멈추자마자 재빨리 일어나 뒷문으로 뛰어내렸다. 남자가 뒷문 바로 앞좌석에 앉아 있다는걸 그때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버스가 떠난 뒤에도 민영은 정류장에 내린 자세 그대로, 그러니까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선 자세로 정류장 바닥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소리를 지르던 순간부터 되뇌던 말을 속으로 계속 중얼거리면서.
눈을 마주치면 안돼. 눈을 마주치면 안돼. 눈을 마주치면.
안돼. (185p)
...그런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들자 내가 그를 너무 냉정하게 대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금 미안해졌다. 나는 그에게 호수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후 내게, 그를 왜 호수로 불러냈느냐고 질책하던 사람들과는 이제 연락하지 않는다. 그는 사과했다. 나는 곧장 사과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뭘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따져 물었다. 나는 정확한 말을 듣고 싶었다. 너를 함부로 대해서 미안해. 단지 그말이 듣고 싶었다. 그 말이 중요했다. 그는 말했다. 내가 장난을 받아주지 못하는 유형의 사람이라는걸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그제야 나는 그가 취해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몸이 굳어버렸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그가 손등으로 내 볼을 툭, 툭, 쳤다.
"장난이잖아. 장난도 못 받아줘?"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어느순간 갚자기 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바닥에 쓰러졌을 때도, 그 이후에도 가만히 있었다. 습관이었다.(193p)
...밤이었다. 여자는 친구들과 호프집에서 맥주를 한잔 마셨다. 그리고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동네 입구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는 걸 느꼈다. 남자였다. 여자는 걸음을 빨리했다. 남자의 걸음도 함께 빨라졌다. 열 걸음 너머에 그녀의 아파트가 보였다. 그녀는 뛰었다. 엘리베이터가 일층에 서 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 뒤,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때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는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핸드폰 키패드로 112를 눌렀다. 손이 떨렸다. 남자가 말했다.
"저기,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남자는 그녀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술집에서부터 따라왔다고 말했다. 중간에 말을 걸 틈이 없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남자가 말했다. 그녀의 집은 십오층이었고 이제 겨우 오층이었다. 그녀는 숨이 막혔다. 남자는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운동을 많이 한 사람처럼 팔뚝이 무척 굵었다. 단단해 보였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말했다. 남자가 씨익, 웃으며 들고있던 핸드폰에 숫자를 입력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중략) 남자는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보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최대한 시선을 떼지 않은채, 그러니까 그가 거절당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따듯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현관문쪽으로 팔을 뻗었고, 초인종을 미친듯이 눌러댔다. 가족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밖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집안에는 띵동 하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졌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197p)
<최은영 - 그 여름>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경도 차차 그 사정을 알게 됐다. 남자 선수들이 경기중에 여자 선수들의 몸을 만진다는 것이었다. 다른 선수들도 그런 일들을 겪지만 그저 욕을 하고 털어버리는 분위기라고 했다.
문제 제기를 한 수이에게 코치는 오히려 불쾌해했다. 운동선수가 운동이나 하면 되지 다른 일에 신경을 쓴다는 반응이었다. 그런 소리 할 시간에 운동이나 열심히 하라고. 남자애들은 원래 다 그런거고, 짓궂은 장난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건 유치한 일이라고 했다. '짓궂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줄곧 생각해왔다고 수이는 이경에게 말했다.
"비열한 말이라고 생각해. 용인해주는 거야. 그런 말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거야.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다니."(224p)
... 은지는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동생에게 아우팅을 당해 아빠와 삼촌들에게 몰매 맞은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뽑히고 이마가 찢어져 꿰매야 했다는 이야기였다. "단 한명이 필요했어요. 단 한명. 내 편을 들어줄 단 한사람. 때리지 말라고 말해줄 사람. 그런데 모두 다 구경만 하는 거죠. 남자 어른들의 일이니까 끼어들 수 없단 듯이." 은지는 자기 머리칼을 장난스레 헝클어뜨렸다.
"괜찮아요. 이제 보지 않고 사니까. 지금이 중요한 거 아니예요? 보고 싶은 사람만 보고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249p)
<천희란 - 다섯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나도 그땐 어렸으니까 말이다. 내가 믿는 우리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냐 하면, 그건 아주 평범한 사랑이었다. 내가 여자이면서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정말로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지. 그게 내 첫번째 착각이었다. 내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제외시켜서는 안 됐어. 그건 정말이지 특별한 사랑이었어야 했다. 물론 내가 여자를 사랑했고, 그래서 세상의 편견과 싸워야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든 사랑은 언젠가 깨지고 부서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랑이라도 사랑하는 순간만큼은 특별하다는 사실을 나는 좀 더 시간이 지난후에 깨달았지. 나는 다른 사람과 나의 사랑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 특별함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력이 없었던 거야. 그걸 좀더 빨리 깨달았어야 해. 그때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랑 앞에서, 평범하므로 당당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타인에게 당당할 수 없으면서 자기 자신에게 당당하다고 믿는 건 기만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게 진정 내 신념이었다면,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실은 나는 자주 흔들렸고, 흔들리는 자신을 바로 세우려고 애를 쓰고 있었던 거야. 그 사람이 나와 똑같은 선택을 하길 바란 건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중략) 그 사람이 나와 헤어진 후에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말이야.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걸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모욕을 당한 기분이 들었어. 더군다나 그가 아이를 키우며 사는 곳이 한때 우리가 함께 여행을 한 곳이었으니까. 그게 뭘 의미했겠니. 그 사람이 나를 추억하고 살아간다는 뜻이었지. 참담했다.(308p)
내가 재밌게 읽었던 작품들 중에 인상깊은 부분만 적었어. 팔이 뻐근하구먼.
다른 작품들도 그렇고 젊은 작가님들이 대부분이라 굉장히 술술 읽혀.
내년 수상작에도 여성 작가님들의 파워가 막강할 것을 기대하며 그럼 이만 안뇽~
첫댓글 백수린 존나좋앙ㅠ
폴링인폴 꼭 읽으세욥
@지은아 낭만해 무슨내용 인지 물어봐듀 되?
읽어봐야겠당 고마워
책 사서 읽어봐야겠다
다 읽었는데 여성에 대한 이야기 많아서 좋았음
헐 젤 처음 작품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
제일 처음 작품 겨우 한 단락만 읽었는데 어떤 배경이며 어떤 상황이며 무슨 일이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다 알것같다.. 어떻게 해야 저렇게 잘 쓰는걸까 신기하네
나도 저부분만 읽고 찾아읽었는데 진짜 내 예상이랑 달라서 놀랐오 대박이야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추천할게!!
@성규 없는 세상 총 맞은 세상 이 댓글 보고 궁금해져서 질렀당.. 고마워!
소수자 이야기들 다 좋더라. 특히 호수-다른 사람 좋았어.
제작년에 윤이형 루카 읽고 엄청 울었지..
강화길씨 글왤케 무섭냐 재밌겠다..
샀다.. 잘 읽어볼게
사러가야징
와 재밌겠다 다 서점가봐야지
오.. 좋더
문학동네 책들도 좋고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도 몇년전엔 찾아읽었었는데 대학들어오고나서는 책에 손을 안댔네.. 빨리 방학하면 읽고싶다
샀다 땡큐!
진짜 좋아하는 책 ! 회마다 구매하는 중
와 사야겠다
김금희 작가 진짜 대단하시다. 체스의 모든 것 재밌게 읽었어욤. 문장력 더 좋아지심 ㅠㅠ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작가분. 백수린 작가님 고요한 사건도 좋았음. 물리적 경계를 통해 감정적 경계까지 표현한 필력에 감탄했음
나도 얼마전에 올해거 샀오 이런거 좋아
지금 고두 읽었는데 여운 짤어 온갖 생각이 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