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불교사 개요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땅에 전래된 지가 벌써 1600여년을 넘어서고 있다.
우리 대중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민족종교로서 면면히 이어오긴 했지만
순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숱한 굴곡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선지식들이 등장해서 순수성을 지키려 노력도 많이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세월이 흐를수록 맹목적이고 기복적인 신앙 형태로 변질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그러나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 선조들은 불교로 하여금 민족종교로서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많은 장애를 극복하면서 종교적 기반을 확장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왔음이 사실이다.
그 굴곡진 시대 변천에 따라 때에 알맞게, 그리고 슬기롭게 대처해나간
선조들의 예지에 감탄할 따름이다.
한국불교사라는 큰 줄기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나라 문화발전에 이바지한 불교의 역할,
그리고 선조들의 노력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다만 우리나라 불교는 인도로부터 직수입된 것이 아니라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된 뒤,
상당히 중국화가 진행된 뒤의 불교를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라는 점을 유의할 일이다.
1. 불교 도입기 - 삼국 시대의 불교
1) 고구려
고구려에 불교가 도입된 공식 기록은 AD 372년(소수림왕 2년)이다.
이때 중국 남북조시대 북방 오호 16국의 하나인 전진(前秦)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옴으로써 그들을 통해 불교 ― 불상과 불경 등이 전래됐다고 본다.
그러나 양 고승전(梁高僧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등에
그 전 동진(東晋)의 고승 도림(道林)이 고구려 승려에게 도교에 습합된
불교인 청담격의불교(淸談格義佛敎)의 대표자인 법심(法深)을 소개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봐서 372년 이전에 이미 민간 경로로
전파됐을 수도 있었다고 본다.
이 당시 고구려는 민중 통치를 위한 지배이념의 필요성으로 왕실이
불교 수용의 주체가 돼 중앙집권적 지배체재를 정비하는 데에 불교를 이용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도입된 전진(前秦)의 불교는 불교를
중국화하는데 앞장섰던 도안(道安, 312~385)에 의해 정비된 어느 정도 중국화한 불교였다.
따라서 고구려 불교는 민간 경로를 통한 격의불교와 왕실을 통한 중국화된 불교,
이렇게 두 가지 형태로 도입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하여 6세기경에는 고구려 승려 승랑(僧朗)이 등장해서
고구려가 불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게 됐다.
그러나 그 후 유교와 함께 도교가 당(唐)에서 전래돼 성행했다.
그리하여 기복을 위한 기도 불사로서 왕실에서 수용한 불교는 국민의 정신통일의 크나큰 역할을 했지만
말기에 이르러, ― 특히 연개소문에 의한 배불정책으로 인해 백성들은
도교계통의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신봉해, 불교는 쇠락하게 되고,
훌륭한 승려들은 일본이나 신라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2) 백제
백제는 AD 384년(침류왕 원년) 동진(東晋)으로부터 인도 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들어와서
불교가 퍼지기 시작했다. 마라난타는 신통한 이적을 가진 사람으로서
백제왕은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를 다해 공경했다.
그리하여 392년(아신왕 원년)에는 왕이 불교 신앙을 대대적으로 권장했다.
그리하여 겸익(謙益, 6세기)은 성왕 때(526년경)
인도에 가서 율학을 배워 와서 백제에 율종을 보급하기도 했다.
3) 신라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150여년 늦은
법흥왕(528년)때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이미 그 이전부터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 온지 40~80년 후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가 들어온 듯하며,
그 경로가 공식적이지 못한 터라 은밀하게 포교됐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당시의 불교는 기복신앙의 형태였고 공인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갈등이 없지 않았다.
갈등은 사회 정치적 갈등이었다. 이차돈(異次頓) 등의 불교도의 불교 공인 요구와
왕권신장 및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 확립을 위한 새로운 지배이념을 필요로 하는
왕실의 요구가 상응한데 반해, 부족합의제의 고수를 지향하는 전통 귀족세력은
법흥왕과 이차돈의 불교 승인요구를 극력 거부했다.
법흥왕의 불교 승인 요구에 대해 귀족층과 보수적인 전통 부족세력을 대표하는 대신들이
승려들의 머리모양, 옷차림새 그리고 그들의 언변에 상당한 비난을 가했다.
이러한 갈등으로 말미암아 불교가 신라에서 공인되는데 그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법흥왕 때(527년) 불교 공인을 반대하는 귀족들의 주장에 대해 이차돈(異次頓)은
자신의 목을 베어 분분한 의견을 잠재우도록 자청했고,
이차돈은 죽음에 임해, “나는 불법을 위해 형을 받는다. 부처님이시여
나의 죽음을 통해 이적을 행하소서.” 이런 말을 끝으로 처형됐다고 한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 피가 솟구쳤고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땅이 진동하고
비가 내리는 등 이적이 나타나 중신 귀족이 더 이상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각기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서는 김부식이 이차돈의 죽음을 대체로 종교적인 측면에서 묘사하고 있으나,
오히려 승려인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정치적인 이유에서
불교가 수용됐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당시 불교를 받아들이려는 주체는 국왕이었고 이를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쪽은 군신(群臣)들이었다.
즉, 법흥왕이 그의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쇼로써
그 일을 벌였고, 불교 공인을 반대하던 군신들에게 연대책임을 물어
그네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또한 ‘흰 젖빛의 피’는 신화적 기술 양식의 일종이라 하겠는데,
당대 법흥왕 측근들에 의해 조작된 풍문으로 간주 할 수도 있다.
어찌됐건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법흥왕은 불교수용정책을 강력히 관철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부족합의제를 지향하던 귀족층의 반대를 누르고 불교를 공인하고,
중앙집권적인 왕권전제통치를 강화해나갈 수 있게 됐다.
이렇듯 왕실에서는 귀족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신장하기 위해
부족연맹체 사회의 지배이념이었던 재래신앙을 대신해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용과정 상의 갈등은 왕권의 지원과 불교도의 재래신앙과의 융화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무마되고 극복됐으며, 재래신앙은 대체로 불교 신앙에 흡수 통합됐다고 하겠다.
이러한 신라 불교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수용과정 상 중국 불교가 직수입되는 게 아니라 고구려를 거치면서
한층 더 토착화됐고, 다른 나라에 비해 어느 정도 민중화가 되기 쉬웠다고 하겠다.
둘째, 불교 수용과 공인을 둘러싸고 지배권력 내부에서 이해관계를 달리 해 갈등이 치열했으나
대체로 민주적 합의에 의해 외래 종교가 받아들여졌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리하여 비록 신라는 삼국 가운데서 가장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밀접하게 불교를 국가와 정치면에 직결시켜
국가 발전에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전개된 신라 불교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① 신라 불교는 왕실의 호국불교였다.
법흥왕에 이은 진흥왕은 왕권확립 및 신장과 국토확장에 힘쓰면서
불교의 국교화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지배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 예로
• 법흥왕이 착공했던 홍륜사를 완성하고(554년),
• 승려가 되기 위한 출가를 공인했으며(544년),
• 고구려 침략 때 귀화해 온 승려 혜량(惠亮)을 승통으로 삼았다(551).
• 부족적 축제를 팔관회 형식으로 계승 발전시켰고,
• 승관제를 확립해 불교의 국교화, 제도화에 주력했다.
• 황룡사의 건립으로 용으로 상징되는 신라 왕권신장을 반영해
왕권 신성화의 도구 구실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사회적 정신적 통합으로 작용해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체가 되는데 기여하게 됐다.
삼국통일에 이바지 한 대표적인 승려로서 원광(圓光)이 있다.
그는 불교적 측면에서 큰 획을 그은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도 신라의 지배권력의 이익을 위해 일했던,
승려귀족으로서 계급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세속5계(世俗五戒)에 나타나는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나라(임금)에 충성하고,
둘째, 부모에 효도하고,
셋째, 벗은 믿음으로 사귀고,
넷째,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며,
다섯째, 살생을 가려서 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언뜻 보면, 첫째, 넷째 계명은 불교적인 윤리와 무관한 왕실 옹호의 윤리였다.
특히 임전무퇴의 계명은 뒷날 고구려, 백제와의 싸움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정신적인 힘이 됐다.
그리고 둘째, 셋째 계명은 유교적인 사고인 것 같으나,
이는 육방례경(六方禮經)과 같은 초기경전에도 나오는 세속적인 일에 대한
불교의 핵심적인 교훈이다.
다섯째 계명은 불교적 윤리이면서 자연숭배의 샤머니즘적 의식과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원광의 사상적 경향은 뒷날 자장(慈藏)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불교가 신라 땅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결정적인 시기에
신라 땅이 결코 불교와 무관한 낯선 땅이 아니라 본래 불국토(佛國土)였다는 신념을
신라 사람들에게 불어넣어 불교에 귀의하게 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 사람이 바로 자장(慈藏)이었다.
그는 선덕 여왕 때 활약한 승려로서 원광에 이어 신라 불교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했고,
한층 왕실과 귀족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엄격한 계율과 의식을 갖추고 대국통(大國統)으로서
전국의 승려들을 감찰하고 포살(布薩), 자자(自恣)의 의식을 시행했다.
원래 석가모니불 불교는 계급적 권위를 타파하고 억압 받는 민중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일깨우고자 했으나,
중국 불교를 거쳐 신라에 이르러 결국 왕권을 신장시키고,
지배층을 위해 일하는 귀족불교가 됐다.
이렇듯 신라 불교가 귀족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했지만,
세속 민중과 함께하면서 자기의 삶과 진리를 중생에게 바치면서
진정한 불교를 실천하는 승려들도 없지 않았다.
즉, 혜숙, 혜공, 대안, 사복, 원효 등의 승려들이 그들이었다.
② 신라 불교학의 발전 ― 의상(義湘)
의상은 원효와 함께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로서 한국 화엄의 기초를
닦은 승려이다. 그는 학문을 대성함과 동시에 제자를 양성하고
대중 교화에 힘쓰며, 불교의 사회적 실천에도 힘쓴 사람이다.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사물은 차별될 수 없다는 평등사상과,
상호연관성을 중시하는, 홀로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그리하여 그의 사상은 삼국통일 후 분열된 민심을 수습하는데 기여했으며,
훗날 고려의 화엄종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국토 및 동해 용왕신앙과 결합시킨
그의 신앙적 실천이 관음신앙을 대중화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세속 권력을 멀리하고 완고한 골품제 사회에서 신분평등을 주장했으며,
국왕에게 올바른 정치를 행할 것을 직접 요구하는 등 지행일치의 실천에 앞장섰던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③ 신라의 통불교적 발전 ― 원효(元曉)
통일신라 초기 불교계에서 독특한 활약을 한 사람아 원효이다.
그는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 불교학은 원효에 의해 통합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통불교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원효의 불교학은 그의 주체적 연구를 통해 신라 불교학의 기틀을 만들었고,
그의 저술은 중국과 일본으로 들어가 중국⋅일본 불교계의 존숭을 받았고,
그의 실천적 불교 대중화 운동은 일본의 불교 민중화 운동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또한 원효는 정토신앙(淨土信仰)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틀에 매이지 않는 생활로 대중 속에 들어감으로써
역사와 민족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고승이었다.
원효의 정토신앙은 인간평등을 전제로 하고 귀족불교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 당시, 현실적으로 고통 받는 민중에게는 엄격한 계율이나 어려운 이론보다는
정토를 지향하는 염원을 가지고 삶을 이어나갈 의지가
더욱 절실했다. 이러한 원효의 노력으로 신라 불교는 점차로 귀족불교에서 민중불교로 발전하게 됐다.
다만 정토종이 좀 더 주체적이고, 조직적인 민중불교로 발전하지 못하고
염불과 기복신앙으로 세속화 돼갔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2. 통일 신라의 불교
통일신라 시기의 불교는 불국사를 비롯한 대규모 사찰 건립 등 불사 위주의 사업 전개로
호사한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 보이고, 왕실 귀족의 안녕과 복을 기원해 주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사찰은 많은 전답과 노비를 시주 받았다.
그런데 그러 함이 너무 심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와 같이 불교계가 지배계급과 밀착해 부패 현상을 보이는가 하면
지배계급은 그들대로 골품제의 모순으로 인해 권력투쟁의 내부 다툼이 일어나고,
그런 기강 해이의 틈을 타서 지방호족세력이 대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말기 현상의 와중에 불교계에서 자각 현상으로 새로운 불교 종파가 등장했으니,
바로 불립문자 견성성불(不立文字 見性成佛)을 지향하는 선종(禪宗)이었다.
9세기 신라 말에 골품제가 모순을 드러내 중앙집권의 지배체제가
점차 흔들리는가 하면, 지방호족세력이 사회모순을 극복할 주체로 떠오르면서
선종은 그 지방호족세력의 이념적 기반이 됐다. 당시 제도권 불교인 교종이 난해하고,
관념적이며, 지배층의 기복에 매달리는데 비해 선종은 직설적이고 간명한 방법과
평등주의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지방호족세력의 호응을 받았다.
한편 이러한 내부모순과 사회혼란에 저항하는 민중봉기 또한 심해지면서
미륵신앙과 도참사상이 민중들에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미륵신앙은 지배층인 지방호족세력과 피지배층이 동시에 선호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미래 대체세력으로 자부하는 지방호족세력은 그들 나름으로 미륵신앙을 선호했으며,
민중은 민중대로 구원을 희구하는 신앙으로 미륵에 의지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미륵신앙은 일종의 민중구제를 위한 집단신앙의 성격이었다.
개인적인 구원을 위한 신앙이라기보다 사회적인 구원이라는 신앙 형태를 이루었다.
특히 진표(眞表)의 미륵신앙이 대표적이었는데,
그는 소외된 지방(지금의 전주, 김제 지방)에서 미륵신앙운동을 일으켰다.
― 남종선(南宗禪)의 도입 ―
신라에 남종선(南宗禪)이 전래된 것은 신라 말 도의(道義)에 의해서였다.
도의는 일찍이 출가해 784년(선덕왕 5) 당나라로 가서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 선사에게 법을 물어 의혹을 풀고 지장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백장(百丈懷海, 720~814) 선사를 찾아가 법요(法要)를 강의 받았는데,
그 때 백장이 “강서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승(東國僧)에게 속하게 됐구나.” 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3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무르다 821년(헌덕왕 13) 귀국해
참선(參禪)을 중심으로 한 선법(禪法)을 펴고자 했으나,
당시 신라 사람들이 교학(敎學)만을 숭상하고 무위법(無爲法)을 믿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 시절인연이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제자 염거(廉居, ?~844)에게 남종선을 전하고 죽었다.
마치 달마(達磨) 대사가 중국에 와서 선법을 펼치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환경과 비슷했다.
그의 선법은 제자 염거(廉居)와 손상좌 체징(體澄)에 의해 널리 전파됐다.
그리하여 그 후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번창하고,
오늘날까지 조계종이라는 이름으로 그 맥이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따라서 조계종에서는 도의 선사를 종조로 모시고 있다.
― 밀교(密敎)의 도입 ―
우리나라 밀교는 인도, 중국에서 후기밀교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신라에 들어왔다. 안함(安含)으로도 알려진 안홍(安弘, 579∼640년 추정)은
601년(진평왕 23)에 수나라에 유학해서 5년 만에 호승(胡僧)과 함께 돌아왔다.
안홍의 저서에는 참서(讖書)라고 하는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 한 권이 있다.
<해동고승전>에 이 책의 일부가 실려 있지만,
원문과 후대의 해석문이 섞여 있어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신라 불국토(佛國土)설은 자장(慈藏)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하지만,
자장의 이 사상은 안홍의 그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이다.
신라인은 자신들의 나라가 불국토이기 때문에 외적방어의 차원을 넘어 성역(聖域)의 보전,
더 나아가 신라를 중심으로 욕계(欲界)의 인간세상을 이룩하고자 한 것이다.
신라의 불국토설은 미래상의 제시로서 이것은 전적으로 안홍의 공적이라 하겠다.
신라에 밀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선덕여왕 4년(635)에 명랑(明朗) 법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부터이다. 명랑은 자장(慈藏)의 생질로서(명랑의 어머니가 자장의 누이임)
선덕여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 주술적인 신앙 잡밀(雜密)을 들여왔다.
같은 시대의 밀교 승려 밀본(密本)도 비밀법을 통해 선덕여왕의 질병을 치유해 밀교 전파에 공헌했다.
특히 명랑의 신인비법과 혜통의 진언지송(眞言持誦)은 고려시대 밀교종파인
신인종(神印宗)과 총지종(摠持宗)이 성립할 수 있었던 기초가 됐다.
그리고 이 시기에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저자인 혜초(慧超, 704~787)가
당나라 금강지(金剛智) 문하에 들어가 밀교를 공부하기도 했다.
결국 신라 후대의 불교신앙은 미신과 결부된 주술적 밀교신앙이 지배했다.
3. 고려 시대의 불교
송악의 호족세력이었던 왕건(王建)이 918년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고려 정권을 세우고,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고려시대가 시작됐다.
건국 과정에 왕건은 동요하는 민심을 무마하고 지방호족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일련의 회유정책으로서 불교를 숭봉하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즉위 원년(918)에, 신라 봉건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연례행사로 치렀던
왕실 주체의 호족불교 행사인 팔관회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태조가 자손들에게 남긴 유훈인 ‘훈요십조’에 나타나듯이,
훈요 십조의 제 1조에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님의 가호에
힘입은 것이므로 선ㆍ교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보내 분향 수도하게
할 지어다.”라고 했다.
그리고 불교 숭상을 표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아 승려의 청탁을 따르게 되면
각 종파가 서로 사찰을 뺏는 다툼을 벌일 것이니, 이를 엄금 할 지어다.”라고 해서
불교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불교는 지배층의 안녕과 복을 빌어 주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교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불교는 왕권의 비호 아래 날이 갈수록 점점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정권과 결탁한 불교는 부패해져서 광종 때 가장 혹심했다.
광종은 왕실의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으로 지방호족세력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선종을 버리고,
화엄종을 선택해 왕권강화를 도모했다. 그는 왕권강화를 위한 시책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특히 승과를 개설, 시행했다.
한편 광종은 승과의 선발 기준으로 균여(均如)의 화엄학을 채택할 정도로 균여를 존숭했다.
그리고 균여 또한 통합된 지배이념으로서 불교를 하여금 광종의 왕권강화정책에 이바지 하게 했다.
이렇게 전제 왕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는 다르게 불교의 대중화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그가 지은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에 잘 나타나듯이 화엄사상을 노래로 지어 민중 속에 퍼뜨렸다.
이는 원효 대사가 그의 화엄사상을 노래로 지어 민중 속에 퍼뜨린 것과 같이
균여에 의해 불교 대중화운동이 일어난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귀족불교를 위한 것이었다는 한계는 벗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성종 때의 유학자 최승로(崔承老)는 ‘시무책(時務策)’을 통해
왕권의 불교 비호정책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당시 권력의 후광을 믿고 횡포를 부리던
귀족불교 승려들을 규탄했으며, 현실주의적인 유교를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제시했다.
성종은 그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여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폈으나,
그것도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다.
현종에 이르러 폐지됐던 연등회와 팔관회가 다시 부활되고 황룡사9층탑을 수리했으며,
거란 침략에 맞서 고려대장경(초조대장경)을 조판함으로써 국민단결과 호국불교를 지향했다.
고려 화엄종은 신라 의상(義湘)의 화엄종을 계승해
고려 역대 왕권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귀족불교로 발전했다.
그리고 법상종(法相宗)은 유가종(瑜伽宗)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대현(大賢) 등의 유가종을 계승한 것으로 이 역시 왕권과 밀착해 발전했다.
화엄종과 법상종이 왕권과 결탁해 위세를 떨치던 이 시기에
선종은 9산선문(九山禪門)으로 분열돼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11세기 중반까지 중앙집권화가 완성됨으로써 서서히 9산 선종도 왕권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교종과 선종이 서로 대립 분열하고 있는 상황에서
왕권은 각 종파 불교의 융화와 통일된 지배이념을 요구하게 됐다.
11세기에 접어들어 문종의 왕자로서 승려가 된 의천(義天)은
그러한 왕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이것은 왕자를 출가시켜 승려 지도자로 앉힘으로써 불교세력을 통합하고
왕권의 통제 아래 둘 수 있게 됐다.
의천은 1085년 중국(송)에 건너가 새로운 통합의 지도이념으로
천태학을 배우고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했다.
그리고 화엄종과 법상종과의 융화와 교종과 선종의 융화를 꾀해
통일적 지배이념을 요구하는 왕권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원효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민중불교보다는 철저한 왕실불교 지도자에 불과했다.
이러한 왜곡된 반민중적 불교 전통은 조선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고려 불교는 왕실 위주의 불교였고, 왕실과 더불어 성장하고 타락했다.
특히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승려들과 함께 방탕하게 놀음과 잔치로
세월을 보내고, 사찰을 곳곳에 세워 향락 장소로 이용하곤 했다.
이러한 왕실의 부패와 함께 민생고가 날로 가중돼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할 때 승려들은 약해진 왕권을 위해 무신정권에 항변해 싸우기도 했다.
그러는 가운데 무신정권의 옹호를 받으며 선종은 성장해 나갔고,
선종은 선ㆍ교 양종을 포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은 지눌(知訥, 1158~1210)과
그 계승자들에 의해 시도됐다.
지눌은 귀족불교에 대한 비판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했다.
이 결사는 선종 뿐만 아니라 교종, 유교, 도교에까지 문호를 개방했고,
세속적 명리를 추구해온 불교의 자기비판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당시의 농민들이 지배층의 착취에 못 이겨 곳곳에서 봉기하고
지방 하층의 승려까지 이에 참여하는 상황에서,
오직 내적 수행의 길에만 정진하고자 하는 결사여서 현실 도피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지눌은 권력으로부터 해방돼 청정한 수행에만 진력했고,
무신정권에 자력이든 타력이든 이용되긴 했지만,
선교융합의 창조적 노선을 추구함으로써 고려 불교를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리고 지눌과 혜심(慧諶, 1178~1234)에 의해 간화선(看話禪)이 발전했고,
그 외에 지눌에 의한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혜심의 <선문염송(禪門拈頌)> 등은
불교 강원의 교과목으로써 우리나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한편, 우리 불교의 주류가 선과 교를 병행하면서,
`마음‘을 찾는 내적 수양에 치중하는 전통이 이때부터 싹 텄다고 하겠다.
그리고 천태종의 요세(了世, 1163~1245)는 지눌과 같은 시기에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결성해 불교계 내부의 분열대립과 타락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
중앙권력에 결탁하지 않고 오직 지방민중의 기반 위에서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하지만 요세(了世)도 말년에 중앙권력층의 회유책에 휘말려 끝내 부패하고 말았다.
다만 백련결사는 지눌의 정혜결사와 함께
고려 불교의 중요한 신앙결사로서 불교 발전에 공헌을 했다고 할 것이다.
고려 후기엔 몽고 침략에 대한 민중불교 내지 승려들의 항쟁이 있었고,
특히 승려 김윤후(金允侯)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그는 명리와 계율을 뛰어넘어 민중을 구제하는 민중불교의 입장에서, 몽고 침략군에 맞섰다.
그에 비해 이 시기의 왕실불교는 팔만대장경 조판을 통한 호국불교를 지향했다.
고려 말 공민왕 대에까지도 불교숭상정책은 계속돼, 보우(普愚, 1301~1382)를 왕사로 추대했다.
이 보우가 현재 선종(조계종)의 종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승직임명권을 차지함으로써 고려 불교 전체를 장악, 통제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서 구산선(九山禪)을 통합하고 임제선(臨濟禪)을 계승했다.
그리고 보우도 당시의 정치와 불교개혁을 절감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고려의 미륵신앙은 건국 초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차원에서
왕실의 지원으로 미륵불이 많이 만들어졌던 옛 후백제 땅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리하여 고려 말의 어수선한 정세와 함께 말세의식과 관련돼
호남지방에서는 미륵불이 땅 속에서 솟아나오기를 기원하는 하체매몰불(下體埋沒佛)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것은 대부분 민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실적인 요구에 따른 신앙대상이 됐다.
득남(得男)을 기원하거나 전연병, 자연재해, 전쟁 따위의 재난 등에 대한
구제기원으로 밀교신앙 형태로 전개됐다.
4. 조선왕조 시대의 불교
불교는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다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상황이 돌변했다.
건국 초기부터 유교국가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계획적인 불교 정비 사업이 진행됐다.
그런데 그것이 유교체제를 진흥하려는 면도 있었지만 인적자원과 국가재정을 확보하려는
현실적인 요구에서 일어난 측면도 있었다.
즉, 불교계의 경제력을 몰수하려는 데에도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주의자들의 열의에 찬 숭유정책(崇儒政策)에도 불구하고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는 좀처럼 청산되지 않아 때로는 유교주의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만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불교의 폐해가 지적되고 의론이 있을 적에는
민심에 큰 충격을 주지 않을 한도 내에서 억불정책을 채용했으나
그의 개인생활이나 종교적 신앙 면에선 오직 불교도로서의 자세로 일관했다.
이성계는 즉위 초에 무학(無學)을 왕사(王師)로 모시는 등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리고 군역의 면제자인 승려의 수를 억제하는 한편 승려의 질적인 향상도
아울러 꾀하기 위해 태조 때부터 승려도첩제를 강화해 실시했다.
이렇듯 태조는 현실적 요구에 의해 불교의 부패청산에 손을 대었지만
일부 유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심한 배불정책은 실시하지 않았다.
특히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처음으로 실시된 수륙회(水陸會)만 보더라도 그의 유연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태종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태종은 태조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결국 숭유억불(崇儒抑佛)의 방침을 시종 견지해 정책상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
그리하여 1405년(태종 5) 한양 천도 후 대대적인 불교 개혁에 착수했다.
국가가 지정한 사원 이외의 사원전(寺院田)과 노비를 환수해 국가에 귀속시킨 것이다.
사찰도 11종 242사만 공인하고 사원전 3~4만 결과 노비 8만 여명이 몰수됐다.
이는 전체 사원전과 노비 규모의 약 8할을 국고로 귀속시킨 것이었다.
2년 후에는 7개로 종파를 축소했으며, 왕릉 옆에 사찰을 두는 능사(陵寺) 제도도 혁파했다.
또한 1415년(태종 15)에는 고려 이래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던 연등회(燃燈會)도 폐지했다.
그리고 세종 때는 억불보다 더한 훼불(毁佛)정책이 강행됐다.
태종 때의 불교 종단이 11개에서 7개로 통폐합됐던 것이
세종 때 다시 선`교 양종(禪敎兩宗) 으로 통합됐다.
또한 전국의 사찰 수도 제한해서 태종 때의 242 법정 사찰에서 36사로 축소돼 선ㆍ교 양종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세종은 한성부 내에 승려가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천태종 승려 행평(行平)에게 사사해, 그 제자가 돼, 승려들이 하는 모금운동에 참여해
탑 등의 사찰건립이나 중수에 사용할 기부금을 모았다.
세종이 이를 묵과해 준 까닭은 왕실에서 대비(大妃)를 비롯한 궁중 여성들이
불교신앙에 많이 젖어 있어서 근절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적인 불교 억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은 집안의 안위를 위해 재를 올리고,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제사 때에는 승려를 초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민중들 사이에는 초파일 연등행사는 그대로 매년 행했다.
이러한 상황에 감화를 받은 세종은 점차 숭불의 왕으로 변신해 갔다.
그리하여 말년에는 세종도 불교를 신봉하게 돼 석가불의 일대기를 엮도록 명했고,
훈민정음을 창제해서 불교 서사시 <월인천강지곡>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의 대표적 호불(護佛) 군주라 할 수 있는 세조는
유신(儒臣)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독실한 신자로 자처하며 불교를 중흥시켰다.
세조가 호법사업을 편 이유는 다음의 3가지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다.
첫째,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친족과 정적을 많이 살해한 데서 오는 죄책감,
둘째, 그의 집권과정상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셋째, 정변에 따른 민심의 동요를 불교의 보호와 장려로서 수습하고자.
그리하여 불교 신자였던 세조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법화경>, <선종영가집>, <금강경>, <반야심경> 등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배포한 것이다.
그리고 왕자로 있을 당시 아버지 세종의 명에 따라 수양대군(세조)은
김수온(金守溫)과 승려들의 후원으로 귀중한 불교서적들을 많이 간행했으며,
대규모 왕실 원찰인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고,
왕위에 즉위해서는 세종 때 금지했던 승려의 도성출입을 재허용하는 등 많은 호법사업을 했다.
성종은 세조 당시 불교를 신봉하던 훈구파(勳舊派)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유교정치를 지향하고
사림파(士林派)를 대거 등용했다. 그리하여 성종의 즉위로 억불정책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당시, 도첩을 가지지 않은 승려들이 증가한 것은,
군역제도의 문란으로 국역을 기피하려고 승(僧)이 된 양민이 많았다.
따라서 민정(民丁)의 확보라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유신(儒臣)들은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색출해 도첩제를 엄격히 시행하고,
급기야 성종 23년에 도첩제 자체를 폐지시켜 출가를 완전히 금했다.
또한 성종은 간경도감을 폐지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킴으로써 승려가 없이 텅 빈 사찰이 늘어났다.
이러한 강력한 불교 억압정책으로 인해 사대부 양반들의 개인적 불교 신앙마저도
극도로 위축돼 그나마 유지되던 불교식 장례나 제사법도 점차 사라져 갔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도 억불정책을 폈다.
그는 사찰에 있던 승려들을 쫓아내어 관노로 삼았고, 토지도 몰수 했으며,
승과(僧科)도 폐지하고, 선ㆍ교 양종의 본사도 폐지했다.
이로 인해 승려들은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됐다.
성종의 불교 배척정책을 철저히 계승했던 것이다.
중종(中宗)에 이르러 억불정책은 최고조에 달했다.
중종은 지난날 사화(士禍)로 인해 거세됐던 사림파 유학자들을 적극 등용해
그들에 의한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시하는 반면 불교는 더욱 억압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찰과 승려는 계속 늘어났는데,
이는 봉건 지배계급의 가혹한 수탈로 파산한 민중이나 도적들,
부역 기피자들이 절(寺)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는 한 마디로 불교 억압정책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과 착취당한 민중들이
이해관계를 같이 해 결합하기 시작한 것이었으며, 불교계의 적극적인 반항을 의미했다.
이에 대해 지배층에서는 향약(鄕約) 제도를 실시해 유교적 미풍양속을 널리 퍼뜨리는 한편,
미신을 타파해나갔으며, 이로 인해 민중의 오랜 신앙이었던 불교마저 타파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종(仁宗)은 재위 8개월에 승하하자 명종(明宗)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고,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대비로서 수렴청정하게 됐다.
헌데 불교를 깊이 신봉했던 문정왕후는 중종의 배불정책을 바꾸어서
명종 6년(1551년) 중흥불사의 대임을 승 보우(普雨)에게 맡겼고,
보우의 진언에 따라 양종과 승과를 다시 시행하고, 도첩제도 부활시켜,
봉은사를 선종,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로 삼았다.
그리고 승과를 통해 휴정(休靜, 서산대사), 유정(惟政, 사명대사) 등
후대의 뛰어난 불교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명종 때 활약한 보우(普雨)는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과 아울러 선교일치론(禪敎一致論)을 주장했다.
유교와 불교는 국가 사회에 나타난 면에서는 각기 다르지만
그 이치의 근본을 따지자면 서로 일치해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 같이 인간의 본심과 본성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불교의 중흥기를 맞았다.
그러다가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친히 정사에 임했고,
보우를 탄핵하는 여론을 받아들여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그 후 보우는 목숨을 잃었고,
그 다음 해에 양종의 승과제도도 폐지됐으며, 배불정책은 날로 심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간총림에 축소된 불교는
그 속에서 수도와 전법에 힘쓰면서 자활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러던 중 선조 때 임진왜란을 계기로 승군 의병들이 왜적과의 싸움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자,
선조는 조직적 역량이 있는 승려들을 전투에 이용하고자 했다.
이때 서산대사 휴정(休靜)과 사명당 유정(惟政)이 승병의 지도자로 나섰다.
휴정은 어린 나이에 출가해 33세에 승과에 급제했고,
임진왜란 때 나라의 부름에 부응해 73세의 노승이면서 승군 오천여명을 이끌고
유정과 함께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실천으로 보여준 현실참여의식과 민중구제사상은
<청허집>과 <선가귀감> 등의 저술로 나타났고,
억불로 쇠퇴의 극에 달하던 불교를 중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명당 유정(四溟堂 惟政)은 휴정과 마찬가지로 명종 때의 승과 출신으로,
휴정을 도와 왜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전란 후에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돼 포로송환에 공헌했고,
민생문제와 국력회복에도 기여를 했으며, 사명집(四溟集) 등의 저술을 남겼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휴정과 유정 등의 노력으로 다소 중흥된 교단은
임제선(臨濟禪)을 계승한 조계종계 선종이었다.
그렇다고 선수(禪修)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교학연구에도 힘써 부분적으로 인재의 복원도 이루어졌다.
조선 말기에 와서는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으로 피폐한데,
외세까지 출몰해 어수선한 정세에 맞물려 관행적인 배불정책을 행할 뿐,
극단적인 탄압은 줄어들었다.
이러한 배경이 귀족불교가 쇠퇴하고, 민중불교가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특히 미륵신앙이 민중과 밀착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말법시대의 고통을 구제할 당대 불교로서 미륵 하생을 고대하는
미륵신앙이 민중을 중심으로 전개돼나갔다. 이러한 미륵 신앙은 조선의 임꺽정의 난,
이몽학의 난, 홍경래의 난, 기타 농민의 난 등 민중 세력이 지향하는 바의 이념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정국이 점차 외세 지배하에 들어가고,
민중 생활은 날로 핍박해지면서 조선불교도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5. 일재 치하의 불교
한국 근대불교는 시기적으로 갑오경장 이후 일제 36년, 그리고 8.15해방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그리하여 대체로 한국의 근대불교는 일체 치하의 불교와 겹쳐지는 양상을 띤다.
승려의 도성 입성 해제가 1895년 일본의 승려 사노 제레이(佐野前勵)의 상서(上書)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 건국 이래 500여 년간 줄곧 핍박받으며 한양도성 출입금지를 당했던
승려들에게 일단 통행의 자유는 확보된 것이다.
하지만 일본 승려 사노의 손에 의해 해제됐다는 치욕이 있었다.
한편 승려의 도성출입해제 이후 일본 승려와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이때부터 서서히 친일 불교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일본 승려들과 제휴함으로써 자신의 신분도 높이고 사찰도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일본 불교종파에 자신들의 사찰을 예속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정부에서는 늦게나마 억불정책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체계를 계획해,
1899년 서울 창신동에 일종의 국립사찰이라 할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조선 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로 삼았다. 이리하여 조선 초 불교 종파가
선ㆍ교 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된 이후 종단의 이름조차 없는
무종무파(無宗無派)의 상태로 전락됐던 데에서 벗어나 새로이 조선 불교를 정립하기 위해
전국승려대표가 원흥사(元興寺)에 모여 원종(圓宗)이라는 종단 명칭을 정했다.
그리고 1907년 이회광(李晦光)을 회장으로 한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가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세력으로부터 탈피, 거국적인 교단을 형성하고자 하는 여망에 따라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세우게 됐다
원종이라는 명칭은 전국 승려들이 모여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정신으로 종단을 세웠다는 뜻에서 취했다는 설과,
영명 연수(永明 延壽)의 <종경록(宗鏡錄)>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또한 당시의 불교가 수선(修禪)과 간경(看經), 그리고 염불뿐만 아니라
밀교까지 두루 원수(圓修)한다 해서 원종이라는 종단명을 지었다고도 한다.
원종 초대 대종정(大宗正)에 이회광(李晦光)이 추대됐고,
1910년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 각황사(覺皇寺)를 세우고 조선불교중앙회무소 겸 중앙포교소로 삼았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이회광이 친일파로 돌아서
조선 불교를 일본 조동종(曹洞宗)에 병합시키려는 음모를 꾸밈으로써 원종은 분열됐다.
이어 1911년 일제의 사찰령 반포와 더불어 조선의 독자적인 종단을 세우려던
취지와 산중불교(山中佛敎)의 낙후성을 극복하겠다는 큰 뜻을 갖고 출범했던 원종은
일제에 의해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는 명칭으로 개칭됐고,
불교교단은 30본산(三十本山) 체제로 전환됐다.
일제 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사 주지들이 임명되고,
주지들의 화합 하에 각황사에 연합사무소가 설치됐다.
그러나 본사 주지 권한과 세력의 확대로 좀 더 강력한 중앙통치기구의 구성이 필요하게 됐다.
그리하여 정치와 종교 분리를 주장한 승려들이 각황사에 중앙교무원을 설치했다.
이로써 중앙통제기구로서의 모습은 갖출 수 있었다.
그러다가 선명한 종명(宗名), 종지(宗旨), 종헌(宗憲) 등의 제정의 필요성을 느껴
1938년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각황사를 현재 조계사 자리로 옮기는 공사를 착공해
준공한 뒤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해 절 이름을 태고사라고 했다.
이렇게 태고사(현 조계사)를 세워 우리나라 사찰의 총 본산으로 삼고,
좀 더 강력한 유기적인 중앙 통제적 역할을 하는 조계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는 해방과 더불어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재정비해 새로운 출발을 맞이하게 됐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불교 지도자는 대개 세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① 민족종교로서의 불교의 책임과 역할을 망각하고 일신의 영달과 안일을 위해
일제와 타협하는 매불적인 행위를 한 반민족적 세력.
② 소위 산중 불교의 맥락을 이어 은둔생활을 일삼은 무기력한 보수 세력‘
③ 민중과의 소통에 귀 기울이고 외세의 침입에 맞서 구국투쟁의 대열에 동참한 세력.
이렇게 3가지 형태로 구분 할 수 있다.
이때 나타난 조선 불교의 선구자가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었다.
한용운은 일제 침략기임에도 불구하고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펼치면서
그의 혁신 이념을 알리고 실천했다. 그가 식민지 조선의 역사적 현실을 발견하는 계기 역시
실천적 투쟁 속에서 이루어 졌는데, 그것이 바로 해인사 주지였던
친일파 승려 이회광 일당의 음모를 분쇄하는 운동이었다.
이회광은 불교 확장이라는 미명 하에 일본 조동종과 결탁해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종교 분야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이에 만해는 승려대회를 개최해 일본 불교와의 연합 획책을 규탄하고 친일 흉계를 백지화시켰다.
그리고 불교계는 3.1운동과 신간회 등의 항일 투쟁에 동참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자격으로 백용성(白龍城, 1864~1940), 한용운(韓龍雲) 등이 참여하고,
전국 사찰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리고 민족 연합전선인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자
조선불교청년회와 불교여자청년회의 회원들은 신간회와
그 자매단체의 근우회(槿友會)에 각각 참여했다.
또한 비합법적 비밀결사운동으로 만당(卍黨)을 결성하기도 했다.
6. 해방 정국과 불교정화운동
일제는 침략기간 중 이 땅의 불교에 비극의 씨앗을 뿌려놓았다.
그리하여 일제는 우리 불교를 왜색화로 만들기 위해 생활불교를 표방하면서,
승려의 대처를 권장하고, 육식 등을 묵인하면서 우리 불교를 타락케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일제강점기가 막을 내리고 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왜색불교를 청산하고 청정수행가풍을 회복하기 위한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됐다.
교단과 재야 불교단체들이 불교를 바로 잡으려는 다양한 노력을 시도하게 되면서
불교혁신총연맹이 조직되고 부산 범어사(梵魚寺)가 설립한 선학원(禪學院) 등이 이에 참여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획책으로 대부분의 승려가 대처승이 돼 있었고, ― 7000여명으로 추산되는데,
이에 반해 비구의 숫자는 전국을 통틀어 불과 200여명을 넘지 못했으므로
비구승의 힘만으로는 대처승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49년 농지개혁으로 인해
사찰 소속의 농지를 몰수당함에 사찰경제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선방의 폐쇄, 수좌의 생존문제 등이 노정돼 불교계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당시 불교 내의 반민족적, 비불교적인 일제시대의 모순들을 척결하고
불교의 순수성을 되찾고자 한 정화운동은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자 한국불교의 당면과제였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와 의지를 지녔던 정화운동은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일어나서 정화운동도 종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종전 후인 1954년 비구승 측에 유리한 정부 정책이 발표됐다.
즉, 이른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요지의 ‘유시’가 내려진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비구승 중심의 불교정화운동은 힘을 얻게 됐다.
그리하여 1955년 대통령의 유시 내용에 의거
전국의 사찰에서 대처승을 몰아내기 위한 전국승려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비구 측은 기존 대처승 중심의 집행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종헌을 통과시켰다.
이 회의를 주도한 이들은 효봉(曉峰), 백용성(白龍城), 동산(東山), 청담(靑潭) 스님 등이었다.
이러한 불교정화운동의 주도 핵심 세력은 부산 범어사(梵魚寺)를 중심으로 한
선학원(禪學院)과 백용성, 혜월(慧月), 남천(南泉) 스님으로 이어지는
범어사의 민족 불교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이승만 유시가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범어사에서는 자생적인 불교 정화 움직임이 있었다.
결국 전국승려대회를 계기로 종권과 사찰 주도권이 비구승 측으로 넘어왔고 정부도 이를 공인했다.
그리하여 ‘한국선불교 교헌’을 제정하고 비구 독자적인 종단 집행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대처승 측은 이에 불만을 품고 정면으로 반발을 했다.
그리하여 정화운동은 비구-대처간의 분쟁으로 격화돼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불과 200여명의 비구승으로서는 당시 전국 1200여개소의 사찰을 다 관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대처승 중심의 기성교단과의 타협이 불가피했다.
그리하여 1962년 이른바 통합종단이 성립됐다.
비구와 대처 양측이 불교재건위원회 설립에 합의,
불교재건비상종회의 구성을 통한 종헌의 제정, 공포가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분규가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6개월 후에 대처승 측에서 이탈을 선언해 통합 종단은 무산됐다.
그리하여 불교 정화는 명분 있는 ‘정화’가 되지 못하고 분규 차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처승들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사찰을 비구 도량으로 선뜻 내 놓는 이가 없었다.
따라서 양측은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계속 벌여나갔다.
전국 사찰 쟁탈전은 가속화 돼 아침마다 주지가 바뀌는 사태가 속출하고,
이 과정에 양측은 인력확보를 위해 불량배를 불러들이는 과오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것이 원인이 돼 승려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0년의 불국사 난투극은 이 갈등의 절정이었다.
이런 사태는 곧장 법정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61년 대법원이 비구승단을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드디어 비구 측의 승소로 결론지어졌다.
이에 양자는 결별을 선언하고 비구승들은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을 탄생시켰고,
정부의 비호를 받은 비구 측에 밀려 대부분의 사찰에서 대처승이 물러가고
전국의 중요 사찰은 비구승 측으로 넘어왔다.
한편 대처승단은 1962년 태고종으로 발족했고,
이로써 양측의 갈등과 대립이 공식적으로 마감됐고, 이후 사법부의 쟁사(爭事)도 거의 사라졌다.
불교정화운동은 단순히 왜색 불교 추방과 대처승의 추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숱한 모순과 문제점을 갖고 진행돼,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실추시켰고, 태고종의 등장,
기타 여러 종단의 난립, 불량세력의 침투, 불교계의 폭력성 등이 노출됐다.
특히 분규과정에서 인력확충을 위해 무자격자를 받아들인 것이
승려자질문제로 확대돼 두고두고 화근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조계종 안에는 무자격 승려들이 대거 들어오게 됐고,
이들은 수행에는 관심이 없이 재산권의 이득만을 노려 조계종 종단 안에 폭력이 활개를 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돼서 대처승 문제를 해결하자 이후 비구 종단 내의 종권다툼으로 다시 분규가 일어났다.
그리고 5.16 군사혁명 직후 불교계 사정을 잘 모르는 군인들은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서 불교계의 여러 종파들을 마구잡이로 등록시켜줌으로써
26개의 종파가 난립하게 됐다. 이렇게 되니 종단 내의 분규는 더욱 거칠어졌다.
그리고 또 하나 조계종 종단 내의 분규는 종단을 대표하는 종정과
종단의 행정을 책임지는 총무원장과의 대립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명목상 종권을 대표하는 종정과 실질적으로 종단을 대표하는 총무원장간의 반목은
종단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각 사찰별 문중, 법맥의 대립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종단 분규가 70년대 말까지 계속되다가
1980년 대 들어 성철 스님이 종정에 취임하면서 종단 분규도 일단락됐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