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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7일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스물여섯 번째 주일)
흔들리지 않는 터전
다니엘서12:1~3; 히10:19~25; 막13:1~8
얼마 전 유투브에서 “사탄의 두 가지 전략”에 대해 말하는 김기석 목사님의 쇼츠를 보았습니다. 그분은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하는데, 하나는 탐욕을 부추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맞아요, 사탄은 우리 안에 끊임없이 두려움을 만들어 냅니다. “너 이 정도 소유하지 않으면, 이 정도 되지 않으면 인생 망한 거야”, 이러면서 끈질기고 뿌리 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계속해서 심어줍니다. 그래서 이런 나의 두려움을 달래줄 수 있는 뭔가(대상)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을 갖도록 만들지요. “이런이런 것을 갖고 싶지?” “너 이 정도는 갖고 살아야 돼” “너는 이 정도는 되야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어.”
그러니까, 사탄은 탐욕과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전략을 쓴다기보다, 확실한 가지 전략이지요. 사탄은 우리에게 두려움만 불러일으키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너 이 정도는 가지고 살아야 돼” “너 이 정도 되지 않으면 사람대접 못 받아.” 사탄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두려움과 불안을 심어줌으로써, 뭔가를 더 가지도록, 뭔가를 더 탐하도록 조장합니다. 마치 그것을 소유하면 두려움이 다 사라질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면,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게 합니다. 자신 만의 큰 성을 쌓아놓고 문을 걸어 잠급니다. 아무도, 누구도 내 성벽에 들어올 수 없도록 창과 방패로 무장합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김주환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이 분노, 짜증, 불안감, 두려움, 역겨움, 좌절감, 우울감 등 여러 가지가 있고, 그 하나하나가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감정의 실체는 “부정적인 감정” 단 하나뿐이고, 그것의 본질은 바로 “두려움”(불안감)이라고 합니다. 가랑비, 보슬비, 소나기, 장맛비 모두가 결국은 “비”인것처럼, 좌절감과 우울감, 그리고 분노와 공격성향은 모두 두려움에서 비롯된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 두려움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몸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역설하지요. 뇌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저는 뇌과학은 잘 모르지만, 경험칙상 이 말에 동의가 됩니다.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올라와 “이런 저런 것을 갖지 않으면, 너는 망한 거야.” “네가 이런 저런 사람이 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너를 무시하고 싫어할꺼야”, “좀더 단단히 방어하고 좀더 경계해”, 속삭이는 “두려움”이란 것이 있습니다.
오래 전 “자신이 벗은 몸인 줄 알고서” 하나님을 피해 숨게 만들었던 “원초적인 두려움”은(“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서 올라와 “넌 살벌한 전쟁터에 던져진 천둥벌거숭이야. 넌 혼자고 넌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 더 많이 가져, 더 철벽같은 성벽을 쌓아!” 속삭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해가 벌써 저물고 있습니다. 우리 달력으로는 아직 한 달 반이 남아 있지만, 교회력으로 보면, 다음 주일(그리스도 왕 주일)로 2024년 교회력은 끝납니다. 그래서 12월 1일 첫 주일이 되면 대림절을 시작으로 새로운 교회력으로 들어갑니다. 올해도 우리 안의 두려움은 여전히 우리를 조종하고, 행동의 동기가 되고, 우리 삶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우리를 노예처럼 부려먹었습니다. 아니, 두려움은 이미 우리 삶의 기본 운영체제가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어떻게요?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면서! 새가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늘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백합화와 들풀이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지만, 세상의 온갖 영화로움도 그 꽃만큼 못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똑똑히 실재를 보아라! 실재를 꿰뚫어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행하는 그 모든 일들이 아니라, 너희의 하늘 아버지시다. 힘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끌고 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다! 실재를 꿰뚫어 똑똑히 보면, 진정 세상을 이끌어 가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 실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어떤 경험을 통해서 실감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온전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죽을 때나 되어야, 이 사실을 받아들이겠지요. 아마 죽을 때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고통 받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성은 죽을 때 하는 것을 지금 하는 것”이라는 키팅 신부님의 말씀은 핵심을 뚫는 말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본문은, 예수님과 한 제자가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나눈 대화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였고, 이제 며칠 뒤에는 여기서 고통 받고 십자가을 받게 되는 때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나면서 한 제자가 말합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이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예수님 당신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왕이 세운 성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맨 처음 주전 10세기 솔로몬에 의해 지어지지요. 구약성경에서는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 매우 화려하고 큰 건물인 것처럼 소개되지만, 솔로몬의 성전은 사실 그렇게 큰 건물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 궁전의 한 부속 건물로 지어진 소박한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다 그 성전이 주전 587년 4월 바빌론에 의해 파괴되고, 후에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스룹바벨에 의해 주전515년 4월 성전이 다시 재건 봉헌됩니다. 이 두 번째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고 규모도 솔로몬 성전과 비슷했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그렇지만 이 성전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 동안 세워져 있던 건물이었습니다. 약 500년가량 존속했는데, 솔로몬 성전보다 100년이나 더 생명이 길었습니다. 이때 성전 건축을 독려하던 예언자가 바로 학개라는 예언자였지요. 나중에 이 성전은 헬라의 장군 에피파네스 안티오쿠스에 의해 돼지 피로 모독당하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마카비 혁명이 일어나지요.(외경, 마카비상하)
예수님이 보셨던 성전은 헤롯이 세운 성전이었습니다. 주전 20년경에 시작되어, 주요건물은 준공되었으나 부속건물은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습니다. 헤롯이 유대인들의 민심을 사기위해 시작한 사업이라서, 이 성전은 당시 유행하던 새로운 양식인 헬레니즘적 로마 양식에 따라 장대한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지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들고나시며 보셨던 성전은 바로 이 건물이었지요. 그러나 이 성전은 반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가 끝을 못 본채 주후 70년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크고 화려했지만 가장 단명한 성전이었습니다.
당시에 그런 건물이 유다에는 없었을 테니,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의 위용을 보면서 감탄을 했을 겁니다. “이 돌의 크기를 보십시오. 이 굉장한 건물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 크기와 위용에 감탄하지만, 예수님은, “너희들이 보는 그 건물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져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서 성전을 보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야기하지만, 실은 이것은 중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 이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끔찍히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건물의 중요성 이상이었던 것이지요. 성전 건물은 이미 자신들 유대교의 상징이며, 자신들의 민족의 상징이고, 자신들이 생존하는 근거 혹은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호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빌론 포로 때 성전이 파괴되는 것에서, 성전이 모독당하는 것에서, 그들은 그렇게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건물 자체와 더불어 자신들의 체제, 자신들의 생존, 자신들의 터전을 감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가차 없이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마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의 충격은 매우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마주 보이는 올리브 산에 올라가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따로 예수님께 묻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제자는 종종 예수님의 은밀한 이야기를 따로 듣던 제자들이지요. 이번에도 이들은 예수님께 “따로”(<카티디안> 은밀히, 종용히) 묻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두 가지 말씀을 하시지요. 1) 속지 말아라! 누가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말하더라도 속지 말아라 말씀하십니다. 2) 놀라지 말아라! 전쟁의 소문도 나고 나라가 맞서고 지진이 나고 기근이 들더라도 놀라지 말아라, 끝은 아니니 놀라지 말아라.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이고, 진통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종종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반이 무너지고 기초가 무너진다는 의미에서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도 종종 지구 종말을 다루는 영화들이 있고, 시한부 종말론을 말하는 종파에서 종말의 때와 징조를 내세우는데, 사실 우리 모두가 이런 두려움이 있는 거지요. 우리의 기초가 흔들리고, 터전이 흔들리는 두려움 말입니다. 인간이 갖는 원초적인 두려움입니다.
사실, 꼭 세상 종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도 가끔 한밤중에 우리의 모든 기반이 흔들릴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하지요. 이 두려움은 우리가 어디에 기반을 두고(터전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실체가 더 분명하게 느껴지겠지요. 만일 우리가 재산과 소유에 기반을 둔다면, 우리가 망해서 거리에 내앉을 것이라는 두려움 있을 것이요, 우리가 우리의 명예(이미지, 인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우리의 이미지가 완전히 망가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겠지요. 사실, 여러 가지 두려움은 우리가 어디에 기반해서, 기초해서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 기반을 두고, 기초를 두고 살고 있을까요? 한 제자가 예수님께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만 굉장한 건물입니까!” 감탄했을 때, 이 제자는 자신이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는지를 은연중에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제자가 발 담그고 있는 당시의 가치관과 관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을까요? 추상적인가요? “내가 이것만 가지면, 내가 이렇게만 되면 행복할 거야”라고 물어보면 답은 금방 나옵니다. 그게 돈일수도 있구요, 지식일수도 있구요, 사회적 인정일수도 있구요, 자식들의 성공일수도 있구요, 심지어는 영적인 능력일 수도 있습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도, 지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동기가 결국은 사람들의 인정이나 사회적 영향력일 수 있지요.
여러분, 이런 우리의 기초, 우리의 가치관과 관습을 당장 무너뜨리고 바꿔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의 삶을 무의식적으로 여기서 기대서 산다면, 우리의 삶은 부자유스럽고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두려움의 노예로 조종당하며 살게 될 테니까요!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이 그렇게나 흠모하고 경배의 대상이었던 성전마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시인은 말하지요.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옷처럼 낡겠지만, 주님은 옷을 갈아입듯이 그것들을 바꾸실 것이니, 그것들은 다만,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시102:26) 여기에는 제국도,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종교체계도 예외가 없습니다.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라는 분이 <그리스도교의 오후>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물고 있다는 거지요. 영원할 것 같던 로마제국도 끝났고, 그렇게 강력하던 막시즘도 철지난 유물이 되었습니다. 미국이라는 강력한 나라는 어떻게 될까요? 이런 것들은 모두 “옷”과 같은 것들입니다. 옷이 낡아지면 주님은 옷을 바꾸십니다.
요셉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제가 물었습니다. “수도 청원자가 없어서 수도원은 앞으로 어떻게 합니까?” 요셉 수도원에 제가 처음 갔을 때는 수도자들이 한 20여명이 되었는데, 지금은 반 토막이 났거든요. 수도자로 오겠다는 청원자는 없고, 돌아가시는 분만 생기니까요. 그러자 수도원장님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했습니다. “수도원이 없어지면,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을 쓰시겠지요. 하나님은 계시잖아요.” 수도원이라는 체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도원은 하나님을 섬기라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은 영원하시지 않느냐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속지 말아라, 누가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해도 속지 말아라” 하신 말씀은, 세상의 어떤 것도 너희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라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교회도 수도원도 그것이 우리의 기초는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체제일 뿐입니다. 세상의 체제들은 사람들을 성장하게 도우며,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돕고 살도록 사람들에게 잠시 주어진 장일뿐입니다.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용도를 잘 알고 잘 사용하면 됩니다.
관습과 체제로부터의 자유, 소위 문화적 동일시로부터의 해방은, 우리들이 평생 닦아내야 할 아주 중요한 훈련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가치관, 세상이 주는 인정, 세상이 주는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탕으로 하고 기초로 하는 복음의 가치관이요, 복음적 가치라고 말씀하시며, 스스로 유대교라는 체제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죽음은 체제가 내린 사형선고입니다.
여러분, 지금이 종말은 아니라 하더라고, 우리에게는 놀랄 일들이 수없이 벌어집니다. 두려운 일들이 수없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지금 전쟁과 같은, 기초가 흔들리는 경험은 하지 않고 있을지라도, 사실 우리 안에서는 여기저기 전쟁이 벌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걱정 근심이 끊이지 않고, 두려움은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됩니다.
예수님이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때, “걱정하다”(메림나오)라는 말은 “전체어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 혹은 분산되어 있는 한 조각”이라는 말(메로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하다”라는 말은 “분심으로 갈라져 있다”는 뜻도 갖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는 걱정은 사실은 갈라져 분산되어 있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두려움은 걱정을 낳고 걱정은 수많은 갈라진 생각들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기초를 가만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터전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바탕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새가 어떻게 공중을 날고 있는지, 백합화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 있는지, 우리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우리의 걱정과 염려가 무엇이며,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속지 말고, 놀라지 말고, 가만히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