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 - 항해를 안전하게 하여 신대륙과 세계일주에 공헌하였다.
십자군 원정, 몽고의 침입, 동방견문록으로 동서양의 왕래와 교통이 열려 상인, 학자, 성직자가 동양을
자주방문하였고, 이탈리아 상인들이 동방의 후추와 향료 등을 사들이어 많은 이익을 남기였다.
육로의 비단길을 통하여 오는 상품은 오스만투르크가 높은 세금을 부가하여 이익이 없으므로 직접 배로 인도나 중국에 가려고 바다 길을 찾으려는 나선 많은 사람 중에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리케가 유명하다.
엔리케의 노력으로 인도의 서해안 캘리컷에 도착하여 인도항로를 개척하여 직접향료를 입수하여 인도네시아의 향료를 독점하였고 중국의 마카오를 중심으로 무역을 하였다.
국왕들의 탐험 목적은 자국에서 현물로 바치는 곡식이나 가축의 세금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이 부족분을 채우려고 상인과 결탁하여 식민지로부터 이익을 얻어내려는 정책을 '중상주의'라고 부른다.
상업에 의한 이익은 비단과 향료였으나 더 간절히 바란 것은 금과 은이었다.
금과 은을 얻기 위하여 항해를 하였으나 후에는 농장에서 노예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노예무역이 성행하여 미국의 독립 시에는 40만의 노예가 있을 정도로 노예무역이 번창하였다.
1492년 에스파냐는 아시아의 길을 서쪽으로 찾으려 한 것이 신대륙을 발견하게되었다.
1519-21년 마젤란은 토르데실라스조약의 뒷면을 확인하기 위하여 서쪽으로 더 항해 한것이 지구를 일주하게 되었다.
독일의 흑색화약 - 아라비아인이 '그리스 불(화염방사기 일종)'을 사용하였으나 흑색화약이 발명되어 대포나 총에 사용되면서 지금까지의 창, 칼, 견고한 성이 필요 없게 되었다.
화약의 역사는 길다. 중국에서는 '불노장생'의 약으로 개발되었다.
후에 인도에 전하준 것이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어 실용성 있게 만들어 졌다.
화약의 원료인 니트로 글리세린은 불안전하여, 1866년 노벨이 규조 토에 흡수시켜 안전하게 만들고
'다이너마이트'라고 하였다.
노벨은 막대한 돈을 벌었으나 인류의 발달보다 파괴에 쓰이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노벨상을 만들게 되었다. 1899년에 무연화약이 총포의 발사약으로 쓰였다.
처음으로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한 사람은 몽고인으로 유럽원정 때 사용하였고 그들에게 전하여 주었으나 유럽인들이 몽골제국을 몰아 낼 때에도 화약의 힘이라고 한다.
유럽인이 화약의 사용한 것은 벨기에가 최초라고 한다.
독일의 쿠텐베르크의 금속활자 - 책의 대량생산으로 싼값의 책 구입과 성직자의 지식독점도 없어지고 책과 성서가 일반인에게 보급되어 종교개혁에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유럽의 금속활자는 고려·중국·아라비아의 길을 거쳐 들어간 방법에 따라서 당시 아비뇽(Avignon)·부르게스(Burges)·볼로냐(Bologna) 등지에서 연구가 진행되어, 작은 수의 로마 표음문자(알파벳)를 대상으로 구리쇠에 글자마다 거푸집을 새겨서 만드는 방법을 창안하였다.
그와 더불어 합금술의 연구로 납에 주석을 섞은 활자쇠를 만들어냈다.
1452∼56년 사이에 구텐베르크가 찍어낸 42줄의 성서는 그 인쇄술이 짧은 시간에 꼭같은 책을 많이 찍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서구사회에서는 획기적인 일이었고, 싼 값으로 일반인에게 지식을 전파하는 속도를 가속화하였다.
이 당시 유럽에는 시민사회가 이룩되어 있었으므로 더욱 시기를 잘 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기업화를 통하여 상업성이 있었던 점이 한국에서의 금속활자 발명 및 인쇄술 발달과 다른 점이었다.
(출처 네이버,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