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4:1~11절은 “(안식에) 들어간다”라는 개념을 8회(1, 3, 5, 6, 10, 11절)나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안식이라는 주제가 핵심임을 알려줍니다. 즉, 안식에 들어가는 문제를 다룹니다.
하지만 본문은 경고 단락으로 히브리서 저자의 주된 관심은 안식에 관한 내용이기보다는, 많은 사람이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지라도 모른다는 경고를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경고를 통해 그의 독자 중에 그 누구도 순례의 길에 낙오되지 않는 것, 그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4:1절과 히브리서 4:11절이 연결되면서 전체 히브리서 4:1~11절이 인클루지오 구조입니다.
히브리서 4:1~5절을 보면 안식에 들어가는 자와 들어가지 못하는 자를 말씀합니다. 3절을 보면 저자는 자신을 포함해서 수신자들을 “우리 믿는 자들”로 규정합니다. 복음을 듣고 그 복음에 반응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수신자들은 출애굽 세대와 달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들입니다. 출애굽 세대는 믿지 아니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민수기 14:22절을 보면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4:1절을 보면 안식의 미래적인 요소를 말씀합니다. 안식에 들어갈 일을 미래로 말씀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4:3절에 “들어간다”라는 말은 헬라어 현재형 동사입니다. 따라서 수신자들이 그 안식에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이미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 계십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패턴대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 있고, 그곳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그 안식이 이미 그리스도인 수신자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보았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가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아니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완성된 안식에 나아가는 순례길에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는 안식은 무엇입니까? “안식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샤바트”입니다. 헬라어로는 “카타파우노”입니다. 명사형은 “카타파우시스”입니다. 저자는 이 안식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3절 하반절을 보면 “세상을 창조할 때마다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달리 번역하면“사실은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그분의 일이 마무리되었다”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절을 보면 확장해서 설명합니다. 창세기 2:2절을 인용하면서 출애굽 세대에게 허락된 안식이 하나님의 창조 시에 있던 안식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 뿌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있다는 점을 밝힙니다.
일곱째 날과 함께 사용된 “샤바트”동사는 무활동을 의미하는 “쉬다” 보다는 “끝내다, 멈추다, 완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세계가 더 이상 창조 과정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 완결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일곱째 날 안식은 육일 창조 사역의 목표인 전 창조의 완결을 함의합니다. 한편 일곱째 날은 다른 여섯 날과 달리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처음 창세기 1장에 소개되는 첫째 날부터 여섯 번째 날 창조는 끝날 때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 째 날이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은 이런 마무리가 없습니다. 이 말은 일곱째 날 하나님의 안식은 끝이 없다,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무리되는 때가 없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일곱째 날이니라”가 아니라 일곱째 날은 “영원하다”라는 연속성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세대에게 허락된 안식이 하나님의 창조 시에 있던 안식에 근원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애굽 1세대는 이 안식의 모형에 들어가는 데 실패합니다. 따라서 그 궁극적인 안식에 들어가는 것도 실패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안식을 성취된 형태로 이미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다(히브리서 3:1~6, 마태복음 11:28~30). 그리고 그 실체 완성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며 내다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히브리서 4:6~11절은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자고 말씀합니다. 먼저 8절을 보면 출애굽 세대와 수신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동일한 약속과 복음을 들은 자들입니다. 받은 자들입니다(2절). 하지만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달리 출애굽 1세대는 불신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출애굽 2세대는 여호수아 인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 두 세대, 출애굽 2세대와 히브리서 저자 당시 세대와의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의 인도에 따라서 가나안에 들어가 진정한 안식을 얻었다면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오늘 곧 “다른 날”을 얘기하고, 다른 안식에 들어가야 한다는 권면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편 95편에서입니다(시편 95:7~11).
시편 95편에서 말하는 “안식”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창세기 2:2~3절에서 하나님께서 제 일을 마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을 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일을 말합니다(히브리서 4:4). 물론 여호수아 21:44절 등에서는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에 안식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므로 안식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가 보기에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제공한 하나님의 모형이었습니다(히브리서 4:8). 실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모형이 내다보는 실체는 “다른 날”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과 여호수아가 헬라어 표기가 동일합니다. 예수님도 “예수스”, 여호수아도 “예수스”입니다. 이러한 이름의 일치는 여호수아 안식과 예수님의 안식 사이의 모형론적인 관계를 시사합니다. 여호수아의 안식은 모형이었고, 예수님의 안식은 그 궁극적인 목표인 실체이다라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11절을 보면 “저 안식에”라고 말씀합니다. “저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자”라고 권면합니다. “힘쓰다”라는 말은 헬라어 “스푸다소멘”입니다. 저자는 그리스도인 수신자들이 들어가야 할 안식을 “저 안식”(에케이넨 텐 카타파우신)이라고 합니다. 수신자들은 이 종말론적인 안식을 이미 누리고 있는 자입니다(히브리서 4:3). 하지만 그들이 누리고 있는 이 안식은 미래의 완성을 내다보고 있는 안식입니다(히브리서 4:1).
따라서 그들은 그 완성된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저자가 이렇게 권면하는 이유는 독자들이 이 완성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힘쓰지 않으면 완성된 안식에 들어갈 수도 없다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습니다(히브리서 4:6, 민수기 14:22~23).
저자는 그들의 실패가 수신자들에게도 부정적인 본이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실패해서 못 들어갔는데, 수신자들은 실패해도 들어간다는 원리가 적용이 안 됩니다. 그들이 실패해서 못 들어간다면 너희도 실패하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신자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히브리서 6:1~8, 10:2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