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의 스승님, 정인세 원장님
그 분과의 첫 만남은 1944년 인 듯하다.
화창한 봄날 이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큰 올케언니가 애기씨 하고 불렀다.
집에 예수 잘 믿는 선지자가 오셨다했다. 집에를 빨리 갔다.
건너 방에를 가보니 테도 없는 중절모에 조끼도 없는 맨 저고리의 한복차림의 옷은 남루했다. 나의 첫말이 ‘잘 믿는 선지자 십니까’ 했다. 돌아보시지도 않고 아무런 답변도 없으셨다. 그리고 한마디 말씀도 없이 그날로 가셨다. 그때 서재호 집사님과 동행하셨다. 그 후에 여름에 밤에 한번 다녀가셨다. 그때 일제 신사참배 문제로 활발히 낮에 다닐 수가 없었던것 같아 밤으로 만 활동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 후 8.15 해방 이후 제가 상급학교를 갈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입니다. 밤에 꿈을 꾸었다. 우리마당 앞에 밭이 있는데 쟁기질을 해놓은 밭이랑에 비들기 새기들이 쭉 깔려 있었다. 그 비들기 새끼를 언니와 둘이서 언니는 바구니에 다 주어서 이고 다니고 나는 하나하나를 치마에다 주어 담은 꿈을 꾸었다, 너무도 꿈이 선명하고 생시 같아서 서 집사님이 오셔서 이야기를 했읍니다. 그 후로 서 집사님께서 오시면 나더러 세상 공부하지 말라 하셨다. 그후 8.15 해방 후 선생님이 오셨다. 나는 그때 인천 인일여중에 원서를 넣고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이현필 선생님이 내게 말슴을 하셨다. 광주에 가면 믿는 학교가 있으니 그리로 가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믿는 학교 라하니 마음이 솔깃했다. 그리고 있었던 때였기에 나 그때에도 나는 예수를 잘 믿어 천사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항상 머리에 있었다. 믿는 학교라고 하니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에 주일이면 약12km 가 넘은 수지 갈보리로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로 어머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헌데 1947년 9월 1일 이날도 주일 예배를 드리러 어머님을 따라 새벽 2시에 12km가 넘는 거리 수지면 갈보리를 갔습니다. 거기에 이현필 선생님이 계셔 주일 예배를 인도 하셨습니다. 오전 예배를 마치고 우리 소녀들을 성경공부를 하기위해 서리내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다 어머님을 따라 예배하러 온소녀들이 였습니다. 그때 간 소녀
김정순 신옥순 방순녀 조정은 복질례 정귀식 어머님 한분 강화선 이렇게 그날 밤부터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동광원 공동체 시작이 바로 이날인 것입니다. 그때 맨 처음으로 공부 시작 한 말씀이 마가복음인 것 같습니다.
틈틈이 명심보감을 가르쳐 주셨지요, 그때부터 1주일씩 소년반과 교대를 했지요. 주일이면 어머님들이 갈보리로 예배하러 오셔셔 데려가시고 데리고 오시고 하셨지요. 헌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1주일 휴가를 마치고 서리내로 가는데 집에서 밀을 가라서 떡을(개떡) 만들어 주셨읍니다. 선생님은 그때 혼자 계시면서 금식 중에 계셨지요, 우리들이 가니 얼마나 반가워 기뻐하시면서 그 떡을 앞에 놓으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성가 아름답다 (93쪽) 예수님 무릎을 치시면서 얼마나 힘 있게 감동적으로 부르시는지 지금도 생각됩니다.
1.아름답다 예수님 나에 좋은 친구 날 위하여 죽음과 날 위하여사셨네
후렴 예수님 내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주님한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2.저의 모든 일체는 주님 것이 되고요 주님 모든 일체는 저의 것이 되시오
3. 예수 없는 사업은 성공 끝에 실패요 예수 있는 생활은 만사 유익합니다.
4. 예수님은 내생명 또한 저의 기쁨 예수없는 내생이면 잠시라도 못사네
5. 아침에는 예수로 눈을 뜨게 하시고 저녁에는 예수로 잠을 자게 하시네
6. 밭에 나가 일할 때 주님 감독하시고 집에 홀로 있을 때 예수 사랑 한없네
7.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하여도 예수 떠난 중생은 사는 법이 없어요
8. 예수 없는 천국은 내가 원치않고요 예수있는 지옥도 내가 싫지 않아요
9.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아름답고 귀하다.
10. 저산 밑에 백합화 빛나는 새벽별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향기 날린다.
11. 예수 죽을 내죽음 예수부활 내부활 예수승천 내 승천 예수친구 내친구
11절이나 되는 성가를 얼마나 기쁨에 충만하게 부르시는지 지금도 그 성가를 부르며 그때 의 전경이 떠올립니다.
어느 겨울 음력으로 1월 15일 정월 보름날 밤 달빛이 밝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갈보리를 다녀 오셨읍니다. 거기서 쑥떡 2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떡을 오감산에서 기도하시고 계신 김광석 집사님께 갖다 드리러 가신다고 같이 가자 하셨습니다.
한나 어머님과 우리 일행이 6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순 순녀 둘이 따라나섰습니다. 12km 3십리가 된다 들은 것 같습니다. 새벽녘에야 가파른 산을 오르니 오두막이 있었습니다. 아주 가파른 오른 막이였습니다. 우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고요히 찬송을 불렀습니다. 집안을 살피니 불을 켜시드니 끄시고 또 한참만에야 불을 켜시고는 얼마 후에 나오셨습니다. 너무 반갑고 놀래신 것이지요. 나중에 들으니 기도중이시라 천사들의 찬송소리인가 하고 놀래여 당황을 하셔서 불을 끄셨다 합니다.
방에가 가운데 가름막이 있는 방에 들어가 말씀을 나누시고 선생님께서 잔치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쑥떡 2개를 내 놓으시고 김공님께는 일주일 잡수실 것을 끌여 놓으셨다고 깡통에 죽을 내 놓으셨다. 3그릇이나 될까 통보리에 쑥 취나물 실가리 콩잎을 넣어서 보리알은 잘보이지도 않았지요. 그것으로 그 새벽에 우리는 만찬을 하고 날이 밝기도 전에 가자 하셨습니다, 산 아래 수락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거기에는 김공님 따님이 살고 계셨지요. 그때 그 집에 돌배기 어린애가 불화로에 앉아 버려가지고 엉덩이가 데여가지고 아주 무서웠읍니다. 그 때야 병원도 없고 그 산중에서 손쓸 길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우리 일행은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마치고 나니 밥상이 들어오니 선생님께서는 일어서셨습니다. 저희도 같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고 허기가 지는지 그러나 선생님께서 오시니 저희도 왔습니다. 서리내를 오니 오후 석양 무렵이 되었습니다. 서리내를 오니 허기에 지첬습니다, 그 후 우리가 돌아온 후 어린 돌백이 아기 엉덩이가 말끔이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가신 것은 그 집에 축복해주러 가신 것이 틀림 없었던 같습니다. 주님의 인자하신 사랑을 전하러 가신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공부요, 보이지 않는 기적들의 교훈인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저는 주님의 부르심의 선택을 받은 것이였다고 느껴집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왜 택하셔서 부르셨을까요? 우리의 삶은 기적과 교훈이 였습니다. 그 때의 삶 자체가 기적이 아니였든 것이였습니다. 우리는 1948년 3월경 공부를 마치고 3월 15일 전 식구가 전남 광주시 양림동 YMCA 로 옮겼다. 그 당시 교통수단이 좋지가 않아 기차로 가다 순천에서 자고 광주에는 3월 16일에 도착 하였습니다. 그때 거기에는 삼화사 남학생들이 있었다. 조석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오전시간에는 성경공부를 예배식으로 한것 같았읍니다
그때 영어 성경 한 구절을 일러주셨습니다. 영어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Do not be afraid, littl flock. for your Father has been pleased to give you the kingdom. luka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 하시느니라
눅 12;32
나는 이 성경구절을 지금도 암송합니다. 그때 그 전경을 회상 하면서 그때 선생님께서 성경을 들고 서서 읽혀 주시던 그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도 저희를 들어 간구 하시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1952년 경 가을인듯 싶습니다. 고아원을 할 때지요. 여학생 한반을 맡아 같이 숙식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내가 생손가락을 앓았습니다. 그때는 약도 쓰지도 않고 병원도 가지 않을 때이니까요, 밤이 깊었습니다. 밤새 손가락이 아려서 잠도 못자고 손을 붙잡고 울고 이리저리 실내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를 울고 실내를 돌고 있었는지 울다 달빛에 비치는 그림자를 언뜻 보았습니다. 유리창 밖에 선생님께서 두손을 합장 하고 기도를 하시고 계신 모습을 뵈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 그때 저는 그 앓은 고통을 잊을 정도로 놀랬으니 까요. 또 울었습니다. 지금 울었던 눈물은 눈물과는 다른 눈물이었습니다. 그 감동을 무어라 표현 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울었을까요? 선생님께서는 저를 위해 창밖에서 기도하셨다는 사실 이였지요. 그때 제 나이 16-17세 인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손가락은 근이 제절로빠지고 낳았으니까요, 그 후로 손가락 앓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 후로도 감히 그때 일을 여쭈어 볼 생각도 못해 보았습니다. 그분 안에서는 반드시 성령이 역사하심이 분명했으나까요,
한번은 형제(김정순)와 선생님께 갔습니다. 많은 말씀을 들었으나 기억된 것은 ‘숨은 봉사를 하라’ 숨은 봉사가 무엇인가 물으셨읍니다. 남이 모르는 봉사 그때 무어라 대답을 드렸느지는 모릅니다. 허나 그때 남의 영혼을 이웃을 위해 일류를 위해 기도 하는 것이 숨은 봉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영혼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인격 도야(陶冶)를 예수를 바로 보고 믿고 가는 것이 곹 인격이 완성되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초점은 인격 완성 자립정신을 인격도야(陶冶)를 두고 말씀하셨지요.
어떤 체계적인 공부나 긴 설교보다도 저희에게는 일상생활에서 한 말씀씩 해주신 말씀이 저희에게 하신 교훈이 셨습니다. 예를 들면 앉은 자세 어른들을 대할 때는 눈을 어떻게 떠야 한다는 것, 남자들과 대화나 물건을 주고받을 때는 직접 받지 않는 다는 것. 절제는 우리 생활하는데 기본이라 하셨습니다. 지당 어머님에게 절제를 배우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절제는 우리 삶에있어 기본이라 하셨습니다.
한번은 매서운 겨울이 였지요, 어데를 가시는데 같이 가자 하셨습니다.
헌데 길바닥은 어름 판인데 서생님께서는 신발을 벗어 들고 가신 것이 아닙니까? 양림동에서 밤나무골을 간 것 같습니다. 저희들도 신발을 벗어 들고 갔습니다. 처음에는 발이 실이더니 나중에는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는 아무 감각도 없이 발이 어데가 단지 것는 것인지 전혀 감각을 잃었지요. 그리고 갔던 기억은 나는데 그로 인해 어떤 고생했던 기억은 나질 않습니다. 이런 기적과 기사를 그때는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났던 것입니다.
1954년 경 학생 2반을 데리고 저는 진도로 가고 정순언니는 남원으로 가라 하셔서 가기 전에 가겠노라고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하신 말씀이 ‘돌아올 때는 동광원은 없을 것입니다’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선견지명이 계셨습니다. 헌데 그해 8월 달에 소식이 왔습니다. 동광원이 해산되었다는 소식이, 언제나 선견(先見) 지명이 계셔서 그대로 되었습니다.
가을에 고구마 추수를 하고 있는데 광주에서 정인세 원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애주 언님과 저를 나오라고 하셨다고 데리러 오셨습니다. 다음날 광주에 나오니 고아원은 다 폐지가 되고 식량마저 다 실어가고 식량으로 많은 곤란을 격고들 생활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불도 때지 않은 냉방에서 이불도 없이 잡수는 것도 통보리 쓰레기 넣은 죽도 하루 한 끼 일식을 하시고 계셨지요, 헌데 식량으로 많이 힘들어 100여명이 넘는 식구가 시내가 똥구루마를 끌고 거름을 퍼다 감동산에 거름을 하느라 매일의 노동은 컸으나 육신 지탱이 어려워 쓰러지는 사람도 생기고 한데 다른 고아원으로 데려간 고아들이 몇날 며칠씩 걸어서들 찾아옵니다. 이러니 식구는 날로 불어나고 식량은 애기들 실어갈 때 식량이니 옷가지 모두를 다 같이 실려 보내 버려서 어려웠던 때였습니다. 헌데 뜻밖에 한천에서 식량을 싣고왔습니다. 한천에서는 정미소를 하고 농사를지면서 5년 동안을 비축했다 합니다. 헌데 이곳 소식을 전해 듣고 추럭으로 싣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여반 학생반 3반을 오북환 장로님을 모시고 한천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8월 달에 가서 돈들메라는 곳에서 살다가 가을에 강변으로 막을 치고 나와서 10월 까지 지내다 날이 싸늘해지고 기거가 어려워 안집 한천으로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그때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 거의 시체가 되신 분이 서울로 가셔서 아현 동 빈민들 굴다리 밑에서 칠성판을 깔고 계시면서 파계를 선언 하셨습니다. 1955년 한천에 계신분들은 냉정 하셨습니다. ‘너희지도자 선생이 시험에 들었다. 너희들도 인제 그 지도자를 따르겠는가? 하고 그곳에 우리를 머물게 하려고 많은 좋지 않은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살기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헌데 그때 마치 저희는 산에 낭구(땔감)를 거의 매일 학생들과 함께 산에가 낭구를 해다 남방 취사 연료를 해결 하던 때었습니다. 그래 서투른 낫 질에 손을 크게 다쳤는데 한편으로는 어머님 생각 또 서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우물을 판다고 돌을 저 나르라고 해서 약 2km 되는 거리에서 돌을 주워 오라해서 지게에 돌을 지는데 지게질이 서투르니 큰 돌을지고 일어서는데 짊어졌던 돌이 앞으로 떨어지면서 땅으로 짚었던 손에 떨어져 손가락 3개를 몽땅 깨 버려서 하나는 매듭들이 거의 으스러지고 2개는 합창이 되여 피가 난자한데 날이 추우니까 피가 그대로 얼어 버립니다. 깨진 손을 추운 겨울인데 돌을지고 약2키로 되는 데를 오고 나니 손이 너무 부어 팔둑까지 너무 부어서 옷을 못 벗고 집에와서 가위로 옷을 짜르고 벗기고는 깨진 손가락 피가 얼어붙어 남의 살이 되어버렀습니다. 이 얼어붙은 피가 녹고 피가 흐르면서 어떻게 아프던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지요. 누가 알까보아 방으로 들어가 밥자리를 못가니 사람들이 내방으로 와서 보게 되었습니다. 헌데 그날이 수요일이여서 저녁에 다 예배를 드리러 가고 혼자 있는데 눈물이 나와서 달을 쳐다보며 울고 또 울고 또 울고 혼자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 그 생활이 힘드러 맘으로 좀 회의를 느껴 시험에 들어 고민을 하고 딴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무엇 보다도 스승님께 대한 비난 시험에 들어 지도자가 고기를 먹고 병원에 가고 약을 쓴다고 타락했다느니 고기를 먹었다느니 하는 비난을 하는 말을 감당 못하고 이곳을 벗어날까 하는 생각에 고심하던 때였습니다. 생활이 힘드는 것 보다도 선생님께 대한 시험이니 비난하는 소리 예배 시간이면 비웃는 소리들 비난소리가 제일 듣기가 힘들어서 차라리 이곳을 떠날까 하는 생각을 잠간 했던건데 그 생각이 시험이고 하나님의 뜻을 기도로 극복하지 못하고 내생각으로 오만한 교만이었다는 것이 회개가 되면서 한없이 자복이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또 자복하고 울고 또 울고 시간이 어떻게 되는 줄도 모르고 울고 또 울고 자복하고 울고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네가 판단하느냐 하는 주님이 꾸지람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잘못했습니다. 벌을 더 주시고 더 아프게 벌을 주시옵소서 자복하고 자복하고 한참 울고 밤새 울고 나니 마음에 평안이오고 다친 것이 도리혀 감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같은 것을 버리시지 않으신 증거로 제게 이 어러움을 주신 것이 분명하여 감사하여 또 울었습니다. 갑자기 선생님을 뵈옵고 싶었습니다. 또 한없이 감사 했습니다. 우리하나님은 나를 기억하시고 보고 계셔 제가 곁길로 가지 못하게 이렇게 현저하게 바른길로 인도하심을 느끼고 깨닫게 하심을 얼마나 감사해야 할 것인가? 감사의 눈물이 또 울고 울었습니다, 울고 또 울고 저는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 손 아픈 것은 잊어버렸습니다. 아침에 보니 그렇게 팅팅부었던 팔이 부기가 빠졌습니다. 헌데 자복하고 울고 있을 때 갑자기 팔이 불에 넣은 것같이 뜨거웠습니다. 그렇게 뜨거웁더니 그 아프던 진통이 머젔습니다. 통증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전혀 통증이 없었습니다. 그때 성령의 불로 치유하신 것입니다(습3;12). 선생님을 뵈옵고 싶은데 그곳에는 광주에 나가는 것조차 시험에 들었다고 비난을 하고 맘으로 많이 힘이 드렀던 것 같습니다. 헌데 그것이 막 회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서 이 상황을 모르신 것인가 하면 어데서나 어려우면 피하면 되는 것인가 정말 뜨거운 눈물과 회개가 나오는데 얼마를 울었는지 얼마나 울고 자복하고 또 자복하고 울고 나니 언제 가는 그 아픈 것이 있고 있는데 어떻게나 불같이 뜨거웁든지 불에다 집어넣었던 것처럼 뜨거웠습니다. 그 때는 다른 생각 할 여지도 없이 어떻게나 뜨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헌데 통회하고 얼마를 울다보니 내가 어데가 아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보니 내가 손을 붙잡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 밤을 얼마나 감사에 눈물로 적시고 새벽을 깨고 보니 부기도 빠지고 상처만 보이고 아프지를 않았습니다. 나중에 선생님을 뵈옵고 알았지만 선생님께서 기도를 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살아계신 우리들의 하나님 이런 이적 기사를 보면서도 깨닽지 못한 어두운 이 심령.
1956년 4월에 정원장님이 오셨습니다. 우리를 데리러 오신 것입니다. 대강 보따리를 챙기고 학생들을 데리고 한천 강 냇물을 건너 광주를 왔습니다. 감나무 골을 들어가니 이현필 선생님께서 마중을 나오시고 계셨습니다. 어찌나 반가워하시는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때 우리를 모두 앉혀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현동 굴다리에서 지나셨던 일 당신의 고통을 대신지고 계신 주님을 보셨노라고 열이 40도에 달아계시는데 어떤 청년 한 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받고 계신 것을 보시면서 저분은 얼마나 아프실까 하는 생각을 하시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 대신에 십자가를 지시고 깨닫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시고 계심을 당신은 아무 고통도 느끼시지 못하셨다는 말씀을하시며 제손 다친 것을 아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셨노라고 멀리 계시면서도 다 알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앞을 보시는 분 얼마나 감격에 넘치는 위로의 말씀을 실지 체험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아 그립습니다. 그 한량없으신 사랑의 힘이여! 그 사랑의 위력이여! 감사 올리옵니다. 새삼 지난 일들이 좀 쓰려고 하니 모두가 살아온 것이 기적이요, 제 삶은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