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칼뱅주의 부흥 운동은 오늘날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의 직접적인 원천이다. 칼뱅주의는 ‘삶이 곧 종교’(life is religion)라는 원리에 따라 문화를 성경의 진리에 따라 변혁하려는 열정을 특징으로 한다. 그 전통을 되살려내려는 운동의 중심에 ‘작은 거인’이라 불리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있었다. 그는 네덜란드인 평균 신장보다 ‘작은’ 사람이지만 정통 신앙을 회복시킨 영적 ‘거장’이었다. 더 큰 업적은 그 신앙에 함축된 문화 변혁적 세계관을 드러내어 삶을 바꾼 실례를 남긴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 세계관 논의도 그 역사를 본받아 삶을 성경의 진리에 더 부합하도록 만들려는 실천적 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기독교 세계관을 4회에 걸쳐 소개하기로 한다. |
세계관은 명료하게 의식되거나 체계적으로 표현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초대교회로부터 독특한 세계관이 기독교 전통 속에서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당대의 세계관을 본받지 말고 변화된 안목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것을 당부했다(롬12:1-2). 또한 비기독교적 사상과 이론을 격파하는 동시에 이것들을 그리스도께 복종하도록 가져오게 해야 한다는 두 과제가 함께 수행되어야 할 것을 역설했다(고후 10:5).
이는 특히 초대교회의 여러 지도자처럼 철학적 훈련을 받은 지식인이 개종할 경우에 반드시 수반되었다. 터툴리안, 클레멘트, 어거스틴이 그 사례이다. 그 후로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나 장 칼뱅(Jean Calvin)이 그랬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카이퍼 같은 지성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세계관적 함축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정립하려 씨름했다.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려는 노력은 이론적 관심이 아니라 실존적인 것이다. 비기독교적 세계관과의 싸움은 기독교 문화라고 여겨질 수 있던 중세에서도 계속되었다. 이 싸움은 르네상스와 근대 계몽사상 이후에는 더욱 격화되었다.
기독교 세계관 논의가 각 시대의 주도적 사상이나 문화적 상황과 연관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대의 세계관을 그대로 차용하거나 답습하는 것에서 그친 일은 없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변화가 반드시 일어났다. 물론 기독교적이지 않은 요소들이 끼어들거나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수 백 년의 전통과 역사를 지닌 서양철학의 개념이나 체계나 세계관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진리를 표현하는 ‘지적 도구’만은 아닐 수 있다. 그것들은 단순한 형식을 넘어서 내용에 영향을 미치거나 논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철학적 개념을 빌어 기독교 진리를 논의하려 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는 기독교 세계관 논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세계관 논의에 있어 유의할 점은 기독교 세계관이 그리스도인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세계관’이라는 말 자체가 기독교 세계의 창작물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세계관’이라는 개념은 서양 사상사에 오랜 뿌리를 두고 발전한 개념이다. 서양철학은 ‘봄’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이데아’를 도출한 플라톤 이래 ‘관점’을 늘 중요하게 생각했다. 물론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회자되기 시작된 것은 18세기 서양 철학에서이다. 특히, 그 용어가 독일의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역사적 상대주의’의 함축을 갖게 되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세계관’이라는 말은 세계에 대한 하나의 견해 또는 관점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부각될 수 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보기에 달렸으며 관점은 개인적이고 시대적이며 사적이면서 역사적 조건에 의해 신빙성이 제한을 받는다는 의미가 내포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