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
三國史記. 고려 인종의 명에 의하여 김부식이 편찬한 역사서로, 삼국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동아시아의 고전적 역사 서술 방식인 기전체 형식을 따르고 있다. 본기 28권(신라 12, 고구려 10, 백제 6),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1145년, 고려의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저술한 사서로, 일연의 삼국유사와 함께 고대 한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본기 28권, 잡지 9권, 연표 3권, 열전 10권, 총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이후의 역사에서부터 고려 초까지의 역사도 다루었는데, 아무래도 당시 고려인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에는 고려가 후백제를 무찌르고 후삼국시대를 통일한 것을 진정한 의미의 통일로 여겼던 것에서 기인한 것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金富軾) 등이 1145년(인종 23년) 완성한 삼국시대 역사서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官撰史書)라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1] 대한민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며, 삼국 시대의 각국의 흥망과 변천을 기술한 정사체의 역사서이다.
1970년 경주 옥산서원에 소장된 판본이 보물 제525호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국보 제322-1호로 승격되었다. 그밖에 1981년 조병순 소장 영본(零本)과 경주부간본(慶州府刊本)이 각각 보물 제722호, 723호[2]로 지정되었다가 경주부간본이 국보 제322-2호로 승격되었다. 국보 제322-1호, 322-2호가 유일한 완본으로 현전하며, 보물 제722호는 7권 1책이 전해진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
고려 중기의 유학자·역사가·정치가·문학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미상, 호는 뇌천(雷川). 시호는 문열(文烈).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에 임명되었다가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중서사인이 되었다. 인종 초에 이자겸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자 이를 저지하였으며, 이자겸이 제거된 뒤 1126년(인종 4) 어사대부가 되었다가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역임하였다. 1130년 정당문학 겸 수국사로 승진하였고 이어 검교사공 참지정사,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당시에 묘청(妙淸) 등 서경세력이 천도를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三軍)을 지휘하였으며, 출정하기 전에 먼저 개경에 있던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백수한(白壽翰) 등을 죽였다. 장기전을 벌이면서 1년 2개월 만에 반란군을 진압하였고, 그 결과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事上柱國兼太子太保)에 승진하였다. 1138년에 검교태사·집현전대학사·태자태사(檢校太師集賢殿太學士太子太師)를 더하였다. 이어 함께 전공을 세운 윤언이와 개인적인 불화가 생기자 그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한 것을 탄핵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쫓아냈다가 뒤에 사면되자,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1142년에 사직하였다. 인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면서 동덕찬화공신호(同德贊化功臣號)를 더하여 내렸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인종의 명령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체재를 작성하고 사론(史論)을 직접 썼으며, 1145년에 완성하였다. 이 밖에도 인종 초년에 <예종실록>을 편찬하였고, 의종 초년에 <인종실록>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군개국후에 봉해졌다. 또한, 문학가인 그는 한림원에 있을 때 선배인 김황원(金黃元), 이궤(李櫃)와 함께 고문체(古文體) 문장의 보급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유행하던 육조풍의 사륙변려문체(四六騈儷文體)에서 당·송시대에 발전한 고문체를 수용하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중찬도 이러한 문체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문집은 20여 권이 되었으나 현전하지 않으며, 많은 글이 <동문수(東文粹)>와 <동문선>에 전하는데, 우리나라 고문체의 대가라 할 수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은 그를 “박학강식(博學强識)해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의 신복을 받으니 능히 그보다 위에 설 사람이 없다”라고 평하였다. 문집 20여 권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