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 중순 어느 휴일, 서울중앙지검 10층 특별조사실에는 이건석 검사가 혼자 출근해 있었다. 특조실은 후미진 곳에 있는데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평소에도 가기 꺼려지는 곳이다. 그날은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더 을씨년스러웠다. 이 검사 앞에는 자신에게 배당된 어떤 사건의 기록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런데 사무실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 검사는 내키지 않았지만, 한 장, 한 장 기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천둥, 번개가 쳤다. 공포감이 밀려왔다. 도저히 기록을 더 볼 수 없었다. 이 검사는 기록을 덮고 특조실을 빠져나왔다. 토막 난 사체와 사건 현장 사진 등이 어지럽게 붙어 있는 그 사건 기록은 20명을 끔찍하게 살해한 ‘유영철의 사건기록’이었다. 사무실의 이상한 냄새는 부검 당시 찍힌 사진에 배어 있던, 사체의 냄새였다.
최근 ‘강호순 사건’으로 다시 떠올리기 싫은 이름이 항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연쇄 살인범 유영철. 5년 전 끔찍했던 살해사건의 주임 검사였던 이건석 변호사를 ‘문영기의 독(獨)한 인터뷰’에서 만났다.
◈연쇄 살인범들과의 질긴 인연, 강호순, 정두영 사건에도 관여..
사무실에서 만난 이건석 변호사는 아주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검사생활 대부분을 강력사건을 다루는 형사부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수사와 관련해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할 때는 예리한 검사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최근 일어난 강호순 사건에 대해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변호사는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범행을 반복해서 저지른 점, 사체유기, 치밀한 범행, 평상시 살인범의 얼굴이 아니라는 점, 피해자들이 저항이 어려운 노인이나 여성이라는 점, 자신의 쾌감을 위해 살인을 계속했다는 점 등을 비슷한 점으로 꼽았다. 다만, 강호순은 범행 공백기가 1년으로 3개월이었던 유영철보다 다소 길고, 유영철은 강간을 하지 않았지만, 강호순은 강간을 했다는 점이 차이점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강호순과도 인연이 있었다. 2006년 12월부터 2007년 1월 사이, 경기 서남부에서는 안개 낀 수요일이면 부녀자들이 잇따라 실종되는 괴담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안개 낀 수요일 사건’. 그러나 실종자들의 사체도 발견되지 않는데다, 단서마저 없어,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강호순이 범인으로 밝혀진 당시 이 사건의 담당 검사가 바로 이건석 검사였다. 이 변호사는 이 사건을 수사하던 도중 전담이 바뀌면서, 수사지휘는 더이상 하지 않게 됐다고 밝혔다. 또 부산지검 강력 전담일 때는 9명을 살해한 정두영이 범행한 현장에서 수사지휘를 한 적도 있다고 하니, 연쇄살인범들과 참 질긴 인연을 갖고 있는 셈이다.
◈ 증오의 두 대상, 부유층과 여성
20명을 살해한 유영철의 범행대상은 부유층과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가 뚜렷하게 나눠진다.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11월까지 부유층을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신사동, 구기동, 삼성동, 혜화동 등 4곳에서 8명을 살해했다. 모두 부유해 보이는 가정집에 침입해 저지른 일이다.
그리고 3개월의 공백기를 갖는다. 출장 마사지사인 한 여성을 만나 동거한 기간이다. 그러나 그녀가 유영철의 과거 전력과 잔혹성을 알게 되면서 유영철을 떠나자, 증오심에 사로잡힌 유영철은 같은 직종의 여성 마사지사들을 살해대상으로 삼게 된다. 살해대상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훨씬 잔인한 방법으로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변호사는 “유영철은 출장마사지사 여성들을 토막살해하면서, 자기권능감, 살인에 대한 희열, 심지어는 사명감에 젖어들어, 살인 충동에 빠져든 것 같다”고 설명했다. 범행 주기, 즉 살해하는 간격도 점점 빨라졌다. 이 변호사는 “범행주기가 빨라진 것은 살인충동을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이고, 차라리 빨리 잡혀버리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유영철이 살해 직전 여성들의 혈액형을 확인한 이유는?
이 변호사는 유영철을 조사하면서, 정말 치밀하고, 잔인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가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수법이 너무 잔인해, 말로 옮기기도 어려울 정도라고 했다. 유영철은 심지어 인육을 먹었다고 스스로 진술했다.
이 변호사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다. “처음에는 뇌를 먹었지만, 생각보다 질겨 그 다음부터는 간을 먹었다고 했다. 간이 좋지 않아 그랬다고 했는데, 자신과 같은 혈액형인 O형 혈액형을 가진 여성들의 간을 골라 먹었다고 한다. 술에 절은 여성들의 간은 먹지 않았고, 사전에 대상을 선정하고, 혈액형을 물었다고 했다. 혈액형이 같아야만 부작용이 없는 것으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영철은 또한 범행과정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신사동 부유층 살해현장에서는 범행을 할 당시 거실에서 체조를 하면서 몸을 풀고 안방으로 들어가 범행을 하고 나오는가 하면, 범행 후 자신의 체모가 떨어졌을 것을 염려해, 수건으로 바닥을 닦고 나왔다고 한다.
범행 후 휴대전화를 24시간 동안 사용하지 않고, 사체 유기 직전에 손톱을 잘라내는 치밀함을 보였던 강호순과 비슷한 행태다.
◈ 1차 도주했던 유영철, 잡히지 않았으면 영구미제사건으로 남을 뻔
유영철은 1차 검거 후 간질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수사관들을 속이고, 경찰서를 빠져나와 도주했다. 도주 5시간만에 영등포역에서 다시 붙잡히기는 했지만,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유영철이 그때 붙잡히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백명을 채우려 했다”는 끔찍한 말을 내뱉었던 유영철은 정말 추가살인을 했을까?
이 변호사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유영철을 놓친 경찰은 재검거에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나섰다. 유영철의 사진 한장만을 움켜쥔 경찰관은 영등포역에서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유영철을 찾아냈다. 어떻게 유영철이 영등포 역으로 올 것인지 알았겠으며, 그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어떻게 그를 골라낼 수 있었을까…”
천우신조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유영철은 다시 붙잡혔다. 그리고 그의 호주머니에서는 치사량의 수면제가 나왔다. 유영철은 당시 붙잡히지 않았다면 월미도에서 자살하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유영철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더라면, 희대의 연쇄살인 사건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을 뻔했다.
◈ 두 얼굴의 유영철, 자식 아끼는 것은 강호순과 비슷...
언론에 얼굴이 공개된 연쇄살인범 강호순은 정말 저 사람이 부녀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한, 인면수심의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호감가는 인상을 가져 충격을 줬다.
유영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변호사는 “유영철을 20일간 심문하면서, 표정을 자주 살필 수 있었는데, 평상시의 눈빛은 살인범의 눈빛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맑아 보였다. 여자들이 호감을 가질만한 인상”으로 기억했다. 또한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살인기록을 남겨 인세라도 받게 하겠다”던 강호순 처럼, 당시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던 아들 걱정을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유영철은 자극을 받으면 야수처럼 돌변했다. 유영철 사건을 같이 담당했던 차관수검사에게는 조사 도중 갑자기 달려들기도 했고, 재판 과정에서 두 번이나,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기계체조로 단련된 유영철은 공판 도중 영등포구치소로 이감을 요구하면서, 판사가 앉아 있는 법대로 뛰어오르는가 하면, 방청석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욕설이 나오자, 몹시 흥분해 교도관이 강력히 제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의자를 몇 개 부숴버리는 괴력을 보이기도 했다.
◈ “사형제도 반드시 유지돼야 한다”
이 변호사는 사형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최근 연쇄살인이나 살인사건이 늘어나는 것이 사형집행을 하지 않고 있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유영철을 염두에 둔 것 인지는 모르지만, 선별적으로라도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형집행하는 것이 곤란하다면 적어도 감형하는 것은 자제돼야 한다고도 했다. 역시 10년 넘게 강력범죄를 다뤄 온 검사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사형의 경우 ‘형 확정 후 6개월 이내에 집행해야 한다’고 규정돼있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을 마지막으로 사형집행을 하지 않고 있다. 현재 58명의 사형수가 복역 중이다. 이에 따라 국제엠네스티는 2007년 우리나라를 사실상 사형 폐지국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수사상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공개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흉악범에게도 엄연히 인권이 있다. 궁금한 것과 인권과는 다른 문제다. 얼굴을 공개하는 일본과는 법률문화가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밝혔다.
◈ 연쇄살인 국가가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한다.
연쇄살인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떨까. 최근 강호순 사건을 접하고,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 또 발생해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현재 연쇄살인 피해자 가족에 대한 보상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범죄피의자 구조법에 따르면 피해 보상비는 최대 천만원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나마 이같은 제도가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변호사는 특히 강호순이나 유영철과 같은 흉악범에게 살해된 가족들의 경우, 치안유지의 책임을 지고 있는 국가가 어느 정도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몇 년전 의정부에서는 남편의 청부살해 위협을 받고 있는 부인이 검찰과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지만 묵살당해, 결국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도개선은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연쇄살인은 사회가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살인자 개인의 문제인지 판단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막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그리고 적절하고 신속한 수사, 그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은 필요해 보인다.
이 변호사는 연쇄살인을 양극화가 만들어낸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진단했다. 엄정한 법 집행도 중요하고, 과학적인 수사방법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약자, 소외된 자에 대한 배려와 보호 등을 통한 원인 제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유영철의 생일과 전화번호에 얽힌 얘기 한토막
질문) 유영철의 휴대전화 뒷 번호는 1818이라던데 사실인가? 18은 붙여 읽으면 욕이다.
답변) 사실이다. 유영철은 1970년 4월 18일 생이다. 즉, 죽을 ‘死'와 욕이 섞여 있는 생년월일이다. 자신의 불우한 가정환경과 사회에 대한 적대감을 품고 있던 유영철은 자신의 운명이 비관적으로 예정돼 있다고 했다. 그런 유영철은 상징적으로 그런 전화번호를 사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