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 스승의 날
[1982년] 스승의 날 부활(1973년 중단)
교원존중과 스승공경의 사회적 풍토를 조성하여 교원의 사기진작 및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하여 지정된 기념일. 매년 5월 15일에 거행된다.
스승의 날이 기념일로 자리잡기에는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큰 공헌을 하였다.
1958년 5월 8일(적십자의 날)에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병석에 있거나 은퇴한 교사들, 불우한 처지의 은사를 방문하거나 위로한 것을 시초로 스승의 날을 제정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며, 1963년 5월 26일에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J.R.C.)에서 5월 26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고 사은행사를 하였으며, 1965년부터는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로 변경하여 각급학교 및 교직단체가 주관이 되어 행사를 실시하여왔다.
그리고 스승의 날을 세종대왕 탄신일로 정한 이유는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이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우리 민족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그뒤 1973년에 정부의 서정쇄신방침에 따라 사은행사를 규제하게 되어 '스승의날'이 일시폐지되었으나, 일부 학교에서는 이 날을 계속 기념하였고, 1982년 스승을 공경하는 풍토조성을 위하여 다시 부활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실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장면 당선
← 1956년 5월 15일 실시된 제3대 정-부통령 선거 벽보. 오른쪽으로 민주당 신익희-장면 후보의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유명한 구호가 보인다.
이승만의 3차 집권을 겨냥하고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목표로 한 제3대 대통령선거가 1956년 5월 15일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됐다. 대통령 후보에는 이승만, 신익희, 조봉암 등 3명이, 부통령에는 이기붕, 장면, 박기출, 이윤영, 백성욱, 이종태 등 8명이 출마했다.
선거 10일전에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한 이승만의 득표수는 전체 유효표 720만표의 70%에 달하는 504만여 표였고, 신익희 지지표를 일부 흡수한 조봉암도 선전해 유효표의 30%인 216만여표를 얻었다.
선거 전에 사망했음에도 유권자들이 신익희에게 던진 185만표는 무효처리됐다. 부통령 후보들의 득표결과는 장면이 유효표의 46%인 401만여표를 얻은데 비해 이기붕은 44%인 380만표를 얻어 패배했다. 민주당은 신익희 대통령후보의 급서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회는 놓쳤지만 자유당이 당력과 권력을 총동원하여 추구한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저지함으로써 자유당의 독주를 막아낼 수 있게 됐다./조선
[1996년] 동편제 판소리 대가 강도근([姜道根) 명창 별세
←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홍보가' 예능보유자인 강도근 명창.
1996년 5월 15일 판소리의 대가 강도근 명창이 별세했다. 강 명창은 동편제 판소리의 마지막 대가로 평생 고향을 지키며 향토의 예맥을 이어온 고집스런 예술인이었다.
조선조 말 명창으로 추앙되던 송만갑의 판소리 전통을 이어받아 동편제 소리를 고수해오던 강 명창은 환갑을 넘겨 60대 중반에서야 판소리계에 이름을 내기 시작한 은둔의 예술인이기도 했다.
서편제가 섬세한 기교의 비애가 섞인 계면조가 주조를 이루는 데 반해 동편제는 뚝뚝 떨어지는 대마디 장단이 많고 단순 웅장하다. 이 꿋꿋하고 장엄한 동편제 창법을 옛 그대로 구사한 것이 고인이었다. 특히 흥보가의 제비 후리는 대목에서 오장육부에서 냅다 내지르는 듯 솟구치는 쇳소리는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독보의 경지였다.
강 명창은 생전에 "인간문화재가 좋다지만 서울 올라가 인간문화재 되고 무대에서만 소리하게 되면 동편제소리는 버리게 된다"며 중앙무대 진출을 거절했다. 명예나 출세보다 오직 판소리 하나만을 벗삼아 농사지으며 일생을 살아온 강 명창은 이 같은 고집 때문에 지난 1988년 70세의 나이에서야 비로소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로 예능보유자 지정을 받았다.
1918년 남원에서 태어난 그는 16세되던 해에 김정문 문하에 들어가 1년을 사사하고 20세 때 상경,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당대 최고명창의 한사람인 송만갑 선생에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배웠다. 그 후 지리산 쌍계사일대에서 7년여 동안 독공한 끝에 득음의 경지에 들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1988년 5월 15일 대중의 정론을 지향한다는 목표 아래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1975년 <동아일보>·<조선일보> 사태로 해직한 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등에서 활동한 기자들과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퇴직한 일부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국민주 모금방식으로 창간했다. 1987년 10월 30일 명동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에서 각계 대표 56명이 모여 창간 발기인대회를 가진 뒤, 같은 해 12월 15일 송건호를 대표이사로 해 주식회사로 정식 발족했다. 1988년 2월 25일 출자인원 2만 7,000여 명으로 창간기금 50억 원을 모금한 뒤, 4월 25일 등록증을 교부받고 5월 15일 창간했다. <한겨레신문>은 종합일간신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글전용 가로쓰기를 채용했으며, 창간호는 32면을 발행했다. 1996년에는 제호를 <한겨레신문>에서 <한겨레>로 변경했다.
[1918년] 최초의 정기 항공우편업무 시행
1918년 5월 15일 워싱턴 D.C.에서 뉴욕시티까지 비행기를 이용한 최초의 정기 항공우편업무가 시행되었다. 항공우편업무는 원래 1911년 영국에서 조지 5세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헨던과 윈저 간에 시작되었지만 당시 부정기적으로 시행되어 21차례의 운송만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항공우편이 실질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20세기초 비행기가 개발되면서부터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항공편을 이용한 우편업무가 실험적으로 시도되었지만, 미국에서는 1918년이 되어서야 본격화되었다. 1920년에는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시티 간에 최초의 미국 대륙횡단 항공우편이 개설되었다.
[1855년] 지석영(池錫永) 출생
1855년 5월 15일 태어남 / 1935년 2월 1일 죽음
"대개 보신지학은 인생에 먼저 힘쓸 것이라 마땅히 강구하기를 소홀히 하지 못할 것이어늘 사람이 매양 범홀하고 심상히 여기다가 그 병나기에 미쳐서 전혀 의원에게만 맡기니 가히 탄식하겠도다. 내가 일찍이 여기 개연함이 있어서 글 읽고 여간에 약간 방서를 섭렵하여 이로써 어버이도 섬기고 몸도 호위하기에 쓸까 하되 깊고 흐리고 멀고 아득한지라. (중략) 구라파주 의서를 얻어보니 그 의논이 가깝고 쉬우며 그 이치가 밝아서 일일이 가히 증거하겠고 그 절절이 가히 빙준하겠도다."- 지석영, <신학신설> 중에서
지석영은 우리나라에 천연두 예방접종을 처음 들여온 것으로 유명한 구한말의 개화 지식인이다. 일찍부터 서구 학문을 동경해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 의학책을 탐독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이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박영선이 구해준 <종두귀감>을 보고 제너의 종두법을 공부했다. 1879년 일본 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병원에서 2개월간 종두법을 실습한 뒤, 실제 시술에 성공했다. 1880년에는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東京]에 가서 구체적인 종두 기술을 배워 귀국했다. 이후 그는 개화파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고 독립협회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여러 번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전국 각지에 우두법을 전파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885년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서인 <우두신설>을, 1887년에는 한글로 씌어진 최초의 예방의학서인 <신학신설>을 발간했다. 그는 국문에도 관심을 가져 국문학교의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1909년에는 한자를 한글로 해석한 <자전석요>를 펴내기도 했다. 국채보상연합회·대한자강회·기호흥학회 등을 이끌면서 개화기의 지식인으로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다./브리태니커
1974년 한국-네팔, 국교수립
네팔은 1969년 한국과 영사협정을 맺었고 1974년에는 한국·북한과 동시에 수교했다. 현재 한국은 주네팔 대사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네팔은 주일본·주중 대사에게 각각 주한·주북한 대사를 겸임케 하고 있다. 양국이 맺은 주요 협정으로는 영사협정(1969)·무역협정(1975)이 있다. 1998년 현재 네팔의 대한수입액은 2,200만 달러, 대한수출액은 20만 달러이다. 한국 건설업체들이 진출해 있으며, 히말라야 산맥 등정을 위해 한국 산악인들이 네팔을 자주 방문한다. 1998년 말 현재 네팔에는 한국 교민은 없고 체류자만 174명이 있다.
북쪽으로는 중국의 시짱 자치구[西藏自治區]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히말라야 산맥 정상이 공동 국경으로 되어 있다. 동쪽·남쪽·서쪽 경계는 인도 국경과 접해 있다. 수도는 카트만두이다. 동남쪽에서 서북쪽까지 800km, 북쪽에서 남쪽으로는 140∼240km로 뻗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험한 산악 지대가 몇 군데 있다. 오랜 동안 지형조건에서 빚어진 고립성과 스스로 초래한 폐쇄성이 지속되어 세계에서 가장 개발이 안된 나라로 손꼽힌다. 면적 147,181㎢, 인구 27,678,000(2006 추계).
[1914년] 네팔의 셰르파족 등반가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 1914~1986) 출생
← 텐징 노르가이
영국 등반대의 E.힐러리경과 함께 에베레스트산 첫 등정에 성공한 히말라야 등반의 셰르파(등반대의 길 안내나 짐 운반을 하는 티베트계 네팔인)이다.
텐징은 등반에 능숙한 티베트인의 분파인 셰르파족 출신으로, 소년시절에 에베레스트 남쪽 지역의 셰르파 거주지역에 있던 집에서 도망나왔다. 인도의 서벵골 다르질링에 자리를 잡은 텐징은 1935년 에릭 십턴 경이 이끄는 에베레스트 조사대의 짐꾼으로 동행했다. 그후 수년 동안 다른 어떤 등반가보다 에베레스트 탐험에 많이 참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짐꾼조직 대장이 되어 많은 탐험대에 동반했다. 1952년 스위스 탐험대는 남부 등반로를 따라 2차례의 에베레스트 정복을 시도했는데, 텐징은 2번 다 짐꾼조직 대장으로 참가했다. 1953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탐험대에 짐꾼조직 대장으로 참가하여 힐러리와 함께 제2 정상등반조를 이루었다. 동남부 산마루 해발 8,506m 지점에 설치한 텐트를 떠난 두 사람은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그는 그곳에서 15분에 걸쳐 사진을 찍고 박하빵을 먹은 후에 독실한 불교도로서 제수를 남겨놓고 하산했다. 텐징은 수많은 네팔인과 인도인들에게는 전설적인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영국의 조지 십자훈장과 네팔의 타라 훈장을 비롯해 많은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자서전으로는 제임스 램지 울먼과 공저한 〈에베레스트인 Man of Everest〉(1955)이 있다. 〈에베레스트 정복 이후 After Everest〉(1978)는 텐징이 맬컴 반스에게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에베레스트 등반 이후에 했던 여행과 다르질링에 있는 히말라야 산맥 등반훈련원의 지도자로서의 생활을 담고 있는데, 이 책은 1954년 인도 정부에 의해 출판되었다.
[1902년] 시인 정지용(鄭芝溶) 출생
아명은 지용(池龍).
한의사인 아버지 태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홍사용·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도쿄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 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문학세계
그의 문학세계는 대략 3가지로 구분될 수 있으며, 섬세한 이미지 구사와 언어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보여준 것이 특징이다. 첫째는 1926~33년으로,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향토적 정서를 보인 모더니즘 계열의 시이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23년경이었다고 하나, 발표되기는 1926년 〈학조〉 6월호에 실린 시 〈카페 프란스〉·〈마음의 일기에서〉 등에서 시작된다. 이어 이미지 시의 면모를 보여준 〈바다〉(조선지광, 1927. 2)와 〈향수〉(조선지광, 1927. 3)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했다. 이런 경향은 〈시문학〉의 향토적 정서, 섬세한 이미지 표현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이 시기의 시들은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면서도 순수 서정시의 가능성을 아울러 보여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 리야"(〈향수〉 1연)와 같이 곱게 다듬어진 우리말의 언어적 세련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감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형상화하고 있다. 둘째는 〈가톨릭 청년〉에 관여하던 1933~35년에 보여준 종교적인 시이다. 이 시기에는 절대적인 신에게 관심을 갖고 시대적 상황에 무력한 자신의 정신적 허기와 갈증을 신앙을 통해 메우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갈수록 열악해지는 현실에 대한 절망과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시인의 정신적 방황을 드러내는 것이며, 특히 〈나무〉(가톨릭 청년, 1934. 3)의 "얼굴이 바로 푸른 하늘을 우러렀기에/발이 항상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한갖 나무만도 못한 욕되고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참회와 나라를 잃은 민족의 정신적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 셋째는 1941년까지 발표한 동양적 전통과 정신에 바탕을 둔 산수시이다. 이 시기에 그는 동양적 정신과 산수의 풍경을 그리는 여행을 떠남으로써, 시적 소재가 〈바다〉(시원, 1935. 12)를 거쳐 〈옥류동〉(조광, 1937. 11)·〈비로봉〉(청색지, 1938. 8)·〈장수산〉(문장, 1939. 3)·〈백록담〉(문장, 1939. 4)으로 바뀐다. 바다를 거쳐 산으로 오르는 이런 시세계의 변모는 즉 일제강점기 말의 암울한 현실에 구애됨이 없이 자연에 몰입하고자 하는 시인의 정신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시어의 조탁(彫琢)과 섬세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독특한 시세계를 표현했는데, 이러한 성격은 한국의 서정시를 계승한 것으로서 이후 제자격인 청록파의 시세계로 이어졌다. 100여 편이 넘는 시 외에도 소설 〈3인 三人〉(서광, 1919. 11)과 평론 〈조선시의 반성〉(문장, 1948. 10)·〈문학으로 사는 길〉(세계일보, 1949. 1. 5) 등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정지용시집〉(1935)·〈백록담〉(1941)·〈지용시선〉(1946)과, 이론서로 〈문학독본 文學讀本〉(1948)·〈산문 散文〉(1949) 등이 있고, 1988년 민음사에서 〈정지용선집〉을 펴냈다.
[1899년] 독립운동가 이붕해(李鵬海) 출생
1899. 5. 15 충남 아산~1950. 6. 28.
본관은 덕수(德水). 일명 일영(鎰永)·봉기(鳳基). 자는 공익(公益), 호는 송강(松崗).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천안에서 일본경찰에게 잡혔다가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했다. 남만주 신흥무관학교를 7기생으로 졸업한 후 한국독립연성대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고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크게 공헌했다. 1921년 관내로 들어가 제1·2봉직전쟁(奉直戰爭)에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활약했다. 자유시를 거쳐 이르쿠츠크로 가서 고려혁명군에 관계하다가 자유시참변으로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3년 5월 옌지 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김규식(金奎植)·고평(高平)·이범석(李範奭) 등이 고려혁명군을 편성할 때 참여하여, 동북만주 미산[密山]·후린[虎林]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중국군을 격파하는 등 무장항일활동을 했다. 1925년 닝안[寧安]에서 김좌진(金佐鎭)이 중심이 되어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할 때 참가하여 경비대장에 선임되었으며 1929년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17인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이어 무정부주의자연맹과 신민부가 합작하여 재만한족총연합회를 결성, 김좌진을 주석으로 추대할 때 군사위원장이 되어 동북만주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930년 김좌진이 공산당원 김봉환(金奉煥:일명 一星)의 조종을 받은 박상실(朴尙實:일명 尙範)에게 피살되자, 그가 중심이 되어 임시치안대를 조직하고 중동선(中東線) 일대를 방위하는 한편, 중국 치안당국과 연락, 해림역(海林驛) 부근의 공산당 근거지를 급습하여 김봉환을 체포·처단했다. 1932년 한족총연합회 주하지방(珠河地方) 집행위원장이 되어 지하운동을 전개하며, 재만한인들의 배일사상 고취와 생활선도에 힘을 기울였다. 1944년 9월 한국광복군을 설치할 때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8·15해방 이후에는 광복군의 최용덕(崔用德)·김학규(金學奎)·김관오(金冠五)·장흥(張興)·권준(權晙)·박시창(朴始昌) 등과 함께 중국군 및 일본군에 소속되었던 한인장병을 흡수하여 베이징[北京]·난징[南京]·상하이[上海]·항저우[杭州] 등지에서 훈련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오광선(吳光鮮)과 함께 국내지대를 따로 설치하고 참모장에 취임하여 활약했다. 이후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회 사찰부장이 되었으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에는 국군에 입대하여 1949년 제주도병사구사령관을 역임하고 방위군옹진지단(防衛軍甕津支團) 고문관으로 재직하던 중 6·25전쟁 때 전사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84년] 독립운동가 오성술(吳成述) 선생 출생
1884. 5. 15 전남 광산~1910. 9. 15.
한말의 의병장.
일명 인수(仁洙)·성술(聖述). 호는 죽파(竹坡).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침탈이 심해지자 가재(家財)를 털어 의병기금을 마련해 김태원(金泰元)의 의진에 들어가 활약했다. 김태원의 의진은 1908년 1월 창평(昌平)의 무동촌전투(舞童村戰鬪)에서 지휘관 요시다[吉田]를 비롯해 여러 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해 4월 무등산전투에서 김태원이 죽자 의진을 수습해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1908년 1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광주에 거주하는 사이토[齊藤] 일가를 습격해 3명을 살해하고 무기를 탈취한 뒤 방화했으며, 나주에서는 일본 밀정 황도현(黃道玄)의 재산을 몰수한 후 살해했다. 1909년 1월 광주에 거주하는 모리[森十內]의 집을 습격해 물품을 탈취했으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강도 및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항소했으나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67년] 신라 문무왕 해중릉 발견
← 문무대왕릉, 사적 제158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문무왕 수중릉(일명 대왕암)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 제30대 왕. 재위 661 ~ 681년.
660년(태종무열왕 7)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당시 태자로서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5만 군대를 거느리고 종군하였다. 661년에 태종무열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문무왕은 신라에 대항하는 백제 부흥군을 소탕하였다. 특히 백제의 옛 장군인 복신(福信)과 승려인 도침(道琛)이 일본에 가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왕으로 추대하여 주류성(周留城)에 근거를 두고 웅진성(熊津城)을 공격하여 신라와 당나라의 주둔군을 괴롭히자 문무왕은 김유신을 비롯한 28명의 장군들로 하여금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공격하게 하여 백제부흥운동을 종식시켰다. 또한 668년(문무왕 8)에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평양성을 함락시킴으로 신라는 마침내 한반도의 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렇지만 문무왕은 멸망 뒤 지속적으로 신라에 반기를 드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포섭하고, 직접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나라의 세력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675년에는 설인귀가 당나라에 숙위하고 있는 풍훈을 안내자로 하여 침략했다가 실패하자, 다시 이근행(李謹行)에게 20만의 대군을 주어 침략해왔으며, 676년에는 해로를 통해 신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끈질긴 신라의 저항으로 당나라의 침략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당나라는 결국 676년에 한반도 지배의 중심 기구인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는 많은 한계성을 지니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문무왕은 즉위 전 백제 공격시 신라 군사를 이끌고 직접 참전하였을 뿐 아니라, 무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성하였다. 또한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백제와 고구려의 남은 세력들을 토벌하고, 직접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한반도 통일을 완수하는 동시에 자주권을 회복하였다.
1967년 5월 15일 경북 경주시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약2백m 앞바다에 있는 대왕바위에서 바닷물 속에 지어진 문무대왕릉이 발견됐다.
둘레 약 2백m의 대왕바위에 정확한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수로를 깎아내고 그 중앙에 패진 4평 가령의 해중못에 해중릉이 조영되어 있다. 유골은 그 못안 석함속에 안치된 것으로 보이며, 그 위에 길이 3.59m, 두께 0.9m의 큰거북 모양의 화강암 개석이 덮여졌다.
이런 릉의 조영방식은 사문을 배치하고 그 중에 사리를 안치한 기원전 2세기의 ‘산치’탑을 위시해 5, 6세기 중국육조시대의 목탑 그리고 신라의 봉황사탑, 백제의 미륵석탑 등의 양식과 비슷하다. 문무대왕은 "내가 죽으면 서국(인도) 식으로 화장을 하여 동해에 장사를 하라. 그러면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으리라."는 뜻의 유언을 했었다.
[1993년] 일본 프로축구리그 'J리그' 출범
'J리그(J League)'는 2부로 이루어진 일본의 프로축구 리그로, 정식 명칭은 일본프로축구리그(Japan Professional Football League)이다. 일본 최초의 프로리그로서, 1부 18개 클럽, 2부 12개 클럽으로 이루어졌으며, 재단법인 일본축구협회와 사단법인 일본프로축구리그가 공동으로 주최한다.
1965년 시작된 아마추어축구리그 JFL(Japanese Football League:일본축구리그)이 모체이며, 1991년 프로리그 설립을 발표하였다. 조직과 운영방식 등에서 유럽 주요 리그의 형태를 모방하였으며,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쳐 1993년 10개 클럽으로 창설하였다. 1998년 소속 클럽이 18개로 늘어났고, 1999년 JFL 소속팀 가운데 프로 전환을 원하는 팀과 기존의 J리그 클럽 가운데 일부를 합쳐 1,2부로 이루어진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J리그 1부는 18개 소속 클럽이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클럽당 30경기를 치르며, 정규 경기에서 승리하면 3점, 연장전에서 이기면 2점, 비기면 1점, 지면 0점을 주어 총점이 가장 높은 클럽이 우승하게 된다. 3월부터 5월까지 열리는 전기리그와 8월부터 11월까지 열리는 후기리그로 이루어지며, 매주 토요일에 경기를 연다.
J리그 2부는 12개 소속 클럽이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클럽당 44경기를 치르며, 3월부터 11월까지 주로 토요일·일요일에 경기를 치른다. 정규 시즌이 끝난 후 1부의 하위 2개 클럽과 2부의 상위 2개 클럽이 서로 자리를 바꾸게 되며, 1부의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서 각각 우승한 2개 클럽이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여 우승을 겨룬다.
한동안 일본 국민들의 열광적인 관심을 끌었으나 최근에는 경제난으로 클럽 재정이 어려워지고 관중 수도 감소하고 있다. 지금까지 챔피언결정전에서 제일 많이 우승한 클럽은 베르디 FC 닛폰이며, 산프레체 히로시마가 그 뒤를 잇고 있다.
[1973년] 국회의사당 본관 상량식

여의도 국회의사당 3개 건물 중 본관 상량식이 이날 열렸다. 국회의사당은 1969년 7월 17일 제헌절을 맞아 기공식을 가진후 6년동안의 공사기간을 거쳐 1975년 9월 1일에 준공됐다. 3개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 국회의사당은 여의도공원에서 바라보아 정면에 의사당 본관이 있고 오른쪽에는 국회도서관, 왼쪽에는 의원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의사당 본관은 화강석으로 된 너비 50m의 대계단과 기단위에세워진 높이 32.5m의 대열주(大列柱) 24개, 대열주가 받쳐주는 처마와 밑지름 64m의 돔으로이루어진 지붕으로 구성되어있다. 열주는 경회루의 석주를 본뜬 것으로, 24절기를 상징하는 동시에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상징하는 것이며 돔은 원만한 결론을 지향하는 의회정치의본질을 상징하는 것이다. 총 대지면적은 33만평방미터제곱(10만평)이고, 지하2층 지상6층의건물로 지반에서 돔까지의 높이는 69.19m, 연건평은 8만1444평방미터제곱(2만4680평)이다.
[1958년] 한강 인도교 보수 후 개통

6.25전쟁으로 파괴됐던 한강인도교가 1958년 복구공사의 준공과 함께 개통됐다.
1년 2개월 동안 11억8천만 환을 들여 부서진 경간과 상판 등을 고쳤다.
현대건설은 이 공사를 성공시켜 우리 나라 6대 건설회사 가운데 하나로 부상했다.
한강인도교는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의 남침을 차단하려는 국군에 의해 폭파됐었다.
한강인도교는 1981년 12월 8차선의 쌍둥이 교량으로 확장됐고 이름도 한강대교로 바뀌었다.
[2007년] 대하소설 '혼불' 배경 종갓집 불
작가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의 무대가 된 전북 남원의 삭녕(朔寧) 최씨 종가에서 불이나 종가의 대를 이어온 할머니가 숨졌다.
15일 오전 1시10분쯤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삭녕 최씨 종가 안채에 불이나 1시간30분 만에 목조한옥 25평이 모두 탔으며, 안방에서 잠자던 종부(宗婦) 할머니 박증순(93)씨가 사망했다.
이 집은 소설 ‘혼불’에서 최씨 종가 며느리 3대 일가가 일제 강점에서 6.25전쟁 때까지 수난과 애환을 겪어온 곳이었다.
박 할머니는 조선 성종의 스승이던 폄재공 최온의 12대 종부로, 먼 친척인 작가 최명희에게 집안 내력과 듣고 겪은 일들을 구술해 주었고, 그 자신 소설 속 종부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조선
[1972년] 미국, 27년 만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
← 일본 오키나와 섬에 있는 식물원
1972년 5월15일 0시, 사이렌과 기적소리가 일본 오키나와(沖繩) 전역에 울려퍼졌다. 27년간의 미국 통치에서 벗어나 ‘오키나와현(縣)’이라는 새로운 출발을 자축하기 위해서였다. 오키나와현 지사는 “오키나와라는 영원한 새 생명의 탄생”이라며 감격해했지만 진보진영은 핵과 미군기지없는 전면반환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럼에도 반환은 예정대로 진행돼 국제선은 국내선이 됐고 우측에서 달리던 차량은 좌측으로 달렸다.
류큐(琉球) 왕국이라는 독립국가로 한국ㆍ중국ㆍ일본ㆍ동남아를 연결해 온 해상무역 중심지 오키나와가 일본령이 된 것은 1609년 가고시마(鹿兒) 영주가 이곳을 복속한 뒤부터였다.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으로 정식 편입됐지만 일본 본토로부터는 언제나 버려진 섬이었다. 종전을 앞둔 1945년 4월부터 석달간 미군ㆍ일본군 간에 벌어진 오키나와전투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전투로 미군 1만5000명과 일본군 6만 5000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주민들도 12만명이나 희생됐다. 본토방어를 위해 시간을 벌기위한 ‘옥쇄작전’ 때문이었다. 일본의 총알받이였던 것이다. 패전 후에도 오키나와는 미국과 일본의 흥정대상이었다. 군사요충지로 오키나와를 필요로 했던 미국에게 일본은 오키나와를 바치고 그 대가로 미ㆍ일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1969년] 금산에 위성통신지구국(衛星通信地球局)을 기공
금산위성통신지구국은 지구궤도에 떠 있는 통신위성과 전파를 송수신하여 한국과 외국 사이에 통신 및 텔레비전 중계가 가능하도록 설치된 통신중계시설로 충남 금산군 금산읍 의총리(義塚里)에 있다.
1967년 2월 국제전기통신위성기구(INTELSAT)에 56번째로 가입하였고, 1969년 6월 국제전기통신위성기구와 통신위성회선의 임대계약이 성립되어 1970년 6월 제1기(태평양 방면)의 국제위성통신을 시작함으로써 개국되었다. 이어 1977년에 제2기(인도양 방면), 1980년에 제3기(TV ·이동용), 1984년에 제4기(TV ·이동용)가 설치되었다. 제1기는 안테나의 지름이 27.4 m, 제2기는 30 m, 제3기는 11 m, 제4기는 13 m의 크기이다. 지구국의 설비는 이들 안테나가 포함되는 통신연락선 전원설비와 국사(局舍)로 구성되며, 한국통신에 소속되어 있다.
사용되는 위성은 각각 태평양 상공 및 인도양 상공에 정지상태로 떠 있는 인텔샛(Intelsat) 4호 ·인텔샛 4호A 등의 위성통신이다. 보유하고 있는 위성통신 회선수는 제1기의 미국 ·타이완 ·홍콩 ·캐나다 등, 제2기의 독일 ·영국 ·프랑스 등 30여 지구국에 걸쳐 1,100회선에 이르며, TV중계시설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또 90년에는 제3기의 소형 안테나가 설치되어 해안위성지구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지구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위성통신의 특징은 단파통신이나 해저 케이블과는 달라서 많은 회선을 얻을 수 있는 마이크로파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전화나 국제텔렉스의 송 ·수신은 물론, 국제간의 TV 동시중계와 같은 통신을 할 수 있는 데에 있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발발
1948년 5월 15일 아랍제국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는 순간이었다. 5월 14일 이스라엘의 지도자 벤 구리온이 이날 소집된 제4회 전국평의회 석상에서 전세계를 향해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했고, 이틀 후인 5월 16일 미국 소련 일본 등이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전쟁 초기에는 아랍제국이 우세했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아랍제국은 패배를 거듭했다. 조정에 나선 국제연합의 도움으로 이듬해인 1949년 7월 21일 휴전이 성립됐지만, 휴전은 잠시뿐 지금까지도 중동의 화약고로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전쟁 패배로 100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생겼으며 아랍게릴라가 조직됐다.
[1862년]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극작가 슈니츨러(Schnitzler, Arthur, 1862~1931) 출생
H.호프만스탈과 어깨를 겨누는 '젊은 빈'파의 대표적 작가이다. 아버지는 빈대학교의 인후과(咽喉科) 교수였고, 그 자신도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동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으며, 1885년 의학박사 학위를 획득, 정신과 의사로 개업하였다. 직업관계로 인간의 심리와 최면술에 흥미를 가졌고, 또 프로이트와의 교류도 있어 31세 때부터 자유로운 문필가를 본업으로 삼게 되었다.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비스마르크가 영도하는 독일제국에 눌려 은인자중하며 장래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으나, 여전히 빈은 전통을 지닌 옛 서울 특유의 전아한 향취를 잃지 않은 도시였다.
그는 정서가 넘치는 이곳에 한없는 애정을 느끼면서, 이 도시에서 영위되는 세기말적인 애욕의 세계를 정신분석의 수법을 써가면서 묘사해 나갔다. 출세작은 1893년에 내놓은 단막물 《아나톨 Anatol》인데, 잇달아 발표한 3막물 《희련(戱戀) Liebelei》이 1895년 가을에 부르크극장에서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작가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획득하였다.
주요 희곡으로는 《초록 앵무새 Grünen Kakadu》(1898), 《윤무(輪舞) Reigen》(1897), 《베아트리체의 베일 Der Schleier der Beatrice》 등이 있으며, 단편소설로는 《죽음 Sterben》(1895), 《구스틀 소위 Lieutnant Gustl》(1901), 《베아테 부인과 그 자식》(1913), 《엘제양(孃) Fräulein Else》(1924), 장편소설로는 《테레제, 어떤 여자의 일생 Therese, Chronik eines Frauenlebens》(1928) 등이 있다. 이 장편소설에서는 퇴역 장교의 딸 테레제가 애욕 때문에 점차 타락하고, 마침내 불량아가 된 사생아인 자기 자식 손에 죽어야 하는 애처로운 여인의 생애를 묘사한 최후의 대작이다.
[1859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Curie, Pierre, 1859~1906) 출생
파리 출생. 주로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16세에 대학 입학자격을 얻어 소르본대학에 들어가 수학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처음에는 이학부의 실험조수로 열(熱)을 연구하였는데, 후에 광물학을 전공한 형과 함께 결정(結晶) 연구를 시작, ‘피에조 전기(電氣)현상’을 발견하고(1880), 그 연구를 위하여 새로운 전기계(퀴리전기계)를 고안하였다.
1883년부터 파리 물리화학 학교의 실험주임, 후에 교수로서 결정물리학(結晶物理學) 연구에 전념하여, 결정의 대칭성(對稱性)에 관한 이론적 고찰을 전개하였다.
그 후 실험연구로 되돌아가, 비주기정밀천칭 등에서부터 얼마 후에는 물질의 자기적(磁氣的) 성질의 연구를 하였다. 상온에서 1400 ℃ 정도까지의 온도 영역에 걸친 물질의 자기화를 조사하여 자화가 온도에 역비례한다는, ‘퀴리의 법칙’을 발견하고, 퀴리온도를 확립하는 등 자성물리학(磁性物理學)의 기초를 확립, 발전에 공헌하였다.
1895년 마리 스크로도프스카(마리 퀴리)와 결혼 후, 결정 성장(成長)에 관한 문제 등을 다루던 중 방사능 연구에 흥미를 느껴 아내와 공동으로 우라늄화합물의 방사선이 원자적 성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물질탐구에 노력하였다. 이 공동연구로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였다.
유기방사능 문제, 방사능에 의해 전매용액(電媒溶液)에 생기는 전도성(電導性)의 문제, 열의 발생, 생리작용 등도 연구하였다. 1903년 아내 및 H.베크렐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후 소르본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06년 교통사고로 급사하였다. 프란테상(1895) ·루카스상(1901) 등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1856년] 미국의 작가 밤(Baum, L. Frank, 1856~1919) 출생
상상의 나라 ‘오즈(Oz)’를 무대로 한 동화 시리즈로 유명하다.
사우스다코타의 애버딘과 시카고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가 글쓰기를 시작했다.
첫번째 책 〈파더 구스 Father Goose〉(1899)가 상업적으로 성공하자 이듬해 〈오즈의 놀라운 마법사 Wonderful Wizard of Oz〉를 발표하여 더욱더 인기를 얻었다.
현대판 요정이야기 〈오즈의 놀라운 마법사〉는 캔자스 농장에 사는 소녀 도로시가 회오리바람에 날려 오즈에 가게 되는데 깡통 나무꾼, 허수아비, 겁쟁이 사자 등 잊지 못할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1901년에 시카고에서 뮤지컬로 공연되었다. 또 1939년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해졌으며 텔레비전에서 자주 방영되어 다음세대 어린이들에게도 친숙해졌다.
오즈 이야기는 13권이며, 밤이 죽은 뒤에는 다른 사람이 계속 이어서 썼다. 밤은 본명뿐만 아니라 여러 필명으로도 썼으며, 어린이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60여 권의 책도 썼다.
[1845년] 러시아의 동물학자, 미생물학자 메치니코프 출생
동물의 체내에서 세균을 비롯한 이물체들을 삼키는 아메바 같은 세포를 발견한 공로로 1908년 파울 에를리히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식세포작용으로 알려진 이 현상은 면역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1864년 하리코프 A. M. 고리키대학교를 졸업한 뒤 1870~82년 오데사대학교에서 동물학 및 비교해부학 교수를 지냈다. 1882~86년 이탈리아 메시나에서 불가사리 유생(幼生)의 소화기관 기원에 대해 연구하다가, 소화와 관계없는 어떤 세포들이 그가 유생의 몸속에 투여한 진홍색 물감 입자와 조각들을 에워싼 뒤 삼키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이 세포들을 식세포(phagocyte : 그리스어로 '게걸스럽게 먹는 세포'라는 뜻)라고 이름붙였다. 1886~87년 오데사에 있는 세균학연구소, 1888~1916년 파리에 있는 파스퇴르 연구소(1895년부터 소장을 역임)에서 연구를 계속해,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에서 식세포가 급성감염에 대한 제1방어선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현재 이 식세포들은 백혈구로 알려져 있다. 1903년 프랑스의 세균학자 에밀 루와 함께 원숭이에게 매독을 옮기는 데 성공했으며, 말년에는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은 젖산균 연구에 전념했다. 〈염증의 비교병리학 The Comparative Pathology of Inflammation〉(1892)·〈전염병에서의 면역 L'Immunité dans les maladies infectieuses〉(1901)·〈인간의 본성에 대한 연구 Études sur la nature humaine〉(1903) 등의 저서를 남겼다.
[1644년]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자살로 홍광제가 남명(南明)의 초대 황제로 즉위
홍광제가 1644년 5월 15일 남명(南明)의 초대 황제로 남경에서 즉위했다. 남명 정권은 명나라 수도 북경이 청나라에 함락되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남경에 이주해 있던 황족들을 중심으로 세운 왕조였다.
황족들은 숭정제가 죽은 후 황태자의 생사여부를 알 수 없어 황족가운데 한 사람인 복왕을 감국(황제를 대신하여 국사를 담당)으로서 국사를 담당케 했다. 이것이 이른바 남명 정권으로 복왕은 그후 제위에 올라 홍광제라 칭했다.
홍광제의 남명 정권은 부패와 무능으로, 즉위 1년만인 1645년 5월15일 청군에 의해 남경이 점령됨으로 막을 내렸다. 융무제, 영력제가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으나 청군의 공격과 관료들의 무능, 부패로 결국 18년동안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 황제 영력제는 청의 군사들을 피해 멀리 미얀마까지 도주했으나 뒤쫒은 오삼계에 의해 처형됐다./조선
[1712년] 백두산정계비 세움
←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워진 경계비.
백두산은 고구려나 발해의 시기에는 우리나라 땅이었으나, 그후 우리나라의 판도가 반도로 위축되었다. 그러다가 1437년(세종 19)에 설치했던 6진(六鎭)으로 백두산과 그 동서의 두만강·압록강이 우리나라의 국경선이 되었다. 그때 두만강 상류의 무산지방(茂山地方)은 미개척지역으로 남아 있었는데, 1674년(현종 15)에 이곳에 무산진을 설치하여 두만강 내 지역 전부를 조선의 영역으로 확정했다. 이리하여 조선과 청과의 국경은 압록·두만의 두 강으로써 이루어졌으나, 그 원류인 백두산 근처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고 두 강 상류의 북안은 일종의 공백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만주에서도 특히 동부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 일대 삼림지대는 인삼·모피·진주 등 특산의 보고(寶庫)였으며 지린[吉林]의 영고탑(寧古塔)은 이러한 특산물 집산지의 하나였다. 이에 날로 융성해지는 청나라는 이 지역을 한인(漢人)·몽골인 등 주변 민족의 침범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제방을 만들고 그위에 양유를 심어놓았으며 요소마다 변문(邊門)을 만들어 출입자를 감시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조선과의 접경에도 해당되었다. 그러는 사이 조선인은 국경을 넘어 산삼을 채취하거나 토지를 개간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월경사건(越境事件)은 자주 발생하여 문제시되었고, 청이 칙사(勅使)를 보내어 국왕과 동석하여 죄인을 심리한 일도 3번이나 있었다. 한편 청나라도 우리나라의 국경을 넘는 월경침입이 자주 있었으며, 때로는 수십 명이 작당하여 우리측의 관원과 군병을 납치한 일도 있었다.
1677년(숙종 3)에는 청 강희제(康熙帝)가 장백산, 즉 백두산을 그 조상의 발상지로서 관심을 갖고, 내대신(內大臣) 무묵납(武默納)에게 명하여 장백산 지방을 답사시키고 다음해에 신하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6년 후에 다시 치제했다.
1691년 조선의 조정은 청대신 5명이 영고탑을 경유하여 장백산에 가서 그곳을 관찰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크게 놀랐다. 그뒤 1710년에는 위원(渭原)의 이만기(李萬技)가 국경을 넘어 삼을 캐며 그 도중에 만주인 5명을 타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백두산을 귀속하려는 청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다. 따라서 2년 후인 1712년에 청은 오랄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해 국경을 실지답사시켰는데, 조선은 그 소식을 그해 2월 24일 청 예부(禮部)에게서 통고받았다. 이에 조선에서는 청의 요구에 불응하자는 측도 있었으나, 결국 응하기로 하고 접반사를 임명해 파견했다. 목극등은 싱징[興京] 방면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러 10일간 강을 따라 올라가 후주(厚州)에서 조선의 사신과 만났고, 다시 4일 후 혜산진에 이르러 여기서부터 육로를 택했다. 이때 목극등은 조선의 접반사인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傅)는 늙고 허약해 험한 길을 갈 수 없다며 무산에 가 있게 했다. 그리고 조선접반사군관·차사관(差使官)·통관(通官) 등과 더불어 백두산의 꼭대기에 이르러 그해 5월 15일에 정계비를 세운 후에 무산으로 갔다. 그리하여 조선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극등의 일방적 조처로 정계비가 세워졌다. 따라서 백두산 정상을 경계로 세우기로 했던 정계비를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 와서 압록강과 토문강의 두물이 강원(江源)에서 '人'자 모양으로 흐르는 곳의 바위를 비석의 귀부(龜趺)로 삼고 세웠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2.55척, 너비 1.83척이며 비면에 '大淸'이라 행서하고, 그 아래에 "烏喇摠官穆克登奉旨査邊至比審視西爲鴨綠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라고 종서(縱書)하고 청의 필첩식(筆帖式), 조선의 군관·차사관·통관의 성명을 각서(刻書)했다.
이와 같이 정계비는 청의 일방적 건립이었으므로, 조선 말기에는 청이 토문강과 두만강을 임의로 유리하게 해석함으로써 경계문제가 양국간의 문제로 재연되어 간도(間島)의 귀속문제에 연결되었다. 1881년(고종 18) 청나라가 간도를 개척하려 하자 1883년 조선은 어윤중(魚允中) 등으로 하여금 정계비를 조사케 하여, 정계비문 가운데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西爲鴨綠東爲土門)를 근거로 해서 간도는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청측은 토문을 두만강이라 하며 간도일대를 청나라의 땅이라 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수십 리 밖의 지점에서 발원한 것이므로 비에 표시되기에는 너무 먼 강이며, 정계비 근처의 물 한줄기가 토문강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토문강이 확실하다고 했다. 이러한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고, 청일전쟁 후 일본이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에 넘겨버렸다. 백두산정계비는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없어졌다.
간도의 영유권 문제는 조·청 양국간의 중요한 외교적 현안으로 부각되었는데, 청나라는 계속 위협을 가했지만 간도가 조선령임을 확신한 조선정부 역시 강경한 자세를 취해 양보하지 않았다. 마침내 조선정부에서는 고종 40년(1903)에 이범윤(李範允)를 간도관리사(管理使)로 파견해 교민을 보호하고 세금을 징수하게 하였다. 이범윤은 군대를 편성하고, 10호(戶)를 1통(統), 10통을 1촌(村)으로 하여 통장과 촌장을 두는 행정조직을 마련하였다. 이는 실로 발해가 멸망한 후 1천여 년 만에 간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세계 만방에 공포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일제가 팔아먹은 만주, 그리고 백두산정계비
그러나 이런 획기적인 조처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일제는 다음해 일본인 고문(顧問)정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제1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한 후 다음해인 1905년에는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제가 한반도를 차지할 것임을 내외에 공포한 셈이 되었는데, 실제로 일제는 그해 11월 강제로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제2차 한일협약의 주요내용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대신 자신이 행사한다는 것으로서 이를 위해 일본인 통감을 둔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이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김에 따라 간도문제는 조·청 사이의 현안에서 청·일 사이의 현안이 되었다. 간도에도 욕심이 있던 통감부는 1907년 간도 용정(龍井)에 통감부 파출소(派出所)를 설치하고 간도가 한국 영토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청이 이에 대해 부당하게 행동하면 무력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간도는 여전히 외교권을 빼앗긴 한국령으로 남아 있었는데, 불과 2년만인 1909년에 일제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남만주철도의 안봉선(安奉線) 연장 등 만주에 대한 이권을 받는 대신에 간도 영유권을 청나라에 팔아 넘겨 버렸다.
그리고 일제는 훗날 말썽이 일 것을 우려해서인지 간도가 우리 영토임을 확인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인 백두산정계비마저 어디론가 가져가 버렸다. 백두산정계비는 보통 1931년 9월 18일에 발생한 만주사변 직후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는 그 두 달 전쯤에 없어졌다. 다음은 이런 내용을 전해 주는 당시 일제의 간도파출소 총무과장이었던 소전치책(篠田治策)의 비교적 양심적인 증언이다.
“백두산정계비는 청나라 황제가 그 선조의 발상지를 자국 영토 내에 포함함과 아울러 조선과 국경을 명확히 하여 국경 분쟁을 막기 위하여 조선과 협의해서 백두산에 건립한 유명한 국경비이다. 그 후 '간도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조청양국과 청일양국간에 28년에 걸쳐 국제분쟁의 원인이 된 중요한 사적(史蹟)이다. 또 오늘날에는 1909년 9월 4일 '청일간의 간도에 관한 협약(協約)'에 기인한 일만(日滿)간의 국경비이다.
그런데 이 정계비는 1931년 7월 28일부터 다음날 29일의 아침 사이에 홀연히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근래 백두산에 등산하는 자는 경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 국경수비대와 동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때 역시 수비대 약 100여 명과 함께 56명의 일반인 등산자가 있었다. 일행이 1931년 7월 28일 오전 9시 30분경 정계비가 서 있는 곳에서 휴식을 할 때에는 정계비가 아주 확실히 있었다.
일반인과 군대가 나뉘어져 산 정상에 올라가 천지 부근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산을 내려왔다. 이 내려오는 길에 두 번째로 정계비에 도달했을 때에는 정계비가 이미 누군가의 손으로 철거되었다. 그 곁에는 단지 백두산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일행 가운데 사적연구가는 돌아오는 길에 비와 비문을 조사할 예정이었는데, 결국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매우 실망하고 산을 내려왔다는 것을 당시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나에게 알려줬다.
아, 이 어찌 몰상식한 행위가 아니냐. 이 중요한 사적을 없애 버린 것은 국경을 모호하게 하려는 기도가 아니냐. 비석을 철거하고 그 대신 안내도를 세운 것을 보면, 진실로 계획적인 행위이지 한순간의 호기심으로 한 것은 아니다. 이 행위는 일반 등산객이 한 것이 아닐 것이며, 그 밖의 자들이 하였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30여 년 동안 간도문제와 관련하여 이 정계비를 연구해 왔기 때문에, 이 사실을 듣고 크게 놀랐고, 또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사적은 국가로서도 영구히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고, 또한 현재 국경비로서 그 위치에 두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나는 여러 차례 조선총독부에 그 조사를 요구했고, 그것도 총독의 명령으로 빨리 착수하면 아주 큰 비석이므로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총독부는 어떠한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고, 1938년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조사를 시도조차 하고 않고 있다.”
만약 백두산정계비를 가져간 것이 일제가 아니라면 조선총독부에서 침묵으로 일관했을 리 없다. 일제는 왜 만주사변 직전에 백두산정계비를 가져간 것일까? 아마 만주에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수괴로 하는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는 데 장애요소로 작용할 것을 우려해 없애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만주국의 정통성을 주장해야 하는데 간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적혀 있는 백두산정계비는 그 장애요소가 될 우려가 있었다. 만주국을 기반으로 중국 전체를 점령하고자 했던 일제가 이런 침략 의도의 장애물이 될 수 있는 백두산정계비를 만주사변 직전에 모처로 가져갔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2007년] 미국 보수 기독교계 인사 제리 팔웰 목사 사망
←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계 인사인 제리 팔웰 목사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계 인사인 제리 팔웰(Falwell·73) 목사가 15일 오전 숨졌다.
TV를 통해 기독교 전파에 나섰던 팔웰 목사는 이날 오전 버지니아 린츠버그에 있는 리버티대학 총장 집무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팔웰 목사는 미국 내 기독교 근본주의파(派)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를 정치세력화해 공화당 보수층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1956년 교인 35명으로 교회를 시작해 2만4000명의 토머스로드침례교회로 성장시켰다.
1979년 ‘도덕적 다수’(Moral Majaority)라는 단체를 설립해, 동성애와 포르노 산업, 낙태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도덕적 다수’는 미 전역에 650만 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그는 또 리버티 대학을 설립, 보수주의 기독교 교육 사업에 헌신했다./조선
[2007년] 한국인 4명 탄 원양어선 마부노 1,2호 2척 피랍
한국인 4명이 탑승한 원양어선 2척이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납치됐다.
아프리카 케냐 몸바사를 떠나 예멘으로 향하던 저인망 원양어선 마부노 1, 2호가 15일 12시40분(한국시각 저녁 6시40분) 소말리아 모가디슈 해안의 북동쪽 210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무장단체에 의해 납치됐다. 납치된 한국인 선원은 한석호 선장, 이성렬 총기관 감독, 조문갑 기관장, 양칠태 기관장 등 총 4명이고, 이 밖에도 중국인 10명, 인도네시아인 4명, 베트남인 3명, 인도인 3명을 포함 총 24명이 피랍된 2척의 배에 타고 있었다./조선
[1993년] 한학자 신호열씨 별세
← 신호열씨
한학계의 원로이며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교수인 우전 신호열씨(80)가 1993년 5월 15일 자택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우전은 고전 국역에 큰 공적을 남겼으며 한학 분야에서 마지막 남은 대학자로 불려왔다. 전남 함평 태생인 우전은 3살 때 조부의 무릎 아래서 천자문을 배우고 6세 때 이병수 선생에게 통감절요를 배움으로써 본격적으로 한학에 입문했다.
열 살 때 이미 한시를 지어 동네 노인들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17세 결혼할 때까지 사서삼경을 비롯, 사기 당송팔대가의 글과 6경 제자백가들을 뗐다. 1960년 `한중시사`를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그가 지금까지 번역한 한문 고전들은 20여종, 수십 책에 이르고 있다. 우전은 한문고전 중에서도 특히 시문 번역에 독보적 경제였다. 난해한 것으로 유명한 퇴계의 시나 완당집을 번역한 것은 그만이 할 수 있었던 업적으로 평가된다. 지난 1985년 제1회 고전 국역상 본상을 수상했다./조선
[1991년] 일본 자민당 아베 신타로(安倍 晋太郎) 사망
← 아베 신타로
일본 자민당 최고실력자중의 한사람인 아베 신타로가 1991년 5월 15일 별세했다. 아베는 자민당의 주요직책인 간사장정조총무회장, 내각의 주요 포스트인 관방외무통산장관 등을 빠짐없이 역임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로 사망하기 전 4년 반 동안 총리총재 자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으면서도 끝내 그 자리에 앉아보지 못했다. 아베는 포스트 가이후의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그는 1989년 6월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돼 책임을 지고 간사장을 사임했으나 다케시타, 가네마루씨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 당내 제2파벌 영수로서 대권에 강한 의욕을 보여왔다. 다케시타 전 총리, 미야자와 전 부총리 등과 함께 일본의 ‘뉴리더’로 불리던 그는 다케시타의 후임 총리로 거의 확실해 보이기도 했으나 리크루트 스캔들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아베씨는 다이쇼(大正)13년(1924년) 야마구치켄에서 태어났다. 동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잠시 마이니치 신문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다 1958년 총선거 때 출마, 첫 당선함으로써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는 3번째 선거인 1963년 총선거에서는 낙선했으나 곧 컴백, 지금까지 11회 당선을 거듭했다.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의 사위라는 가계의 덕택과 성실한 인품, 원만한 성격으로 신망을 쌓았다. 그는 미키 내각 때(1974년) 농상으로 첫 입각한 것을 계기로 관방장관, 통산상과 외상을 역임했다.
자민당 내에서도 간사장을 비롯, 정조회장·총무회장 등 주요 3역을 모두 거쳤다. 특히 1982년 나카소네 내각 발족과 동시에 취임한 외상은 연속 4기, 재임기간 3년8개월에 이르는 최장수였으며 일본의 국제국가로서의 공헌을 목표로 한 ‘창조적 외교’를 제창함으로써 국제적 지명도를 높였다./조선
그밖에
2007년 김성은 전 국방장관 별세
2007년 마크 로스코의 '화이트 센터' 현대미술 최고가 낙찰
2005년 입파도 일가족 보트 참사
2003년 국립 공주박물관서 국보 1점등 4점 분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미국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5년 국제언론인협회(IPI) 제44회 연례총회 서울서 개막
1988년 소련, 아프가니스탄 철수 시작
1982년 영국 특공대 포클랜드 상륙
1980년 대학생 가두시위 절정
1973년 국무회의에서 새 가정의례준칙 의결
1964년 라오스내전 격화
1963년 동경올림픽 남북 단일팀 협상 홍콩서 개시
1957년 영국 수소폭탄 실험 성공(세계에서 3번째 수폭 보유국)
1957년 제25회 임시국회 야당만으로 개회식
1955년 오스트리아 주권회복조약 조인
1946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발표
1940년 나일론 스타킹 미국 전역에서 판매 시작
1932년 일본 군장교 쿠데타. 수상을 사살 (5.15사건)
1911년 최초의 동시상영 영화 `The Lost Chord`와 `The Fall of Troy` 상영
1901년 모펫, 한성에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 설립
1818년 근대 인도의 철학자, 종교개혁가 타고르 출생
1713년 프랑스의 천문학자 라카유 출생
1397년 세종대왕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