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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걸음걸이
윤 대 녕
내가 열한 살 때니까 1972년에 지어진 집이다. 집의 나이도 그새 만 스물다섯 살이 된 셈이다. 대지 50평에 건평이 30평 인 작은 슬레이트 집.
평면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가야나 발해의 집터 발굴 현장 도면처럼 그리고 싶었는데 누가 그렇게 봐주기나 할는지. 마루 공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각개 배치가 약간 허술하더라도 전체 균형을 이룩도록 그렸어야 했다. 그래야만 아침에 해가 떠서 저녁에 질 때까지 빛이 어디서 어떤 각도로 지나가는지를 어느 방 창문에서든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오염된 지구도 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색색깔로 아직 아름답듯 이 오래된 집도 경비행기나 기구(氣球)를 타고 보면 그렇듯 잘 차려놓은 밥상처럼 보일까? 혹시라도 그래 보이면 좋을 덴데. 거기엔 25년간 내 일가족의 과거와 현재가 고스란히 공존하고 있다. 가족이란 것도 하나의 소우주며 외로운 행성에 속한다는 걸 이즘 와서 깨달았다.
가계도를 보면 현재 부모(64세, 62세)가 있고 큰딸(38섹)과 막내딸(33세)이 있고 중간에 독자인 내(36세)가 있으니 모두 다섯 식구다. 아버지가 스물일곱 어머니가 스물다섯에 첫애를 낳은 셈이까. 집을 지어 이사할 때 누나는 어여쁜 사춘기의 중학생이었고 나는 늘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으며 여동생은 휜 운동화만 세 켤레인 좀처럼 말이 없는 아이였다. 그때 넌 2학년이었어,
해 바라기 방
처음엔 방이 세 개인 집이었다. 그러다 10년 전 누나가 결혼을 할 당시 마당 한쪽에 약 6, 7평 정도의 문간방을 새로 들여 네 개가 되었다. 아무리 예식장에서 식을 올린다고 해도 큰일을 치르다 보면 시골에서 올라온 집안 어른들이 묵고 내려갈 방이 하나쯤 필요하다는 게 아버지의 오랜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큰일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닥칠 터이었다. 세월이 갈수록 집안 대소사는 잦아지게 마련이니까.
그 막사 같은 큰방이 지어짐으로 해서 우리 가족은 아쉽게도 하나 잃어버린 게 있었다. 그 자리에 우리는 해마다 해바라기를 심었던 것이다. 그곳은 또한 철조망 없는 닭장이기도 했다. 봄에 해바라기 밭에다 병아리들을 풀어놓으면 가을에 저마다 장닭*이 되어 굵은 대궁들*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 후 집안에 큰일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시골에서 올라온 수염 흰 사람들이 거기서 해바라기를 깔고 앉아 술을 마시거나 화투를 치다 누워서 잠을 자고 갔다.
어느 여름날 어머니가 대문 앞을 지나던 사진사를 불러 누나와 여동생과 나를 일렬횡대로 세워놓고 해바라기 밭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던가? 안 그래도 빛에 그을려 시커먼데다 렌즈에 익숙지 않아 저마다 찡그린 얼굴들을 하고 있어 우리는 마치 유엔식량기구에서 각국에 배포하기 위해 찍은 자료 사진처럼 나왔다. 게다가 나는 맨발이었던 것이다. 그때가 몇 시쯤였던가? 해바라기 대궁의 그림자가 20도쯤 일제히 서쪽으로 쏠려 있는 걸로 봐서 아직 오전인 모양이고 그렇다면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이거나 국경일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사진을 스무 살이 되어 집을 떠날 때까지 다락 사진첩 속에다 소중히 보관했다. 비록 흑백이나마 거기엔 잃어버린 내 유년의 해바라기 밭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그때 외롭게 렌즈를 투과해 들어간 빛이 우리 셋을 필름에 음각해놓았으므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인화를 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며칠 후 집으로 찾아온 사진사는 우리에게 필름을 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단 한 장 인화된 그 사진도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다락에 올라가 찾아보니 사진첩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누나 혹은 여동생이 가져갔을 까? 일부러 버리지만 않았다면 누군가의 사진첩에 아직 꽂혀 있겠지.
가끔 집에 내려와 새로 들인 방에 누워 있게 되면 나는 영락없이 그 누런 사진 속에 맨발로 서 있는 꿈을 꾸곤 했다. 그 방은 아침 볕이 그중 먼저 찾아드는 열대 온실 같아서 해바라기 꿈을 꾸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때 내 발등을 모로 밟고 종종 지나가던 병아리의 간지러운 발자국 몇 점. 아, 그리고 네 붉은 입술!
집도 별 수 없이 나이를 먹는지 블록에다 슬레이트를 얹어놓은 허술한 건물은 세월이 갈수록 눈에 띄게 허물어져 갔다. 무엇이든 고장나거나 부서진 것은 못 봐 넘기는 성격의 아버지는 일요일만 되면 집수리를 하는 데 모든 시간을 바쳤다. 그리고 그동안 아마 다섯 번쯤? 페인트 통을 들고 올라가 지붕의 색을 바꿔 칠했다. 하늘색, 감색, 노란색, 주황색, 엷은 쑥색의 차례로. 하지만 대문만큼은 줄곧 탁한 빨강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을 빨간 대문 집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빨간 대문 집의 해바라기 방.
스물여섯 살 이후 그곳이 내게는 일 년에 그저 서너 번쯤 내려와 묵고 가는 허름한 호텔 방이었다. 나는 부모 형제와도 어쩔 수 없이 반쯤은 타인인 나이가 돼버려 안방은 물론이고 동쪽 건넌방이거나 서쪽 건넌방에 있으면 몹시도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기만 했다. 이제는 그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들이 터무니없이 잔뜩 생겨 있었던 것이다.
6월 7일 토요일 정오
안방엔 오늘 아침 병원에서 퇴원한 어머니가 누워 있고 동쪽 건넌방에는 작년에 늦결혼을 한 여동생이 첫애를 낳고 산후 조리를 하기위해 내려와 있다. 서쪽 건넌방에는 올2월에 이혼을 한 누나가 곁방살이를 하고 있다.
6월이건만 지금 안채의 방 세 개는 지글지글 꿇고 있는 참이다. 동쪽 방에서 산후 조리를 하고 있는 여동생 때문이다. 뒤꼍에 설치돼 있는 보일러 선이 안방과 양쪽 건넌방으로 연결돼 있어, 안방에 불을 넣으면 동쪽 방이나 서쪽 방에 한꺼번에 불이 들게 돼 있다. 각 방에 열을 차단할 잠금장치가 따로 설치돼 있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그리 지어놨으니 구들장을 다 들어내지 않는 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나는 어젯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와 병원에 들렀다가 자정께 집으로 왔다. 어머니에게 몸살기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보름 전쯤의 일이었다. 지난달에 외조모 상을 치르느라 무리한 탓이라 믿고 가까운 보건소에서 주사를 맞고 돌아왔지만 발열이 계속되자 평소 협심증과 위경련으로 고생하는 아버지가 자주 가던 회사 근처의 내과에 데리고 갔다. 검사 결과는 신장염이었으나 대학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 년 전 늑막염으로 대학 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는 어머니는 진저리를 치며 가지 않겠다고 생고집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염증 치료만 끝내고 어머니는 한의원에 들러 엉뚱한 보약을 지어가지고 기어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병원에 있는 게 왜 그렇게 힘들고 징그러운지 모르겠다며 어머니는 어젯밤 퀭한 눈으로 나를 붙잡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안 그래도 다음 주 화요일이 어머니의 생신이어서 내일 앞당겨 차리기로 한 아침상에 앉기 위해서라도 어차피 내려와야 할 사정이었다. 하지만 몸져누워 있는 이에게 무슨 생일상을 들이민단 말인가.
누나는 부역하는 죄수처럼 동생의 산후 조리와 어머니의 병 수발을 함께 들고 있다. 오래간만에 온 가족이 모여 방 네 개가 모두 찼지만 분위기는 아무래도 어수선하다. 동생은 하필이면 이런 때 어머니가 아프다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지만 시댁으로 갈 형편도 못 된다. 시어머니란 사람이 심한 당뇨에 합병증까지 있어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은 탓인지 아까부터 되레 된소리*나 내고 있다. 그럴 때마다 마루엔 괴괴한* 적막이 빈 항아리처럼 도사리고 앉았다 사라지곤 한다. 어머니를 퇴원시키고 회사에 나간 아버지는 오후 3시쯤에나 돌아올 터이다.
나는 지금 해바라기 방의 창문을 통해 거의 수직으로 화단에 내리붓고 있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다. 화단엔 철 늦은 민들레 서너 송이와 석류·대추 나무와 패랭이와 용담과 작약과 달리아와 맥문동과 양귀비 같은 것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자라고 있다. 화단 한가운데엔 장독에 올라 다닐 수 있도록 디딤돌이 몇 개 박혀 있다. 여름날에 선혈처럼 낭자하게 피어나는 양귀비는 어머니가 남몰래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식물이다. 그래서 해마다 여름만 되면 어머니는 대문 빗장을 굳게 닫아걸고 산다.
이윽고 정오가 되자 화단엔 검불*만 한 그림자만 몇 올 남고 크레파스를 마구 분질러놓은 것처럼 빛들이 화사하게 튀며 서로 엉킨다.
일순 귀에서 낮의 소란이 멎는다.
연탄
어머니가 다시금 된소리를 낸 건 누나가 안방으로 죽 그릇을 들고 들어간 직후였다. 아니 된소리가 아니라 그건 차라리 상소리라고 해야 옳았다. 이 육실헌 년이! 하고 돌연 마루에 튀어나온 소리를 듣고 나는 화닥 창밖으로 목을 빼고 귀를 곧추세웠다. 전에는 결코 들어본 일이 없는 거친 소리였던 것이다. 매양 깔끔하고 단정한 말만 골라 쓰는 양반으로 어머니는 동네에 소문이 나 있었다. 도로 죽 그릇을 들고 나오는 누나의 눈자위엔 실고춧빛 핏발 몇 올이 선연했다.
“그렇게 되게 쑤면 목구녕으로 넘어가 이년아!”
동쪽 방의 누이도 부옇게 뜬 얼굴로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갸웃이 마루를 내다보다 슬그머니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가스레인지에다 솥을 올려놓고 있는 누나의 등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이래저래 마음이 편찮아서 그러려니 하고 속에 담아두지 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누나가 시큼한 소리로 되받았다.
“하긴 소박맞은 딸년까지 내려와 있으니 오죽 속이 끓겠어.”
“……
“어려서부터 엄만 나한테만 유독 저러셨어. 식구들이 모르게 감쪽같이 말이야.”
“그건 무슨 소리야?”
부엌은 천장이 낮고(안방 벽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다락이다) 비좁아서 가스레인지 하나만 켜도 목에서 땀이 났다. 누나의 등은 벌써 축축이 젖어 있었다.
“우리 여기로 이사 오기 전 사글셋방에 살던 때 기억나?”
무척 오래된 일이다. 적어도 25년 전의 얘기다.
“하루는 엄마가 시장에 간다고 나한테 국수를 삶으라고 시키더라. 근데 국수라는 게 그렇잖아. 아무리 부엌살림을 오래 한 사람이라도 삶고 나면 딱 맞지가 않고 항상 조금 남거든. 그래서 다섯 사람분을 삶는다고 삶았는데 이게 양동이로 반이 돼버린 거야. 남자 열이 먹어도 될 만큼 잔뜩 불어난 거지. 기가 질려서 그만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떨고 있는데 엄마가 왔어. 엄마는 시장바구니를 들고 부엌 문간에 한참을 서 계셨지. 하지만 웬일인지 혼내지는 않는 거야.”
나도 지금까지 어머니를 그런 사람으로 알고 나이 먹어왔다. 적어도 스무 살이 되어 집을 떠날 때까지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그날 밤 식구들이 잠든 사이에 어머니가 나를 깨워 부엌으로 데리고 가더니 양동이에 남아 있는 국수를 먹으라고 시키는 거야. 우리 집엔 개도 없고 돼지도 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엄마가 뒤에 서 있는데 그럼 어떡해. 양동이째로 퉁퉁 불은 국수를 손으로 다 건져 먹었지. 기억나? 그땐 또 부엌이 맨땅이었잖니. 결국 먹은 걸 다 토하고 들어와 울면서 잠이 들었어. 그러고 나서 지금까지 난 국수를 못 먹어.”
과연 그런 일이 있었구나. 물론 뜻은 다르지만 나 또한 어렸을 적에 가끔 어머니의 손에 깨워져 새벽에 밖으로 불려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내게 얼굴을 씻게 하고 북어 대가리와 초가 꽂혀 있는 떡시루를 장독대 앞에 갖다 놓고는 절을 시켰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졸음에 겨워 되는대로 마당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곤 했다. 지금까지도 어머니와 나밖에는 모르고 있는 사실일 게다.
누나가 맏딸이었던 때문일까. 명문 여고를 나와 명문대에 들어갔지만 가세가 기울어 2학년도 다 마치지 못하고 누나는 자퇴서를 낸 다음 공무원 시험을 봐서 여동생을 대학에 보내고 또 졸업할 때까지 묵묵히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면서도 싫다는 소리 한마디가 없었다. 그런 사람을 어머니는 왜 고약한 시어머니나 편모처럼 대했던 것일까. 그것도 다른 식구들이 모르게 말이다.
되쑤어진 죽이 안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마루에 차려진 밥상에 막 둘러앉았을 때 삐꺽 하고 대문 소리가 나더니 연탄집 박(朴)씨 아저씨가 리어카를 밀고 들어왔다.
“아직도 우리 집에 연탄 때는 방 있어?”
숟가락을 들다 말고 나는 누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원래부터 연탄보일러잖니. 새로 들인 문간방만 기름 때지.”
그는 두 장을 겹쳐 들 수 있도록 만들어진 집게를 양손에 들고 한번에 네 장씩 뒤꼍 처마 밑으로 연탄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탐욕스럽게 빛을 빨아들인 연탄은 무두질*을 한 가즉처럼 번들거렸다. 유독이나 야윈 몸매에 머리까지 흰 데다 그는 알코올중독자이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적 엔 포도밭을 여러 개 부리던 사람이었다.
“형편이 어떻길래 저 나이까지 연탄 배달을 하지?”
그가 뒤꼍으로 돌아간 사이 누나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원체 부자였으니까 형편이야 지금도 웬만해.”
“그런데?”
“우리가 중학교 땐가 왜 동네 이발소 여자하고 바람이 났었잖니. 그때 아줌마 몰래 포도밭을 팔아 그 여자한테 집까지 사줬단 얘기가 있었어. 나중에 그 여잔 집을 되팔아 먼 데로 도망갔지.”
그 때문에 한동안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그가 연탄을 가지러 마당으로 나올 때마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그때부터 아줌마가 아저씨한테 연탄 배달을 시키고 있는 거야.”
“20년 동안이나 말이야?”
그렇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저 일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러지 않겠냐고 하며 누나는 시커먼 연탄 수레로 눈길을 던졌다. 조금 서둘러 수저를 밥상에 내려놓고 다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불콰한 얼굴에 술내를 풍기며 뒤꼍에서 결어 나온 그는 대뜸 집게를 휘휘 내두르며 연탄으로 내 손이 가는 것을 막았다.˙
“냅둬. 껌댕이 묻으면 잘 지워지지 않응게.”
리어카가 대문을 빠져나가고 난 다음 나는 마당에 떨어져 있는 연탄 가루를 쓸어내고 누나가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소리를 들으며 뒤꼍으로 돌아가 보았다. 뒤꼍으로 돌아가는 담벼락 모서리엔 가마솥과 장작더미가 쌓여 있었다. 그때 햇빛은 부엌 하늘께를 지나고 있었으므로 시멘트 담벼락에선 매운 열기가 확확 반사되고 있었다. 바깥 창에서 안방을 들여다보니 어머니는 가슴을 벌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뒤란*은 지붕 처마에서부터 담장까지 비받이 차양이 드리워져 있어 서늘했다. 연탄은 집의 서쪽 끝 차양 밑에 ι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옆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담벼락에 바투* 선 채 지붕을 모로 비껴 하늘로 뻗어 올라가 있었다. 아버지가 환갑을 넘기고부터는 내가 해마다 추석 때 내려와 감을 따곤 했다. 지금은 절굿공이처럼 굵어 있지만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감나무는 겨우 손가락만 한 굵기였다. 어머니가 외조모 환갑 때 외가에 갔다가 캐 온 것이었다. 그 감나무 아래서 나는 어느 여름날에 엉거주춤 바지를 내리고 서서 첫 수음을 했고 같은 날에 첫 담배를 피우며 담벼락에 기대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담배 이름이 은하수였던가 비둘기였던가 남대문였던가 아니면 명승이었던가? 아마도 불국사 사진이 박혀 있는 명승이었던 것 같다. 아무려나 나는 반쯤 피운 담배끙초를 버릴 데가 없어 제대로 끄지도 않은 채 그만 옆에 쌓여 있는 연탄구멍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날 밤 나는 집에 불이 난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맨발로 나가보니 뒤꼍 처마 밑에 첩첩 쌓여 있는 수백 장의 연탄이 잉걸불*처럼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불길은 감나무 푸른 잎새를 말리며 옆집으로 옮겨 붙고 잠에서 깨어난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물동이를 들고 달려오는 소리가 담 밖에서 요란했다.
그러고 나서 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한 가닥씩 징그러운 털이 솟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나는 눈비 내리는 밤이 오면 자정이 넘은 시각에 슬그머니 뒤꼍으로 돌아가 여전히 연탄 더미 옆에 서서 수음을 하거나 감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하다가 맥없이 흐느껴 울기도 했다. 빛 한 점 없는 새까만 내가 몹시도 서글펐던 것이다.
귀
아버지가 돌아온 것은 오후의 농익은 햇살이 장독으로 몰려가며 구름 한 자락이 마당과 화단 한쪽을 덮고 있을 때였다. 세 송이? 네 송이쯤 벌어져 있는 석류의 붉은 주둥이에서 염염한* 빛이 튀어나오고 있는 것을 해바라기 방에서 홈쳐보고 있을 때 대문을 들어선 아버지는 대뜸 연탄 들였냐? 라며 성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일껏 쓸어냈는데도 마당에 연탄 가루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통에 마루에 나와 앉아 있던 여동생의 품에서 갓난애가 자지러지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어머니가 깨어난 것도 그때였다.
“저 냥반이 요즘 걸핏하면 왜 소리를 질러댄댜?”
어머니가 칼칼한 소리로 핀잔인지 푸념 인지를 늘어놓았으나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않고 수도에서 손을 씻은 다음 불쑥 내 방으로 건너왔다. 나는 얼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기관지도 안 좋다면서 그까짓 담배를 여태 못 끊고 있남?”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여전 성이 안 풀린 목소리였다.
“그래 넌 언제 올라갈 겨?”
“내일 오후 차를 탈 생각예요.”
“뭐라고?”
“내일 간다구요!”
얼결에 목줄을 세우며 나는 뒷짐을 지고 문간에 버티고 서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귀를 가리키며 잘 안 들려! 하고 또 성난 소리를 했다. 협심증에 위경련 말고도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중이염을 앓고 있었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런 소린 없었는데 갑자기 상태가 악화된 성싶었다. 몇 년 전인가 귀에서 피고름이 심하게 나와 병원에 다녀온 후 그는 평생 즐기던 술 담배를 단 하루 만에 끊어버렸다. 한데도 나이는 어쩔 수없는 모양이었다.
“어디 귀뿐인감? 이젠 눈도 먼 덴 아예 못 봐!”
담배 연기가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그가 손님인 듯 방으로 들어왔다.
“되게 어수선하지?”
집 안 분위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두 억지를 부려 일단 집으로 데려오긴 했다만 곧 큰 병원에 가봐야 할 거 같어.”
“……”
“니 에미 말이여. 봄부터 자꾸 승질만 느는 게 어째 심상찮어.”
“……”
“게다가 큰년 소박맞아 내려와 있지, 넌 또 변변찮게 어디 한군데 주저앉아 있질 못허지. 작은년은 귀신도 속을 모를 테니 말할 건덕지도 없고.”
하지만 그 완강한 자기 속엔 또 얼마나 괴로운 비밀들이 많을 텐가. 이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안방에서 마루로 또 어머니의 목소리가 냅다 튀어나왔다.
“누가 가서 저녁 참까지 연탄 좀 빼놓거라! 누굴 삶아 죽일 작정이면 몰라두.”
서쪽 방에서 나온 누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루에 서 있는 꼴이 안 봐도 눈에 선했다.
헛헛, 마른기침을 하며 아버지가 끙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못 꼲겠으면 은단이라도 써봐.”
아직도 은단을 파나? 라고 생각하며 나는 담장에 올라앉아 장독을 기웃거리고 있는 도둑고양이를 쫓아낼 양으로 손에 쥐고 있던 성냥갑을 집어던졌다. 성냥갑은 화단과 장독대 사이에 날아가 떨어졌다. 하지만 이 눈치 빠른 동물은 냐옹! 소리를 내며 곧 담 너머로 사라졌다. 뒤미처 아버지가 뒤란에서 파란 불이 이글대는 연탄을 빼내 대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동쪽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여동생에게 해바라기 방으로 옮기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러면 낮부터 안방에 불을 넣을 일은 없는 것이다. 그녀는 화닥 젖을 가리고 얼굴을 붉히며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쪽 방은 여동생이 출가해 집을 떠날 때까지 줄곧 혼자 쓰던 방이었다. 벽에는 그녀가 중학교 때 걸어놓은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란 복제 그림 이 오랜 세월 문장처럼 걸려 있었다. 여동생은 집을 떠날 때까지 서쪽 방이나 해바라기 방에는 좀체 얼씬거리지 않았다.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누에고치처럼 늘 제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저 모네의 그림 속에. 안개 서린 저 고요한 빛의 잔주름 속에.
여동생은 집이라는 곳을 그저 잠깐 머물러 있다 가는 장소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잠깐은 무려 32년의 긴 세월이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중학교 미술 교사였다. 어머니의 친구 중매로 우기던 끝에 맞선을 본 자리에서 여동생은 꼭이 입양되는 아이처럼 결혼에 응했다고 한다.
여동생은 하루만 더 있다 내일 아침에 올라갈 거라고 내게 말했다. 그녀는 한국전력공사에 다니는 남편과 청주에 살고 있었다. 더 있으란 말을 할 처지도 못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로 마루로 나왔다. 어머니는 자리에 누워 옆으로 마당을 내다보고 있었다. 연탄을 버리고 들어온 아버지가 마루에 걸터앉자 어머니가 둥을 좀 비켜 앉으라고 또 지청구*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치매처럼 뜻 모를 소리를 웅얼웅얼 내뱉기 시작한 건 멀리서 웬 낮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였다.
“석류꽃이 네 개 폈고 패랭인 곧 진다. 달리아, 양귀비 피면 장독뚜껑을 열어야 하는데 여름내 또 얼마나 귀찮게 비가 올는지.”
“……”
그때 돌쩌귀卞의 개미들은 비를 맞고 다 어디로 갔지?”
“……”
“킬킬, 채송화 속에 숨었네. 난 부처 손 밑에 앉아 분홍바늘꽃 보고 있지.”
화단은 상기* 모네의 붓질처럼 시시각각으로 색깔이 변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옆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화답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어, 저기 내 귀가 지나가네.”
그 말에 얼핏 놀라 화단을 쏘아보니 바람 한 자락이 슬쩍 화단 머리를 핥고 지나가고 있었다.
“나 원 참, 꽃들이 귀가 멍멍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이 기묘한 화답은 조금 더 계속됐다.
“신발 신고 가우?”
“맨발에 짚신을 머리에 엊는걸.”
“고봐요, 큰애 낳고 안 사준 신발이니 여태 맨발이지. 요새 누가 짚신 신어요, 그냥 들고 다니다 팔 떨어져서 머리에 엊지.”
“그럼 당신도 방금 저기 지나갔나?”
“내가 먼저 갔더 이다.”
“하면 어디 좋은 데로 갔나?”
“조금 더 여기 등 뒤에 누워 있다우.”
처녀 할머니
그때 누군가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대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다락방의 묵은 사진첩 속에서 웬 여인 하나가 걸어 나오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는 아랫마을에서 두붓집을 하던 언청이 노파였다. 윗입술이 쭉 찢어져 코까지 올라붙은 데다 한쪽 눈까지 멀어 평생 시집을 못 가고 있는 여자였다. 아무도 이름과 나이를 몰라 사람들은 그녀를 그냥 두붓집 노파, 언청이, 처녀 할머니로 불렀다. 여간 품이 많이 드는 일이 아니어서 벌써 오래전에 그녀는 두붓집을 그만두고 텃밭에 감자나 고구마를 심어 겨울을 나거나 봄 여름엔 나물 따위를 뜯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쌀과 바꿔 먹었다.
그녀는 까만 보따리 하나를 들고 마당 한중간에 우두커니 서서 누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명* 저고리에다 통치마 그리고 매양 신고 다니던 검은 고무신 차림이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수년 전의 일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완전히 잊고 있던 사람이었다.
안방에 누워 있던 어머니가 발작적으로 일어나 그녀를 향해, 너 이 년 왜 벌써 왔어! 하고 사납게 소리를 질렀을 때 아까 옆집으로 사라졌던 고양이가 다시 담장 위에 나타났다. 고함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처녀 할머니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담에 올라와 있는 고양이한테 눈을 돌렸다. 석연찮은 느낌 이 등짝에 몰려와 얼핏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는 귀신을 본 듯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지금도 기억이 나지만 처녀 할머니가 우리 집에 찾아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그녀에게 새로 밥을 해 먹 이고 뒤주의 쌀까지 퍼 줘 보내곤 했다. 한데 오늘은 웬 구박에 상소리일까?
“미란아! 쌀 한 됫박 퍼서 빨리 저년 내쫓아 버려!”
부엌에서 급히 노란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나와 마루에 있던 뒤주 뚜껑을 여는 누나의 손은 보기 흉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얼결에 내 눈과 마주친 아버지의 눈에도 분명 불길한 기운이 한 꺼풀 덮여 있었다. 깔깔한 공기의 버성김* 속에서 나는 무얼 하려는지 화단에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는 처녀 할머니의 등으로 눈을 돌렸다. 되는대로 슬리퍼를 꿰신고 마당으로 내려간 누나가 여기 있어요, 하고 바가지를 내미는데도 그녀는 들은 숭 만 숭이었다.
“저년이 뭘 하려는지 다 알어! 뭘 해, 빨리 내쫓고 마당에 소금 뿌리지 않고!”
처녀 할머니가 석류나무 밑의 양귀비 모가지 하나를 똑! 부러뜨려들고 안방을 흘겨본 것은 화단에 쏟아지고 있던 빛이 슬그머니 장독으로 올라붙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숫제 오갈이 든* 것처럼 뒤틀려 있었다.
“접땐 아무 소리 없었잖어.”
담장의 고양이도 꼼짝하지 않고 처녀 할머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나더러 그새 가라고?”
어머니가 거듭 내쏘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암만해도 대꾸가 없었다. 그러더니 누나가 엉거주춤 내밀고 있는 바가지를 한참 내려다보고 있다가 오늘밤 니 에미 입에나 넣어줘, 하고는 돌아서 대문을 열고 나가버 렸다.
어머니가 그 말을 들었는지 어쨌는지는 확실치 않다. 양귀비 모가지가 떨어지던 순간에 반사적으로 마당으로 내려섰던 아버지도 그 소리는 미처 못 알아들은 성싶었다. 누나가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도 뭘 어쩌지 못하고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었다. 고양이가 담에서 사라지고 나서 뒤에서 안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류나무 옆에서 뒷짐을 지고 서서 모가지가 떨어져 나간 양귀비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던 아버지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해바라기 방으로 들어와 하요의 나른한 빛이 장독대를 적시며 뱀처럼 꾸물꾸물 담을 타 넘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얼핏 안방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낯선 흐느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가.
누나가 부엌에서 저녁상을 차리는 동안 아버지는 뒤꼍에서 부채를 흔들며 연탄을 피우고 있었고 여동생은 동쪽 방에서 문을 닫고 여전히 혼자만 조용했다. 그리고 식구들이 저녁상에 둘러앉아 있는 동안 서서히 마당의 빛이 걷히고 이불보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젓가락을 든 손으로 아버지가 마루 등을 켰다.
상을 물리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나는 마루에 앉아 있는 아버지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해바라기 방에서 가만히 엿듣고 있었다.
고양이 담 넘어오고
마당엔 검은 보따리
그리고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양귀 비 떨어지니
마루엔 연탄 냄새
피와 두부
하루 일을 끝낸 누나가 내 방으로 온 건 동쪽 방의 아기가 잠투정을 하느라 끈덕지게 제 어미를 보채고 있을 때였다. 누나는 4개월 전에 이혼을 했고 아이 둘은 전남편이 맡아 키우고 있었다. 수입 양주 유통업을 하고 있는 그는 곧 재혼할 거라고 했다. 아직 젊은 나이이므로 누나도 누군가를 만나야 할 터이었다.
“낼모레면 마흔인데 젊다고 할 수 있니? 그냥 엄마 아버지 수발이나 들며 살래.”
“아이들 보고 싶지 않아?”
큰애는 초등학교 4학년 딸애고 작은애는 2학년 아들애다. 가슴에 깊이 묻고 아예 잊으려 한다고 누나는 말했다. 하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산다는 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휴일의 공원에서 웬 낯모르는 사람이 쥐여주고 간 고무풍선을 얼결에 받아 들고 무려 10년이나 꼼짝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구 누나는 지나온 세월을 단순하게 요약했다. 한데 공원 문을 닫을 때가 되자 어디선가 불쑥 주인이 나타나 풍선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녀의 눈엔 다시금 핏발이 도져 있었다.
“작년 봄에 나 무척 힘들었어.”
작년 철쭉꽃이 필 즈음에 누나는 많은 피를 토했다고 했다.
“철쭉꽃 필 때 피?”
나는 담배를 비벼 끄며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동쪽 방 갓난아기의 울음도 문득 그쳐 있었다.
“어느 날 잠자리에 들었는데 뭔가 자꾸 목울대로 올라와. 그냥 속이 안 좋은 탓이려니 하고 몇 번이나 도로 삼켰지. 근데 입에서 이상한 비린내가 나는 거야. 그러더니 곧 울컥 하고 끈적한에 마구 입에서 쏟아져 나오더라. 불을 켜고 보니 요며 이불에 핏덩어리가 그야말로 낭자한 거야.”
“……”
“그걸 하필 남편이 봤어. 그러더니 대뜸 당신 폐병쟁이야? 하며 기겁을 하고 돌아앉더라.”
폐병.
“병원에 가서 찍어 보니 허파에 동전만 한 구멍이 두 개나 뚫려 있더라. 집으로 돌아와 날두부를 얼마나 먹었는지 몰라. 근데 두부를 먹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니.”
눈물이야 날 수도 있겠지만 두부라니.
“두부처럼 깨끗한 음식이 없잖니 왜.”
그렇다고 하더라도 폐병에 두부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려서 우리는 처녀 할머니가 만든 두부를 참 많이도 먹었다. 이른 아침마다 그녀가 바가지에 담아 한 모씩 들고 오던 그 부드럽고 따뜻한 두부.
그래, 인생이란 어쩌면 한갓 고무풍선과 두부의 추억 같은 것이
리라.
“그러고 나서 아침 공복에 알약을 일곱 알씩 1년이나 먹었어. 저녁엔 계속 두부를 한 모씩 먹고 말이야.”
“……”
“평소에도 그리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지만 어누 날 불쑥 남편이 이혼을 하자는데 막상 왜냐고 묻기가 싫데. 그냥 맥이 쑥 빠지더라. 막상 울음이 나온 건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내려오는 기찻간에서였어. 근데 어릴 때 불렀던 「오빠 생각」이란 동요가 왜 그렇게 생각나니. 비다안 구우두 사가지고 오오신다아더니, 하는 노래 말이야. 너도 알지?”
알다뿐인가. 초등학교 몇 학년 때던가. 셋방 쪽마루에 앉아 처마 사이로 붉은 노을을 올려다보며 함께 부르기도 했잖은가 왜.
“넌 아는지 몰라도 엄마도 한때 폐병을 앓았어. 아마 네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일 거야. 아버지가 밤마다 엄마 궁등이에다 주사를 놓아줘서 겨우 나았지.”
두 살 차이인데 누나는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가 폐병을 앓았다는 사실도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엄만 늘 모질게 날 대했지만 이상하게 원망을 해본 적은˙ 없어. 정말 이상하지? 근데 요즘 와서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애.”
거기에도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하긴 이유가 있겠지.
“엄마한테는 내가 제일 가까운 사람이었던 거야. 살기가 좀 어려웠니. 그래서 속이 상할 때면 날 가지고 괜히 구박하고 그랬던 거야.”
어머니가 죽고 나면 이 사람이 내 마음속 어머니가 되리라. 따뜻한 두부 같은 사람.
“넌 앞으로 어떡할 거니?”
“뭘?”
“언제까지 그렇게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살 거야. 적당한 사람 있으면 그만 살림 차려. 너도 이젠 서른여섯이잖아.”
적당한 사람. 그런 사람이 내겐 없다. 하지만 그리운 사람이 하나 쿠타에 있기는 하다. 일주일 후 나는 비행기를 타고 그곳으로 갈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장래의 내 어머니에게 그곳에 그리운 이가 있다고 고백했다.
“쿠타가 어디야?”
발리에 있는 관광 해변이다. 올 1월에 나는 12일간 발리에 가 있었다. 서울은 너무 추웠으므로 그냥 따뜻한 곳에 가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인도네시아 여자란 말이야?”
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마주 보았다. 그렇다는 뜻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금세 아연한 빛으로 변했다.
“그럼 이름은 뭐고 몇 살이니?”
그럼이라니.
“수잔이란 영어 이름을 쓰고 있어서 발리 이름은 몰라. 나이는 스물둘.”
“너무 어리구나. 그래…… 그럼, 그 여자와 무슨 약속이라도 있었던 거야?”
누나는 쓸데없이 자꾸 진지해지고 있었다. 괜한 얘기를 했나 보다.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지.”
스물여섯 살 이후 내게는 집이 눌 떠나기 위해 돌아오는 곳이었다. 거꾸로 내가 다닌 세상의 모든 곳은 돌아가기 위해 떠나오는 곳이었다.
“그 약속 지킬 거야?”
“그리우니까 아마 저 절로 지키겠지?”
이번에 가면 발리 이름부터 알아놓으리라. 누나는 그새 뭔가를 체념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일에 있어서 여자들은 굉장히 체념이 빠르다.
“뭐 하는 여자니?”
“우리 식으로 말하면 여고 나와 호텔 식당에서 일해.”
“호텔 이름은?”
별걸 다 묻는다.
“발리 서머 호텔.”
발리 서머 호텔, 이라고 우물우물 되받으며 누나는 사뭇 미덥잖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문득.
“넌 나이를 먹어도 왜 그렇게 꿈처럼 사니.”
내게는 꿈이 생시요 생시가 곧 또 꿈이다. 난들 어쩌겠는가. 어쨌든 그리운 이가 지금 쿠타에 있다는 것이다.
쿠타의 발리 서머 호텔 식당에서 도미구이를 먹다가 나는 그녀와 멀리서 눈이 맞았다. 샤롱(발리 치마)이 잘 어울리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키가 작고 귀여운 여자였다. 떠나오기 전 나는 그녀에게 졸탄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가 들어 있는 CD와 플레이어를 주고왔다.
돌아와서 가끔 꿈을 꾸곤 한다. 그녀와 열대 안락의자에 앉아 빈땅이란 발리 맥주를 마시며 코다이의 「무반주 첼르」를 듣는 꿈을.
그때 안방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누나가 네!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며 그녀가 말했다.
“엄마한테 그 여자 얘기 했어?”
어찌 그런 얘길 하겠는가.
“혹시 상처라도 입지 않을까 걱정된다. 너희 둘 다 말이야.”
상처. 어차피 모든 그리움은 상처의 원인이다. 나중에 상처로 변해 그리웠던 만큼 가슴에 남게 된다. 그걸 떠안고 누구나 살아가게 된다.
안방에 갔던 누나가 돌아온 건 그로부터 약 5분 후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올 생각을 않고 문밖에서 암만해도 어머니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왜?
“갑자기 뒤꼍에 맷돌이 있나 보고 오래. 그걸 쓰지 않은 지가 벌써 언젠데.”
“……있긴 있어?”
“있어.”
“그럼 됐잖아. 이제 누나도 그만 들어가 쉬어. 아 참, 그리고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뭐? 하고 그녀가 외등 불빛에 일긋거리며* 물어왔다.
“우리 어렸을 때 해바라기 밭에서 찍은 사진 가지고 있어?”
유감스럽게도 누나는 그 일만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나가 서쪽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집이 문득 고요해졌다.
발리 서머 호텔
그녀는 끈 달린 하얀 신을 신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식당에 내려갈 때마다 그녀가 내게로 왔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나는 그녀가 도미구이를 식탁에 갖다 놓는 사이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밤새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노라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식탁 밑의 하얀 신발을 내려다보면서. 그 말에 여자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그녀는 내가 앉아 있는 식탁으로 쟁반을 들고 왔다. 나는 그녀에게 한국엔 지금 눈이 많이 온다고 말해주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눈, 이라고 가까스로 되받았다. 당신 신발처럼 하얀 눈, 이라고 나는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발을 안쪽으로 오므리며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식사를 끝낼 때까지 멀리서 나를 바라보았다.
발리 서머 호텔에서 닷새째 머물던 날 아침에 나는 과일과 커피와 토스트를 가져온 그녀에게 저녁에 와텔(사설 전화국)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야외 카페가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 나는 그녀와 밤새 빈땅을 마시며 그저 아무 얘기나 주고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얼굴을 확 붉히곤 고개를 가로저으며 도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먼 데서 또 나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날 밤 그녀가 내 방으로 왔다. 와서 서먹하게 한 시간이나 코다이를 되풀이해서 듣다가 서로 입이 마를 즈음 슬그머니 옷을 벗었다. 그녀는 아기처럼 내 품에 안겨 들며 서툰 영어로 말했다.
“눈 보고 싶어요.”
“그래, 눈이로군.”
“하늘에서 신발이 매우매우 떨어져요?”
웃으면서 나는 그렇다고 대꾸했다. 하늘에서 흰 신발들이 마구마구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어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래도록 너를 사랑했어. 이 말 없는 애야.”
뜻을 알 리 없을 텐데 그녀는 묵묵히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너는 지금도 모네의 붓질 속에 숨어 있겠지. 그 기묘한 빛의 그림자 속에. 이 벙어리 여자야.”
그녀는 가슴과 엉덩이의 선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자였다. 창밖에선 외등 불빛 속에서 야자수 잎이 쉼 없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눈을 감으니 야자수 잎이 저마다 커다란 물고기로 변해 이마 위로 천천히 떠가는 것이었다.
다음 날엔 정오에 그녀가 왔다. 그날도 그녀는 내게 눈[雪]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나는 그녀의 벗은 등 너머로 열대 장미와 야자수를 훔쳐보며 줄곧 동쪽 방의 내 연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주일째 나는 그곳을 떠났다. 흰 신발과 코다이를 남겨두고. 다시 돌아오리란 약속을 던져두고. 그러나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울루와트에 가서 사흘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던 날 뜻밖에 그녀가 덴파사 우랄라이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 내가 눈사람이 아니길 바란다며 불현 눈시울을 붉히고 말했다.
신발
자정이 지나 잠자리에 들려고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아버지가 밖으로 따라 나왔다. 아니, 나를 따라 나왔던 게 아니다. 오줌을 누고 도로 방으로 들어가는데 아버지가 마루 앞에서 손에 무얼 들고 시커멓게 서 있었다. 다가가 보니 어머니의 신발이었다. 감히 왜냐고 묻지를 못하고 나는 아버지의 얼굴만 그저 뜨악하게 마주 보고 있었다.
“어째 이걸 가지고 들어오란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웬일인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신발을 든 아버지가 안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집 안의 모든 불이 다 꺼졌다.
밤의 결음걸이
얘야, 오늘 난 우리 집의 평면도를 그려놨어. 언젠가는 햇빛을 받아 누렇게 색이 바래고 두루마리처럼 안으로 말려버릴 테지. 우리들 인생처럼. 그러고 나면 이 집과 함께했던 우리 세월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지겠지. 하지만 나중에라도 왠지 너만은 모든 결 다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 해바라기 밭에서 찍은 사진도 네가 가지고 있다는 걸 난 알아. 어느 여름날 우리는 해바라기 푸른 대궁 사이에 숨어 겁 없이 입을 맞췄지. 너는 그 큰 눈으로 일생(一生)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혹은 내가 너를.
며칠 후 난 또 너를 만나러 갈 거야. 아주 먼 열대의 섬이지. 그래, 열대. 거기서 내 서른여섯 살에 다시 너를 만나게 될 줄이야.
신발도 없이 밖에서 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해바라기 지붕을 밟고 지나 화단을 밟고 지나 장독대를 밟고 지나 상기는* 담을 타 넘어가고 있다.
밤의 발자국 소리가 도로 돌아와, 내 머리맡에 바투 와서 어깨를 흔든 건 아마 새벽 3시나 4시쯤이 됐을 시각이었다. 그녀와 열대 안락의자에 앉아 코다이를 듣다가 한순간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밤이 내 귀에다 대고 하는 소리를 캄캄히 엿듣고 있었다.
“갔어!”
조용히 말해도 될 텐데 그는 굳이 외쳐 말하고 있었다. 이토록 고요한 밤에도 귀가 어두운가. 일어나서 내가 불을 켜려고 하자 그가 내 손목을 차갑게 거머쥐었다.
“냅두고 나와!”
나는 그에게 손목이 붙들려 방 밖으로 나갔다. 마루로 막 올라서려다 말고 그가 해바라기 방에서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네 에미가 갔다고!”
그제서야 나는 안방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퍼뜩 깨달았다. 서쪽 방과 동쪽 방은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겨우 가누고 안방으로 들어섰을 때, 맨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머니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흰 고무신이었다.
『문학동네』 12호(1997년 가을);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생각의 나무 2005)
* 2006년 6월 작가가 부분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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