鄧麗君私家相冊 등려군 개인 앨범 (제3부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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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部分:无端更渡桑干水:北上的列岛(8)
까닭없이 다시 상건(桑乾) 강을 건너다: 북쪽의 열도(8)
她对现今日本能够拓宽音乐幅度来说功不可没。摇滚派、演歌派的翘楚也无法拿来形象比喻她,只能说在非常少数的畅销歌手中,
她是当中的舵手,如今令人有非常惋惜的情绪。--- 三木刚《拓宽日本音乐幅度的舵手》在东京“新宿歌谣祭”现场中。
현재 일본이 음악의 폭을 개척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녀의 공이 작다고 할 수 없다.
록앤롤, 엔카 등의 Top Star도 그녀에 비유될 만한 사람을 생각해 낼 수 없다.
단지 매우 적은 가수중 판매량이 많은 사람 중에서 그녀는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지금도 팬들에게 매우 안타까운 정서를 남기고 있다.
三木剛 [일본 음악의 폭을 개척한 선도자: 拓寬日本音樂幅度的舵手]는 동경 신주쿠 가요제 현장에 있었다.
邓丽君在东京浅草国际剧场演出,1978年5月5日摄,时年25岁。邓丽君在日本娱乐圈的人缘也非常好,许多明星也乐于同她交往,
当时的日本著名艺人森进一写过一篇《尚未意识到过世的预感》 的纪念文章,回忆最初对邓丽君的印象。与邓丽君初次见面 她在日本出道之前吧。
因为《女性自身》编辑部的人说:“有一位想拜会森进一先生的人呢,可以抽空见面吗?”刚好我有休假就促成了会面。
등려군이 동경의 아사쿠사 국제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것으로 1978년 5월 5일에 사진을 찍었으며 그 때 나이 25살이었다.
등려군은 일본 연예계의 인연도 매우 좋아서 수많은 스타도 그녀와 기꺼이 서로 왕래하였으며 당시의 일본의 유명한 연예인 [森進一]은
[尙未意識到過世的預感_아직도 세상을 떠났다는 느낌을 깨닫지 못하네] 이라는 추도의 글 한 편을 쓰면서, 등려군과의 첫 만남에 대한 인상을 되새겼다.
등려군과의 첫 만남은 그녀가 일본에 데뷰하기 전이었다. [女性自身]이라는 편집부의 사람이 森進一 선생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데,
틈을 내어 한 번 만나겠어요? 라고 물었기 때문으로 때 마침 나는 휴가를 보내고 있어서 만남이 서둘러 이루어 지게 되었다.
她好像是很喜欢唱《港都布鲁士:港町ブル-ス》,而且在台湾也大受欢迎吧,因而想和我见面。当时的印象 一般来说,所谓的东洋人亚洲人大家的容貌感觉不是很类似吗?
可是她和日本人的印象稍微不同,有光滑的圆圆的脸蛋。出道的过程 见面之后,接受了希望藉由森进的关系来制作唱片的请求,
经由我当时的制作人现在drifters所属的事务所所长井泽健先生介绍了渡边制作系列的事务所sanze,因为那时我也在渡边制作。
그녀는 [港都布魯士 : 항구 Blues;港町ブル-ス]를 아주 잘 불렀으며, 게다가 대만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으며, 그리하여서 나와 만나려고 생각하였던 것 같았다.
당시의 인상은 일반적으로 이른바 동양인 아시아인은 대부분의 얼굴에 대한 느낌이 매우 비슷하지 않지요 ?
런데 그녀는 매끄럽고 동그란 얼굴이 일본인의 인상과 약간만 달랐어요.
데뷰 과정에서 만난 뒤에 森進一(모리 신이치) 관계를 통하여 음반을 제작하고 싶다는 요청이 받아들여졌으며
나를 거쳐서 당시의 제작자 현재의 Drifters 소속 회사의 사장 井澤健이 渡邊 계열의 회사 Sanze를 소개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때 나도 渡邊 회사에 있었다.
因为事情有这样的原委,制作人也不会有感到不得已的感觉,而是以受托台湾的歌手的感觉战战兢兢的制作。
我想她最初受欢迎的歌《空港》也是希望请到对我憧憬且她很喜欢的《港都布鲁士:港町ブル-ス》的作曲家mr.lnomata kosho帮她作曲。如果不是这样,
像那样在台湾和香港可以做自己节目的人,是不用挖空心思特地跑到日本来吧。宣传活动的辛苦 她在海外本来就非常受欢迎。
但是到日本来是不会受到那样明星级的待遇的。我想所谓的辛苦是这样的意思。还有她的自尊吧。好的一方面是她有专业的自信,而且是认真且井井有条的。
사정이 이런 자초지종이었기에 제작자도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만의 가수를 부탁 받은 마음으로 전전긍긍하였다.
나는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을 받았던 노래 [空港'쿠우코]도 내가 그리워하며 또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港都布魯士:港町ブル-ス] 노래의 작곡가 lnomata Kosho가
그녀를 위해서 작곡하기를 희망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대만과 홍콩에서 처럼 스스로 프로그램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만일 이렇지 않았다면,
온갖 지혜를 짜내서 특별하게 일본으로 달려갈 필요는 없었다. 해외에서의 그녀의 홍보 활동의 고생은 전에는 매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에 와서는 이같은 스타급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나는 이른바 고생이라는 것은 이같은 생각이라고 느꼈다.
또한 그녀의 자존심이 있고요, 좋은 면으로는 그녀가 전문가적인 자신감이 있었고 게다가 진진하였으며 조리가 정연하기도 하였다.
第一次在森进一的节目中登台演出 有三四年的时间,邓丽君一直在我的节目中固定演唱。两个小时的节目中她以唱一二首歌的形式演出。
那时候,因为非常忙碌没有什么特别的印象,与其说邓丽君不如说对她母亲一直在她身边照顾她一事比较有印象,是个说话不多的妈妈。
私底下的往来 和邓丽君有家庭上的往来,她偶尔会到我家来玩。好像常和我妹妹一起去看电影吧。一直觉得是像小孩、妹妹一般。
처음으로 森進一의 프로그램 무대에 올라 공연한 것은 3,4 년간으로 등려군은 쭉 내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을 하였다.
2시간의 프로그램에 그녀는 노래 한 두 곡을 부르는 형식으로 공연을 하였다. 매우 바빴기에 특별한 인상은 없었다.
등려군과 논의하기 보다는 그녀의 곁에서 관련된 사무를 처리하던 그녀의 어머니와 쭉 논의하는 것이 나았으며 비교적 말씀이 적은 어머니이었다.
개인적으로 등려군과 집으로 왕래를 하였는데 그녀는 가끔 우리집에 놀러오곤 하였다. 늘 내 여동생처럼 함께 영화를 보러 갔었다.
언제나 마치 어린 여동생과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邓丽君小姐搬到巴黎后的印象 她搬到巴黎后也常常会在日本的电视节目中遇到。遇到她时还有“啊!邓丽君也有白头发跑出来啦”的感觉。
对于她歌唱魅力的看法 歌唱的方式非常的细致爽朗,甚至有点像沐浴在忧愁的感觉,非常动人,之所以会受到女性听众的喜爱,
因为这是现今日本女性缺乏的部分,也不会特别去迎合的听众的喜好吧! 对她去世时的感觉 吓了一跳,猜想不是骗人的吧!
因为不知道去世的原因不知道说什么才好。应该有在锻炼身体吧!她的手臂还蛮结实的呢,我常开玩笑说:“怎么回事啦?邓丽君。
등려군 샤오졔가 파리로 떠난 뒤의 느낌은, 그녀가 파리로 떠난 뒤에도 언제나 일본의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었기에,
그녀를 볼 때마다 또한 아!
등려군도 해맑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노래 부르는 매력적인 창법은, 노래하는 기교는 매우 정교하고 명랑하였기에
심지어 우수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 사람들을 매우 감동시켰는데 여성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던 까닭은
이것이 현재 일본 여성에게서 부족한 부분이기도 하는데, 특별히 팬들의 기호에 영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깜짝놀랐는데, 억측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세상을 떠난 원인을 알지 못하기에 무엇이라 말을 하여야 좋을지 몰랐다.
응당 몸을 단련하여야 하였지요! 그녀의 팔뚝은 여전히 매우 단단하였는데 나는 늘 우스개 소리를 하였다: 어떻게 된 거야? 등려군..
”我还蛮喜欢这些和她歌曲印象不同的生活趣事呢。虽然自从她搬到国外后,无法再像之前一般的往来,但是尚未意识到过世的预感啊!
总有她好像还会回到日本再一起工作的感觉。死亡对她来说实在是太早了,虽是让人震惊的骤逝,以这样的意义来说实在相当的可惜啊,
令人不胜唏嘘。
나는 여전히 이런 것과 그녀의 노래 인상과 같지 않은 생활속의 재미난 일들을 좋아하였지요.
비록 그녀가 외국으로 떠난 뒤에는 다시 전처럼 늘 오고 갈 수는 없었지만 아직도 세상을 떠났다는 느낌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네요!
늘 그녀는 마치 일본으로 다시 와서 함께 작업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그녀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말하자면 정말로 너무나 이릅니다,
비록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의 驟逝이었지만 이런 의미로 말을 하면 정말로 매우 안타까워서, 사람들이 탄식을 금할 수 없게 하네요.
邓丽君与森进一的合照。邓丽君1978年5月25日在日本浅草剧场演出。
热情的日本歌迷喜欢送礼物,往往一场演唱会下来,邓丽君就会带回十几二十束的玫瑰花,她都舍不得丢弃,就转送给邻居。
要是像娃娃、熊猫等小礼物,则以海运寄回台湾,给哥哥的三个小孩当玩具。在日本的歌迷中有一两个“很有办法”的男歌迷,辗转由公司介绍认识,
由于她从未考虑要和日本男士交往,所以坚决保持距离。但是其中有一位,他只要能为邓丽君服务就高兴,完全不管邓丽君的反应如何。
등려군과 森進一의 합동 사진이다. 등려군은 1978년 5월 25일 일본의 아사쿠사 극장에서 공연을 하였다.
열정적인 일본 팬들은 예물을 보내기를 좋아하였는데 가끔 공연장 아래로 내려오면 등려군은 열 몇 개 내지 스무 다발의 장미꽃을 받았는데
그녀는 모두 버리기를 아까와 하여서 이웃 사람들에게 보내곤 하였다. 만일 아기 인형, 판다 완구 같은 작은 예물이면 곧바로 대만으로 보내어
오빠의 3명의 아이들에게 장남감으로 보내 주었다. 일본의 팬들 중에는 수완이 매우 좋은 남성팬 한 두명이 있어서
여러 사람을 거쳐서 회사의 소개로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결코 일본 남자와 교제하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굳건히 거리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 어느 한 사람은 등려군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기만 하면 매우 기뻐하였는데 완전히 등려군의 반응이 어떻던 간에 개의치 않았다.
这是一位在日本一家航空公司担任高级职员的男性歌迷,在并未与邓丽君结识的情况下,就常义务为邓丽君携带衣物,送小礼物给她,
并每天打听台湾的新闻和天气,然后打电话到邓丽君家告诉她听,因此被邓丽君称为“乡情大使”,也让邓丽君心怀忐忑,怀疑他还有其他目的。
后来在渡边公司的经理介绍下,邓丽君和这位“乡情大使”正式会面。那一天,他带着老婆孩子一起和邓丽君共进晚餐,才让她松了一口气,
知道只是很单纯的喜欢她的歌而已,并无其他意图。在这次会面后,这位“乡情大使”一家人也都变成邓丽君的歌迷,这是第一位和邓丽君成为朋友的日本男歌迷。
일본의 한 항공사에서 고위직인 남성 팬인 이 분은 등려군과 결코 친분을 맺지 않는 상황에서, 언제나 무료로 등려군을 위하여 옷가지를 운반하였으며
작은 예물을 그녀에게 보내 주었다. 아울러 날마다 대만의 소식이나 날씨를 물어보고는, 그런 뒤에 등려군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그녀에게 들려 주었다.
이로 인하여 등려군이 고향대사(鄕情大使)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또한 등려군의 마음을 불안하게도 하였다.
그 사람이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였다. 나중에 渡邊회사의 사장의 소개로 등려군은 이 鄕情大使와 정식으로 만났었다.
어느 날, 그 사람은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함께 등려군과 만찬을 하여서 비로소 그녀는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단지 매우 단순히 그녀의 노래를 좋아할 뿐이고 아울러 다른 뜻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만남 뒤에 이 고향대사(鄕情大使)의 가족도 모두 다 등려군의 팬이 되었기도 하였으며 이것이 등려군과 남자 친구가 된 첫 번째 일본 남성 팬이었다.
在日本原宿家中。邓丽君闲时喜欢呆在家中,享受母亲在身边的温暖。偶然也会倒一点红酒或者香槟自斟自饮。
本歌坛中有所谓的“50圈”,也就是每周全国唱片销量统计前50名,都会登载于全国报纸与各大杂志上。
1976到1977年间,邓丽君每张唱片都进入了50圈,这正是歌手是否受欢迎的指标。直到1977年为止,
邓丽君一共在日本出了八张大唱片,12张小唱片,每张唱片都挤入排行榜前30名,这在日本歌坛不是一件简单的事。
일본 하라주쿠의 집에서 등려군은 한가할 때 집안에만 있으면서 곁에 있는 어머니의 따스한 정을 받았다.
가끔은 포도주 또는 샴페인을 조금씩 스스로 따라 마시곤 하였다. 일본 가요계에는 이른바 50권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매주 전국 음반 판매량 통계의 50명 안에 있는 것을 말하는데 모두 다 전국 신문과 여러 큰 잡지에 실리게 된다.
1976년부터 1977년 동안 등려군은 모든 음반이 모두다 50권에 진입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가수가 얼마나 환영을 받았는지의 지표이었다.
1977년을 끝으로 등려군은 모두 일본에서 8장의 대음반 12장의 소음반을, 모든 음반은 모두 순위챠트 30명 안에 들었는데
이것은 일본 가요계에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在日本平均一个月做一次个人演唱会。”邓丽君说:“每一次个人演唱会长达1小时45分钟,每次节目安排35首歌曲,包括中英日三种歌曲,
每排一次全新的节目,大概要花三个月的时间来准备,光是最后一个月背歌词,就把我累坏了。”
但是日本观众高度的欣赏水准,让她在演唱会结束时,总会被观众的热烈掌声感动哭泣,因此就算再累再苦,她也愿意接受这样的考验。
일본에서 평균 한달에 한차례의 개인 콘서트를 하였다. 등려군이 말을 하였다: 한 번 개인 콘서트를 할 때마다 1시간 45분이 걸리는데,
한 프로그램마다 35곡의 노래를 준비하였는데
중국어 영어 일본어 3가지의 노래를 포함하였고, 한차례 완전히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만들었으며,
준비를 하였는데 대체로 3개월간의 시간이 걸렸어요. 겨우 마지막 한 달 동안 가사를 암기하였는데
나를 매우 지치게 하였지요.
그러나 일본 팬들의 높은 감상 수준으로 그녀는 공연이 끝날 때 늘 팬들의 뜨거운 손뼉 소리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설령 지치고 힘들어도 그녀는 다시 이런 어려움을 받아들이길 원하였다.
港町ブル-ス미나또마찌부르스_(誰來愛我)/ 鄧麗君등려군
Minatomachiburusu_(Minatomachiblues_港町 Blues)
深津武志 词/ 猪俣公章 曲/ 金康顯 飜譯
编曲 : 森岡賢一郎
专辑 : 怀念邓丽君 Teresa Teng 테레사텐 テレサ・テン
邓丽君 演唱 :《港町ブルース》9.93M'1974년_(谁来爱我)
[港町ブルース미나또마찌부르스_(誰來愛我).日本语]☜일본어
[誰來愛我수래애아.中国语]☜등려군노래듣기
[Kau Tinggalkan Daku_(誰來愛我).印尼语]☜인도네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