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은 불빛>을 보고
20세기와 21세기를 걸쳐 살아가면서…
나는 1968년도에 태어났다. 그리고 올해는 2023년이다. 이 숫자는 공상과학만화에 나올법한 연도의 숫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과학문명이 발달할 줄은 1980년대에는 꿈도 꾸지 못했다. 앞으로 20년이나 30년 후에는 어떤 발전이 있을지 아마 그때까지 살아서 세상을 본다면 나는 다시 오늘처럼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는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유대인들을 말살하려는 홀로코스트가 유럽을 휩쓸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의 비인간적인 만행이 곳곳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그 후에는 이념을 앞세운 집단학살의 광풍이 한반도 전역에 몰아쳤다. 제주4.3사건이 그것이고 여수와 순천에서 일어난 집단학살이 그것이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과 후예들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인류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 걸까? 과학기술문명은 분명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신기술로 인하여 신소재가 발견되고 새로운 제품이 선을 보이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런데 유럽에서 일어난 홀로코스트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집단학살 같은 야만적인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까? 인권존중의 의식이 높아지고 민주주의가 발전한 지금은 약자를 위한 법과 시행령이 촘촘하게 마련되어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 못지 않는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전쟁의 소식을 들어 보면 이 모든 수고와 업적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 일어나면 인간을 이롭게 하던 모든 기술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무기로 사용된다. 그 무기를 든 사람들은 인간이 아이들과 여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마련한 법이나 규정을 간단히 무시하고 행동한다. 마치 그런 것들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만 같다.
고상하고 우아한 옷차림과 화려하고 깨끗한 집에서 사는 사람들도 한때는 두려움과 절망의 진흙에서 허덕였던 사람들이다. 80년 전 유럽의 상황이 그랬고 70년 전 우리나라의 상황이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인간은 서로를 저주하고 상대방을 죽이는 일인 줄 알면서도 뻔뻔한 거짓말로 포장하며 해치운다. 감사원장에 대한 부당한 감사가 그렇고 방통위원장을 쫓아내기 위하여 꼼수를 쓰는 것이 그렇다.
성경에도 무도한 세력들이 아첨하고 거짓을 말하면서 안하무인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시편 12:8
전쟁 때에만 인간이 비열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평상시에도 어느 때든지 인간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에는 언제든지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비열해지는 것은 아니다. 홀로코스트의 광기가 유럽을 휩쓸던 그 숨막히는 상황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한 사람이라도 더 숨겨주기 위하여 분투했다. 악한 기운이 들고 일어나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숨죽이는 때에도 어떤 이들은 더 크고 위대한 선한 힘이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믿으며 그의 인도를 따르기 위해서 용기를 낸다.
고대의 현인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성선설이나 성악설 등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말처럼 어쩌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평범성(banality)이라는 말은 고대에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다 세금을 바쳐야 했듯이 일반 대중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일을 가리킨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사고의 결핍이 그런 비극을 낳았다고 하며, 에리히 프롬은 관료주의적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제라고 진단했다. 관료주의에 물든 인간은 주체적인 사고가 결핍된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 둘 다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세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이 문제를 설명하는 것 같다.
그런데 디즈니가 만든 영화 ‘작은 불빛’에서는 평범한 사람도 악한 기운이 엄습한 상황 가운데서 선한 일을 꾸준히 해내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성격이 까다롭고 어린 시절의 상처가 그를 괴롭게 하지만 주인공은 안네 프랑크의 가족을 숨겨주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한다.
영화 소개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OE_p7a3Tt8E
이 영화에서는 종교나 신앙의 문제는 부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평범한 인간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함이다. 1년 전 뉴스를 찾아보니 안네 프랑크의 가족을 밀고한 사람은 유대인 공증인이라고 한다. 다른 민족은 숨겨주고 같은 민족은 밀고했다. 물론 그 사람도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정말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지 알 수 없는 때를 만난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이 내리는 선택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면 매일 일상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과연 우리는 아이히만과 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그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전두환 전 대통령은 끝내 사과하지 않고 죽었다.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고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다고 끝까지 확신한 것일까? 종교계가 일제히 일어나 잘못을 지적하고 돌이키라고 성토하고 있는데 윤석열 대통령은 왜 계속 그 길을 가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선택이 정말 국익을 위해서 최선이라고 확신하는 것일까?
이념이 지배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인간은 서로 다른 생각과 확신을 가진 채 서로를 비난하고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면서 결말을 향해 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 수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하지만 여전히 평범한 사람들 안에 그 해답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때로는 오해하고 때로는 화를 낸다. 그리고 소리도 지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하고 들어준다. 그리고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내어 놓는다. 그렇게 하면서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어쩌면 신앙이라는 구도의 길은 가장 평범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 길을 걸어가려면 위선과 허영의 옷을 벗어버려야 하고 두려움과 탐심이라는 짐도 내려놓아야 한다.
오늘 가장 위대한 순간인 일상이 또 다시 내 앞에 열려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