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던 날을 기억할 순 없어요. 그때 내 자아의 근본이 어떻게 생겨나
어떻게 땅 속에서 깨져서 미세한 싹의 형상으로 생을 시작하게 됐는지 기억에 없어요.
그러다 작은 묘목이었을 때 누군가 나를 여기에다 심어놨고 주변 세계에 대한 의식이 시작됐어요.
그때로부터 약 삼십 년의 풍상이 흐르도록 나는 여기에 서서 피어나고 짐을 이어왔습니다.
처음 나는 내 존재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필요한 건지 불필요한 건지, 중요한 건지 중요하지 않은 건지...
그러다가 내 인식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진실과 부딪쳤는데,
그것은 나 외에, 사람 외에, 이 세상 외에 누군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졌다는 것, 만들어졌다면 만든 자가 있을 것이라는 것,
만든 자가 있다면 그는 거룩하고 정의롭고 아름답고 따뜻한 분이실 것이라는 것.
그것은 여기 서서 무수한 낮과 밤을 맞으며 무수한 계절이 지나는 동안 내 눈에 비친 사실입니다.
아침에는 서광과 함께 고요히 해가 떠오르고, 햇빛 아래 만물이 움직이는 낮이면
참새가 날아와 내 가지에 앉아 지저귀고, 매미들도 찾아와 앉아 노래하며, 까치들도 간혹 쉬었다 가고,
봄이면 내 몸에서 파릇한 순이 나와서 몸체를 덮고, 여름이면 그것이 삼각형 부채꼴의 무성한 잎사귀가 되어
저 하늘의 뭉게구름과 양떼구름과 일몰을 바라보는 동안,
가을로 접어들어 소슬한 대기 아래 노랗게 변색된 잎사귀들이 손뼉을 치다가 깊어진 계절 찬 비를 맞아 떨어져
사람들의 거리에 사랑의 카펫을 깔아주는 이 모든 현상들은 참되고 선하였어요.
마침내 별들이 순결하게 빛나는 냉혹한 겨울 밤하늘 아래서 나는 나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벌거벗은 내 몸이 겨울 바람을 맞으며 달빛 아래 긴 그림자를 땅에 드리울 때,
나는 내가 있다는 것과 내가 나 외의 어떤 거룩한 분에 의해서 지탱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흰눈이 내려 땅 위의 피조물을 덮고 내 초라한 몸 역시 하얀 눈꽃으로 뒤덮을 때
나는 나를 만드신 분의 깊고 따뜻한 마음씨를 배웠습니다.
이런 사실은 내 조그만 인식의 여과기를 통과하여 내 안에 뿌리내린 진리가 되었습니다.
때로 여름의 거센 태풍에 내 몸체가 휘어지고 가지가 부러지는 위기도, 추위에 자지러질듯한 순간도,
폭우에 온 몸이 빗물로 뒤범벅이 된 것도 모두 이 깨달음을 향한 노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은 너무 더웠어요. 물론 나무인 저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사람들은 힘들었을 거예요.
이제 나는 옷을 벗어야 할 시기로 들어섭니다.
밤새 내 몸에서 떨어진 은행잎이 오늘 아침 거리에 세운 자동차를 뒤덮고 보도 위에는 노란 융단을 깔았어요.
요즘 내 열매는 사람들에게 인기는 없지만 여러 사람들이 거두어가기도 합니다.
이제 몸뚱어리 외에 내게는 남은 게 없어요.
나를 둘러싸는 추위, 하얀 겨울, 주황색 가로등 불빛, 보도 위 고독한 그림자를 기다리면서.
그런데 이상해요. 이런 순환 속에서 아련히 내 안에게 형성되는 샘 같은 게 있어요.
무엇일까요? 이 마음, 이 감정은?
진실한 것에 대한 의식, 따뜻함, 눈물, 감사, 감격, 놀라움, 경외감, 신뢰, 그리고 맑은 행복...
원래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나왔던 것,
또 모든 것은 다시 그분에게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
아, 결국 우리에게 있었던 모든 것은 그분의 선물이지만,
그 선물은 모두 그분의 영광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이 존재의 순리이며,
이것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존재의 신비에 눈을 뜨며 우리의 정체성에 놀라게 되는 것이예요.
이 믿음을 위해서 우리에겐 입음과 벗음, 여름과 겨울의 순환이 필요했던 것 아닐까요?
자기 주장, 자기 중심, 자기 만족, 자기 의, 자기 숭배, 자기 영광 이 모두는 어리석은 죄악입니다.
나는 내 일을 다 했어요. 내가 벌거벗더라도 내 머리 저 위로부터 그분의 심오한 눈빛이 나를 덮을 거예요.
또 한번 나는 그 눈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까만 겨울밤으로 들어갈 거예요."
2024. 2. 5
이 호 혁
첫댓글 존재의 의미를 깨달은 은행나무가 심오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