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핵심은 있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요,
있다는 것은 미세하든 거대하든 독립적인 질량의 유무로 결정합니다.
다행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있다 또는 없다는 기준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해서 파르메네디스의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없음]은 없다"는 명제가 철학과 과학의 바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시공 속에 변화가 있어.. 전에 있던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생기지만..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장 생기는 문제는 생각[식, 심]이란 것입니다.
생각은 질과 양이 없어요. 그렇다면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없는 것인가?.
그리스 철학자 아르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의하길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라고 했듯이..
오히려 생각을 인간의 핵심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 고 했듯이 존재와 생각은 동등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곧 생각은 질량이 없지만 없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국민학교 일 학년 국어 교과서에 영희, 철수, 바둑이 나오는 문장과 그림이 나온 게 기억납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가면 생물 시간이 있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는 다섯 가지 감각 기관에 대해 배우지요.
감각 기관은 질량이 있는 존재를 감각하는 능력입니다.
시각 장애자가 아니라면 감각기관 가운데 눈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서 특별히 눈의 작용에 대해 집중적으로 가르칩니다.
물론 청각, 냄새, 맛과 접촉도 배우고요.
우리가 새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생기는 판단은
바로 다섯 감각기관이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생깁니다.
하여 과학이나 미학, 철학 모든 것들의 시작 역시 감각 작용을 바탕으로 생기고..
그것은 결국 오늘의 과학 세계를 만들었고
미래 세계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렇듯 접촉하면 생기는 것을 어떻게 적응하며 활용하는지에 의해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인간 대부분이 머물고 있는 세계가 그것입니다.
한편 그와같은 감각 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관심을 돌리는 작업이 있습니다.
생물 시간에는 보는 자인 눈과 보이는 대상이 만나 보이는 것을 인식한다고 가르칩니다.
저 문장대로라면.. 모든 눈[안]은 같은 대상[색]을 만나면 똑같은 안식이 생겨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지요?.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인내의 한계" (전 대통령 부인인) 김정숙 고소에, (현 국회위원인) 배현진 "애닳긴 하나보다"
두 사람의 말을 보듯이 전혀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왜 같지 않습니까?.
안과 색이 만나 생기는 것을 판단하는 식[마음]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은 안과 색이 만나서 생기는 게 아니라, 기억이라는 경험인 식과 결합해서 생깁니다.
즉 새로운 안식은 안과 색 그리고 과거의 경험인 안식이 결합해 생기지요[3사화합].
그러니 같은 것으로 보면서 다른 안식이 생기는 것은 3사의 하나인 과거의 기억, 안식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새로운 안식은 안과 색과 (과거의) 안식이 결합해 생긴다[3사화합]고 기억하십시오.
언젠가 지인이 <반야심경>을 한마디로 하면 무엇이라고 하겠느냐고 묻더군요.
<심경>을 보면 거기에 나오는 문장이나 단어가 바로 <심경>을 의미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걸 한마디로 하라는 질문은 우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장이나 단어가 바로 반야심경을 의미하니..
무엇이라 답하든 현답이 아닙니까?^^.
저는 현답으로 12처라 하겠습니다.
12처는 앞에서 설명한 열 가지 감각작용은 (안과 색), (이와 성), (비와 향), (설과 미), (신과 촉) 외에
마음작용인 의와 법의 결합이 들어가 있습니다. 해서 12이라고 하는 겁니다.
의와 법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있어야만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 또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합리적이 됩니다.
그런데 의와 법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왜냐면 그것은 질량이 있는 게 아니어서 감각적인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하기 쉽습니다.
만일 <심경>의 핵심으로 12처를 말한다면.. 그 12처는 시중에서 설명하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12처가 심경의 핵심이 되려면
우리가 알고 있는 12처 설명보다 더 깊이 들어가 3사화합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만일 12처를 질량이 있는 감각기관으로 이해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누군가 <빈야심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을 포함해 관세음보살은 존재하지 않는.. 없는 존재라고 합니다.
즉 존재하지도 않는 보살을 왜 신처럼 여기며 의지하고 복을 빌고 있느냐는 거지요.
만일 질량이 있는 존재로서 관세음보사님을 알고 있다면.. 그의 주장이 맞지요. 그런 보살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몸과 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존재입니다.
만일 관세음보살님이 몸이 아닌 생각 속에 있는 분이라면 있는 겁니까 아니면 없는 겁니까?.
생각 속에 있는 분을 존재하는 몸처럼 증명을 하라고 하면 억지지요..
처음부터 몸이 존재하는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분이 아니었기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 먼저 보고, 듣고, 만지고, 맛, 냄새인 다섯가지 감각작용을 통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그렇게 안 세상은 생각이란 기억이 결합하면서 더욱 넓어집니다.
그것을 3사화합 작용이라 하여 안과 색과 안식이 결합해 새로운 안식이 점점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은 3사화합 작용 가운데 의와 법과 의식이 결합해 생긴 식입니다.
식이기에 질과 양인 존재 증명할 할 수 없는 영역이 됩니다.
여기서 질과 양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현재는 계시지 않지만 과거에 계셨던 분도 질량이 있었던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질량이 있는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하느냐고 물을 수 있지요.
우리는 마음인 식이 있느냐 없느냐 할 때 질량[존재]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면 침묵으로 답을 합니다.
<심경>에는 우리가 존재라고 하는 일체는 뒤바낀 '꿈속 모습[전도몽상]'이라 하고 있지요.
그것을 이해하고 있으면 역시
꿈 속 모습이 되는 관세음보살님을 어떻게 있다고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3사화합에 의해 외부에 존재한다는 세계가 분명히 있고,
그것을 몽상으로 보는 의식 세계가 있음을 보고 있다면..
관세음보살은 없다고 말하는 게 어떤 대상을 보며 주장하는 것인지 알 수 있고,
그것은 안과 색만이 아닌 안과 색과 안식의 3사화합인 세계를 설명하는 불법을 벗어난 주장임도 알 수 있을 겁니다.().
214. 이법경(二法經)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2. "두 가지 인연이 있어서 식(識)이 생긴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이니라.
.……(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3. 안(眼)과 색(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나니,
그것은 무상하고 유위(有為)이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心緣生].
4. 만일 색과 안과 식이 무상하고 함이 있으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心緣生]이라면,
이 세 가지 법이 화합하는 접촉[觸], 접촉 뒤의 느낌[受], 느낌 뒤의 의도[思], 의도 뒤의 생각[想], 이러한 모든 법도 다 무상하고 함이 있으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른바 접촉[觸]·생각[想]·의도[思]이다.
5. 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6.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12처의 3사화합을 바르게 이해하면?.
윤회가 없다는 주장도 함부로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