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는 21세기를 바라보고 있는 현재에도 일본, 사무라이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알려져 있는데 정작 이 인물의 성향에는 많은 전설이 남아있습니다. 그는 1584년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확실치 않은 것으로 그는 에도시대의 초기에 등장한 병법가(兵法家)로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뛰어난 서화의 작가로서도 존재하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서 알려진 이도(二刀)를 쓰는 방법은 이천일류병법(二天一流兵法)의 시조로서의 위치를 강하게 보여주고 있고 수묵화가(水墨畵家)이면서 공예가(工芸家)라는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미야모토 무사시로 알려져 있지만 본성은 후지하라(藤原), 휘(諱)는 하루노부(玄信)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유명(幼名)으로서 벤노스케(辨助 弁助、弁之助) 등으로 알려져 있고 호(號)는 이천(二天) 또는 이천도락(二天道樂)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의 일생을 간략화한 저서 오륜서(五輪書)에서는 본성이었던 新免武藏守 藤原玄信으로 명기하고 있습니다.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서신을 보면 다양한 명칭과 호가 적혀져 있지만 무사로서 가진 위업이 워낙 높은 형태로 남아져 있기 때문에 일본의 사무라이=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서양에도 퍼져있어서 지금의 일본에 있어서 가장 퍼퓰러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토(京都)의 명문 가문인 요시오카(吉岡) 파벌과 벌인 싸움과 간류지마(巖流島)에서 벌여진 대결이 소설, 영화, TV드라마, 만화 등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어서 일본에서 그의 이름이나 활약을 모르는 일본인을 찾는 것이 힘들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저서인 오륜서(五輪書)는 지금도 현대인에게 있어서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철학서로서 또는 경영, 스포츠 지침서로서 애독되고 있어서 그의 사상에 대한 인생관이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그가 그린 수묵화, 목도, 공예품등이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의 업적과 예술성에 대한 많은 화제를 부른다고 할 것 같습니다. 여타 병법자=사무라이의 생애에 있어서 그 생애가 밝혀지기 어려운 점이 있는 반면 무사시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의 일생을 건 이야기를 남겼고, 그곳 기술에 자신의 나이를 기록한 형태가 있어서 1584년생이라는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그의 인생관이 펼쳐질 수 있겠지만 그의 성장기를 떠나서 무사시의 양자인 이오리(伊織)가 남긴 기록은 생전의 무사시를 알고 있었던 이에 의한 것으로서 비판성향이 적고 역사에 관련된 자료 자체가 거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비교적 실제와는 오차가 있을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를 기리기 위한 자료로서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의 기록에는 미화가 있을 수 있다고 하겠지만 기나긴 전국시대를 마친 에도시대에 있어서 가장 파란만장하고 화려한 일대기를 보낸 무사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의 저서인 오륜서를 기반으로 알려진 무사시의 인생은 13살에 첫 대결에서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29살까지 약 60여번의 대결을 벌여 모든 승리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역시 무관으로서 큰 이름을 날렸던 아버지와 함께 전국시대의 말기를 같이 지낸 무사시는 천하를 제패할 수 있는 무사로서의 위치를 굳건하게 갖추게 된 요시오카 문파와의 대결이 가장 유명한데 이 사건을 시작으로 그의 특이한 전력과 역사적인 활약에 대한 조명이 새롭게 부각된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가 벌인 다양한 대결은 많은 화제를 불렀고 이후 속칭 간류지마의 결투(巖流島の決鬪)는 이후 다양한 영화, 소설 등에서 많은 시극인들의 창작에 자극의욕을 주었고 실제와는 좀 다른 형태로서 소개되는 상반된 의견을 가진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무사시가 무사로서 가진 최고의 캐릭터 성향은 그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재능을 보였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이름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적용되었고 그가 전국시대 말기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 측이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서 활약했다는 증거나 자료가 실제로 그의 행적을 보여주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의 무명이 알려지면서 그를 사칭한 이들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실제로 그가 벌인 행적 자체는 그가 기술한 자신의 책자를 제외하고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행적보다 그의 무사로서 성숙기에 이른 후에 벌인 대결 등이 정식으로 기록되었는데 진검을 이용한 대결을 금지했던 시대를 앞두고서 벌인 다양한 대결의 결과는 결국 최후의 실전을 경험한 (공식적으로) 무사로서 기록되는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식, 비공식전을 포함하여 그가 벌인 보장원류창술(寶藏院流槍術)의 다카다 마타베(高田又兵衛)과 벌인 대결 등이 많은 이들에게 전술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신분은 일반적인 무사에서 상급무사로서 위명이 더해져서 대 귀족 무사가문에서 가신으로 위임되었을 때도 그의 신분에서는 허락되지 않았던 매사냥을 할 수 있었던 등 대단히 높은 위치에 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제자 등이 말한 기록에 따르면 그의 인생에 있어서 말년 그의 문하에 들어선 이들은 1천 여 명이 넘었다고 하고, 무사시가 말년까지 작업한 그림과 공예품은 지금까지도 전해지면서 그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643년, 구마모토시(熊本市) 그교에 있는 금봉산(金峰山)에 있는 영엄동에서 오륜서(五輪書)를 집필하기 시작, 죽기 수일전에 자철서(自誓書)라고 일컬어지는 독행도(獨行道)와 함께 오륜서를 제자에게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1645년 6월 13일 치바성(千葉城)의 저택에서 사망한 그는 초기 무사 병법에 의한 자신의 검법류를 원명류(円明流)라고 지칭했지만 이후 자신이 직접 기술한 오륜서에 의하면 이도일류(二刀一流) 또는 이천일류(二天一流)라는 명칭을 이용, 결국 이천일류가 최종적으로 정착되었습니다. 후세에는 무사시류라는 이름으로 통칭되기도 했지만 무사시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이 이도류를 이용해 꾸준히 많은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