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 때 쯤, 허리아래 웃자란 벼이삭 사이로 논고랑을 타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등에 한 짐 가득한 농약 통을 메고 한 손으로는 연신 펌프질에,
다른 손으로는 분무기를 흔들어야 하는 그 온 몸 동작도 만만치 않지만,
미끈 질퍽거리는 논바닥에서 발을 옮길 때마다 자칫 중심이라도 잃으면
논바닥에 널부러지는 우세(?)를 당할 수도 있다.
7월 땡볕이 두려워 밀짚모자에 긴 팔 작업복을 입었지만 그보다는 농약
중독이 더 두려워 마스크에 수건까지 목에 두른 터라 운동선수들 땀복
입고 체중조절 하는 사정보다 몇 배는 더할 것이다.
밀짚모자를 뚫어버릴 기세로 내리쬐는 한여름 땡볕은 논바닥까지 달구어
발목까지 고인 논물이 목욕물처럼 뜨듯하다.
이틀 전 아버지와 고모부가 농약을 치다가 서너 마지기를 남기고 기계가
고장 나버렸는데 그 손바닥(?)만큼 남긴 것을, 운동 삼아서 얼른 뿌려
버리고 오라는, 그 “손바닥만큼”의 만만함에 생각 없이 나선 것인데,
삽자루 꼽아 표시 해둔 그곳에서 논자락 끝까지는 상당히 넓었다.
아니, 그때까지는 생각했던 것 보다 일감이 좀 많아 보이는 정도였지만
서너 번 농약통을 갈아매는 동안,
빗물처럼 흐르는 땀에 눈을 뜰 수 없고, 바람 한 점 없는 들판의 뙤악볕
열기와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독한 농약냄새는 숨쉬기조차 어렵게 하는데
손바닥만 했던 논바닥이 급기야는 국민학교 운동장 보다 커 보이는 것이었다.
땡볕 피할 그늘 이라고는 밀짚모자 밖에 없는 들판에서 잠시 쉬는 것도
고통이다.
그제야 헛간에 걸려있던 검정우산을 가져가라시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다 떨어진 검정우산을 버리지 않고 왜 걸어두나 했더니 이제 그 용도를
제대로 알겠는데, 대수롭잖게 흘러들었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다.
한여름 들판 속은 지나치며 보는 한가롭던 풍경과는 너무 딴판이다.
바람 한 점 없이 내리 쬐는 땡볕은 논바닥에서 올라오는 습한 열기와
함께 마치 열탕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에구-! 이러다 열병에, 농약중독으로 들판에서 죽는 것 아닐까? 싶기도 ----
잠시 한나절 꺼리로 알았던 “손바닥”에 임자 만났지.
사투 끝에 다 뿌리고 나니 해는 저만큼, 이제 그 기세도 저 만큼
멀리 이평 들판을 달구고 있었다.
그런데 가져간 농약병 꾸러미를 보니 신기하게도 남는 것이 없지 않는가.
결국 아버지의 “손바닥”이 내 운동장이었던 것이다.
미숫가루 물도 다 동나 목도 마르고, 농약냄새 때문인지 어질어질한 게
불안하다.
약냄새와 땀으로 범벅된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 급한 것 같아 비칠비칠
약통과 병 보따리를 챙겨들고 근처의 농수로를 향했다.
우리 논 근처에는 폭 이 미터쯤, 깊이는 어른 배꼽 정도로 늘 맑은 물이
흐르는 농수로가 있었다.
발을 멈추고 잘 들여다보면 무리지어 다니는 피라미 사이로 제법
탕거리감 물고기도 눈에 띄고, 군데군데 웅덩이 진 수초 그늘에는
조그만 민물새우들이 보이기도 했는데 가끔 논에 있어야 할 징그러운
거머리가 헤엄치고 있어 질겁했지만 그날은 가리고 말고 할 틈이 없었다.
그냥 옷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드니 그 기분을 누가 알까?
아직은, 환경보호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시절 이었다(그날 농약 냄새로
비명횡사한 피라미들이 꽤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부지런한 아버지는 가끔 그곳에서 물고기를 잡아오셨는데
투망이나 뜰채를 쓰기에는 비좁고 수초가 많아 쓰지못하고
들깨나 참깨를 씻어 걸러내던 (우리말로 “얼망채”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그 얼망채를 수초와 잡풀우거진 웅덩이를 발로 더듬어가며
얼망채로 떠내어 잡는데 쉽지는 않지만 생각보다는 미꾸라지며, 붕어며,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잡어들이 피라미와 함께 잡힌다.
사람들은 그런 곳에 물고기가 있으면 얼마나 있을까 싶어 우습게 생각
하고 들여다보지도 않는 것을 아버지는 논일 끝내고 잠간동안에 한끼
먹거리를 장만해 오시는 거다.
더구나 함께 잡히는 것들 중에는 손가락 두어마디 남짓 한 민물새우가
잡히는데 아버지는 이 새우에 무썰고 고춧가루 풀어 끓인 맑은 새우국을
참 좋아하셨다.
서울에 계실 때 언젠가 노량진 수산시장에 갔다 마침 그 민물새우가
보여 사다 국을 끓여드렸는데 그 좋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잡은 붕어와 피래미들은 호박잎 뜯어 바닥에 깔고 배를 따낸 다음
시래기 넣어 끓이던가 말려 두었다가 겨울 시래기로 매운탕을 끓이면
그 귀하던 쇠고기 국이 뺨맞고 울고 간다.
4년쯤 전에 신태인을 지날 일이 있어 잠시 이평 길로 바꿔 돌아
차를 세우고 들어가 보니 시멘트로 더 깊고 높게 쌓아올린 수로에는
그 무성했던 수초조차 온데간데 없이 피라미는 커녕 송사리 그림자
조차 없는 콘크리트의 삭막함만 있었다.
옛날 그대로였던들, 농약 때문에 물고기들이 살고 있을 리 없겠지만
아직도 생생한 그 여름들판이 수리조합 다리 넘어에 그대로 있을 것
같고 한마당 더 지나 하천다리 뚝방 버드나무 그늘에는 거나한 장똘
뱅이들의 걸걸한 입담이 길가는 사람들의 발을 붙잡아 둘 것만 같았다.
더 놀란 것은 수리조합 다리 지나 이평쪽 하천다리까지 그토록 멀게
느껴지던 곳이 지금은 바로 저 앞에 있는 것처럼 가깝더라는 것.
한참을 둘러보며 있을 곳은 다 그대로 인데도 그처럼 가깝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니 새로 정비해 포장한 도로가 거의 직선인
데다 기존 다리위로 건설된 큰 다리가 차지하는 길이가 길어져 조금
가까워지기도 했지만 상대적 으로 가깝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
되었다.
아무튼 그날 이후 이틀을 드러누워 있었는데 처음걱정 했던
농약중독 때문이 아니라 더위 먹은거였지 싶다.
젖은 옷을 홀랑 벗어 물에 행구어 털어 낸 다음 수초에 널고,
물속에 주저앉아 머리만 빼꼼이 혹시 지나가는 사람은 없는지, 이리
저리 휘둘러보지만 한낮 땡볕아래 오갈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그보다는 거머리가 더 두려웠다.
언젠가 논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어버지의 바지가랑이에서 잔뜩 배
불린 거머리 한마리가 마루바닥에 절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온식구가
질겁했는데 그때 보았던 그 통통한 거머리가 눈에 아른거리면서
물속에 있는게 겁이나 밖에 나가있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하는데
묘한 것이, 인적 없는 들판에서 홀랑 벗고 서 있어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더라는 말이다.
뭐랄까, “자유로움”이랄까?
자연의 풍광 아래, 들판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서있어 보니 표현은
어렵지만 어떤 독특한 무엇인가를 느끼겠더라는 것.
옷 벗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때문에 벗는 것일까?
그 무렵 “스트리킹”인가 뭔가 듣도 못했던 말이 등장하면서 가끔
신문에 벌거벗고 뛰는 사람 얘기가 나던데,
역전 통 누구도 술김에 벌거벗은 몸으로 장바닥을 질주했다는
소문이 짜- 했었지. 하지만 그가 이런 기분 땜에 장바닥에서 미친놈
소리를 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농약을 해도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경운기에 고압펌프를 달아 소방 호스처럼 쏘아대는 기계가 등장하면서
부터 농약 뿌리기도 쉬워지고 쉬워지는 만큼 농약도 훨씬 자주하게
되었던 것 같다.
논빼미 구석이나 하천에 빈 농약병이 떠다니면서 부터 화호병원, 중앙
병원에 농약중독으로 입원하는 환자도 많아지고 더러는 죽었다는
소리도 들리고는 했다.
논옆 수로에 허옇게 배를 드러내고 떠올라있는 피래미들이 자주
보이면서 부터 더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내가 군대생활 하던 영천에는 금호강이 흐르는데 강변 양쪽 모래사장
넘어 에는 무수한 사과밭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중고참 시절 어느날 부대 모래사역(강가에서 모래를 퍼오는)에 자원해서
따라 나갔다가 “어죽”이라는 것을 처음 먹어보았는데,
모래사장에 트럭을 대놓기가 무섭게 웃통을 벗어던진 팬티바람으로
한 차 가득 모래를 실어 놓으면 오전에 한차, 오후에 한차로 정해진
책임 양은 끝난다.
근처 과수원에 맡겨놓은 길다란 뜰채와(그것도 과수원에 모래 한차
퍼주고 얻은 것) 기타 식기와 취사도구가 들어있는 커다란 식관을
들고 나오는데 그 군용 식관(50인분 이상의 국을 담을 수 있는 알미늄
으로 된 커다란 들통)을 보니 지피는 게 있었다.
2주전 쯤 취사반 선임하사가 밤사이에 식관 하나가 없어졌다며 잡으
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씩씩거리며 수송부 식당을 뒤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식관이 이곳 모래사장에 출장 와 있었던 것이다.
뜰채 두 세개 를 합한 길이의 그물망을 미리 쌓아둔 돌담 사이의 구멍
에 쳐놓고 그 위 무릎 깊이의 물길을 따라 돌로 바위를 두드리며,
첨벙거리며, 장대로 물을 후려치며 한꺼번에 요란 법석을 떨면서
고기를 그 구멍으로 몰고 가는 것인데 고기 잡는 것 보다 그 법석을
떨며 첨벙거리고 다니는 재미가 더 있었다.
고참이고 졸병이고 없이 예닐곱 되는 청년들이 울타리를 벗어나
훌렁 벗어던지고 첨벙거리고 뛰노니 그 홀가분함은 ----------
난 정말, 군대생활하며 부대 울타리를 경계로 나있는 양쪽 가로수의
색깔이 다른 것을 보았다.
부대 안쪽의 가로수는 푸르죽죽한 국방색인 반면 도로 바깥쪽 가로수는
선명한 녹색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부대 안에 들어가 확인해보라.
그렇게 해서 고기가 잡힐까 했지만 뜰채 속에 담긴 내용물을 보니
그게 아니다.
온갖 잡동사니 민물고기에서부터 은어까지(수박냄새 나는 은어를
난 생전처음으로 그곳에서 보았다) 두세번 법석으로 근 삼분의 일
양동이를 잡은 것.
식관에다 물고기를 먼저 끓이고 부대에서 타간 7인분 부식(라면)을
넣어 끓이는 것만으로도 어느 음식점에서도 맛볼 수 없는 기막힌
“어죽”이 만들어진 것이다.
양념이라야 부대에서 가져간 고춧가루, 된장과 마늘 정도가 다였지만
그때 그 맛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난 초록빛 너른 이평 들녘과, 금호강 지류의 어느
강변을 첨벙거리며 법석을 떨어 어죽을 끓여먹던 그 여름을 꺼내어
본다.
올여름도 내 낡은 추억 보따리 속 그곳, 그 사진첩을 다시 볼 것이다.
첫댓글 두장의 추억사진 고향 냄새와 잊어져 가는 추억의 군생활 물신 풍기네 좋은글 또 또...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희성이친구 반갑네요 카페에서도 보고 전화 목소리도 듣고***이젠 다음 정기 모임땐 꼭 얼굴 볼수 있겠지요? 무더운 여름 잘보내고 항상 행복 하시길****
바우 목소리 멋있어. 그리고 그의 부인은 아름다운 사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