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른 이 누굴까?
꽃이 다 떨어지겠어, 어쩌니? 새벽 잠결에 들려오는 빗소리가 심상치가 않다. 예보에 많은 비가 내린다고 하더니 어제 핀 벚꽃들이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겠다. 야속하기는 하지만, 어찌하겠어, 오는 비를 그치라고 할 수 있겠나, 오지 않는 비를 내리라고 할 수 있겠나!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추적추적 내리다가 창문을 톡톡 두들기고 간다. 요즘은 몸은 그다지 바쁘지 않은데 마음이 바쁘다. 숨겨져 있던 잔잔한 감성이 마음을 휘젓고 다닌다. 컴퓨터 앞에서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출근길에 제법 비가 많이 내려서 남편을 지하 주차장까지 배웅해 주었다. 이왕 나온 김에 산책하고 싶었다. 파라솔 우산을 버겁게 앞세우고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비 오는 날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비 오는 날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정서가 있어서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조경수로 꽃나무가 많다. 매화나무부터 대추나무 목련나무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모과나무 감나무 라일락 꽃사과나무가 있다. 각자 매력을 뽐내며 예쁜 꽃을 피운다. 올해도 저마다의 고운 자태로 유혹하고 있다.
빗속에서 두 송이 하얀 꽃을 달고 있는 목련나무를 보았다. 나무가 아픈 것일까? 머리를 빡빡 밀고 훈련소로 입대하는 청년 모습이다. 목련나무는 손을 안 보면 계속 자라기 때문에 수시로 가지치기를 해줘야 편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과감한 가지치기를 마친 목련나무가 빗물에 젖어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작달막한 체구에 짧은 팔다리로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다. 어떻게 두 송이 꽃만 피었지? 나무는 굵고 근육질로 단단해 보이는데 어찌하여 꽃은 이렇게 부실한가? ‘하나는 외로워서 둘이랍니다.’뭐, 그런 건가!
목련나무 아래서 우산을 쳐들고 빗물에 젖어 수척해진 목련꽃과 한참 눈을 맞추었다. 왠지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빗물 탓인지. 나무에서 느껴지는 외로움 탓인지. 친구는 목련꽃이 빗물에 젖어 바닥에 떨어진 모습을 보면서 ‘실연당한 여자’ 같다고 했다. 두 송이 꽃잎이 속절없이 떨어지는 날 목련나무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까?
아파트 단지 안에 심어놓은 꽃나무 안부를 일일이 물으며 천천히 걸었다. 모과나무 앞을 지나가다 그만 모과꽃 유혹에 넘어갔다. 섬세하고 매혹적인 향기와 연홍색의 고급스러운 꽃잎은 봄꽃 중에서도 고급스럽다. 빗물에 젖은 모과꽃은 차라리 슬퍼 보였다. ‘유혹’이란 모과꽃 꽃말처럼 그녀의 유혹에 깊게 빠져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느릿느릿 걸었다. 자두나무도 꽃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살구나무도 질세라 열심히 꽃송이를 키우고 있다. 대추나무 감나무 메타스 콰이어 주목 향나무들이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아파트에 처음 입주할 때부터 함께 살아온 나무들이다. 중간에 심하게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나무가 고마울 뿐이다.
어린이 놀이터 울타리는 명자나무로 만들었다. 키 작은 명자나무를 울타리 목으로 심었다. 누가 이런 낭만적인 생각을 했을까? 붉은 꽃이 비에 젖어서 너무도 매혹적이다. 나를 숨이 멎게 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놀이터 바닥에 하얗게 눈이 내린 기막힌 풍경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놀이터 앞에 두 그루 벚나무가 교장선생님처럼 점잖게 서 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라 벚꽃이 일찍 핀다. 하룻밤 사이에 꽃잎이 빗물에 떨어져서 놀이터 바닥에 한 장씩 한 장씩 꽃눈으로 내렸다.
발자국이 없는 눈밭처럼 새하얗다. 눈이 내렸다, 사월에. 나를 부른 이 누굴까.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준비해 놓고 나를 부른 이 누구일까? 울컥하는 마음에 깊은 곳 어디에서 뜨거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카메라에 조심스럽게 담기 시작했다. 행여나 발자국이 남을까 조심조심 멀리서 사진을 찍었다. ‘머리끝이 곤두서면 그것이 시’라고 했다. 지금 나는 머리끝이 곤두서고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에서 심장이 뛰었다. 누가 그린 그림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누구의 시가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 같단 말인가! 그네에 앉아있는 꽃잎 서너 장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훔칠 수 있단 말인가! 너무도 소중해서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풍경이다. 전화기를 손에 꼭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 2024년4월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