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四十一
장광한(張光翰) 묘갈명(墓碣銘)
군(君)의 이름은 광한(光翰)이고, 자(字)는 사거(斯擧)이며, 관적(貫籍)은 옥산(玉山)으로, 고려 때에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다. 증조(曾祖)는 장적손(張嫡孫)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고, 조부(祖父)는 장잠(張潛)으로 성균 진사(成均進士)였으며, 선고(先考)는 장곤(張崐)으로 증(贈) 통정 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參議)이다.
참의(參議)가 양성 이씨(陽城李氏)로 내금위(內禁衛)를 지낸 이훈(李薰)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군은 가정(嘉靖) 신유년(辛酉年, 1561, 명종 16)에 태어났으며, 형제는 모두 여섯 사람이었는데 군은 그중에서 셋째 아들이었다.
군은 과거 공부에 부지런히 힘써서 재차 발해(發解, 향시(鄕試)에 합격한 것을 말함)하였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었다. 군이 살던 고을에 오산 서원(吳山書院)이 있었는데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의 왜란(倭亂) 때에 병화(兵火)에 보전하지 못하였으나 군이 난리 뒤에 서원의 원장(院長)이 되어 정성껏 경영(經營)하여 중건(重建)하였다.
천계(天啓) 갑자년(甲子年, 1624, 인조 2) 정월(正月)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고, 그해 12월에 부(府)의 서쪽에 있는 양촌(陽村)의 뒷산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군의 아내인 허씨(許氏)는 학생(學生) 허응윤(許應尹)의 딸인데, 신유년(辛酉年, 1561, 명종 16)에 함께 태어나서 뒤의 신유년(辛酉年, 1621, 광해군 13)에 세상을 떠났으니, 군보다 3년 먼저 죽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인 장내절(張乃節)은 현감(縣監)의 직첩(職帖)을 받았고, 차남은 장내적(張乃迪)이다. 서얼(庶孼) 아들이 둘인데 장내순(張乃順)과 장내걸(張乃傑)이고, 서얼 딸이 넷인데 장녀는 김중길(金重吉)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나이가 어리다. 군의 여러 고자(孤子)들이 빗돌을 장만하여 나에게 명(銘)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여, 이에 간략하게 서술하고 명을 짓는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양촌(陽村)의 언덕이 낙동강(洛東江) 동쪽에 있으니,
선영(先塋) 곁에 있어서 그 마음이 길이 편안하리라.
이에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새기니,
또한 훌륭한 끝맺음이 있다고 할 수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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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張光翰 墓碣銘[張顯光]
君名光翰, 字斯擧, 籍玉山, 高麗三重大匡、金吾衛上將軍諱金用之後。 曾祖諱嫡孫, 忠順衛; 祖諱潛, 成均進士。 考諱崑, 贈通政大夫、戶曹參議。 參議娶陽城李氏, 內禁衛薰之女。
君生於嘉靖辛酉。 兄弟凡六人, 君其第三也。 勤擧業, 再發解, 未成而止。 邑有吳山書院, 壬辰寇亂, 不保於兵火, 君爲長於亂後, 盡心經營以重建焉。 天啓甲子正月, 疾歿。 是年十二月, 葬于府西陽村後山坤向之原。
妻許氏, 學生應尹之女, 生同辛酉, 而歿於後辛酉, 先於君三歲。 有男二人: 長乃節, 受縣監帖; 季乃迪。 孼男二: 曰乃順、乃傑。 孼女四: 長嫁金重吉, 餘幼。 諸孤具碣請銘, 遂略敍以銘。 銘曰:
陽之原, 于洛之東。 傍先塋, 永安其衷。 碭以銘, 亦云有終。<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