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나움
(마 4:12-2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가버나움’이라는 영화가 몇 해 전에 개봉되어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레바논 출신 감독이 만든 영화로 한 어린 소년의 입으로 ‘인간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버린 사회,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지켜주지 않는 사회’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고, 팔아넘기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스러져갑니다. 아이는 감옥에서 부모를 고발한다고 하여 주목을 받습니다. 돌보지도 못하면서 왜 자식을 많이 낳아 비참한 삶으로 몰아넣느냐는 이유입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한 가정, 한 도시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세계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정치인들, 종교인들, 경제인들은 품위 있게 인권을 이야기하고, 정의와 평화를 외치며 인간의 존엄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전쟁을 일으키고, 경제 이익을 위해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고, 착취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 탐욕, 증오는 정치, 종교의 우아한 말로 포장하여 사람들의 눈과 귀를 흐리게 만들고 자기들만의 거대한 탑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고, 편리해졌지만,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부와 권력과 힘의 양극화는 세계를 분열시키고, 세대와 성별을 갈라놓습니다. 갈가리 찢겨진 세계는 더욱 치열한 경쟁으로 서로를 해치고 있습니다. 30년 전에는 부의 양극화를 80대20이라고 하였습니다. 상위 20%의 인구가 부의 80%를 차지하고, 80%의 인구가 부의 20%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양극화는 심화되었고, 90대10을 넘어섰을 것입니다. 10%의 인구가 부의 90%를 넘게 차지하는 것입니다. 과장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부자들은 부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인데 가난한 사람은 오늘 하루 끼니를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가버나움은 오늘의 세계를 축소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 성경에 나오는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이 가난하고, 차별이 많고, 인간의 이기심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붙였을 수도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입니다. 그래도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에는 로마군의 주둔지가 있어서 백부장이 군대의 지휘관으로 있었고, 상업중심지여서 세관도 있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갈릴리 지방은 북쪽 이스라엘에 속했는데 앗수르에 점령당하면서 이방인 이주정책으로 이방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을 지키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나중에 유다가 포로에서 돌아와 나라를 회복한 때가 있었는데 유다는 갈릴리, 사마리아를 멀리했습니다. 신앙의 순수성, 정통성을 지키지 못하고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배척당한 것입니다. 물론 주민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선택받은 민족’이라 여겼지만, 유다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은 것입니다. 갈릴리 지방에도 회당은 있었고, 가버나움에도 회당이 있어서 안식일에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근처 마을이어서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가 하나쯤은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적이나 경제적, 종교적으로 차별받고 외면당한 경험이 많이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전도 활동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연도별로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료는 복음서뿐인데 순서가 다를 수도 있고, 잘 정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성장하셨습니다. 매년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것입니다. 종교적 의무로 남자는 12살이 넘으면 일 년에 세 번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활동을 시작하기 일 년 전쯤 세례요한의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유대 땅에서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절기 때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세례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막으로 들어가 시험을 이기고 세상으로 나와 자신을 알리게 됩니다. 맨 먼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당장 활동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세례요한이 길을 닦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둘이 경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가 세례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세례요한은 갈릴리 분봉왕인 헤롯 안티파스가 이복형제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재혼한 것을 비판했기 떄문에 투옥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와 나사렛에서 잠시 지내다가 가버나움에서 살게 됩니다. 가버나움이 옛날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 경계에 있던 마을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이 ‘예언의 성취’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들어오기 전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입니다. 그때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주지 않아서 고향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때가 아마 세례를 받으시고 일 년 정도 지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물론 정확하지 않고, 몰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구약 이사야서의 예언은 가버나움을 가리켜 ‘이방의 갈릴리,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 그늘에 앉은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화려하거나 품위 있는 도시는 아닌 것입니다. 이곳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는데, 복음 전파를 가리켜 ‘큰 빛을 보았고, 빛이 비치었다’고 예언한 것입니다. (15-16절) 그리고 마태는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가버나움의 배경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희망이 없고, 사랑, 기쁨, 평화 등 사람들이 기대하는 밝은 내용의 도시는 아닙니다. 아픔과 상처가 많습니다. 차별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복음을 전파한다면 희망과 축복, 평등과 평화에 대해서 알려주면 귀 기울일 텐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니 사람들이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회개하라’고 하면 여의도나 용산에 회개할 사람 더 많으니 거기 가서 말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이 잘못하면 얼마나 큰 잘못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결실을 보지 못하고 가버나움을 책망하게 됩니다. 11장 20절부터 소돔과 고모라 같을 것이라고 저주하듯 말씀하시는데 저주라기보다는 회개하지 않은 결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활동 대부분이 가버나움에서 이뤄집니다. 어부인 제자를 부르시고, 세관에 앉은 마태를 부르시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기적을 가버나움에서 행하셨습니다.
23절에서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 여러 마을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과 약한 것을 고쳐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 교회의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고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복음은 ‘회개하는 것’이었을까요? 사람들은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거나 새로운 진리를 들으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적을 기대하고, 보여달라고 청하지요. 또 진리를 얻었다며 놀라워하기도 합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을 비롯해 갈릴리 지방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달라지지 않았고, 예수님으로부터 회개하지 않는다고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는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만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온 삶이 돌아서야 합니다. 삶의 목적, 가치, 방향이 달라져야 합니다. 어쩌면 회개의 모습을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첫 제자인 어부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 없이 살다가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전부가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20절 ‘곧 그물을 버려두고’, 22절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9장 9절에서 세관에 앉은 마태를 부르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버린 것’은 삶의 전부입니다. 인생의 목적일 수도 있고, 삶의 의미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도구가 되기도 하고, 나를 지지하고 도와주는 가족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삶의 목적, 방법, 수단, 이유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직장도, 가족도, 친구도, 재물도 다 버리고 주님만 믿고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온전한 믿음으로 따를 수 없다면 버려야 되겠지요. 욕심이 커서 버릴 수 없다면 과감한 결단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인생 파탄자’가 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결단이 필요할 때 결단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사는 삶과 세상이 가버나움처럼 흑암과 사망과 그늘로 드리워진 죽음과 같을 수 있습니다.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돈과 권력의 수단으로 이용당하는 비참한 인생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빛으로 오십니다. 주님이 오신다고 세상이 밝아지는 것 아닙니다. 회개를 통하여 우리 삶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빛으로 채워야 합니다. 내 생각, 내가 가진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주님을 모시고 살 때, 모든 것은 헛되고, 오직 주님의 말씀과 사랑과 은혜만이 우리를 빛나게 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 돌아가 살지만, 이전과는 다릅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가버나움이 천국으로 바뀌는 것은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변하여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