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네한바퀴91 -수덕사
9월24일 수덕사로 갔습니다. 상사화(相思花)가 피었습니다. 상사화의 꽃말은 "이룰수없는 사랑"으로 꽃과 잎이 다른 시기에 피어 만날수 없는 연인을 빗대어 표현됩니다.
설화로 금술좋은 부부에게 늦둥이 딸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병환중 세상을 뜨자 아버지의 극랑장생을 빌며 백일동안 탑돌이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절의 큰수님 수발승이 탑돌이를 하는 여인을 흠모하였으나 중의 신분인지라 이를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여인이 불공 마치고 돌아가자 스님은 그리움에 사무쳐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듬해 봄, 스님의 무덤에 잎이 진 후 꽃이 피었는데, 세속의 여인을 사랑하에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스님을 닮았다하여 꽃이름을 상사화(相思花)로 지었다고 합니다.
라인균 작품 보자기 1 입니다.
작품설명
"덕숭산 만한 황금덩어리가 있다한들 마음이 만족할줄 모르면 항상 부족하고 헐떡기탄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삶이 가벼워지겠지"
수덕사(修德寺)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입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충남 일원의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으며 수덕사는 백제 때에 창건되어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고찰이며 내포땅 가야산의 가장 이름 높은 명승지이기도 합니다. 가야산 남쪽 덕숭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우리나라 4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습니다
창건설화
창건설화는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수덕도령과 덕숭낭자 이야기입니다. 수덕이라는 도령이 사냥갔다가 먼발치에서 덕숭낭자를 보고 상사병에 빠집니다. 여러번 청혼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합니다. 끈질긴 청혼에 덕숭낭자는 자기집 근처에 절을 지어달라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수덕도령은 욕심속에 절을 지었으나 완공 직전에 불이 나서 소실되었습니다.
절 짓기를 다시 했으나 같은 일이반복이 되었습니다. 세번째는 탐욕을 내려놓고 부처님만 생각하며 절을 완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약속대로 결혼은 하였으나 낭자는 도령의 손길을 거부하였습니다. 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사라지고 버선 한쪽만 쥐어 있었습니다.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하얀 버선꽃이 피어있었습니다. 낭자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던 것입니다. 그후 수덕사는 도령의 이름을 따고 덕숭산은 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두번째 설화는 대중창불사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절이 낡았습니다. 당시 스님들로서는 불사금 조달이 어려운 중에 묘령의 여인이 공양주를 자청하여 절에 찾아왔다. 그런데 미모가 뛰어나 많은 이가 찾아오게 되었고 대부호의 아들인 정혜라는 청년이 청혼을 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불사가 완성되면 청혼에 응하겠다하니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불사기간을 앞당겼습니다. 낙성식후 하산을 재촉하자 잠시시간을 달라며 여인이 방을 나가려하기에 그녀를 잡았는데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봄이 되면 버선꽃이 피어나게 되었고 관세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창건역사
수덕사는 오래된 절의 역사에 비해 전해지는 기록이 없
에 연혁을 살피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어떤 기록에서는 559년백제 위덕왕 때 지명법사가 창건했다고 하고 또 다른기록에서는백제 말 숭제법사가 창건했다고 말하지만 근거는 업흡니다. 백제 무왕 2년(601년) 혜현스님이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강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이미 그 이전에 창건되었던 것으것으로 보입니다.
문헌에 언급된 백제사찰 가운데 흥륜사, 왕흥사, 칠악사
수덕사, 사자사, 미륵사, 제석정사등 12개의 사찰 이름
이 전하지만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수덕
사 경내에서 백제시대의 와당과 와편 등이 발견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시대부터 유지되어온 사찰임이 분명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대웅 전수리 시 나온 묵서명에서 대웅전이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지어진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기 고려 말까지 대찰로서의 사격을 유지하고있음을 알 수있습니다. 14세기 중후반에 나옹혜근 선사가 절을 중수했다고 전하고, 조선시대에는 1528년(중종 23년)과 영조와 순조때 대웅전을 중수했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선불교의 요람
구한말에 경허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습니다. 경허스님은 1880년대 끊어진 선불교의 수행체계와 법통을 다시 수립하고있게 한 스님으로 수덕사와 수덕사 인근의 천장암, 부석사, 개심사 등지에서 주로 보림하며 수월, 혜월, 만공, 한암스님 등의 제자를제자를 길러냈습니다. 이 가운데 수월스님은 만주로 건너가서 숨은 도인으로 살다 열반에 들고 혜월스님은 부산으로 내려가 운봉성수, 향곡혜림, 진제법원 스님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루었습니다.
한암중원스님은월정사로 가서탄허택성, 보경희태, 만
화희찬 스님으로 이어지는 오대산 법맥을 만들었습니다. 1898년(광무 2년)에 경허의 제자 만공(滿空)이 중창한뒤 수덕사에 머물면서 보월성인, 용음법천, 벽초경선, 혜암현문, 고봉경욱 스님 등 기라성 같은 제자를 길러스승이 뿌린 선불교의 씨앗이 곳곳으로 퍼져 나가 넓게 뿌리내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현재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5대 총림 가운데 하나인 덕숭총림으로 많은 스님들이 강학과 참선정진하는 종합교육도량이다. 또한,충청남도 내포 일대의 36개 말사를 관장하는 제7교구 본사이기도 합니다.
소장 문화재
수덕사의 성보문화재는 단연 국보 제49호인 대웅전을
먼저 꼽을 수 있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건립된 지 700년이 지났습니다. 1937년에 해체수리를 할 때 중수년대가 적힌 붓글씨가 발견되어 이 건물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덕사 대웅전은 단지 오래된 것뿐만 아니라 안정감 있는 모습과 화려하지않지만 단정하면서도 은은한 멋이 느껴지는 건축입니다. 옆면 공포와 벽이 이루고 있는 환상적인 면 분할은 그대로가 하나의 추상화 같습니다.
이외에도 보물 제1263호인 노사나불괘불탱과 보물 제
1381호 목조 삼세불좌상 등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5
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가 5점, 문화재자료와 등록문화재 4점 등 수덕사는 총 15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사인 예산 화암사에 걸려있던 무량수각, 시경루
등 추사 김정희의 친필 편액과 만공스님이 조선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이강공에게 받았다고 하는 고려시대 공민왕의 거문고도 남아 있습니다. 이 거문고에는 조선후기 이조묵이 새긴공민왕금이라는 글씨와 만공스님의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말사인 예산화암사에 걸려있던 무량수각, 시경루
등 추사 김정희의 친필 편액과 만공스님이 조선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이강공에게 받았다고 하는 고려시대 공민왕의 거문고도 남아 있습니다. 이 거문고에는 조선후기 이조묵이 새긴 공민왕금이라는 글씨와 만공스님의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수덕사 뒤 덕숭산 정상부에는 선방인 정혜사와 여러 토
굴들이 산재해 있고 그 가운데 하나인 금선대에서는 경
허, 만공, 혜월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덕숭산 꼭대기에 위치한 전월사는 만공스님이 말년을 주로 보낸 곳이라 합니다. 그 근처에 세계일화라고 쓰여진 탑이 만공스님 부도탑으로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473호입니다.
<삼국유사> 에의하면 백제의 중 혜현이 이곳에서 삼
론을 공부했다고 전해집니다. 산 위에는 비구(남자 중)가 거처하는 정혜사가 있으며, 서쪽에 비구니(여자 중)가 사는 총림이 있다. 관음 바위, 미륵 석불, 만공탑, 전원사 등이 있습니다. 특히 담징이 그린 대웅전 벽화가 유명합니다.
수덕사 가람 배치도
상사화가 꽃과 잎이 못 만납니다.
상사화가 많이 피웠습니다.
사천왕문
하루선방
대웅전
가을의 꽃
경내
이곳은 옛날 여관 했던자리
이응노 화백이 수덕사에서 주로 작품활동을 해왔었다고 합니다. 이응로(李應魯1904년음력 1월 12일~ 1989년 1월10일)는 대한민국 출신의 프랑스 회ㅣ가입니다.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호는 고암(顧庵, 顧菴)
.죽사(竹士,竹史)입니다.
출생과 성장
이응노는 충청남도 홍주군 홍천면 중리(현 홍성군 홍북
면 중계리)에서 아버지 이근상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5
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고암리를 거쳐 그 후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17살 때 가출, 산제당에 단청을 그리는 상엿집 칠장이로 전전하다가 염재 송태회 선생에게 묵화의 기본을 배우고, 1923년 경성부에서 당시 유명한 서예가이자 서화가였던 해강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 사군자.묵화등을 교습하고 죽사라는 호를 받았습니다. 이듬해 1924년 조선미술전에 '묵죽'을 출품하여 입선하였습니다. 1928년 공주, 대전 등지에서 활동하다 전주 중앙동에 정착하여 개척사라는 간판가게를 운영하였습니다. 1931년10회 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부에서 청죽으로 특선을 차지 하였습니다. 이듬해 같은 전람회에도 풍죽, 대죽, 청죽을 무감사로출품하였습니다. 1933년에는 규영 정병조 선생에게 고암이라는 호를 받았습니다
1935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신문배급소를 운영하며 작품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습니다. 동경 본향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 기법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마쓰바야시 게이게쓰의 덴코화숙에서도 공부했습니다.이들 학교는 정규의 미술학교가 아닌 본과입학을 위한 예비학교 같은 곳이었는데, 그는 서양미술의 소묘와 유화기법을 연수했습니다. 마쓰바야시 선생이 그를 보고 직접 대나무 숲에 가서 면밀히 그 생태를 관조할 것을 교시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의 필법이 너무나 제멋대로였으며 준거로서의 규범을 무시했거나 등한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규학교에서 미술수업을 받지 못하였을 뿐 게으르거나 소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35년 제95회 일본미술협회전에 풍죽으로 입선하였
고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1945년까지 선전과 일본 화원전에서 입선과 특선 또는 무감사로 계속 출품했습니다. 1939년에는 서울 화신화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는데, 작품은 남화신작들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사군자에서 벗어나 대상을 사실주의적으로 탐구한 현실풍경화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1945년 42세가 된 이응노는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충남 예산의 수덕여관을 인수하여 동생 흥노에게 경영을 맡기고 서울에 '고암화숙'을 개설하였습니다. 1946년 김영기,배렴, 이유태, 장우성과 함께 단구미술원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했으며, 조선미술가협회의 상임위원이 되었습니다
1948년 홍익대학관(현 홍익대학교)에 부임하여 1950
년 6월까지 재직하였습니다. 1948년에서 1954년까지 대전문화원, 동아갤러리, 서울화신백화점, 광주, 홍성, 수원, 예산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1954년에는 경주 서라벌예술대학의 동양화과 교수로 취임하였습니다. 1956년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을 출판하였습니다
1954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폐단을 지적하고 국전
추천작가로 초대받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미국 뉴욕 월드 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현대한국미술전에 '출범'과 '산'을 출품하였는데, 록펠러 재단이 이를 구입하여 뉴욕 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습니다. 세계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장 자크 라상느로부터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하라고 초청을 받았습니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 초대전에 동양화가로는 유일하게 초대받아 '숲, '산', '은조'를 출품하였습니다.
1958년 12월에 한국을 떠나프랑스로 작품 생활의 무대를 바꾸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서울 중앙 공보관에서 도불 기념 개인전을 가졌으며 1959년 서독대사 리차드 허츠 박사의 주선으로 서독을 방문하여 1년간 콜른, 본, 프랑크푸르트에 체류하였습니다. 이 기간동안 독일 본 시립미술관에서 이응노-박인경 부부전을 개최하였고, 프랑크푸르트와 쾰른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1960년 1월에 파리에 정착하여 재불한국작가전에 출품하였고, 미국 워싱턴 국제현대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파리 폴 파케티갤러리의 그룹전에도 참여하였습니다.
파리에서 새롭게 출발한 이응노의 생활은 궁색하여 작품을 제작할 재료가 없어 뜰에 버려진 낡은 컬러판 잡지를 주워서 그것을 물감 대신 캔버스에 뜸어 붙불였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새로운 전기가 되었습니다. 콜라주 기법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뜬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붓글씨를 쓸 때 느껴지는 '획'이 이 과정에서 부여되었습니다. 붙여지는 한 조각의 종이가 서예의 획과 같이 한 획 한 획의 힘과 절도가 중첩되고 집적되어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고암의 콜라주 작품 60호는 1961년 11월 개막된 카네기국제미전에 출품되었습니다. 1962년 11월 파리의 폴 파케티 갤러리에서 '이응노,콜라주' 초대전을 개최하고 폴 파케티 갤
러리와 전속으로 계약하였습니다. 또,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초대 개인전을 갖았고, 프랑스 파리 살롱 콩파레종에 참가하였습니다. J. Lassaigne, M. Ragon, P. Schneider 평론가의 추천으로 파리 막스 카가노비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독일 뮌헨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회갑이 된 이응노는 1964년 11월 초 프랑스화단의 예술가와 각계 인사의 후원으로 파리 세르누쉬 미술관안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린 카네기 국제미술제에 초대작품을 출품하였고, 스위스 오베르니에 누마가 갤러리와 파리 막스 카가노비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이듬해 그는 브라질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후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미술관과 스위스 누마가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 조작되었고, 그는 한국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독의 동베를린에 갔다가 고국에 납치돼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감옥에서도 그의 예술혼은 시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안에서도 나무 도시락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나무 도시락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베니어 합판 위에 먹다 남은 밥풀로 붙이고, 덕지덕지 붙은 나무조각들 위로배식용 고추장과 간장을 발라 색깔을 입혀 도시락 콜라주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신영복은 자신의 재판이 빨리 끝나 대전교도소에 수용되면 이응노를 만날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이응노가 프랑스 정부의 탄원에 힘입어 빨리 출소했기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영복이 대전교도소에서 이응노와 한 방에서 생활한 수감자를 만나 이응노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는데, 이응노는 다른 수감자를 번호로 부르는 일이 없었고 관례와는 다르게 꼭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1969년 3월 석방후 예산 수덕여관에서 요양하다가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이일로인해 대한민국 예술계와는 단절되었으나 스위스
와 프랑스에 이어 일본.미국.벨기에를 중심으로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파리의 동양미술학교에서 다시 프랑스인들에게 묵화기법을 지도하였습니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영국 브리스톨
시립미술관의 회화와 콜라주전에 출품하였습니다. 1976년11월 파리에서 고려화랑을 개관하였고, 프랑스에서 'Ungno Lee'라는 그의 생애를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같은 해 주앵빌 고등학교의 벽화를 제작하였습니다. 1977년 문헌화랑에서 신작 <무화(舞畵)>로 개인전을 열었으나 또다시 뜻하지 않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그의 아내 박인경은 1977년 7월 31일 취리히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의해 발생한 백건우와 윤정희 부부 납치미수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