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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숙(金星淑) (1898 ~ 1969)】 "임정 국무위원,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
1898년 (음)3월 10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강암동(江岩洞)에서 김문환(金文煥)과 임천 조씨(林川趙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이 김보구(金寶具)가 있었다. 본관은 상산(商山), 호는 운암(雲巖), 법명은 태허(太虛)·성숙(星淑), 이명은 충창(忠昌)·창숙(昌淑)·성암(星巖) 등이다.
1916년 양평의 용문사(龍門寺)에서 태허(太虛)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에는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奉先寺)에서 월초(月初) 스님 문하에서 지내며, 성숙이란 법명을 받고 불가에 입문하였다. 두쥔훼이(杜君慧)와 결혼하여 두간(金杜甘)·두젠(金杜建)·두렌(金杜連) 세 아들을 두었다.
3·1운동 때 양주와 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2년간 옥고를 겪었다. 1921년 봄 출옥 후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 등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초 김봉환 등 승려 5명과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민국대학(民國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재학하면서 사회주의에 관한 지식과 이론을 앞세워 존재감을 확보해 갔다.
유자명·신채호의 추천으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선전부장을 맡았다. 1923년 10월 불교유학생회를 조직하여 기관지 『황야(荒野)』를 발행하였다. 1924년 2월에는 윤종묵·김봉환·심용주 등의 학생들과 별도의 학생구락부(學生俱樂部)를 조직하여 매월 기관지 『학생구락부』를 통하여 사회주의사상의 선전에 힘을 쏟았다. 1925년 1월에는 고려유학생회(高麗留學生會)로 개칭하는 동시에 조직을 확대하였다.
같은 해 조선고학생회와 함께 비밀결사 반역사(反逆社)를 조직하여, 『메이데이』란 선전문건을 발행·배포하였고, 1925년 1월에는 고학생에게 반일취지서를 배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베이징에서 장건상·장지락·양명·김용찬·김봉환·이낙구(李洛九) 등과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였다. 창일당은 이르쿠츠크(Irkutsk) 공산당의 베이징지부 역할을 하였다. 양명과 함께 기관지 『혁명(革命)』 발행에도 깊게 관여하였다. 이 잡지는 1925년 1월부터 1927년 2월까지 발행되어 국내·만주·시베리아(Siberia)·호놀룰루(Honolulu)·캘리포니아(California)·유럽 등지의 한인 학생·청년층에 영향력이 컸다. 모든 글을 직접 써서 석판 인쇄하느라 과로로 협화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코민테른(Comintern) 극동국 책임자 보이틴스키(Grigori Voitinsky)와 중국공산당의 창립자 리다자오(李大釗) 등을 만나 조선공산당 각파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1924년 늦가을 조선유학생회와 학생구락부를 통합하여 통일기성회를 조직하였다. 1925년에는 원세훈 등 민족주의자가 주도한 한교동지회와 함께 3·1운동 기념회를 개최하여 베이징 지역 한인 진영의 통합을 강력하게 제기하였다.
1925년 6월 장쭤린(張作霖) 군벌정권이 일제와 한인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하면서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자, 이를 피해 광저우(廣州)로 가서 중산대학에 재학하면서 의열단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6년 봄 김원봉과 황포군관학교 교장실 부관 겸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손두환(孫斗煥)을 통해 장제스(蔣介石) 교장을 방문하고 한인 학생들의 황포군관학교 입교 및 학비면제 승낙을 받기도 했다. 3월에는 손두환·김원봉 등이 조직한 여월한국혁명군인회(旅粤韓國革命軍人會)에도 관여하였다.
1926년 봄 광저우에서 국내외 각 분파와 단체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있자, 한인 세력을 하나로 단결시키려고 김원봉·장지락 등과 함께 의열단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통일 지도부로서 유월한국혁명청년회(留粤韓國革命靑年會, 粤:광둥성의 간칭)를 조직하였다. 회장에 손두환, 조직위원에 장지락이 선임되었고, 중앙집행위원에 김원봉과 함께 선임되었다.
1926년 6월경 유월한국혁명청년회는 유월한국혁명동지회(留粤韓國革命同志會)로 개편되어, 광저우 지역 한인 진영을 대표하는 유력 단체로 성장하였다. 청년회와 동지회에서 기관지 『혁명운동(革命運動)』 주필을 맡아 모든 선언서를 기초하는 이론가이자 문장가로서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장지락 등과 각지에서 온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망라하여 ‘KK’를 조직하였다. ‘KK’는 독일어 ‘Koreaner Kommunismus’의 약자로 ‘조선인 공산주의’를 뜻한다.
‘KK’가 공산주의자의 통일을 위한 조직이었다면,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체로 주목한 것이 의열단이었다. 의열단 내에서 좌파를 자임하였고, 의열단 조직체제의 ‘정치 단체로 전환’을 추진하였다.
1927년 3, 4월경 광저우에서 개최된 의열단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5명(최림-김원봉, 최원, 장지락, 이영준)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유월한국혁명동지회 집행위원 및 의열단 중앙집행위원의 신분으로 상하이에서 장건상을 만나 대독립당촉성회운동을 논의하였으며, 5월 8일 의열단 및 유월한국혁명동지회를 규합하여 광동대독립당촉성회(廣東大獨立黨促成會)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4월 12일 장제스의 ‘반공쿠데타’로 광저우에서 공산당 숙청이 시작되자, 김원봉·유자명 등과 함께 우한(武漢)으로 피신하여 교도단(敎導團) 제2영 제5련 중공 조직의 책임을 맡았다.
9월 말 중공(中共)의 지시로 교도단과 함께 장파구이(張發奎) 부대를 따라 10월경 광저우로 돌아와 중산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두쥔훼이를 만났다.
12월 11일 광주기의(廣州起義)가 시작되자, 5련(連) 중공 조직의 책임자로서 한인들을 인솔하여 포병련과 함께 사허(沙河)를 점령하였다. 다음 날 장지락 등과 함께 광저우 소비에트정부 성립대회에 참석하였고, 소비에트정부 숙반위원회(肅反委員會) 위원으로 선임되어 군사와 정치의 공작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봉기군이 군벌 및 영·미군의 공격을 받아 철수할 지경에 처하자, 애인 두쥔훼이와 함께 중산대학 학생숙사를 찾아가 중국인 복장과 여비를 마련해 한인 학생들의 탈출을 도왔다.
12월 13일 광저우를 장악한 리지선(李濟深) 군벌이 한인들을 ‘적기당(赤旗黨)’으로 지목하여 탄압을 강화하자, 두쥔훼이의 집에 숨었다가 함께 홍콩을 경유하여 탈출하였다. 1929년 두쥔훼이와 결혼한 이후 생계 유지를 위해 집필과 번역 활동에 진력하여 김산·오성륜 등의 동지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1930년경 다시 광저우로 와서 『민국일보(民國日報)』 기자로 활동하던 중, 중산대학 일본어통역과에 초빙되어 일본어연구소의 일본어 교수로 재직하였다. 상하이로 돌아와서는 문필 활동에 종사하며, 1930년 8월경 두쥔훼이와 함께 중국좌익작가연맹(이하 ‘좌련’)에 가입하여 창작비평위원회 소속원으로 루쉰(魯迅)·마오둔(茅盾) 등과 함께 문학창작 및 이론비평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하자, 루쉰·마오둔·딩링(丁玲) 등 좌련의 지도자들과 함께 연명으로 일본군의 상하이 침략과 민중 학살을 반대하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동시에 『봉화(烽火)』라는 전시 특별간행물과 『반일민중(反日民衆)』이라는 신문의 편집을 담당하며 제국주의 침략을 비판했다.
1932년 초 중국군이 패한 후 광시성(廣西省) 사범대학에서 1년간 교수 생활을 하고, 이듬해 상하이로 돌아와 저술과 번역 활동에 진력하였다. 1928년부터 『일본경제사론』, 『통제경제론』, 『산업합리화』, 『중국학생운동』, 『변증법전정(全程)』 등의 책을 번역하였다. 합법 단체와 문필 활동은 1934년까지 지속되었다.
독립운동 진영으로 돌아온 것은 1935년 무렵이었다. 1935년 12월 12일 상하이의 좌련 및 문화계 인사들과 연명으로 『상하이문화계 구국운동선언(上海文化界救國運動宣言)』을 발표하였다. 두쥔훼이가 관여하던 상하이여성구국회에도 가입하여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35년 중국공산당을 탈퇴하고, 한인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조선공산주의동맹’을 조직함으로써 중국 관내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였다. 1936년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 움직임을 배경으로 상하이에서 박건웅·김산 등 공산주의자 약 20명과 함께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개편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였다.
1937년 11월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 류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의 편집인과 주요 논진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10월 2일 한중 양측 대표들은 조선의용대 결성을 위해 지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 측 인원 4명과 조선민족전선연맹 대표로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김학무, 조선혁명자연맹의 류자명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한커우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조직인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대원들의 정치 및 사상교육을 담당하는 정치조장직을 맡았다.
이후 1942년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까지 중국군 ‘6개 전구(戰區) 남북 13개 성(省) 전지(戰地)’에 배속되어, 주로 일본군 포로 심문, 대일본군 반전 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10월 25일 우한이 일본군에 점령됨에 따라 12월 3일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하였다. 구이린에서 조선의용대 대원들에게 사상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에 한국 독립운동을 알리고 중국인의 항전 의지를 고취하는 글들을 게재하느라 분주하였다. 중국 각계의 요청으로 한중 연대 공동 항일을 주제로 한 강연을 행하였다. 1939년 2월 하순 이후 충칭(重慶)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이 주도한 관내 지역 독립운동 진영의 단일당(單一黨) 결성 움직임이 일어나자, 소수파인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충칭 부근 치장(綦江)에서 전개된 중국 관내 지역 통일전선운동에 뛰어들었다. 5월 김구와 김원봉은 『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여 강력한 단일대당(單一大黨)의 건립을 촉구하자, 이를 반대하고 ‘연맹체’ 방식을 주장하였다.
1940년 12월,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민족전선연맹 대원들은 뤄양(洛陽)에서 민족혁명당에서 탈퇴한 왕지연(王志延, 한빈(韓斌))·이정호 등과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에서 외무주석직을 맡았으나, 내부의 노선 대립으로 결렬되자, 극좌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였다.
1941년 11월경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조직을 복원하고 충칭으로 돌아왔다. 충칭에 복귀한 직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독립운동 단체를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통일 지휘 하에 집중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942년 1월 22일 국무회의에서 김윤택·박건웅·호건과 함께 선전위원으로 뽑혔다. 1월 26일 국무회의에서는 차리석·윤기섭·엄항섭·최석순·김관오·박건웅·안원생과 ‘3·1절기념 주비위원’에 선임되어, 선전조 주임을 맡았다.
1943년 3월 4일 국무회의에서는 내무부 차장에 임명되었고, 4월 10일 국무회의에서는 조소앙·신익희·엄항섭·김상덕·손두환 등과 선전부 선전위원에 선임되었다. 또 같은 해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위원에 선임되어 충칭에 소재한 소련대사관을 상대로 임시정부의 창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4년 4월 24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선거에서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리석·장건상·박찬익·조소앙·성주식·김붕준·유림·김원봉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당선되었다. 1942년 10월 11일 결성된 중한문화협회의 이사로 선임되었고, 10월 17일의 제1차 이사·감사회의에서 선전조 부주임에 선임되었다. 1945년 3월 15일 한국구제총회 창립대회에서 유동열·김붕준 등과 감사에 선임되었고, 회장에는 안정근, 이사에는 두쥔훼이 등이 선출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12월 1일 임시정부 요인 제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초 독립노동당을 창당한 후 장건상·김원봉과 함께 임정을 떠나 민족주의민주전선에 가입하여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노동신문』을 창간하여 미군정 반대 활동을 벌이다가 6개월 옥고를 겪었다. 1947년 5월에는 근로인민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통한 통일임시정부 수립 문제 해결을 주장하였고, 단독정부 수립에는 반대하였다.
1948년 남북 협상에는 참여치 않았으며, 이후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후 유림과 독립노농당을 결성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6·25전쟁 시 납북을 모면하였다. 1952년 부산에서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결성하여 이승만 정권의 재집권에 반대하였고, 이후 혁신계 정치노선을 견지하였다. 1957년 근로인민당 재건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혁신정당 창당에 가담하였으며, 1961년 5·16 쿠데타 시에는 장건상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독립유공자’ 신분이 감안되어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1965년 통일사회당 대표위원, 1966년 신한당 정무위원회 위원, 1967년 재야통합 야당인 신민당의 운영위원, 1968년 신민당 지도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69년 4월 12일 71세로 사망하여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2004년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었고, 2008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98년 (음)3월 10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강암동(江岩洞)에서 김문환(金文煥)과 임천 조씨(林川趙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이 김보구(金寶具)가 있었다. 본관은 상산(商山), 호는 운암(雲巖), 법명은 태허(太虛)·성숙(星淑), 이명은 충창(忠昌)·창숙(昌淑)·성암(星巖) 등이다.
1916년 양평의 용문사(龍門寺)에서 태허(太虛)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에는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奉先寺)에서 월초(月初) 스님 문하에서 지내며, 성숙이란 법명을 받고 불가에 입문하였다. 두쥔훼이(杜君慧)와 결혼하여 두간(金杜甘)·두젠(金杜建)·두렌(金杜連) 세 아들을 두었다.
3·1운동 때 양주와 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2년간 옥고를 겪었다. 1921년 봄 출옥 후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 등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초 김봉환 등 승려 5명과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민국대학(民國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재학하면서 사회주의에 관한 지식과 이론을 앞세워 존재감을 확보해 갔다.
유자명·신채호의 추천으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선전부장을 맡았다. 1923년 10월 불교유학생회를 조직하여 기관지 『황야(荒野)』를 발행하였다. 1924년 2월에는 윤종묵·김봉환·심용주 등의 학생들과 별도의 학생구락부(學生俱樂部)를 조직하여 매월 기관지 『학생구락부』를 통하여 사회주의사상의 선전에 힘을 쏟았다. 1925년 1월에는 고려유학생회(高麗留學生會)로 개칭하는 동시에 조직을 확대하였다.
같은 해 조선고학생회와 함께 비밀결사 반역사(反逆社)를 조직하여, 『메이데이』란 선전문건을 발행·배포하였고, 1925년 1월에는 고학생에게 반일취지서를 배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베이징에서 장건상·장지락·양명·김용찬·김봉환·이낙구(李洛九) 등과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였다. 창일당은 이르쿠츠크(Irkutsk) 공산당의 베이징지부 역할을 하였다. 양명과 함께 기관지 『혁명(革命)』 발행에도 깊게 관여하였다. 이 잡지는 1925년 1월부터 1927년 2월까지 발행되어 국내·만주·시베리아(Siberia)·호놀룰루(Honolulu)·캘리포니아(California)·유럽 등지의 한인 학생·청년층에 영향력이 컸다. 모든 글을 직접 써서 석판 인쇄하느라 과로로 협화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코민테른(Comintern) 극동국 책임자 보이틴스키(Grigori Voitinsky)와 중국공산당의 창립자 리다자오(李大釗) 등을 만나 조선공산당 각파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1924년 늦가을 조선유학생회와 학생구락부를 통합하여 통일기성회를 조직하였다. 1925년에는 원세훈 등 민족주의자가 주도한 한교동지회와 함께 3·1운동 기념회를 개최하여 베이징 지역 한인 진영의 통합을 강력하게 제기하였다.
1925년 6월 장쭤린(張作霖) 군벌정권이 일제와 한인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하면서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자, 이를 피해 광저우(廣州)로 가서 중산대학에 재학하면서 의열단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6년 봄 김원봉과 황포군관학교 교장실 부관 겸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손두환(孫斗煥)을 통해 장제스(蔣介石) 교장을 방문하고 한인 학생들의 황포군관학교 입교 및 학비면제 승낙을 받기도 했다. 3월에는 손두환·김원봉 등이 조직한 여월한국혁명군인회(旅粤韓國革命軍人會)에도 관여하였다.
1926년 봄 광저우에서 국내외 각 분파와 단체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있자, 한인 세력을 하나로 단결시키려고 김원봉·장지락 등과 함께 의열단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통일 지도부로서 유월한국혁명청년회(留粤韓國革命靑年會, 粤:광둥성의 간칭)를 조직하였다. 회장에 손두환, 조직위원에 장지락이 선임되었고, 중앙집행위원에 김원봉과 함께 선임되었다.
1926년 6월경 유월한국혁명청년회는 유월한국혁명동지회(留粤韓國革命同志會)로 개편되어, 광저우 지역 한인 진영을 대표하는 유력 단체로 성장하였다. 청년회와 동지회에서 기관지 『혁명운동(革命運動)』 주필을 맡아 모든 선언서를 기초하는 이론가이자 문장가로서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장지락 등과 각지에서 온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망라하여 ‘KK’를 조직하였다. ‘KK’는 독일어 ‘Koreaner Kommunismus’의 약자로 ‘조선인 공산주의’를 뜻한다.
‘KK’가 공산주의자의 통일을 위한 조직이었다면,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체로 주목한 것이 의열단이었다. 의열단 내에서 좌파를 자임하였고, 의열단 조직체제의 ‘정치 단체로 전환’을 추진하였다.
1927년 3, 4월경 광저우에서 개최된 의열단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5명(최림-김원봉, 최원, 장지락, 이영준)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유월한국혁명동지회 집행위원 및 의열단 중앙집행위원의 신분으로 상하이에서 장건상을 만나 대독립당촉성회운동을 논의하였으며, 5월 8일 의열단 및 유월한국혁명동지회를 규합하여 광동대독립당촉성회(廣東大獨立黨促成會)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4월 12일 장제스의 ‘반공쿠데타’로 광저우에서 공산당 숙청이 시작되자, 김원봉·유자명 등과 함께 우한(武漢)으로 피신하여 교도단(敎導團) 제2영 제5련 중공 조직의 책임을 맡았다.
9월 말 중공(中共)의 지시로 교도단과 함께 장파구이(張發奎) 부대를 따라 10월경 광저우로 돌아와 중산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두쥔훼이를 만났다.
12월 11일 광주기의(廣州起義)가 시작되자, 5련(連) 중공 조직의 책임자로서 한인들을 인솔하여 포병련과 함께 사허(沙河)를 점령하였다. 다음 날 장지락 등과 함께 광저우 소비에트정부 성립대회에 참석하였고, 소비에트정부 숙반위원회(肅反委員會) 위원으로 선임되어 군사와 정치의 공작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봉기군이 군벌 및 영·미군의 공격을 받아 철수할 지경에 처하자, 애인 두쥔훼이와 함께 중산대학 학생숙사를 찾아가 중국인 복장과 여비를 마련해 한인 학생들의 탈출을 도왔다.
12월 13일 광저우를 장악한 리지선(李濟深) 군벌이 한인들을 ‘적기당(赤旗黨)’으로 지목하여 탄압을 강화하자, 두쥔훼이의 집에 숨었다가 함께 홍콩을 경유하여 탈출하였다. 1929년 두쥔훼이와 결혼한 이후 생계 유지를 위해 집필과 번역 활동에 진력하여 김산·오성륜 등의 동지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1930년경 다시 광저우로 와서 『민국일보(民國日報)』 기자로 활동하던 중, 중산대학 일본어통역과에 초빙되어 일본어연구소의 일본어 교수로 재직하였다. 상하이로 돌아와서는 문필 활동에 종사하며, 1930년 8월경 두쥔훼이와 함께 중국좌익작가연맹(이하 ‘좌련’)에 가입하여 창작비평위원회 소속원으로 루쉰(魯迅)·마오둔(茅盾) 등과 함께 문학창작 및 이론비평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하자, 루쉰·마오둔·딩링(丁玲) 등 좌련의 지도자들과 함께 연명으로 일본군의 상하이 침략과 민중 학살을 반대하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동시에 『봉화(烽火)』라는 전시 특별간행물과 『반일민중(反日民衆)』이라는 신문의 편집을 담당하며 제국주의 침략을 비판했다.
1932년 초 중국군이 패한 후 광시성(廣西省) 사범대학에서 1년간 교수 생활을 하고, 이듬해 상하이로 돌아와 저술과 번역 활동에 진력하였다. 1928년부터 『일본경제사론』, 『통제경제론』, 『산업합리화』, 『중국학생운동』, 『변증법전정(全程)』 등의 책을 번역하였다. 합법 단체와 문필 활동은 1934년까지 지속되었다.
독립운동 진영으로 돌아온 것은 1935년 무렵이었다. 1935년 12월 12일 상하이의 좌련 및 문화계 인사들과 연명으로 『상하이문화계 구국운동선언(上海文化界救國運動宣言)』을 발표하였다. 두쥔훼이가 관여하던 상하이여성구국회에도 가입하여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35년 중국공산당을 탈퇴하고, 한인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조선공산주의동맹’을 조직함으로써 중국 관내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였다. 1936년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 움직임을 배경으로 상하이에서 박건웅·김산 등 공산주의자 약 20명과 함께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개편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였다.
1937년 11월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 류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의 편집인과 주요 논진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10월 2일 한중 양측 대표들은 조선의용대 결성을 위해 지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 측 인원 4명과 조선민족전선연맹 대표로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김학무, 조선혁명자연맹의 류자명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한커우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조직인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대원들의 정치 및 사상교육을 담당하는 정치조장직을 맡았다.
이후 1942년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까지 중국군 ‘6개 전구(戰區) 남북 13개 성(省) 전지(戰地)’에 배속되어, 주로 일본군 포로 심문, 대일본군 반전 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10월 25일 우한이 일본군에 점령됨에 따라 12월 3일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하였다. 구이린에서 조선의용대 대원들에게 사상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에 한국 독립운동을 알리고 중국인의 항전 의지를 고취하는 글들을 게재하느라 분주하였다. 중국 각계의 요청으로 한중 연대 공동 항일을 주제로 한 강연을 행하였다. 1939년 2월 하순 이후 충칭(重慶)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이 주도한 관내 지역 독립운동 진영의 단일당(單一黨) 결성 움직임이 일어나자, 소수파인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충칭 부근 치장(綦江)에서 전개된 중국 관내 지역 통일전선운동에 뛰어들었다. 5월 김구와 김원봉은 『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여 강력한 단일대당(單一大黨)의 건립을 촉구하자, 이를 반대하고 ‘연맹체’ 방식을 주장하였다.
1940년 12월,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민족전선연맹 대원들은 뤄양(洛陽)에서 민족혁명당에서 탈퇴한 왕지연(王志延, 한빈(韓斌))·이정호 등과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에서 외무주석직을 맡았으나, 내부의 노선 대립으로 결렬되자, 극좌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였다.
1941년 11월경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조직을 복원하고 충칭으로 돌아왔다. 충칭에 복귀한 직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독립운동 단체를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통일 지휘 하에 집중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942년 1월 22일 국무회의에서 김윤택·박건웅·호건과 함께 선전위원으로 뽑혔다. 1월 26일 국무회의에서는 차리석·윤기섭·엄항섭·최석순·김관오·박건웅·안원생과 ‘3·1절기념 주비위원’에 선임되어, 선전조 주임을 맡았다.
1943년 3월 4일 국무회의에서는 내무부 차장에 임명되었고, 4월 10일 국무회의에서는 조소앙·신익희·엄항섭·김상덕·손두환 등과 선전부 선전위원에 선임되었다. 또 같은 해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위원에 선임되어 충칭에 소재한 소련대사관을 상대로 임시정부의 창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4년 4월 24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선거에서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리석·장건상·박찬익·조소앙·성주식·김붕준·유림·김원봉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당선되었다. 1942년 10월 11일 결성된 중한문화협회의 이사로 선임되었고, 10월 17일의 제1차 이사·감사회의에서 선전조 부주임에 선임되었다. 1945년 3월 15일 한국구제총회 창립대회에서 유동열·김붕준 등과 감사에 선임되었고, 회장에는 안정근, 이사에는 두쥔훼이 등이 선출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12월 1일 임시정부 요인 제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초 독립노동당을 창당한 후 장건상·김원봉과 함께 임정을 떠나 민족주의민주전선에 가입하여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노동신문』을 창간하여 미군정 반대 활동을 벌이다가 6개월 옥고를 겪었다. 1947년 5월에는 근로인민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통한 통일임시정부 수립 문제 해결을 주장하였고, 단독정부 수립에는 반대하였다.
1948년 남북 협상에는 참여치 않았으며, 이후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후 유림과 독립노농당을 결성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6·25전쟁 시 납북을 모면하였다. 1952년 부산에서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결성하여 이승만 정권의 재집권에 반대하였고, 이후 혁신계 정치노선을 견지하였다. 1957년 근로인민당 재건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혁신정당 창당에 가담하였으며, 1961년 5·16 쿠데타 시에는 장건상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독립유공자’ 신분이 감안되어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1965년 통일사회당 대표위원, 1966년 신한당 정무위원회 위원, 1967년 재야통합 야당인 신민당의 운영위원, 1968년 신민당 지도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69년 4월 12일 71세로 사망하여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2004년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었고, 2008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98년 (음)3월 10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강암동(江岩洞)에서 김문환(金文煥)과 임천 조씨(林川趙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이 김보구(金寶具)가 있었다. 본관은 상산(商山), 호는 운암(雲巖), 법명은 태허(太虛)·성숙(星淑), 이명은 충창(忠昌)·창숙(昌淑)·성암(星巖) 등이다.
1916년 양평의 용문사(龍門寺)에서 태허(太虛)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에는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奉先寺)에서 월초(月初) 스님 문하에서 지내며, 성숙이란 법명을 받고 불가에 입문하였다. 두쥔훼이(杜君慧)와 결혼하여 두간(金杜甘)·두젠(金杜建)·두렌(金杜連) 세 아들을 두었다.
3·1운동 때 양주와 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2년간 옥고를 겪었다. 1921년 봄 출옥 후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 등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초 김봉환 등 승려 5명과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민국대학(民國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재학하면서 사회주의에 관한 지식과 이론을 앞세워 존재감을 확보해 갔다.
유자명·신채호의 추천으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선전부장을 맡았다. 1923년 10월 불교유학생회를 조직하여 기관지 『황야(荒野)』를 발행하였다. 1924년 2월에는 윤종묵·김봉환·심용주 등의 학생들과 별도의 학생구락부(學生俱樂部)를 조직하여 매월 기관지 『학생구락부』를 통하여 사회주의사상의 선전에 힘을 쏟았다. 1925년 1월에는 고려유학생회(高麗留學生會)로 개칭하는 동시에 조직을 확대하였다.
같은 해 조선고학생회와 함께 비밀결사 반역사(反逆社)를 조직하여, 『메이데이』란 선전문건을 발행·배포하였고, 1925년 1월에는 고학생에게 반일취지서를 배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베이징에서 장건상·장지락·양명·김용찬·김봉환·이낙구(李洛九) 등과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였다. 창일당은 이르쿠츠크(Irkutsk) 공산당의 베이징지부 역할을 하였다. 양명과 함께 기관지 『혁명(革命)』 발행에도 깊게 관여하였다. 이 잡지는 1925년 1월부터 1927년 2월까지 발행되어 국내·만주·시베리아(Siberia)·호놀룰루(Honolulu)·캘리포니아(California)·유럽 등지의 한인 학생·청년층에 영향력이 컸다. 모든 글을 직접 써서 석판 인쇄하느라 과로로 협화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코민테른(Comintern) 극동국 책임자 보이틴스키(Grigori Voitinsky)와 중국공산당의 창립자 리다자오(李大釗) 등을 만나 조선공산당 각파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1924년 늦가을 조선유학생회와 학생구락부를 통합하여 통일기성회를 조직하였다. 1925년에는 원세훈 등 민족주의자가 주도한 한교동지회와 함께 3·1운동 기념회를 개최하여 베이징 지역 한인 진영의 통합을 강력하게 제기하였다.
1925년 6월 장쭤린(張作霖) 군벌정권이 일제와 한인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하면서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자, 이를 피해 광저우(廣州)로 가서 중산대학에 재학하면서 의열단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6년 봄 김원봉과 황포군관학교 교장실 부관 겸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손두환(孫斗煥)을 통해 장제스(蔣介石) 교장을 방문하고 한인 학생들의 황포군관학교 입교 및 학비면제 승낙을 받기도 했다. 3월에는 손두환·김원봉 등이 조직한 여월한국혁명군인회(旅粤韓國革命軍人會)에도 관여하였다.
1926년 봄 광저우에서 국내외 각 분파와 단체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있자, 한인 세력을 하나로 단결시키려고 김원봉·장지락 등과 함께 의열단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통일 지도부로서 유월한국혁명청년회(留粤韓國革命靑年會, 粤:광둥성의 간칭)를 조직하였다. 회장에 손두환, 조직위원에 장지락이 선임되었고, 중앙집행위원에 김원봉과 함께 선임되었다.
1926년 6월경 유월한국혁명청년회는 유월한국혁명동지회(留粤韓國革命同志會)로 개편되어, 광저우 지역 한인 진영을 대표하는 유력 단체로 성장하였다. 청년회와 동지회에서 기관지 『혁명운동(革命運動)』 주필을 맡아 모든 선언서를 기초하는 이론가이자 문장가로서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장지락 등과 각지에서 온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망라하여 ‘KK’를 조직하였다. ‘KK’는 독일어 ‘Koreaner Kommunismus’의 약자로 ‘조선인 공산주의’를 뜻한다.
‘KK’가 공산주의자의 통일을 위한 조직이었다면,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체로 주목한 것이 의열단이었다. 의열단 내에서 좌파를 자임하였고, 의열단 조직체제의 ‘정치 단체로 전환’을 추진하였다.
1927년 3, 4월경 광저우에서 개최된 의열단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5명(최림-김원봉, 최원, 장지락, 이영준)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유월한국혁명동지회 집행위원 및 의열단 중앙집행위원의 신분으로 상하이에서 장건상을 만나 대독립당촉성회운동을 논의하였으며, 5월 8일 의열단 및 유월한국혁명동지회를 규합하여 광동대독립당촉성회(廣東大獨立黨促成會)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4월 12일 장제스의 ‘반공쿠데타’로 광저우에서 공산당 숙청이 시작되자, 김원봉·유자명 등과 함께 우한(武漢)으로 피신하여 교도단(敎導團) 제2영 제5련 중공 조직의 책임을 맡았다.
9월 말 중공(中共)의 지시로 교도단과 함께 장파구이(張發奎) 부대를 따라 10월경 광저우로 돌아와 중산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두쥔훼이를 만났다.
12월 11일 광주기의(廣州起義)가 시작되자, 5련(連) 중공 조직의 책임자로서 한인들을 인솔하여 포병련과 함께 사허(沙河)를 점령하였다. 다음 날 장지락 등과 함께 광저우 소비에트정부 성립대회에 참석하였고, 소비에트정부 숙반위원회(肅反委員會) 위원으로 선임되어 군사와 정치의 공작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봉기군이 군벌 및 영·미군의 공격을 받아 철수할 지경에 처하자, 애인 두쥔훼이와 함께 중산대학 학생숙사를 찾아가 중국인 복장과 여비를 마련해 한인 학생들의 탈출을 도왔다.
12월 13일 광저우를 장악한 리지선(李濟深) 군벌이 한인들을 ‘적기당(赤旗黨)’으로 지목하여 탄압을 강화하자, 두쥔훼이의 집에 숨었다가 함께 홍콩을 경유하여 탈출하였다. 1929년 두쥔훼이와 결혼한 이후 생계 유지를 위해 집필과 번역 활동에 진력하여 김산·오성륜 등의 동지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1930년경 다시 광저우로 와서 『민국일보(民國日報)』 기자로 활동하던 중, 중산대학 일본어통역과에 초빙되어 일본어연구소의 일본어 교수로 재직하였다. 상하이로 돌아와서는 문필 활동에 종사하며, 1930년 8월경 두쥔훼이와 함께 중국좌익작가연맹(이하 ‘좌련’)에 가입하여 창작비평위원회 소속원으로 루쉰(魯迅)·마오둔(茅盾) 등과 함께 문학창작 및 이론비평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하자, 루쉰·마오둔·딩링(丁玲) 등 좌련의 지도자들과 함께 연명으로 일본군의 상하이 침략과 민중 학살을 반대하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동시에 『봉화(烽火)』라는 전시 특별간행물과 『반일민중(反日民衆)』이라는 신문의 편집을 담당하며 제국주의 침략을 비판했다.
1932년 초 중국군이 패한 후 광시성(廣西省) 사범대학에서 1년간 교수 생활을 하고, 이듬해 상하이로 돌아와 저술과 번역 활동에 진력하였다. 1928년부터 『일본경제사론』, 『통제경제론』, 『산업합리화』, 『중국학생운동』, 『변증법전정(全程)』 등의 책을 번역하였다. 합법 단체와 문필 활동은 1934년까지 지속되었다.
독립운동 진영으로 돌아온 것은 1935년 무렵이었다. 1935년 12월 12일 상하이의 좌련 및 문화계 인사들과 연명으로 『상하이문화계 구국운동선언(上海文化界救國運動宣言)』을 발표하였다. 두쥔훼이가 관여하던 상하이여성구국회에도 가입하여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35년 중국공산당을 탈퇴하고, 한인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조선공산주의동맹’을 조직함으로써 중국 관내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였다. 1936년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 움직임을 배경으로 상하이에서 박건웅·김산 등 공산주의자 약 20명과 함께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개편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였다.
1937년 11월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 류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의 편집인과 주요 논진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10월 2일 한중 양측 대표들은 조선의용대 결성을 위해 지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 측 인원 4명과 조선민족전선연맹 대표로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김학무, 조선혁명자연맹의 류자명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한커우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조직인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대원들의 정치 및 사상교육을 담당하는 정치조장직을 맡았다.
이후 1942년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까지 중국군 ‘6개 전구(戰區) 남북 13개 성(省) 전지(戰地)’에 배속되어, 주로 일본군 포로 심문, 대일본군 반전 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10월 25일 우한이 일본군에 점령됨에 따라 12월 3일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하였다. 구이린에서 조선의용대 대원들에게 사상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에 한국 독립운동을 알리고 중국인의 항전 의지를 고취하는 글들을 게재하느라 분주하였다. 중국 각계의 요청으로 한중 연대 공동 항일을 주제로 한 강연을 행하였다. 1939년 2월 하순 이후 충칭(重慶)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이 주도한 관내 지역 독립운동 진영의 단일당(單一黨) 결성 움직임이 일어나자, 소수파인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충칭 부근 치장(綦江)에서 전개된 중국 관내 지역 통일전선운동에 뛰어들었다. 5월 김구와 김원봉은 『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여 강력한 단일대당(單一大黨)의 건립을 촉구하자, 이를 반대하고 ‘연맹체’ 방식을 주장하였다.
1940년 12월,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민족전선연맹 대원들은 뤄양(洛陽)에서 민족혁명당에서 탈퇴한 왕지연(王志延, 한빈(韓斌))·이정호 등과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에서 외무주석직을 맡았으나, 내부의 노선 대립으로 결렬되자, 극좌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였다.
1941년 11월경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조직을 복원하고 충칭으로 돌아왔다. 충칭에 복귀한 직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독립운동 단체를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통일 지휘 하에 집중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942년 1월 22일 국무회의에서 김윤택·박건웅·호건과 함께 선전위원으로 뽑혔다. 1월 26일 국무회의에서는 차리석·윤기섭·엄항섭·최석순·김관오·박건웅·안원생과 ‘3·1절기념 주비위원’에 선임되어, 선전조 주임을 맡았다.
1943년 3월 4일 국무회의에서는 내무부 차장에 임명되었고, 4월 10일 국무회의에서는 조소앙·신익희·엄항섭·김상덕·손두환 등과 선전부 선전위원에 선임되었다. 또 같은 해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위원에 선임되어 충칭에 소재한 소련대사관을 상대로 임시정부의 창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4년 4월 24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선거에서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리석·장건상·박찬익·조소앙·성주식·김붕준·유림·김원봉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당선되었다. 1942년 10월 11일 결성된 중한문화협회의 이사로 선임되었고, 10월 17일의 제1차 이사·감사회의에서 선전조 부주임에 선임되었다. 1945년 3월 15일 한국구제총회 창립대회에서 유동열·김붕준 등과 감사에 선임되었고, 회장에는 안정근, 이사에는 두쥔훼이 등이 선출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12월 1일 임시정부 요인 제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초 독립노동당을 창당한 후 장건상·김원봉과 함께 임정을 떠나 민족주의민주전선에 가입하여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노동신문』을 창간하여 미군정 반대 활동을 벌이다가 6개월 옥고를 겪었다. 1947년 5월에는 근로인민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통한 통일임시정부 수립 문제 해결을 주장하였고, 단독정부 수립에는 반대하였다.
1948년 남북 협상에는 참여치 않았으며, 이후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후 유림과 독립노농당을 결성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6·25전쟁 시 납북을 모면하였다. 1952년 부산에서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결성하여 이승만 정권의 재집권에 반대하였고, 이후 혁신계 정치노선을 견지하였다. 1957년 근로인민당 재건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혁신정당 창당에 가담하였으며, 1961년 5·16 쿠데타 시에는 장건상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독립유공자’ 신분이 감안되어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1965년 통일사회당 대표위원, 1966년 신한당 정무위원회 위원, 1967년 재야통합 야당인 신민당의 운영위원, 1968년 신민당 지도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69년 4월 12일 71세로 사망하여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2004년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었고, 2008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