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에게
<명성황후해원굿>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억울하고 비참하게 시해된
조선조의 국모인
명성황후의 한을 풀고 원을 푸는
망인천도제의 무속적 진혼의례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진혼의례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호칭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서울, 경기 지역에서는 진오귀굿 또는 새남굿,
경상 지역에서는 새남굿,
충청 지역에서는 질닦음,
제주 지역에서는 시왕맞이,
동해안 지역에서는 오귀굿(오구굿),
황해도 지역에서는 시왕굿(수왕굿),
평안 지역에서는 다리굿,
함경도 지역에서는 망무기굿 등이 그것들입니다.
<명성황후해원굿>을 이야기 하기에 앞서
명성황후 민비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
국사 수업 시간에
조선조 말 고종의 비 민비에 대하여서는
자신의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사사건건 맞서며
정쟁이나 일삼다
결국은 일본인들의 손에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비운의 왕비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서야
조선조 말에 우리나라는
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
황제의 국가임을 국내외에 천명한 바 있으니
고종의 비 민비는
호칭으로도
명성황후로서 황제의 비로 품격을 올려야하며
그녀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재인식과 재평가를 해야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비는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태어나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변에 알려져
16세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妃/이하 비)에 간택되었던 분입니다.
처음에 민비는 예의범절이 밝아 칭송을 받았으나
원자가 태어난지 5일만에 요절하자
그 원인이 대원군에 있다는 의심을 갖으면서
대원군의 반대파를 규합하여
정치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위 강국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충정이 대단한 지략가이기도 하였습니다.
대원군과 대립한 여러 번의 국란 끝에
민비가 러시아에 접근하여
대원군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 하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봉록을 받지 못하고 유랑하는 무사(武士) 계층인
일본 낭인들을 궁중에 잠입시켜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하였던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살해를 은폐하기 위하여
그녀의 시신을 궁궐 밖으로 옮겨
소각하였던 끔찍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합니다.
그 뒤 민비는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광무 1)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게 되었고
그 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안장되었다.
고종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그녀를 명성황후(明成皇后)라 칭하게 된 것입니다.
<명성황후해원굿>의 출발은
대원군이 민비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충주시 노은면 신흥 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그 때 그 지역의 무녀 박소사와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명성황후와 박소사 무녀에 관한 내용은
임광규(林炚圭)가 소장하고 있는
을미사적부행록(乙未史蹟附行錄)과
을미사변복수창의비사 기록의
『명성황후』편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어느 때는 아랫마을 예언가를 불러
점을 칠 때 박소사라는 무당이
밥상에 청수(淸水)를 떠받들고 엽전을 흔들다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보고 벌떡 일어나 큰절을 하면서
“대왕마마 이시지요? 어찌 여기까지 오셨나이까?
마마께서는 50여일이 지나
팔월 초하루가 되면
환궁하셔 나라를 구하실 것입니다”라며 굴복(屈伏)하였다.
황후는 변장하여 평민행세를 하는데도
정체를 알아내니 족집게 무당이로구나 하면서 감탄하였다.
그리고 무당 박소사의 신통력을 믿어
환궁 후 진령군(眞靈君)으로 봉하여
전국 무속인들의 해원(解寃)공사 발상지가 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소사 무녀에 대한 기록은
한일합방이 되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황현(黃玹1855〜1910) 『매천야록梅泉野錄』에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무녀 박소사는 임오군란이 끝나고
명성황후가 환궁할 때 동행하여 진령군으로 봉해졌으며,
1895년 10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명성황후 혼을 위로하는 해원굿을 거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박소사 사망 후 그녀 신딸이
<명성황후해원굿>을 비밀리에 이어오다
일제 식민지 정책 하에서 중단되었으나
20여년 전부터 무녀 신명기에 의하여
<명성황후해원굿>의 명맥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