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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길사한(成吉思汗), 울란바토르 동쪽에서 태어난 일은 없다.
○ 통상적(通常的)인 오늘날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의하면 : 《산재(散在)해 있던 몽고족(蒙古族)을 일통(一統)하고, 대륙(大陸)의 북부(北部) 동서(東西)지역 이만(二萬)리를 정복(征服)한 “성길사한(成吉思汗)”이 태어난 곳은, 현 몽골 수도(首都)인 ‘울란바토르’ 동(東)쪽의 알난하(斡難河) 상류(上流)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정말 이런 역사해설(歷史解說)이 진실(眞實)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옛 역사서(歷史書)나 고전(古典)에 기록(記錄)된 얘기와는 천지(天地)차이(差異)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 신원사(新元史)는 바로 원(元)나라의 역사서(歷史書)다. 그곳에는 「몽고족(蒙古族)이 동방(東方)에서 유래(由來)한 것이 아니라, 서방(西方)에서 ‘카스피해(海)’를 건너, 알난하(斡難河)가 발원(發源)하는 아불한산(兒不罕山) 아래로 이주(移住)왔다.【孛兒貼赤那與豁埃馬蘭勒,同渡騰吉思海,徙於斡難河源不兒罕山之下,生子曰巴塔赤罕.】고 서문(序文)에서 이야기를 한다.
○ 현재(現在)의 ‘외몽골’ 땅은, 당시(當時) 「몽고족(蒙古族)의 땅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등길사해(騰吉思海)는 카스피해(海)다.》 카스피해(海)를 건너왔다면 몽고족(蒙古族)은 본래 서방(西方) 땅에서 기원(起源)한다는 이야기며, 또 이들 《몽고족(蒙古族)이 “카스피해”를 건넜다면 그곳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이며, <파미르고원(高原)=총령(葱嶺)>의 서(西)쪽 땅이다.》
㉮ 몽고족(蒙古族)들이 ‘카스피 해(海)’를 건너,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을 지나, 총령(葱嶺)을 넘어, 신강성(新疆省)지방을 건너뛰고, 알타이산맥(山脈)을 넘고 넘어, 하서회랑(河西回廊)이나, 또는 북방(北方)의 ‘알타이 산(山)’을 넘어, 당노오랍산(唐努烏拉山)을 넘고 넘어, 강(江)을 건너고, 호수(湖水)를 건너, 대초원(大草原)을 뛰고, 또 뛰어 ‘울란바토르’ 동북(東北)쪽의 배특산(背特山) 아래까지 이주(移住)했다는 어떠한 정황(情況)증거(證據)도 없다. 이동사(移動史)도 없다.
㉯《현재(現在)의 ‘외몽골’ 땅은, 본래(本來) 조선(朝鮮)의 영토(領土)였다. 함에 조선(朝鮮)을 해체(解體)한 자(者)들이, 이 빈자리를 서방(西方)에 있었던 몽고족(蒙古族)들을 이동(移動)시켜, 오늘날의 ‘외몽골’ 땅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라고 주장(主張)하는 것이다.
㉰ 이것은 서력(西曆) 2,000년대의 ‘외몽골’ 인구(人口)를 보면 : 1,924년 독립(獨立)한 이후(以後), 1950년대에 외몽골은 폭발적(爆發的)인 인구(人口)증가(增加)를 보였는데, 2015년 현재(現在) 겨우 3백만(2,992,908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1,924년의 독립(獨立) 당시(當時) 인구(人口)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 두산 백과 / 러시아몽골협약(協約) : 1,912년 11월 <러시아와 외몽골>사이에 맺어진 협정(協定). / 일시 : 1912년 11월 / 목적 : 몽골왕공의 자치, 러시아의 특권 인정 / 4개조의 협정과 17개조의 부속 의정서로 되어 있다. 러시아는 몽골왕공(王公)의 자치를 인정하고, 몽골은 러시아의 여러 특권을 인정한 내용이다. 《1,911년 12월, 몽골의 왕공들은,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을 계기로,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의 승인을 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로 인해 중국과의 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몽골왕공의 요구를 극력 누르고, 자치요구의 범위를 외몽골에 한정하려고 획책하였다. 협정에서 러시아는, 형식적으로 외몽골에 대한 중국(中國)의 종주권(宗主權)을 인정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들의 영향(影響)하에 두게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대체적(大體的)인 윤곽(輪廓)을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 외몽골(외몽고)는 ‘러시아’에 의해 탄생(誕生)된 나라이다. 이 설명(說明)은 곧, 서방(西方)의 요충지(要衝地) 땅에서 살아가던 ‘몽고족(蒙古族)’들을 내쫓고, 그 땅을 러시아 땅으로 만든 다음, 반발(反撥)하던 일부(一部) 몽고족(蒙古族)들에게, 현재(現在)의 땅으로 이주(移住)시켜 버린 것이다. 조선(朝鮮)이 망(亡)하고 난 뒤, 이곳은 무인지경(無人之境)과도 같았다.《외몽고(外蒙古) 땅은, 본시(本是) ‘조선(朝鮮)영토(領土)였다’는 사실(事實)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이러한 사실(事實)에 대해,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닌, 「기록(記錄)과 그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가지고, 증거(證據)하는 이야기다.」 지형지세(地形地勢)! 자연환경(自然環境)! 이것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바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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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타(大沙陀)와 음마하(飮馬河)!…
○ 海國圖志 卷031 / 西南洋(沿革北印度西北鄰部附錄 / 邱長春西遊記(구장춘서유기(西遊記)를 보면 :
본문(本文) : 《以辛巳年二月八日啟行.辛巳,元太祖十六年,宋寧宗嘉定十四年,金宣宗興定五年,度野狐嶺在張家口外,北過撫州. : 신사(辛巳)년 2월 8일 인도(啓)하여, 야호령(野狐嶺)【장가구(張家口) 밖에 있다.】에 도착, 북쪽 무주(撫州)를 지나다. 十五日,東北過蓋裏泊,有鹽池.金史:撫州之豐利縣有蓋裏泊,在今張家口北百裏.迤東北去,自此無河,鑿沙井以汲.南北數千裏,亦無大山.馬行三日出明昌界,又六七日忽入大沙陀即大漠東北行千裏外. : 15일, 동북(東北)의 개리박(蓋裏泊)을 지나는데, 염지(鹽池)가 있어,【금사(金史)에 의하면 : 무주(撫州)의 풍이현에 개리박(蓋裏泊)이 있는데, 장가구(張家口) 북쪽 백리에 있다.】돌아 동북(東北)으로 갔는데, 이곳에는 하천이 없어, 모래에 구멍을 뚫어 우물에서 물을 긷는다. 남북 수천(數千)리에, 또한 큰 산(山)이 없다.➊ 말(馬)을 타고 3일을 나가 명창(明昌)지경에서, 또 6-7일을 가 대사타(大沙陀)【곧 대막(大漠)이다.】➋에 들어갔는데, 동북(東北)으로 천리(千里)밖이다.》
➊ 《남북(南北) 수천(數千)리에 큰 산이 없다 : 南 北 數 千 裏, 亦 無 大 山》 : 예를 들어, 몽고족(蒙古族) 철목진(鐵木眞)의 선대(先代)가, <동구라파(東歐羅巴) 또는 러시아의 모스크바 남쪽>지대에서, 카스피 해(海)를 건너,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으로 들어왔다가, 또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하여 일만 리(一萬里)를 건너 뛰어, 울란바토르 동쪽의 알난하(斡難河) 유역(流域)까지 이동(移動), 그곳에 자리 잡았는데, 이곳에서 철목진(鐵木眞)이 태어났다고 하자.
㉮ 그런데 현(現) 하북성(河北省)의 북경(北京) 북(北)쪽의 장가구(張家口)에서 동북(東北)지방으로 방향(方向)을 틀어 일천(一千)리 가량 왔다고 기록(記錄)하여 놓고 있다.
㉯ 문제는 이곳에는 남북 수천(數千)리에 큰 산(山)이 없다고 하였는데, 장가구(張家口) 동북(東北)에는 대흥안령(大興安嶺)의 남쪽 큰 산(山)【2029m】이 자리 잡고 있다. 위의 이야기대로 남북 수천(數千)리에 큰 산(山)이 없다고 한다면 :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의 장가구(張家口)로부터 북(北)쪽으로, ‘울란바토르’ 방향(方向)으로 가야한다.
㉰ 그러나 분명(分明)하게 기록(記錄)되어 있는 것은 : 장가구(張家口)로부터 동북(東北)으로 일천(一千)리밖에 와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 또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 북방(北方)의 내몽고(內蒙古) 땅에 있는 사막지대(沙漠地帶)는 근세(近世)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곳이 철목진(鐵木眞)시대에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는 이야기는, 허구(虛構)로 볼 수밖에 없다.
➋ 대사타(大沙陀)【即 大 漠】: 자치통감(資治通鑑)唐紀 26 / 玄宗편을 보면 : 《處月居金娑山之陽,蒲類之東,有大磧,名沙陀,故號沙陀. : 처월(處月)이 살고 있는 곳은 금사산(金娑山)의 남쪽(陽)으로, 포류(蒲類)의 동(東)쪽에, 대적(大磧)이 있는데, 이름은 사타(沙陀)이며, 고로 사타(沙陀)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고유명사(固有名詞)라 할 수 있다. 아무 곳에서나 “사타(沙陀)”라고 했다는 말이 아니라, 오직 이곳에서만, ‘사타(沙陀)’라고 불렀다는 뜻이다.
㉮ 대사타(大沙陀)지대(地帶)를 찾으려면 : 《금사산(金娑山)의 남쪽, 포류의 동(東)쪽》이 핵심(核心)이다. 사타(沙陀)란 ‘모래언덕’이란 뜻이니, 곧 대적지대(大磧地帶)이며, 대사타(大沙陀)라고도 한다는 뜻이다. 처월(處月)씨가 살던 곳으로, 사타돌궐(沙陀突厥)이라고도 한다.
㉯ 금사산(金娑山) : 讀史方輿紀要 / 金山 : 金娑山.金沙嶺.一名金嶺.金山在庭州東南,西州西北.此西域之金山也. : 금산(金山) : 금사산(金娑山)·금사령(金沙嶺)이며, 일명(一名)금령(金嶺)이라고도 한다. 금산(金山)은 정주(庭州)동남(東南), 서주(西州)서북(西北)에 있다. 이 산(山)은 서역(西域)의 금산(金山)이다. 山形如兜鍪,俗謂兜鍪為突厥.突厥之先,興於金山之陽.蓋以山形為號.亦謂之金沙嶺.一名金嶺.中略. : 산의 형태가 두무(兜鍪)와 같다. 두무(兜鍪)는 돌궐(突厥)이라고 전해 왔는데, 돌궐(突厥)의 선조(先祖)는, 금산(金山)의 남쪽에서 일어났는데, 산의 모양를 따서 불렀다. 또 금사령(金沙嶺)이라고도 하고, 일명(一名)금령(金嶺)이다. 又開元中,改西州曰金山都督府,亦以山名,又謂之金娑山.西突厥別部處月種居金娑山之陽,蒲類海之東,有大磧名沙陀,因自號沙陀. : 또 개원(開元)중에, 서주(西州)를 금산도독부로 고쳤는데, 역시 이 산의 이름이다. 또 금사산(金娑山)이라고 불렀다. 서돌궐(西突厥)의 별부(別部) 처월종족이 금사산의 남쪽에서 살았는데, 포류해(蒲類海)의 동(東)쪽이고. 이곳에 대적(大磧)이 있는데, 이름이 사타(沙陀)이다. 이로 인해 사타(沙陀)라 불렸다.》
➠ 금산(金山)·알타이산(山)·아이태산(阿爾泰山)·벨루하산(4506m) : 벨루하 산(山)(러시아어: Белуха, 4,506m)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산이다. 이 산은 알타이 산맥의 지류인 카툰 산맥의 동쪽에 위치해 있고, 알타이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높이는 4,506m이고 1년 내내 눈이 내린다. 동벨루하 봉(4,506m)과 서벨루하 봉(4,440m)의 2개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三月朔出沙陀,至漁兒濼,始有人煙聚落張德輝紀行雲,昌州以北入沙陀,凡六驛而出沙陀,與此正同.今為達兒海子,在克什克騰部落北.又二十餘日方見一沙河,西北流入陸局河陸局河,即臚朐河之音轉,今克魯倫河也.渡河北行,三日入小沙陀. : 3월 초하루에 사타(沙陀)➊를 나와, 어아낙(漁兒濼)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사는 취락(聚落)의 연기가 처음이다.【장덕휘의 기행에서 이르기를 : 창주(昌州)이북에서 사타(沙陀)에 들어가는데, 무릇 여섯 역(驛)에서 사타가 나오며, 이곳은 같은 곳인데, 지금 어아해자이며, 극즙극등부락의 북쪽이다.】 또 20 여일을 가니 한 개의 사하(沙河)가, 서북(西北)으로 흘러 육국하(陸局河)➋로 들어가는데, 【육국하(陸局河)는 곧 려구하(臚胊河)가 음이 변한 것으로, 지금의 극노륜하(克魯倫河)이다.】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 3일에 작은 사타(沙陀)에 들어갔다.》
➊ 사타(沙陀) : 資治通鑑 卷210 唐紀26/玄宗至道大聖大明孝皇帝上之上/先天元年 : 《辛酉,沙陀金山遣使入貢.沙陀者,處月之別種也.姓朱邪氏. : 신유(辛酉), 사타(沙陀)금산(金山)의 사신이 들어와 조공하였는데, 사타(沙陀)는 처월(處月)의 별종이며, 성(姓)은 주사(朱邪)씨이다. 處月居金娑山之陽,蒲類之東,有大磧,名沙陀,故號沙陀. : 처월(處月)이 살고 있는 곳은 금사산(金娑山)의 남쪽(陽)으로, 포류해(蒲類海)의 동(東)쪽에, 대적(大磧)이 있는데, 이름은 사타(沙陀)이며, 고로 사타(沙陀)라고 하였다.》
㉮考異曰:薛居正五代史後唐太祖紀曰:太祖姓朱邪氏,始祖拔野古,貞觀中為墨離軍使. : 고이(考異)에서 이르기를 : 설거정(薛居正)의 오대사(五代史) 후당(後唐) 태조(太祖)기에서 이르기를 : 태조(太祖)의 성씨(姓氏)는 “주사(朱邪)”씨이다. 시조(始祖)는 “발야고”이다. 정관(貞觀)중에 “묵리군사”였다. 太宗平薛延陀,分同羅,僕骨之人,置沙陀都督府,蓋北庭有磧曰沙陀,因以名焉. : 태종이 설연타를 평정하여 동라, 복골 인을 나누어 사타(沙陀)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였다. 북정(北庭)에 적(磧)이 있는데 이르기를 “사타(沙陀)”라 하며, 이것으로 인하여 이름이 되었다. 永徽中,以拔野古為都督.其後子孫五世相承,曾祖盡忠,貞元中繼為沙陀府都督. : 영휘(永徽) 중 발야고는 도독(都督)이 되었으며, 그 뒤 자손(子孫) 5세를 계속 계승하고, 증조(曾祖) 진충에 이르렀는데, 정원(貞元) 중에 사타부(沙陀部) 도독(都督)을 이었다.》
㉰ 歐陽修五代史記曰:李氏之先,蓋出於西突厥,本號朱邪,至其後世,別自號曰沙陀,而以朱邪為姓,拔野古為始祖.其自序云沙陀者,北庭之磧也. : 구양수 오대사(五代史)기(記)에서 이르기를 : 이씨(李氏)의 선조는 서돌궐(西突厥)에서 나왔는데, 본 호는 “주사”이며, 그 후세에 스스로 호칭해 이르기를 “사타”라 하였으며, “주사”를 성(姓)으로 하였고, 발 야고는 시조다. 그 스스로 “사타 사람은 북정(北庭)의 적(磧)이다”라 하였다. 蓋沙陀者大磧也,在金莎山之陽,蒲類海之東,自處月以來居此磧,號沙陀突厥. : 모든 “사타”는 “대적”이다. “금사 산”의 남쪽(陽)에 있으며, “포 류 해”의 동쪽이다. “처 월”이래로 “적(磧)”에 살았으며, 호칭하기를 “사타돌궐‘이라 하였다.》
※ 옛날에 지명을 정할 때 산(山) 남(南)쪽이나 강(江)의 북(北)쪽을 양(陽)이라 했다.【山 南, 水 北, 日 陽】
● 사타(沙陀) : 사타(沙陀)란 ‘비탈진 모래언덕’이란 뜻으로, 사타(沙陀)돌궐(突厥)이 있던 곳이며, 이곳은 신강성(新疆省)의 천산(天山)북로(北路)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금산(金山)의 남쪽지대라고 했으니 밀이다.
사타(沙陀)란 특정(特定)특이(特異)지형(地形)을 말하는 것으로 알타이산맥(山脈) 동(東)쪽에는 존재(存在)하지 않으며, 여타(餘他)고전(古典)에서는 신강성(新疆省)지방의 특이(特異)사막(沙漠)지대(地帶)를 일컫고 있다.
●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석(注釋)에서 말하는 사타(沙陀)지방은 2개소(開所)로 압축(壓縮)된다.
① <금산(金山)의 남쪽에 사타(沙陀)가 있다.>에 따르면 : <금산(金山)은 알타이 산(山)이며, 벨루하 산(山)>으로 보면 : 사타(沙陀)는 준갈이(准噶爾)분지(盆地)를 말한다. 이곳의 반통고특사막(班通古特沙漠)지대를 말한다.
② <포류해(蒲類海) 동(東)에 있다.>에 따르면 : 포류해(蒲類海)는 언기(焉耆)와 위리(尉犁)에 있는 박사등호(博斯騰湖)를 말하는 것이니, 그 동쪽의 토노번(吐魯番:투루판)분지(盆地)의 특이(特異)지형대(地形帶)를 말하는 것이다.
➠ 이러한 곳에 있었던 특이사막(特異沙漠) 지형(地形)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사타(沙陀)”란 이름이,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하여, 일만 리(一萬里)를 건너 뛰어, 초원(草原)지대(地帶)에 붙여졌다는 것, 자체(自體)가 조작(造作)된 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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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육국하(陸局河) : 려구하(臚胊河)이며, 극노륜하(克魯倫河)>이다. 육국하(陸局河)는 : 주석(註釋)에서, 려구하(臚胊河)가 음이 변한 것으로, 지금의 극노륜하(克魯倫河)라고 하였는데, 극노륜하(克魯倫河)【陸局河 : 即臚朐河之音轉 : 今克魯倫河也】는 : 후륜호로 유입(流入)되는 하천(河川)으로, ‘울란바토르’ 동(東)쪽을 흐르는데, ‘배특령(背特嶺)=배특산(背特山)’에서 발원(發源)한다. 바로 성길사한(成吉思汗)이, 이 강변(江邊)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알난하(斡難河)」 다. 그런데,
㉮ 음마하(飮馬河)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飲馬河在漠北.本名臚朐河,或曰即西平河也.中略.明洪武五年,李文忠進兵至此,襲敗遺孽於土剌河,追至土魯渾河,大戰,窮追至騁海而還.中略.其北為兀古兒札河,又西北即斡難河矣. : 음마하(飮馬河)는 막북(漠北)에 있다. 본명(本名)이 려구하(臚胊河)이며, 혹은 곧 서평하(西平河)이다. 명(明) 홍무(洪武)5년에, 이문충이 진격하여 병사들과 이곳에 도달하여, 뒤에 남은 자들(遺孽)을 부수고, 추격하여 토노(土魯)혼하(渾河)에 이르러, 크게 싸우고, 끝까지 추격하여 빙해(騁海)에 이르러 귀환하였다. 중략. 그 북(北)에 올고아찰하(兀古兒札河)가 있고, 또 서북(西北)에 즉 알난하(斡難河)가 있다.》고 하였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알난하(斡難河) : 《玄冥河在和林東北,即斡難河也.元初興於此.中略.既而稱帝於斡難河.永樂八年.中略.賜斡難河名為玄冥河. : 현명하는 화림(和林)의 동북(東北)에 있는데, 곧 알난하(斡難河)이다. 이곳은 원(元)이 처음 일어난 곳이다. 중략. (철목진)이 알난하(斡難河)에서 황제가 되었다. 영락8년, 중략, 알난하(斡難河)의 이름을 현명하(玄冥河)로 하사(下賜)하였다.》고 하였다.
➠ 곧 육국하(陸局河)=려구하(臚胊河)=극노륜하(克魯倫河)=알난하(斡難河)이다. 명(明)나라 때는 현명하(玄冥河)라고 바꿨다. 《화림(和林)의 동북(東北)에 알난하(斡難河)가 있다면, 반대로 「알난하(斡難河) 서남(西南)에 화림(和林)에 있었다.」는 이야긴데, 알난하(斡難河)의 서남(西南)은 ‘고비사막’지대를 벗어날 수 없다. 도대체 화림(和林)이 어디냐?》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화림(和林)편에 의하면 : 《금산(金山)의 남쪽에 나눠, 원수부(元帥府)를 두었고, 대덕 11년에는 화림(和林)총관부(摠管府)를 두었으며, 황경(皇慶)초에는 영북등처행중서성(嶺北等處行中書省)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화림로를 화녕로로 하였다.》고 하였다.
➠ 《음마하(飮馬河)=려구하(臚胊河)=서평하(西平河)=려구하(臚胊河)는 곧 알난하(斡難河)》 이다. 명(明)대는 현명하(玄冥河)이다. 똑같은 강(江) “알난하(斡難河)”를 가지고, 메치고, 업어 치고,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는 뜻이다. 결국 아무리 떠들어 봐도 몽고(蒙古)때의 “알난하(斡難河)”다.
㉰ 알난하(斡難河)는 : 오논강을 말한다. 《위키 백과》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오논 강(몽골어: ᠥᠨᠥᠨ ᠭᠣᠣᠯ 오논 요울, 러시아어: Онон)은 러시아와 몽골을 흐르는 강으로 유역 길이는 818 km이다. 헨티 산맥의 동쪽에서 발원을 한다. ‘인고다 강’과 합류하여 ‘실카 강’을 이룬다. 칭기즈 칸이 이 강(江) 부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알난하(斡難河)라고 한다.
이러한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조작(造作)은, 필연적(必然的)으로 승자(勝者)에 의한 복수(復讐)라고도 할 수 있다. 패자(敗者)는 말이 필요(必要)없으니 말이다. 아래를 보자.
㉱ 중국역대인명사전 : 《칭기즈칸(成吉思汗) : 1155년 추정 ~ 1227년 / 원(元)나라의 태조(太祖)(재위, 1206-1227). 몽고걸안부발아지근씨(蒙古乞顔部孛兒只斤氏)로, 본명은 테무친(鐵木眞)이다. 바이칼 호 근처에서 출생했다. 태어난 연도에 대해서는 1155년과 1162년, 1167년 등의 이설이 있다. 태화(泰和) 1년(1201) 자다란 부족의 자무카를 격파하고, 타타르와 케레이트를 토벌하여, 동부 몽고를 평정했으며(1203), 군제(軍制)를 개혁한 뒤, 서방의 알타이 방면을 근거지로 하는 나이만 부족을 격멸하고(1204) 몽고 초원을 통일했다. 6년(1206) 알난하(斡難河) 강변에서 홀리늑대【忽里勒臺, 忽里臺는 큰 朝會라는 뜻】를 열고, 이때부터 칭기즈칸이라 부르면서 몽고제국(蒙古帝國)을 건립했다.》고 전한다.
㉲ 중국역사년대표에 의하면 / 太祖(成吉思汗,Genghis Khan,1162-1227)라고 하였지만, <인명사전에서는 1155년 추정>이라고 하였다.
●《철목진(鐵木眞) 곧 성길사한(成吉思汗)은 알난하(斡難河)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중국역대인명사전에서는 바이칼호(湖) 주변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한다. 바이칼호(湖)는 알난하(斡難河)에서 북(北)쪽으로 일천(一千)여리 쯤 떨어져 있다. 또 출생(出生)년도(年度)도, 태어난 곳도, 모두가 추정(推定)이라고 하며, 또 그곳의 지형지세(地形地勢)도 전혀 다르다. 과연(果然) 성길사한(成吉思汗)이란 인물(人物)이 있었긴 한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도 철목진(鐵木眞)에 대한 상세(詳細)한 이야기는 진행형(進行形)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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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結局) :《철목진(鐵木眞) 곧 성길사한(成吉思汗)이라는 몽고(蒙古)황제(皇帝)에 대한 이야기와 그 영토(領土)에 대해서도 명확(明確)하지 않고, 추정(推定)한 이야기일 뿐이다.》라는 거다.
➌ 해국도지(海國圖志)의 육국하(陸局河)는 : 《려구하(臚胊河)=극노륜하(克魯倫河)=알난하(斡難河)=서평하(西平河)=음마하(飮馬河)이며, 명(明)때 현명하(玄冥河)로 개명(改名)》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사(朝鮮史)에서 음마하(飮馬河)는 무엇일까?
㉮ 계산기정 제2권 도만(渡灣) / 계해년(1803, 순조 3) 12월 19일(경진) / 《노봉구(蘆峯口) : 십리대보(十里臺堡)에서 5리 되는 지점에 있다. 산이 끊어져 길이 되었는데, 남쪽과 북쪽은 다 높은 산봉우리여서, 길이 점점 돌이 많아진다. 이는 창려현(昌黎縣)을 빠져 나가는 산협이다. 음마하(飮馬河)를 지나서 배음보(背陰堡)가 있고 또 8리를 가면 쌍망보(雙望堡)에 도달한다. 쌍망보에는 성이 있고 성 동쪽에는 돌다리 둘이 있다.》고 하였다.
노룡새(盧龍塞)【험난(險難)하기로 유명(有名)한 사막(沙漠)의 땅이었다고 한다.】
새벽에 유관의 달을 밟고 : 曉踏楡關月 / 저녁에 노룡새의 눈 뚫었네 : 夕穿龍塞雪 / 예부터 황막한 땅이라 : 古來荒漠地 / 마을과 끊긴 지 오래다 : 人煙久阻絶 / 황사에는 북방 기운 흐르고 : 黃沙朔氣流 / 백룡퇴는 천연으로 험준하다 : 白堆天險設 / 노회(老獪)한 아만(阿瞞)이 동쪽으로 출정하자 : 老瞞東出征 / 오환이 그 굴혈을 짓이겼다 : 烏桓擣巢穴 / 열흘 내내 비 멎지 않고 : 一旬雨不止 / 중략(中略).
㉯ 동문선 제8권칠언고시(七言古詩) 제 음마도(題飮馬圖) /석굉연(釋宏演)
강남의 고운 풀이 봄날 한창 살쪘는데 : 江南芳草春政肥 / 종 녀석이 하수가에서 말에 물을 먹이누나. : 奚奴飮馬河水湄
㉰ 무오연행록 제2권 무오년(1798, 정조 22) 12월14일 / 새벽 첫 닭이 울 때에 길을 떠나 음마하(飮馬河)에 이르니 말 먹이는 물이란 말이라. 옛글에 장성(長城)을 많이 일컬으며 반드시 음마하(飮馬河)를 일렀으니 이 물을 가리킨 말인가 싶더라.
● 조선사(朝鮮史)에서의 음마하(飮馬河)는 하(河)의 물을 말(馬)에게 먹이는 곳을 말하고, 이는 하(河) 곧 황하(黃河)를 일컫는다. 또 이 하(河)는 「노룡(盧龍)에 가기 위해 창려현(昌黎縣)의 산협(山峽)을 빠져 나가는 곳에 있다」는 이야기다. 곧 협곡사이에 있던 물은 음마하(飮馬河)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➍ 그렇다면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 동북방(東北方) 130km에 있는, 음마대협곡(飮馬大峽谷)은 무엇일까? 이곳은 예전에 황하(黃河)가 흘러가던 계곡(溪谷)인데, 물길이 변해서 지금 석림(石林)지대(地帶)로 유명(有名)한 관광지(觀光地)로 변모(變貌)하였다.
➎ 그런데 왜 이곳이 “음마(飮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음마(飮馬)란 <말(馬)이 물을 마신다.>는 뜻이다. 고전(古典)에 기록(記錄)된 ‘음마하(飮馬河)’란 「먼 길을 달려온 말(馬)에게 하(河)의 물을 마시게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곳을 흐르는 황하(黃河)의 별칭(別稱)이 아닐까?
장안(長安)으로부터 달려오는 많은 군인(軍人)·상인(商人)·행인(行人)·관리(官吏)등이, 이곳에서 말(馬)들에게 물을 먹이고, 황하(黃河)를 건너 서(西)쪽으로 길을 재촉했을 것이고,
구라파(歐羅巴)로부터, 서역(西域)으로부터, 많은 군인(軍人)·상인(商人)·행인(行人)·관리(官吏)등이 장안(長安)으로 가기 위해 달리다가 이곳에서 말(馬)에게 물을 먹이고, 황하(黃河)를 건너, 장안(長安)으로 가기 위해 길을 재촉했을 것이다.
➏ 그렇다면 말이다?
ⓐ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 동북(東北) 130km에 있는 옛 황하(黃河)가 흐르던 협곡(峽谷)인 음마대협곡(飮馬大峽谷)의 옛 황하(黃河)!
ⓑ 조선사(朝鮮史)의 노룡(盧龍)의 험난(險難)한 사막지대(沙漠地帶)에 있었던 음마하(飮馬河)!
ⓒ 현(現) 몽골의 울란바토르 동(東)쪽으로 흐르는 ‘극노륜하(克魯倫河)=육국하(陸局河)=려구하(臚胊河)=현명하(玄冥河)=알난하(斡難河)였다’는 옛 음마하(飮馬河)!
어느 하천(河川)이 진실(眞實)일 수 있을까? 음마하(飮馬河)란 장성(長城)과 관계(關係)가 있고, 곧 하(河)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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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몽고(蒙古)는 글란(契丹)의 소부락으로 출발(出發)했고,
② 요금(遼金)에게 정복당한 후 노예(奴隸)에 가까운 생활을 했고,
③ 신원사(新元史)에서는 : 몽고족(蒙古族)은, 돌궐(突厥)에서 왔다고 했으며, 이들은 ‘등길사해(騰吉思海)=카스피해(海)’를 건넜다【몽고족(蒙古族)은, 흑해(黑海) 연안(沿岸)과 우랄산맥(山脈) 서남(西南)쪽 타타르공화국(共和國)등지에 살던 종족(種族)들이라고 봐야 타당(妥當)하다.】고 하였다.
④ 청장관전서 제23권/ 송사전 몽고열전(蒙古列傳) : 《오환(烏桓)의 북쪽, 내만(乃蠻)ㆍ외라(畏羅)ㆍ구성(九姓)ㆍ회골(回鶻)의 고성(故城) 화림(和林) 부근에 흩어져 살며, 대대로 요(遼)ㆍ금(金)에게 조공(朝貢)하다가, 다시 달단(韃靼)에게 붙었다.》고 하였다.
⑤ 이러한 몽고족(蒙古族)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하여, 일만 리(一萬里) 동(東)쪽에 나타난다는 것을 불가능(不可能)에 가깝다. 대륙사 또는 조선사에서 말하는 몽고족(蒙古族)들이 흩어져 살던 곳을 보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알타이산맥(山脈) 부근 지명(地名)들이다.
음마대협곡(飮馬大峽谷) 석림(石林)지대
▲ 감숙성(甘肅省)의 난주(蘭州)에서 동북(東北)으로 130 Km를 가면, 음마대협곡(飮馬大峽谷)이라는 석림(石林)지대가 있다. 이곳은 과거(過去)에 황하(黃河)가 흘렀던 곳으로 물줄기가 바뀌어, 지금은 협곡(峽谷)이 되어버린 곳이다. 이곳에는 황하(黃河)와 사막(沙漠)과 석림(石林)이 있다.
2016년 09월 18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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