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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라는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갖는 사람이 많다. 극기 안에 개인 억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서 한 번쯤 담력을 키우고 자신감을 높이기 위해 ‘극기 훈련’의 캠프를 간다. 이때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하는 프로그램의 특성이 극기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가지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사람은 시간이 가면 자연적으로 잘 하게 되는 것도 있고 힘들게 노력해야 겨우 잘 하게 되는 것이 있다. 이것은 모두 지금의 나를 넘어서는 과정이다. 삶은 끊임없이 나를 넘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역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공동의 문법이 필요하고 누구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프라이버시가 있다.
하지만 프라이버시만 있고 공동의 문법이 없으면 함께 만나는 광장이 없어진다. ‘극기복례(克己復禮)’는 그 광장의 크기를 넓히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연애하는 남녀도 결혼한 부부도 공동의 문법을 서로 지키기에 사랑을 키워갈 수 있다.
- 295번째 원문
• 克 : 극(克)은 잘하다, 이기다의 뜻이다. 극기(克己)는 나를 극복하다는 투쟁의 맥락으로 읽을 수 있고 나를 발휘하다는 계발의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차이는 [논어]를 해석하는 커다란 이견을 대표한다.
• 己 : 기(己)는 나, 스스로의 뜻이다.
• 克己 : 극기(克己)는 지금의 나를 넘어서다는 뜻으로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극대화시키는 맥락으로 쓰인다. 극기복례(克己復禮)는 처음에 다소 떨어져있던 기(己)와 례(禮)의 사이를 메워서 둘이 닮아서 가까워지는 맥락을 나타내므로 나를 닮은 예를 만나다로 옮길 수 있다.
• 復 : 복(復)은 돌아오다, 기준으로 삼다의 뜻이다.
• 歸 : 귀(歸)는 돌아가다, 의지하다의 뜻이다.
• 由 : 유(由)는 말미암다, 따르다의 뜻이다.
• 目 : 목(目)은 일차적으로 몸의 눈을 가리키지만 여기서 총론을 실천할 수 있는 세목, 실천적 방안을 가리킨다.
• 勿 : 물(勿)은 ~하지 말라는 금지 부사로 쓰인다.
• 敏 : 민(敏)은 재빠르다, 영리하다, 힘쓰다의 뜻이다. 불민(不敏)은 머리가 나쁘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나타내는 상투적 표현이다.
• 事 : 사(事)는 일, 임무를 뜻하지만 여기서 동사로 전념하다, 일로 삼다를 뜻한다.
근대와 전근대를 나누는 기준으로 개인주의를 꼽는다. 전근대는 개인의 욕망과 가치보다 공동체의 그것을 우선시했다면 근대는 공동체의 가치와 욕망보다 개인의 그것을 높이 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문명의 역사를 기술하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타당하다. 그렇다고 전근대에 개인의식이 없었다거나 개인의 가치를 실현하려고 했던 시도가 전무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전근대의 공간에서 개인이 공동체에 대항하여 자신의 욕망과 가치를 추구하려고 하는 숱한 시도들 끝에 마침내 ‘혁명’을 통해 개인주의가 근대 사회의 주된 흐름이 된 것이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도 기본적으로 출생으로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였지만 신분을 뛰어넘은 숱한 개인들이 등장했다. 그 개인들은 신분 사회의 단점을 메우는 인물로 성장하기도 했지만 신분 사회와 다른 꿈을 꾸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군주와 유력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별도로 전문가 집단을 양성했다. 이를 “양사(養士) 현상”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인재 우대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빈객(賓客, 취업을 위해 떠돌아다니는 전문가)은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지 않는 한 자신을 거두어준 유력자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지, 유력자에게 자신의 대우와 관련해서 더 많은 조건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풍환(馮驩)은 예외였다. 풍환은 제나라 맹상군(孟嘗君)의 막하에 들어와서 자신에 대한 좋은 대우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처음엔 생선 반찬 타령을 해서 반찬을 잘 해주자 다음엔 타고 다닐 수레가 없다고 타령했다. 수레를 마련해주자 살 집이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렇게 불만을 터뜨려서 좋은 대우를 요구한 풍환은 맹상군이 풀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는 수완을 보였다.([사기] ‘맹상군열전’)
또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이 초나라로 가서 군사적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함께 갈 전문가를 아무리 수소문해도 숫자가 부족했다. 이때 모수란 인물이 스스로 적임자로 추천하여 ‘모수자천(毛遂自薦)’이라는 고사가 생기게 되었다.
이렇듯 춘추전국시대에는 알아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인물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그러한 ‘나’들이 등장하여 이전과 다른 시대를 만들어갔다. 어찌 보면 공자도 춘추시대라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날 수 있었던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었다. 만일 주나라가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면 아무리 공자라고 해도 관학(官學)의 수장이 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학(私學)을 세워서 학생을 가르치는 스승 노릇을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나’들이 등장하자 제자백가들은 각기 나름의 해법을 제안했다. 제자백가 중 법가(法家)는 ‘나’들의 욕망을 이용하여 부국강병의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더 많은 물질적 소유를 바란다. 국가는 전쟁에서 많은 적을 죽이고 농사를 지어 소득을 많이 올리는 사람에게 그 결과에 어울리는 상벌을 주었다. 그리하여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은 과거의 신분에 상관없이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법가 사상은 진(秦)나라가 서쪽 변방에 위치해 있으면서 동쪽의 여섯 나라를 정복하고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자(莊子)는 부국강병의 논리에 희생되는 개인의 고통에 주목했다. 사람들이 국가가 제시하는 길을 걸어가며 신분 상승을 했다. 이 성공은 엄청난 위험성을 무릅쓴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은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고 칼로 백병전을 벌이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온갖 위험을 이겨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장자는 부국강병의 정책에 동원된 사람들의 신음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켜서 표현했다. 후세에 장자가 남긴 이런 글들을 엮은 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 [장자]이다.
묵자(墨子)는 공자를 이어서 활약한 사상가이다. 하지만 묵자는 공자의 “극기복례”가 아닌 “극기복의(克己復義)”를 주장했다. 묵자는 당시 수많은 ‘나’들이 다른 사람의 말과 공론을 듣지 않고 자기주장을 하기 때문에 국론이 분열되고 이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묵자는 한 사람이 한 가지 주장을 내세우는 일인일의(一人一義)를 백 사람이 한 가지 주장을 하는 백인일의(百人一義)의 상황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공자의 “극기복례”라는 표현을 빌린다면 “극기복의(克己復義)”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자기만의 주장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서 전체의 대의나 일반적 기준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묵자의 “극기복의”는 극론 분열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도 있고 전체주의의 특성을 지닐 수도 있다. 양면성을 지닌 “극기복의”는 경우에 따라 현실에서 아주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여씨춘추]에 묵자의 집단을 이끌던 거자(鉅子, 영어의 Boss에 해당하는 말로 조직의 우두머리) 이야기가 있다. 진(秦)나라 혜왕(惠王)과 거자 복돈(腹) 사이에 있었던 일화이다.
복돈은 늘그막에 아들을 하나 얻었다. 애지중지 키웠지만 버릇이 좋지 않았던지 살인 사건을 저질러 사형을 받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혜왕은 복돈의 나이가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서 옥리에게 사형을 처결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복돈은 “사람을 죽이면 사형이고, 사람을 다치게 하면 벌을 받아야 한다(殺人者死, 傷人者刑)”라는 묵자의 법을 들먹이며 혜왕에게 대의에 따른 공정한 법 집행을 요구했다. 혜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복돈은 묵자의 법에 따라 아들을 처형했다. 즉 자식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아끼는 대상이지만 개인적인 관계를 참고 대의를 실행하니, 복돈은 공적인 가치를 우선했다고 할 수 있다.
거자 맹승(孟勝)은 초(楚)나라의 양성군(陽城君)과 영지를 지켜주는 맹약을 맺었다. 양성군이 초나라의 내분에 연루되어 망명을 떠나자 초나라는 양성군의 땅을 회수하려고 했다. 맹승은 양성군의 망명과 상관없이 맹약대로 영지를 지키고자 했다. 맹승은 형세와 상관없이 약속을 지켜야 사람들이 엄한 스승이나 현명한 친구, 훌륭한 신하를 찾을 때 묵자 집단에 올 것이라며 영지 사수를 결정했다. 반면 묵자 집단의 일원이었던 서약(徐弱)은 초나라와 싸운다고 아무런 실익이 없으므로 항복하자고 말했다.
이렇게 결정이 내려지자 서약은 제일 먼저 자결하고 이후에 180명이 서약의 뒤를 따랐다. 맹승은 죽기 전에 묵자 집단의 계승을 위해 두 사람을 보내 ‘거자’의 직책을 송나라의 전양자(田襄子)에게 넘기려고 했다. 두 사람이 맹승의 지시를 전양자에게 전달하자, 전양자는 두 사람에게 초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을 보좌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끝내 전양자의 말을 듣지 않고 초나라로 돌아가 맹승의 뒤를 이어 자결했다.
묵자는 개인적 이해와 욕망을 넘어서 공의(公義)를 지키는 극기복의야말로 시대의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때로는 극단적인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는 묵자의 “극기복의(克己復義)”에 비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을까? 최근에 ‘분노 조절 장애’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분노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심리적 반응 중 하나이다. 분노 조절 장애는 분노의 표출이 명백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을 알면서도 분노를 표출하는 충동을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분노를 드러내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분노를 과도하게 표출하고서 시간이 지난 뒤 스스로 후회한다. 입장을 바꿔서 누군가가 나에게 까닭 모를 분노를 지나치게 드러낸다면 ‘나’는 그것을 참기 어렵다. 따라서 과도한 분노의 표출은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 표출하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 즉 지나치게 분을 드러내는 ‘나’는 일반화시킬 수 없는 존재이다.
이승우는 지금 FC 바르셀로나 후베닐 A에서 활약하는 선수로 미래의 한국 축구를 대표할 인물로 기대가 높다. 하지만 이승우는 작년과 올해 시합 중에 뜻대로 되지 않거나 교체를 당하게 되면 과도한 감정을 표출했다. 인터넷을 찾다보면 ‘이승우 신경질’이라는 검색어가 나올 정도이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선수로 보기도 하지만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하여 스스로 실망했다고 할 정도로 거친 모습을 보였다. 거친 모습은 결국 스포츠를 사랑하는 팬들의 기대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의 군 입대를 피하기 위해 해외 원정 출산을 한다거나 비리를 저지르기도 한다. 자식이 군대 가면 고생하기도 하고 위협하다고 생각해서 ‘불법’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적 욕망을 위해 공적 요구를 저버리는 것이다. 자식을 아끼는 마음은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나의 자식만 귀하고 남의 자식은 천한 것이 아니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이 귀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와 달리 “극기복례”는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반감을 사거나 불편을 주지 않고 서로 가까워지고 호의를 가질 수 있는 길을 말한다. 스포츠에서 넘어진 상대팀 선수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면 치열한 승부를 다투는 현장에서도 그 승부를 떠나서 인간애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것은 승부를 떠나서 스포츠를 좋아하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다. 극기복례는 사람의 감정을 편안하게 담아내는 형식에 초점이 있다면, 극기복의는 감정과 무관하게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원칙에 초점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극기복례”는 ‘나’들이 함께 노닐 수 있는 공적 영역을 확충하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마시고 먹고 응대하는 사람은 ‘나’ 개인이지만 그 개인은 정말 독특하여 누구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개인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의사소통을 하며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공통성의 소유자를 말한다. 조지 허버트 미드(G. H. Mead, 1863~1931)는 이러한 개인을 “일반화된 타자(generalized other)”로 불렀다.
일반화된 타자는 나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거나 그것에만 이끌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모두에게 통할 수 있는 형식을 존중한다. 이때 사적 영역과 공적은 서로 다른 특성을 드러낼 수 있다. 사적 영역은 공유되면 자아의 온전성이 위협받으므로 보호할 세계가 되는 반면 공적 영역은 나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확장시킬 수 있는 ‘일반적인 내’가 노니는 세계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