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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 제 7 성리품 12장 대종사 영산으로부터 봉래정사에 돌아 오사 한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영산에서 윤선(輪船)으로 이곳에 올 때에 바다 물을 보나 깊고 넓은지라 그 물을 낱낱이 되어 보았으며 고기 수도 낱낱이 헤어 보았노니, 그대도 혹 그 수를 알겠는가」 하신데, 그 사람이 말씀 뜻을 짐작하지 못하니라. |
A. 김제원 교무님: 육안으로 보는 숫자와 세상이 있고요. 심안 또는 혜안, 불안, 법안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으로 보는 숫자와 세상은 달라요. 그 법문은 대종사님께서 육안으로 숫자를 세는 것을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 부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숫자, 더 나아가 수를 넘어선 수를 말하는 거죠. 그런 안목을 가지고 하라는 거죠. 처음엔 무슨 소리냐는 생각이 들 거예요. 이것을 계속 하다보면 의문이 되고, 의두요목으로 가지고 가다보면 어느 때인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계시는 구나’라는 대종사님의 심경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때 질문을 “교무님, 제가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것이 맞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거예요.
Q. 김은하 교우님: 요즘 잠자기 전에 좌선은 하지만 호흡을 하면서 깊은 잠이 잘 오고, 편법이긴 한데 누워서 하고 있거든요. 예전에는 좌선을 하거나 하면 잡념이 빨리 없어졌는데, 깊은 잠에 들어가고 싶은데 좋은 생각들이 나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기분이 좋아져서 잠이 안 오고 흥분되며 더 자꾸 생각하게 되니깐 깊은 잠을 못 자게 되요.
A. 김제원 교무님: 수양과 연결된 연구는 수양으로 통해 자연스레 밝아지는 연구에요. 수양으로 과학적 연구가 아닌 도학적 자성의 지혜가 솟아 올라오는 것이거든요. 하지만 잘 때는 그게 중요지 않고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누워서 하는 선이 좋습니다. 그런데 왜 누워서 하는 선이 좋은데 좌선을 하라 하냐? 누워서 하면 호흡을 하는데 걸림이 없지만 선을 하는 도중에 자버립니다. 그래서 앉아서 적당한 긴장과 이완을 가지고 선을 하라는 겁니다. 저녁엔 낮의 활동의 잔상이 남아있어요. 무시선과 연결이 되는데, 수심정기라는 말이 있어요. ‘마음을 지키고 기음을 바르게 한다.’는 뜻인데 좌선에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한가지 인데, 내 온전한 마음이 경계 속에서 분별과 집착의 세계로 빨려가지 않고 참마음을 지키면서, 체를 잡아서 살아가는 것이 수심이에요. 내가 안, 이, 비, 설, 신, 의 육근을 움직이면서, 외부 경계에 감정,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의 칠정에 동하는 것을 기운이라고 합니다. 그 기운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정기이지요. 이 칠정이 동하는 것에 너무 마음을 뺏기면 그 잔상이 저녁에도 남아요. 기운이 감정의 노예로 사는 거죠. 감정의 시소를 너무 많이 타면 내가 선을 하려고 해도 잔상이 너무 많이 남아 차분히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종사님이 수양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정당한 일에도 하물며 존절히 해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잔상이 너무 크니까 그런 것이죠. 낮에 활동 할 때에 항상 수심정기라, 내 온전한 마음을 분별, 주착에 너무 뺏기지 않고, 오롯한 마음을 챙기면서 일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 감정이 생각을 일으키기도 하고 생각이 감정을 일으키기도 해요. 그때마다 감정을 승화시켜서 활용을 하되 감정에 너무 빨려 들어가면 수양을 할 때에 감정에 빨려 들어가지고 수양이 안 되어요.
Q. 신대룡 교우님: 최근에 습관을 바꿔 보고자 노력하는데 잘 안됩니다. 저번 주 설법하셨듯이 성격에 대한 게 내세 다음 생에도 가져갈 정도로 깊게 박혀있는데 습관을 바꾸기도 어려운데 성격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얼마나 걸리는 겁니까?
A. 김제원 교무님: 한 경계에 한 마음이 동하는 것을 분별이라고 해요. 한 생각이라고도 하죠. 이것이 외부 경계를 대하면서 착심이 되요. 이게 계속 분별하다가 주착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깐 분별이 진행해서 분별하는 성질, 즉 분별성으로 가는 거예요. 분별성이 반복해서 주착심으로 갑니다. 분별하는 성질에 색안경을 쓰면 주착심이 됩니다. 예를 들어 대룡이를 볼 때마다 대룡이를 좋아 한다거나, 볼 때마다 ‘꼴 보기 싫어’는 주착심이고, 대룡이를 볼 때 ‘애가 괜찮게 생겼다.’는 것은 분별성입니다. “대룡이다.”는 분별이고, “대룡이가 마음에 든다.”는 분별성이예요. 근데 “대룡이가 볼 때 마다 마음에 든다.” 이것은 주착심이예요. 안, 이, 비, 설, 신, 의 육근에서 더 들어가서 저장식이라는 7식이 있습니다. 이게 주착심이랑 연결이 되는데, 생을 마감하면 거의 끝나요. 근데 더 들어가서 함장식, 아리아식이라고 부르는 제8식이 있는데, 여기에 저장되는 게 성격입니다. 그 주착심이 아주 강렬하면 이곳에 갖고 갑니다. 그러니깐 기억날 정도로 넘어선 주착이죠. 제1천성은 성품(제 8식), 제2천성은 습관(제 7식), 제3천성은 환경입니다. 그러니깐 성격을 바꾸기 위해선 먼저 환경을 조성하세요. 환경이 사람의 마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여기가 디스코 클럽인 것과 목탁을 듣고 있는 거랑 천지차이죠. 자력으로만이 아닌 외부 타력으로써의 환경이 중요합니다. 외부 환경에서 어떤 것을 접하느냐, 법문을 접하느냐, 아니면 친구가 자꾸 술 한 잔하자, 게임하자고 하고 있느냐. 만약 환경이 좋지 않다면 외부 환경을 정리한 필요가 있어요. 사실 제일 중요한 공부가 적공인데, 적공은 한 생각을 놓치지 않고, 속지 않고 챙기는 것입니다. 이게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면 아까 성격도 습관도 주착도 분별도 한 생각의 연장선상이잖아요. 한생각의 연장에서 한 마음을 수심하고 정기하는 것, 즉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한 마음을 지키는 것, 이것이 최고의 적공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으니 유념을 하라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이 유념이라는 항목을 잡아서 먼저 그 부분만 챙겨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라. 물론 한꺼번에 전부 한 생각을 챙기려면 죽겠지, 그러니깐 하루에 몇 때를 나눠서 아침 식사 전, 점심 전, 후, 저녁 식사 후, 이렇게 몇 개로 나눠서 유념을 잡을 수 있고요. 순간순간 잡는다는 것은 진짜 어려운 것이니 일단 넷 때로 나눠서 해라. 그리고 환경을 잡아 일과를 잡아라. 아침은 수양, 낮은 보은헌공, 경전공부, 저녁은 참회 반조로써 잡아라. 지금 대룡 교우 입장에선 타력이 더 중요해요. ‘엄마 내 알아서 할 테니 건들지 마’ 이러면 강급의 지름길입니다. 어릴 때 자력 강조하면 망하는 겁니다. 청소년기에는 환경, 타력을 잘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스승, 경전, 인연 등 이런 게 중요해요. 자력이 약하기 때문에 자력을 키우기 위한 타력(환경)이죠. 의뢰하고, 노예가 되기 위한 타력이 아니라, 자력을 갖추기 위해 도움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적극적인 것이죠.
심리학에서 말하길, 성격은 평생 동안 안 바뀌는 것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틀렸다고 봅니다. 대종사님 법으로는 바뀔 수 있습니다. 만약 대룡이가 대각을 하면 바뀔 수 있어요. 그리고 유념을 잡아서 부분 부분을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능한 부분, 성향, 성격이 있을 텐데, 왜 생겼겠어요. 그쪽으로 계속 썼다는 거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제가 사람을 활용 할 때는 장점을 쓰라고 하지만 자기가 수행할 때는 반대로 하라고 합니다. 자기의 장점을 감추고 단점을 채워라, 이게 절장보단이라고 해요. 장점을 조절하고, 절도 있게 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거예요. 멍청한 놈들은 잘하는 것만 치고 나가 그쪽 성향만 키웁니다. 하지만 미래세계는 제일 중요한 게 원만입니다. 원만이라는 것은 절장보단을 통해서 두루 어디 가서나 활용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성격이 원만하려면 유념을 통해 절장보단을 해 줘야 합니다. 수행의 세계에서는 철저하게 원만을 향해서 가기 때문에 타력을 통해서, 때로는 “내가 어느 부분이 부족합니까?” 라는 질문을 해서 충고, 지적을 받고 도움을 구해서라도 바꿔야 나가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습관은 보통 100일 간 유념을 잡으면 가능합니다. 습관을 바꾸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닌데 성격은 더더욱 쉽지 않죠.
Q. 박준성 교우님: 5단 박준성입니다. 제가 태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터미널을 들락날락 하는데, 병 앓는 환자들을 위한 모금을 하는 대학생들이 많아요. 고생한다 치고 적은 금액이라도 주는데, 이름있는 큰 재단도 돈을 올바로 쓰지 않고 후원금으로 해외여행을 간다고 뉴스도 나오는데, 학생들이 돈을 어떻게 썼는지도 모르잖아요. 이렇게 돈을 기부하는 것이 은혜가 되는 일이 맞는지 그게 궁금했습니다.
A. 김제원 교무님: 이제는 확실한 단체가 아니면 안 주는 게 맞습니다. 왜나면 범죄의 온상이 될 수 있어요. 이번에 딸한테 여자 친구 데리고 오면 이천만원 줄게 하고 여자 친구 데려오고 성범죄하고 죽여 버렸잖아요.(어금니 아빠사건) 그 사람이 돈이 어디서 났나 하면 불쌍하게 해서 들어오는 돈을 먹은 거죠. 지금 공식적인 단체도 반 이상은 약간 거짓이 많습니다. 그 돈이 불우이웃에게 한 10% 밖에 안갑니다. 80%정도 다 유지비, 선교로 씁니다. 우리도 사실은 원음방송이라고 하는 게 원불교도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을 겨냥해서 방송하려고요. 이러한 공식적인 단체가 많죠. 원불교도 우리가 세도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길 가는 중에는 감정에 동해서 기부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위에도 상위 조직이 있어요. 그래도 국가의 복지가 허술하지 않습니다. 자선단체들도 다른 단체가 속이고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기부금을 제대로 쓸 것인지, 또 공식적인 단체인지 확인도 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인색한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이 든 것 아닌 것 인가’ 하는 것은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내 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Q. 박준성 교우님: 기한이 있어서 해야 되는 일이거나 안하면 혼나는 일이 있으면 제가 잘하거든요. 기한되기도 전에 미리 끝내고 그런데 기한이 없는 교법, 불법 공부와 같은 저를 이롭게 해주는 일들은 실천이 잘 안돼요. 하려는 마음은 있는데 몸이 실천을 안 합니다. 실천을 잘 하기 위한 방법이 뭐가 있을지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A. 김제원 교무님: 꿈이 큰사람은 그 꿈을 단어로 규정화를 해서 명료화거나 적어놓습니다. 원력 또는 포부와 경률, 비전, 서원이라 하는 데 그것에 대조하면 해결이 되요. 나태심도, 안 하고 싶은 마음도 자기관리가 되어 나갑니다. 이게 불명확하다면, 현상에 보이는 것, 박수 받을 것, 짧게 끝나는 것, 옆 사람이 채근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에만 에너지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소를 냇가에 데리고 가서 물을 먹이는데 소가 물을 안마시면 어쩔 수 없는 것과 같이, 주위의 것들은 안내를 하고 도와줄 뿐이지 최종은 내 자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력에 중요한 것은 안으로는 원력이고, 밖으로는 신심인거에요. 이 두 가지가 중요한데, 경영학에서도 그러듯이 보통 사람은 눈에서 보이는 것만 찾아 합니다. 이것은 선후 본말의 문제예요. 선후는 강한데 본말에 약하다는 것이죠. 급한 것과 뒤에 할 것은 선후를 취하는데, 본말은 얼른 효과가 안나 하지만 선후만 찾는 사람은 후회하더랍니다. 본말을 향하면 늦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빠릅니다. 이것이 성리(사리연구)입니다. 당장 배고프면 선을 취해야겠죠. 그러나 무형의 마음인 큰 원력과 그 원력을 점검할 스승이 있어야 되요. 그러지 않으면 자력이 없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만 하게 됩니다. 선후로 보면 그때는 심각한 것 같지만 10~20년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관점이 인과적 관점, 불생불멸의 영생의 관점입니다. 멀리, 넓게 보면 현상적인 것에 덤덤할 수 있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어요. 그 관점을 두지 않으면 짧은 것만, 현상적인 것에만 에너지가 갈 수 밖에 없겠죠. 큰 꿈을 명료화에서 단어로 뽑아 적어놔야 되요. 그것을 보며 계속 반조 공부를 할 수 있어요. 저 같은 경우 ‘김제원 너 출가한 이유가 뭐냐, 서원을 한마디로 말해 봐라.’ 그럼 전 말할 수 있어요. “영생의 행복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성불제중이라고 해요. 이것을 딱 대조하면, 서원이 강력할수록 아닌 마음, 나태한 마음, 안하고 싶은 마음들이 일시에 해소될 수 있죠. 이게 약해 버리면 빼먹는 거죠. 예를 들어 준성교우가 할 일이 있어요. 친구가 “한 잔하자” 하면, “미안, 나 할 일이 있어서”라고 말 할 수 있어요. 서원이 없으면 오히려 준성교우가 찾아서 만나자 그러죠. 사람이 단기적인 계획도 있어야 되지만 중기, 장기, 영생 계획까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것을 바탕으로 장기 계획과 본말을 놔두고 선후를 찾아야하는데, 중생은 선후에서 선만 취하고 말만 취해서 근본이 계속 밀립니다. 근본은 장기 계획이고 무형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근본에 관심을 안 갖게 되요. 세월이 지나며 신심이 있거나 원력이 크면 해나가는데, 그렇지 않으면 자기 판단으로 하는 거예요. 법마상전급까지는 자기가 자기를 믿지 마세요. 근본은 자기가 일원상이라는 것을 믿지만 자기한테 일어난 생각, 경험으로서 일어난 판단을 믿으면 안 됩니다. 에고가 욕심, 무명, 습관이 자기라는 국한에서 중심을 잡고 해나가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면 타력을 입고 법문과 스승에 의지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단견으로 가는 사람들은 잘 나가다 막판에 푹 내려갑니다. 그런데 근본을 잡은 사람은 처음에 늦지만 세월이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서 생을 마감할 때는 정 반대의 인생이 됩니다. 퇴임하신 원로 교무님들은 인생의 후회가 없어. 다음 생에도 교무님 해야겠다고 합니다. 여러분들한테 물어보면 고생할 것 같은데, 힘들 것 같은데? 하지요. 나중에 나이 먹고 다시 물어보면 맨날 후회투성이입니다. 마음속으로 대종사님, 일원상에다 물어보세요. 일원상을 집에다가 모셔놓고 때로는 투정, 땡강, 어리광도 부려봐야 됩니다. 일원상이 신성한 것만이 아니에요. ‘법신불 사은님, 이거 하기 싫은데 어찌해야합니까?’ 법신불 사은님을 대화상대로 삼다보면, 내 에고와 욕심에서 비롯된 감정이 중시된 생각에서 반대로 바뀌는 거예요. 헌배하기 전 생각과 헌배와 입정 후의 생각이 달라지잖아요. 그런 거랑 비슷한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 현상에 재미 붙이면 안 돼, 현상에 속지 마세요. 박수치는 사람도 다 죽기 마련이죠. 박수 받으려고 애 쓰지 마세요.
Q. 이하은 교우님: 아까 염불 10송할 때 “이 염불의 인연으로 생사의 자유를 얻어 육도를 임의로 왕래하여 지이다.” 육도를 임의로 왕래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임의로 왕래한다는 것이 어떤 제한이 없이 마음대로 다니는 것인지, 그럼 제가 인간세계를 살고 있는데 갑자기 축생으로도 갈 수 있고 그런 것 입니까?
대산종사법어 제 4 적공편 58장 대산 종사, ‘염불 10송’을 내리시니 「① 이 염불의 인연으로 삼계 업장이 소멸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② 이 염불의 인연으로 시방세계가 청정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③ 이 염불의 인연으로 이매망량이 항복하여지이다. ④ 이 염불의 인연으로 육근이 항상 청정하여 대지혜 광명이 발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⑤ 이 염불의 인연으로 심량이 광대하여 제불 조사의 심인을 닮을 만한 대법기가 되어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⑥ 이 염불의 인연으로 생사의 자유를 얻어 육도를 임의로 왕래하게 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⑦ 이 염불의 인연으로 무량세계 무량겁에 무량 중생으로 하여금 불도를 이루게 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⑧ 이 염불의 인연으로 삼계 진루(三界 塵漏)가 다 사라지고 심월만 홀로 빛나게 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⑨ 이 염불의 인연으로 삼계의 유주 무주 고혼을 다 천도하게 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⑩ 이 염불의 인연으로 무량아승기겁에 흐를지라도 대서원, 대법류느 대불퇴전이 되어지이다. 나무아미타불.」 |
A. 김제원 교무님: 육도는 심상육도와 현실육도가 있습니다. 지금 현실육도, 죽고 나서 받는 세계만 생각한 거예요. 하지만 심상육도라는 것이 있고, 지금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까 선하면서 호흡이 잘 될 때, 여러분들이 이 몸을 가지고 천상세계에 간 거예요. 마음속에서 고락이 상반하면 인간세상이고, 여러분들이 열 받아서 눈에 뵈는 게 없고 그러면 지옥이에요. 심상지옥. 대종사님은 심상 육도도 자유자재로 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이 목소리도 크시고 덩치도 크시지요. 한 날은 대종사님이 조실에서 “야, 이놈아! 너, 나가!” 소리를 지르셨지요. 대종사님 뵈러 온 사람이 그 먼 총부 입구에서 “저 양반이 성질났네.” 하셨다지요. 현상에서는 고의로 지옥을 만들고 화를 낸 것처럼 보였는데 내면은 평온하지요. 화를 내는 것도 자유자재로 드나드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안될 겁니다. 화 내다보면 또 그것에 동해서 화가 또 나버리잖아요. 대종사님은 의도적으로 표면적으로 화를 내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것이죠. 그리고 힘이 있는 영혼은 현실 육도에서 내가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어요.
Q. 이하은 교우님: 성불 제중이 가장 큰 목표잖아요? 지금은 성불제중이 마음에 와 닿지 않으니깐, 그것과 비슷하게 작은 서원을 세우고 신분의성을 계속하면 서원이 신분의성을 반복하면 성불 제중으로 갈 수 있나요?
A. 김제원 교무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법문에서는 기도할 때에 먼저 큰 것을 하고, 뒤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라고 했어요. 뭐나면, 병에 큰 돌과 작은 돌을 넣을 때, 작은 돌을 넣고 큰 돌을 넣겠다고 하면 안 들어가는데, 큰 돌을 먼저 넣고 작은 돌을 먼저 넣으면 다 들어갑니다. 원력과 기도를 할 때도 마찬가지로 큰 것을 먼저 세우면 작은 것도 따라붙어서 다 되게 있어요. 성불 제중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성불제중이란 참 나로 살아가는 거예요. 성불제중이라는 큰 것을 향하는 게 아니라, 참 나를 회복하는 것이 성불이고, 참 나를 그대로 쓰는 것이 제중인 것입니다. 질문은 참 나를 놔둬버리고 작은 나로 살아가겠다는 거예요. 이 작은 내가 나고 참 나는 무슨 대단한 그런 게 아니지요. 성불제중은 본래의 나로 살아가자는 것이죠. 그래서 가장 행복한 것이지요. 아직은 지금 참 나라는 것이 나로 생각이 안 될 겁니다. 성불 제중은 대단한 사람들이 하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저도 이런 것을 출가 할 때부터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성불은 참 나를 알아서 회복하고, 제중은 참 나로 힘이 닿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 나를 알아서, 나다운 삶으로 내가 행복한 삶이겠죠. 그것을 아직 모를 만해요. 하은이가 질문을 참 잘해. 까닭이 있어야 하거든 그래야 질문이 나옵니다.
Q. 조현화 교우님: 수요공부방에서 진행사조 사연사조를 공부할 때, 불신을 가장 경계해야 될 목표이자, 가장 없애야 할 것이라고 했는데요. 준성교우도 질문 할 때 모금 하는 단체들이 돈을 막 쓸까봐 그런 불신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예로 사람이 계속 시간약속을 늦고 하면 ‘그 사람이 계속 늦는 사람이다.’ 라고 불신 할 수도 있잖아요. 제가 생각하길 다른 사람에 대한 불신하는 마음이 커져 가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서 불신을 한다고 보는데요. 그 불신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A. 김제원 교무님: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신과 불신이 뭐냐면, 내 본래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믿자. 내가 하면 할 수 있는 역량이 갖춰졌다는 것을 믿자, 삼학 수행을 통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믿자는 겁니다. 밖으로는 진리와 법과 스승과 회상에 대해 믿자는 것입니다. 그럼 불신은 뭐겠어요? ‘내 안으로 내가 뭐를 할 수 있겠어? 나는 멍청해서 안 돼, 안 될 거야.’ 와 같이 내 안으로 나를 믿지 않는 것이 불신입니다. 그리고 진리와 법, 스승과 회상에 대해 믿지 않는 것이 불신입니다. 경전에서 나오는 불신은 다른 사람에 대해 안 믿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질문 잘하셨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을 때가 있었어요. 그러면 무조건 세상 불신하지 말자는 거냐? 그 말이 아닙니다. 도둑놈은 도둑놈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삼학 수행에 있어서 신과 불신입니다.
Q. 설영우 예비교무님 : 저는 영산선학대학교 2학년입니다. 저는 보산님보다 청년들한테 질문을 하고 싶은데요. 보산님께서 수행법회를 늘렸다고 했는데, 수행법회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궁금합니다.
A. 김화중 교우님: 제가 제안을 한 사람으로 답을 하겠습니다. 제가 회장을 맡으면서 교당에서 삼학공부를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로 하는데, 사리연구는 수요공부방을 통해서 잘 이뤄진다고 생각을 했고요, 작업취사는 사업부를 통해서 잘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신수양은 어떤가는 의문이 들었었습니다. 근데 현실적으로 보면 수행법회 때 보면 참석률이 굉장히 높아요. 그래서 우리 청년들의 원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늘렸습니다.
Q. 설영우 예비교무님: 이 수행을 통해서 내 생활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단순히 수행과 생활이 분리가 되지 않고 수행과 생활에 관련이 있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실생활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A. 김화중 교우님: 제가 수행을 좋아한다고 했었잖아요. 혼자 수행을 하다가 성품 자리를 본 경험을 했었거든요. “이것을 나만 할 수 있나? 다른 청년들도 다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같은 중생도 했는데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밀어붙이는 게 있었고요. 성품자리를 알고 나니깐 경전이 제대로 보이는 거예요. 전에는 막무가내로 읽었었는데, 이제는 그 성품이라는 제품을 쳐다보며 하나씩 보다 보니깐, 이것이 핸드폰을 보며 매뉴얼을 쓰는 느낌이 들었어요. 삼학을 어떻게 돌리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일반 청년으로 시작했다 맛을 들여서 귀한 것을 얻게 되어서... 그게 굉장히 좋았습니다.
Q. 이법선 교우님: 직업에도 귀천이 있다고 하잖아요. 이것이 천하고 귀한 것이 아니라 가치를 어디에 두는 것에 따라, 얼마나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지에 따라서 귀천을 나눠진다고 하는데요. 성불제중이 참 나를 깨닫고 그런 나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런 것을 따라서 직업에 따라서 성불제중이 나눠지지 않을까.
A. 김제원 교무님: 성불제중을 참 나로 살아간다고 했잖아요, 그 말을 다 이해를 못했을 것 같습니다. 성불제중은 나 자신의 완벽한 삶이에요. 보통은 내가 제중을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에요. 더 들어가면 제중의 세계가 바로 나에요. 그러기 때문에 제중의 삶이 곧 나의 삶입니다. 중생은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성불제중은 나의 삶이라는 것이지요. 대종사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해야 할 큰일이 둘이 있는데, 스승을 만나 성불하는 것과 제중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성불과 제중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성불 제중은 교무님만 합니까? 아니죠. 판소리 하는 사람도, 학교 선생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성불 제중의 뜻을, 나와의 관계를, 가치를 아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예를 들어 음악인 중에 죽을 때가지 작곡한 사람이 있는데, 죽기 한 달 전까지 발표회를 했다고 합니다. 음악인으로서는 대단하죠. 그러나 성불이라는 것은 참 나를 알아 내 생사를 자유화 하는 거예요. 내가 나의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거예요. 육신이 아니라 내 자성, 참 마음이 나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유명한 예술인이라도 자신을 모르고 살면 되겠어요? 유익을 줘서 복을 줄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불이라는 것은 지혜이고 제중이라는 것은 복입니다. 유익을 주는 것이 결과가 되어야겠지만 자기 자신이 성불하지 못하고는 제중이 될 리가 없고, 제중을 하지 않고, 즉 복이 없이, 성불하기가 어렵습니다. 성불, 제중은 하나로서 막 돌아요. 성불하려면 제중하지 않을 수 없고, 제중하려면 성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치예요. 자와 타로서 하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천억, 1조를 희사했어도 성불하지 못한 사람은 단지 하나의 복일 뿐 이예요. 물론 큰 복을 짓기는 했지요. 성불하지 않고 복이 많으면 나중에 복이 치여 가지고 더 큰 죄를 지을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이생에 겁나게 예쁜 사람은 복이 엄청 많은 거예요. 귀티 있고 매력 있어서 사람들이 자주 오고 그럽니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의 끝판이 어때요? 생을 마감할 때 스스로 행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고, 이 세상에 유익했던 사람이 얼마냐 있느냐? 한 때 눈요기 감이죠. 여러분들이 이 가치관, 보는 눈이 바뀌어야 되요. 예를 들어 내가 죽었으면 천명이나 슬퍼할런가 모르겠어요. 근데 연예인이 죽었다면 어마어마한 난리일 거야. 많은 사람이 울면 그 사람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성불과 제중은 인과와 영생의 판단기준을 놓고 판단하셔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현상에서 판단해요. 나 같은 사람은 돈도 없고, 사회적 인기도 없는 놈입니다. 그런 시각으로만 판단할 수 있느냐는 거죠. 안목이 현실적 안목, 진리적 안목 양면을 생각해보아야 되요. 저는 일차적으로는 생을 마감하고 무형의 자산을 가져갈 것이 많은 놈이 잘 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때 잘 살았는데 욕먹고, 자살하고, 혼자 죽은지도 모르게 썩어서 발견되는 사람은 잘 산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 스스로 인과와 영생의 입장에서 잘 살았느냐, 죽어서 나는 뭘 가지고 갈 것이냐를 봐야 합니다. 이 몸이 죽으면 바로 뒷날 솜 찌르고 냉동실에 넣고, 옷 입혀서 삼일 째 바로 불속이나 땅속에 들어가요. 이 몸이 과연 내 것이냐는 거죠. 그러나 내가 성불제중하는 것은 철저하게 내 것입니다. 육도 윤회를 자유화할 수 있는 수행의 힘과 원력, 주위에 베푼 인연과 공덕, 이런 것은 철저하게 가져가는 겁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육신에 집착하고 재색명리를 향해 가는 것은 조그마한 욕심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돈, 명예, 미인과 제일 좋은 집에서 살고 남에게 부러울 것 없는 자리에서 허망하다고 벗어버렸잖아요. 그런데 이천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것을 찾으려하고 못 구하고 한탄하고 에너지를 쓰는 사람이 많아요. 대종사님이 “그것은 작은 욕심이다. 진짜 욕심을 더 크게 내라. 죽어서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을 욕심내라. 쥐똥만한 돈이나 명예는 조그만 것이다. 큰 걸 잡으면 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와 버린다.” 고 하셨어요. 한 생만 성불제중해도 그놈은 복이 미어터집니다. 근데, 그새를 못 참고 다들 그렇게 살지요. 부러워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부러운 것이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인데, 여러분들 누가 부럽습니까? 여러분들은 사실 내가 부러워야 되요. 연예인이나 연예인과 결혼한 그런 여자랑 차라도 마시고 싶지 않나요? 그런게 부러우면 중생입니다. 대종사님, 정산종사님이 부럽고 성불제중한 사람이 부러워야죠. 다들 부러울 것을 안 부러워하고 안 부러워 할 것을 부러워하네요.
Q. 김화중 교우님: 그런데 교무님이 하는 일도 부럽고 회사 일도 재밌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김제원 교무님: 아직 가치의 비중을 여기에 못 둬서 그럽니다. 사실 비교도 안 되는 가치예요. 대종사님이 “제일 큰 일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성불을 하고 제중을 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어요. 대산 종법사님 당대에 예비교무가 찾아 갔어요. 이 사람이 정남을 할지, 결혼을 할 지 고민이었어요. 종법사님에게 “제가 정남을 할까요?” 그랬더니 종법사님이 “먼저 견성을 해라, 이놈아”라 했지요. 견성을 하면 결혼해도 안 해도 상관이 없다. 견성, 성불, 제중 그러거든요. 성불 이전 단계가 견성인데, 견성도 못한 것이 결혼을 하냐 안하냐 고민하니.. 원불교 출가자 재가자 구분 없는데 내가 재가로 잘하면 되지 않냐? 그러면 아직 욕심이 안 놓아진 생각입니다. 능히 견성, 성불 한 사람은 재가, 출가 구분도 없고요. 내가 이생에 견성, 성불 먼저 할 수 있는 것이 좋죠. 그 다음에는 공덕입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한 것도 많지만 부처님 공덕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입니다. 옛날에 대산종사님 밑 법문을 정리하는 시자가 있었습니다. 그 시자가 총부 간부로 가고 싶었는데 못 가게 되어서 약간 서운한 것이 있었지요. 그러니 대산종사님이, “네가 법문 정리한 것이 빌딩 백 채 지은 것 보다 낫다, 이놈아.”라고 하셨어요. 인과와 영생의 관점에서 어떤 것이 가치가 있고 세상에 은혜가 되느냐고 하는 거죠. 질문은 내가 얼마나 즐거우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내가 얼마나 이 세상에 도움이 될 건지가 중요하지요. 회사가 되고 안 되는 게 이 세상의 문제야? 사람들이 자기 존재를 모르고, 어떤 게 참 나인지 모르고, 작은 나가 참 나인 줄 아는 사람들에게 진짜 참 나는 이런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세상도 좋고 자기한테도 좋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큰 겁니다. 불보살들은 에너지를 중생 제도하는데 쓰는 거죠. 그것이 제일 가치 있고 보람 있고 재미있어요. 여러분들은 어떤 것이 적당히 편하고 재미있냐는 것을 찾아다니죠. 적당히 내 것 구하고 편하면서, 중생들은 나라는 것이 항상 들어있죠. 자 또 질문 있으면 하시고 없으면 마칠까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와우! 감사해요~ 대룡, 현승 교우님! 고생하셨습니다. 멋져멋져
도자부 화이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