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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소리에 젖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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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에 젖다]
허말임 시집 / 문산시선 15 / 문학산책사(2015.09.22)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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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에 젖다
허말임
외암마을에서
늦가을 속을 소요하는데
어디선가 다듬이 소리가
돌담 너머로 들려왔다
달빛도 옥양목처럼 하얗던
머언 유년의 기억 속으로
담박질하듯 달려가 귀를 열고
이불 홑청 같은 마음의 결을 폈다
엇박자 없이 두드리는
저 소리 다닥다닥 다닥다닥
대청마루에서 긴 골목을 돌아
어머니가 마중하듯
버선발로 뛰어 나왔다
두 손 회합으로만 울리는
저 소리 다닥다닥 다닥다닥
할머니와 어머니가 홑청의 깃을 잡고
끝과 끝을 평평하게 당기던
고된 하루도 소리 속에 삭혀서
고운 결을 펴기도 하셨던가
애잔하게 울려오는 저 소리
하늘까지 하얗고 넓은
어머니 품처럼
그 소리에 젖었다
여명 속으로
허말임
손수레 한대 지나간다
질박한 손에서
모락모락 가슴 데우는 소리
반듯하게 잘려진
잊고 있었던 소리
긴 골목길에 머문다
댕그렁 댕그렁
풍경처럼 매달린
그의 하루가
새벽 잠 끝에
있다
눈물이 맵다
허말임
사랑방 닫힌
문틈 사이로 빠져나간
아버지의 붉은 온기
문을 여니 흙냄새만 훅 풍겨온다
거미들은 방 주인이 된 듯
사방에 줄을 치고
영역을 침범한
내 얼굴에도 줄을 친다
걷어 내도 달라붙는
몸 속에 숨어 잇던 인연 줄이
같이 줄을 뽑는다
마당 한 켠 멍석 위
수없이 많은 고추는
가을볕에 바삭 말라가는데
아버지가 찾던
고추는 어디에도 없었다
축축해진 아버지 부재를
가을볕에 꺼내 놓았다
고추가 뭐길레
고주, 고추 하던 생전의 말씀
말리는 내 눈물이 더 맵다
멀리한 꽃
허말임
꿈 같이 지나간 그와의 인연은
여문 밤 한 톨만 남겨 두고 떠났다
가슴으로 궁글린 세월
외동아들 무럭무럭 자라서
한 그루 밤나무 되더니
손자손녀 주렁주렁 열게 했다
보기만 해도 좋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알밤들
가끔은 가시처럼 찌르는 날들 있어
새상이 그렇다고, 그렇다고
한숨 속에 삭힌 말을 묻기도 했다
청상의 시간들을 은장도처럼 품고
살았다는 그녀
지금도 기억에 갇힌 그 사람 그리는 걸까
멀리했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향기를 내고 있는 유월 숲 속
별들만 바쁘다
개망초
허말임
그리움마저 접어 버린 것 같은
여름꽃이 성주사지*에 피었습니다
돌고 도는 발길 속을 떠나지 못해
피고지고피고지는 그들
꼿꼿한 대궁 위에 하연 기다림
둥둥 띄워놓고 바람결에 흔들려도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네요
내생에 본분을 다한다는 것
꽃을 피웠을 때
그들을 꽃이라 불렀지요
목까지 차오르던 세속의 일들이
안에서 망초처럼 하얗게 터질 때
성주사지에서 아득한 길을 묻습니다
모두가 떠나버려 고요한 이 터전
그래도 피고지고피고지다가
주인처럼 제자리 지키고 있네요
벌과 나비가 손님처럼 찾아와
여름 축제를 열고 있는 곳
천년 동안 서 있는 저 석불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충남 보령에 있는 절터
봄
허말임
제비꽃
라일락
목에 두른
머플러
보라색이다
나 보라는 듯 핀
그들과
하나가 된
꿈결
풍란
허말임
우리꽃식물원에서
만난 꽃
여기저기 풍란이다
아슬한 자리에 붙어
살아온 내력도
당당하게 뿌리째 내놓고
꽃을 피운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저 꽃만 같았으면
그만큼 자리에서
저 만큼만 피웠으면
침묵을 배우다
허말임
야트막한 뒷간 아래
대나무 같은 고집을 심고
백년이 넘도록
님의 침묵이 걸어다닌다
믿지 않는 말들이
우왕좌왕
혼돈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채찍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고삐를 어디다 매어야 할지
하안거에 든 소나무만 푸르다
인연과 인연을 거쳐
사립문 열고
툇마루에 앉는 날
얼기설기 올 사이로
무심한 바람만 드나들고 있다
고삐를 놓친 말들과 소들이
주인 잃은 채 뛰고 있다
어둠이 오기 전에 찾아야 하는 소
침묵을 가르치는 학교*가
홍성에도 있었다
*만해 한용운 생가
동갑내기 정원사
허말임
물향기수목원에서 만난 쉰 살의 해송분재, 품 넓혀 갈수록 그릇이 바뀌었을 나무, 흙에 뿌리내린 나무와 마주보며 무슨 생각했을까. 주어진 그릇에 순응하라 동여매고 잘라내며 구부리는 질책, 천천히 정원사에게 길들여진 세월이 우주를 품과 거인처럼 우뚝하다.
내 안에 정원사가 숨어 있었다., 이게 웬 일 손가락 관절부터 구부리며 곧추세운 척추를 기울게 한다. 순응하지 못한 고집이 앙탈을 부린다. 좁아진 그릇에서 약해진 뿌리가 흔들린다. 자라나는 고집 이것만은 잘라달라고 스스로 가위를 맡긴다. 백년도 못가 그 고집도 쓰러지고 말걸. 아픈 농담 던져 주고 숨어있는 세월이란 정원사.
소망슈퍼
허말임
손님 없어도 문 닫을 수 없어
습관처럼 문을 여는 아저씨
종종걸음 바쁘던 처음의 소망
점점 줄어드는데
대형마트 빼앗긴 세상의 흐름을
그래도 따뜻하게 진열한다
기다림만큼 형벌도 없을 것이다
긴 한숨 먼지처럼 쌓여가도
툭툭 털어내며 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의 소망은 언제쯤 끝날까
기다림이 골목을 밝히다가
드문드문 손님 발걸음에 활짝 웃다가
하루가 저무는 그곳
가족들 오롯이 앉아있는 아저씨 어깨가
십자가처럼 빛을 내고 있다
작은 소망들이 모여 사는
골목 끝에서
거짓말
허말임
바다에서 물질하고 잡아온
해산물을 손질하는 엄마
손님으로 온 사위와 딸에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며
퉁퉁 부은 손으로 요리를 한다
자식 먹일 생각이 앞서
환한 거짓말을 하는 엄마
엄마들만이 할 수 있는 거짓말
아픈 다리도 슬쩍 싱크대에 기대어
마음 편에 서 준다
자식들 떠나고 나면 혼자 끙끙
파도 속에 묻으면서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늙은 엄마
연뿌리
허말임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비오면 질퍽한 대로
살아가는 여름꽃 앞에서
그래도 버릴 수 없는
간곡한 발원
새벽부터 치성을 올리고 있다
고인 시간은 순간이란다
일심으로 키운 자식
여물어라 밀어내며
품안에서 벌어지는 손
고인 시간이 마르고
캐어낸 여름의 길
숭숭 뚫린 가슴에 숨겨둔
너도 그랬구나
길은 안에 있었구나
부러지고 삭아진 마음들이
진흙탕 속에서
숨을 쉬고 있었구나
목련꽃 핀, 교정에서
허말임
이른 아침 할머니가
여고 운동장을 걷고 있다
몸이 갸우뚱 하는 걸음 사이로
목련 봉긋 솟은 꽃망울 사이로
아무리 돌아가도 갈 수 없는
길이 멀어 진다
운동장 원심에서 느려지는 걸음
등교하는 여고생들 사이로
마음만 달려간다
터질 것 같은 교복 속에
그녀들의 소망도 목련처럼 피어나
눈 깜빡할 사이 하르르 떨어질
꽃잎 같은 날들이라고
손사래 치며 앞서가는 세월이
운동장 밖으로
할머니를 밀어내고 있다
내 모습이 저게 아니라고
걸음은 자꾸 느려지고
교정은 피어나는 꽃으로 가득하고
겨울편지
허말임
첫 추위가 왔다고
또 계절이 간다고
편지가 왔다
아직도 가슴 두근거리는
읽기도 전에 패이지가
다 녹아버리는
첫눈이 내리고 있다
벗어봐요
허말임
고향이 같은 경상도 부부가
산을 오른다
모락산 정상을 오르는 동안
살갑게 손 한번 잡아주지 않고
힐끔 뒤돌아 볼뿐 참 멋없다
정상에서도 별말 없이
바람만 가득 쐬고 내려오는 길
다리가 지칠 때쯤 도착한 정자
두 사람만을 기다린 듯
쉬는 사람 아무도 없다
아내는 등산화를 벗고 정자에 누웠다
화끈거리던 발의 시원함
남편과 나누고 싶어
신발 벗고 누워봐요가, 그만
바지 벗고 누워봐요 였다
왱, 남편 왈 책임질래 대낮에?
뭔 책임요
배꼽 잡은 두 사람 웃음소리에
도토리 놀라 툭툭 떨어지고
주위를 날던 벌 한 마리도 뭔 일이냐고
왱왱 침을 놓으려 한다
가시연
허말임
삼복더위 둥글게 말아
둥둥 떠 있는 잎
주름진 길과 가시밭길 뚫고
나온 꽃이 가슴을 뚫는다
그 아득한 길
어머니 몸 빌려 인연 되던 날
무중력 탯줄을 따라
뿌리 내리고 잎이 되고
가시를 키운 인과는
까마득히 몰랐었다
인연이 업연 되어
호수에 가두어버린 주름진 세월
깊숙이 빠져버린 두 발은
헤어나지 못해
붉은 마음만 물 위에 뜨고
맺어진 인과의 씨앗 톡톡 터지며
꽃 피울 수밖에
백목련
허말임
성당 뜰 안
막 올라오는 봉오리
밤에 보니
목화솜 올려놓은 트리 같다
아 하 그래
십이월이 아니어도
그곳은
미사를 올리고 있었구나
가지마다 늘어난
걱정과 한숨을 품으로 안아
바람 불면 떨어질까
뿌리에서 붙잡은 채
기원도 봉긋하게
소망도 봉긋하게 들어 주는
천사 같은 하얀 손으로
기도 올리는
한 그루 목련은
숨어들다
허말임
숲 속 언덕길에
가쁜 숨 내려놓고
광산사 일주문 들어서니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하얀 뜨락에
무심한 행복이 가득하다
소리 죽여도 따라오는
자박자박 저 발자국 소리
내가 흘린 것이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염주알처럼 꿰어진 일상
늦가을 풍경 속으로 깊이
숨어들어도 따라오는
자박자박 저 소리
꽃잎보살
허말임
숨 헉헉대며 올라온 망해암
연둣빛 잎들 손처럼 흔들어 주어
길 위에 모두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법당 안 부처님 친견하고 나서
발길은 어느새
삼성각에 와 있었다
산신님 앞에 서서니
슬며시 솟는 자식에 대한 기원
약수에 입 헹구고
마음도 씻어 내렸는데
찰라 같은 몇 분 사이에
초심을 잊어버리고
무릎 꿇은 어미
한동안 일어날 줄 모르는 그녀 곁에
날아온 벚꽃잎 한 장
가볍게 내려앉은 꽃잎에게
부끄러움 들킨 것 같아
고개 들지 못하는데
열매를 위해
나를 버린 꽃잎들은
바람따라 눈처럼 날리고 있다
뒤란의 기억
허말임
화려한 건물 앞에 서면 그곳의 뒤편이 궁금해진다. 손님을 맞는 안내자의 배꼽인사까지 정중히 받고 들어서면 더더욱.
어릴 적 내 고향집은 돌담 안에 과일나무가 다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나무들이 내 맘을 알아주는 뒤란에서, 수없이 행렬을 이룬 개미떼도 만나고 이슬방울 쳐진 거미줄에서 생과 사도 보았다. 그해 겨울 지병을 앓던 오빠가 먼 세상을 떠난 후, 길이 멈춰 버렸다, 길이 보이지 않아 봄날 우물가 너럭바위에 앉아 맘껏 울어도 미나리꽝에 미나리는 잘 자랐다. 물만 주면 쑥쑥 자라서 베인 상처 옆에 새순이 돋았다.
화려한 건물 뒤켠에 서면 버려진 것들이 상처처럼 보일 때가 있다. 오빠 떠난 자리에 버려야만 상처가 아물던 거, 이제야 편안해진 뒤란의 기억이다. 가끔 가슴에서 발끝까지 싸아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뒤란에 서면, 걸어온 내 뒷모습이 궁금해진다.
왕벚꽃
허말임
자연이 하는 일도
인연 닿아야 볼 수 있는 꽃
벚꽃보다 늦게 피는
왕벚꽃 보러
가는 봄 붙잡고
개심사를 갔습니다
고즈넉한 산사
꽃등 주렁주렁 매달고
꽃잔치가 열렸습니다
부처님 모습처럼
환한 마음의 길 밝혀주는
꽃그늘 아래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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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원고를 보내고 독감이 왔다.
허전한 마음과 앓았던 시간 속으로
유년의 기억들이 문병을 와
삐비꽃 핀 언덕으로
자운영꽃 핀 들녘으로 불러낸다,
그런 고향에서
문학의 꿈을 키우다 젊은 나이에
먼 길 떠난 오빠는 내게
슬픔 대신 문학의 씨앗을 안겨 주었다.
그것을 싹 틔우게 해준 스승을 만나
슬픔과 화해하며 살아온 흔적을
네 번째로 시집으로 묶었다.
누군가에게 씨앗이, 열매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마음으로,
2015년 9월에
허 말 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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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말임 詩集 [※소리에 젖다※]
[ 해설 ] -
일상의 깊이를 말하다
- 허말임, 선線과 선禪 사이
배준석(시인, 문학이후 주간)
연륜을 말하다
詩는 언어로 말하고 노래하고 묘사해서 감동시키는 것이다. 참고 참으며 꼭 필요한 것인지 효과 있는 것인지 분위기 맞는 것인지 오래 잊히는 것인지 읽는 사람들 가슴을 두근거릴 정도로 흔들어 놓을 수 있는지 하나하나 가려 정제시키는 것이다. 때로 깎고 다듬고 삭히고 우려내서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 쓸 만하면 얼마나 좋으랴. 기껏 수고를 무색하게 부족하거나 남에게 내놓기 부끄럽기가 태반이거나 아예 혼자 숨겨 놓거나 그예 찢어버리는 일도 다반사다.
그나마 인생 살다보면 부끄러운 일이 있어도 마음 다잡고 다시 살아가듯이 詩앞에서도 다시 용기를 내세우게 된다. 한 권의 시집을 만든다는 것은 그래서 보퉁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것 모르고 마구 시집을 찍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는 사람은 아는 일이 병이 되어 몸살을 앓는 세월이 길기만 하다.
이미 세 권의 시집을 상재한 허말임의 네 번째 시집은 얼마나 큰 용기를 담보로 한 것인가. 종전과 다르게 얼마나 정제된 언어로 말하는가. 그 저력으로 어떤 사연을 가려내어 쓰고 있는가 등등이 궁금하다. 그 기대를 내심 부풀리며 詩 속을 파고들어 본다. 애정이라는 방편으로.
시력 20년에 네 번째 시집은 많은 양이 아니다. 시집 한 권 내지 않고 평생 버티는 시인을 보면 용기가 없음인지 천성이 게으른 것인지 단판을 지으려고 벼리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대개 변명 같은 이야기를 詩 앞에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무늬만 시인도 많기 때문이다.
詩는 말을 참는 것이다. 할 말, 안 할 말 구분 못하고 마구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참다 참다 터져 나오는 한마디가 詩 구절이다. 그것도 비유의 단계를 지나 선의 경지에 오른 언어는 더 짧을 수밖에 없고 짧은 만큼 더 많은 울림을 전달해 준다. 그때 인생의 깊이까지 느낄 수 있다면 감동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권력이나 금력으로 또 다른 완력으로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도 많고 그 힘에 휘둘리거나 그 힘에 붙어 생색내려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 힘이란 것은 감동과 거리가 먼 존재이다. 감동은 스스로 울림을 얻어 생기는 공명이다. 그래서 여운이 오래 간다. 아니 평생 잊지 않게 된다.
그러한 감동으로 기억되는 순금 같은 詩를 쓴다는 것은 모든 시인들의 염원이다. 오래 깊은 생각으로 우려낸 맛이라야 느낄 수 있는 그 감동을 찾아 시인들은 평생 글의 밭을 서성이며 생각의 씨앗들을 소중히 뿌리고 키워나가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는 그러한 감동의 언어들이 여기저기서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댄다. 도무지 감동할 것 없이 각박한 세상에서 허말임이 남긴 언어들은 더 큰 가치를 발하고 있다.
첫째는 詩를 대하는데 있어 계산하지 않고 욕심 앞세우지 않고 꾸준하고 순수한 마음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둘째는 불심佛心이다. 불교는 중생들을 위한 종교이다. 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종교가 아니다. 불심이 녹아들어 詩 속까지 녹아들어 자연스레 만들어진 의미가 편안함마저 주고 있다.
셋째는 과격하거나 소심하지 않은 중용의 무게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기울지 않고 상호 아우르는 마음 씀씀이는 詩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차곡차곡 쟁여있는 시집을 펼쳐 본다.
손수레 한 대 지나간다
질박한 손에서
모락모락 가슴 데우는 소리
반듯하게 잘려진
잊고 있었던 소리
긴 골목길에 머문다
댕그렁 댕그렁
풍경처럼 매달린
그의 하루가
새벽 잠 끝에
있다
-「여명 속으로」전문
시집 첫 장에 수록된 작품이다. 시작에 걸맞게 여명 깨우는 일을 요란스럽지 않게 두부 장수 종소리로 대신하고 있다. 이 한 작품으로 허말임 시인의 詩세계를 엿볼수 있다. 언어의 절제, 선禪의 경지에서 나온 언어는 세 권의 시집 위에 세워진 든든한 울림이다.
목까지 차오르던 세속의 일들이
안에서 망초처럼 하얗게 터질 때
성주사지에서 아득한 길을 묻습니다
모두가 떠나버려 고요한 이 터전
그래도 피고지고피고지다가
주인처럼 제자리 지키고 있네요
- 「개망초」에서
빈 절터를 지키고 있는 개망초, 너무 흔해서 ‘개’자를 붙인 한갓 흔한 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개망초는 부처님의 현신 같은 느낌이다. 허말임 시인에게 있어 불심은 시심詩心이다. 무소유는 유용한 의미가 된다. 힘든 삶을 포근히 감싸주고 성찰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속깊은 佛心 때문이다.
벚나무 아래는
활짝 핀 그들의 말을 듣고 싶어
봄나들이 나온 사람들
안달이 났다
참다 참다 나온 저 하얀 말들
나폴나폴 날고 있다
귀보다 눈으로 먼저
들리는 소리 잡으러 다가서는데
햇살이 눈을 가린다
-「햇살이 눈을 가린다」에서
꽃은 좋은 소재가 아니다. 많은 시인들이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꽃은 좋은 소재가 된다. 남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꽃은 시인을 시인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소재이다. 예쁘다고 아름답다고 사랑이라고만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꽃이다. 벚꽃 난분분한 시절도 이렇듯 감정을 버무려 한 편의 신선한 詩로 만들어 놓는 허말임의 솜씨에 벚꽃구경한 것과 다른 또 다른 감탄을 하게 된다.
유비를 말하다
유비는 詩의 생명이다. 그 속에서 운용되는 일들이 詩를 만들어 준다. 시인은 결국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연결해 주느냐에 달려 있다. 이를 터득한 사람이 시인이요, 이로 인해 감동과 의미를 남겨 준다면 좋은 시인이다.
이른 아침 할머니가
여고 운동장을 걷고 있다
몸이 갸우뚱 하는 걸음 사이로
목련 봉긋 솟은 꽃망울 사이로
아무리 돌아가도 갈 수 없는
길이 멀어 진다
운동장 원심에서 느려지는 걸음
등교하는 여고생들 사이로
마음만 달려간다
터질 것 같은 교복 속에
그녀들의 소망도 목련처럼 피어나
눈 깜빡할 사이 하르르 떨어질
꽃잎 같은 날들이라고
손사래 치며 앞서가는 세월이
운동장 밖으로
할머니를 밀어내고 있다
내 모습이 저게 아니라고
걸음은 자꾸 느려지고
교정은 피어나는 꽃으로 가득하고
-「목련꽃 핀 교정에서」전문
그냥 그림 한 폭 보는 것처럼 느껴도 좋다. 굳이 할머니와 여고 운동장이 갖는 대조관계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덧없는 세월을, 노인문제를 꺼낼 이유도 없다. 스스로 읽고 느끼면 된다. 이러한 시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보는 눈이 그윽해 졌기 때문이다.
손으로 겨냥해
재미로 잡은 고 작은 놈이
내 손에 똥을 쌌다
-얼마나 놀랐으며
어디선가 끌끌 혀 차는 소리 들려온다
살기 위해 똥 싸는 것이
어디 방아깨비뿐이냐고
-「방아깨비」에서
방아깨비에 의한 사람 확인이다. 사람 이야기로 환원해 보면 재미있다. 똥 싸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오죽하면 똥을 쌀까. 살다보면 그런 일 겪게 된다. 심하면 피똥도 싼다. 방아깨비나 사람이나 매한가지다. 비유의 맛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해학을 논하다
詩는 여유다. 한가로움이나 나태와 다른 것이다. 여유이되 삶속에 예민한 촉을 꽂아두고 있어야 한다. 겉으로는 아닌 척도 해야 한다. 그럴듯하게 위장도 해야 한다. 포장, 변장……. 詩에서는 다 좋은 말이다. 시적 여유는 소재를 낚아채는 낚싯바늘과 같다. 민첩성, 날카로움도 있어야 한다. 여유를 잘못 인식하면 미련한 시인이 된다.
고향이 같은 경상도 부부가
산을 오른다
모락산 정상을 오르는 동안
살갑게 손 한번 잡아주지 않고
힐끔 뒤돌아 볼뿐 참 멋없다
정상에서도 별말 없이
바람만 가득 쐬고 내려오는 길
다리가 지칠 때쯤 도착한 정자
두 사람만을 기다린 듯
쉬는 사람 아무도 없다
아내는 등산화를 벗고 정자에 누웠다
화끈거리던 발의 시원함
남편과 나누고 싶어
신발 벗고 누워봐요가, 그만
바지 벗고 누워봐요 였다
왱, 남편 왈 책임질래 대낮에?
뭔 책임요
배꼽 잡은 두 사람 웃음소리에
도토리 놀라 툭툭 떨어지고
주위를 날던 벌 한 마리도 뭔 일이냐고
왱왱 침을 놓으려 한다
-「벗어봐요」에서
생각과 달리 헛말이 나오면 나이가 든 것이다. 그런 일이 잦은 사람들은 남 일 같지 않아 공감이 된다. 공감은 감동과 친구다. 입가에 웃음이 번지면 이 詩는 성공이다. 그런데 웃지 않을 재간이 없게 만들어 놓았다
나이 들면 맞춤법도 아른아른, 헛말은 스멀스멀, 기억력은 아득해 진다. 스스로도 기가 막혀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 많아지면 나이 먹었다는 증거다. 경상도 부부를 등장시킨 것도 재미있다. 무뚝뚝한 사람들 사이에 생긴 일이라 더 웃긴다. 허말임 부부가 바로 경상도 사람들이다. 이런 여유는 마음의 여유도 여유지만 시적 인식이 앞서야 한다.
그런데 이 詩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나이 들어도 정신이나 마음은 그대로이다. 아직도 책임지기를 바라는 표현에서 나이 들어 생기는 쓸쓸한 빈 마음을 짚어내는 것이 오히려 의미가 아닐끼.
환자들의 소리들이 살아 움직인다
줄무늬 커튼너머 들려오는 소리들
드렁드렁 드러렁, 코 고는 소리
끙 끙 앓는 소리, 아이쿠 시원타 하는 소리들
그 속에 스며들어 설핏 잠이 들었던가
꿈결처럼 들려온 간호사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김순득 할머니 침대에 누우세요”
세상에 같은 이름 많다고 하지만
엄마이름을 한의원에서 듣다니!
칸막이 사이에 두고 치료 받는
할머니의 얕은 숨소리가 애잔하게 넘어온다
-「한의원에서」에서
인생을 아는, 詩를 아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는 쉬우면서도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신인 때는 긴장하고 억지로 두드려 맞추다 보니 어딘가 딱딱하고 억세고 느낌은 잘 전해지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인생을 배워가는 단계이다. 詩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맥 풀어진, 보잘것없이 헤픈 것이 아니다. 한의원에서 들은 엄마 이름, 순간 詩가 찾아 온 것이다. 시인은 늘 시인이 아니다. 詩를 쓸 때 시인이다. 딴 일에 골몰하고 딴 일로 움직이며 詩를 쳐다보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면, 그런 일이 계속 된다면 그때는 당연 시인이라 하지 말아야 한다. 시인은 시인일 때가 있고 그래서 일상인일 때가 있다. 일상인으로 살다가도 詩를 찾아내고 詩곁에 있을 때 시인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인으로 있을 때에도 시적 감촉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 촉이 항상 날카롭게 빛나야 한다.
경계를 넘어서다
일정한 선線을 긋는 것보다 자연스러 선禪을 넘나들며 사는 것이 문학이다. 어떻게 단칼에 무 자르듯 살아가는 일들을 잘라낸단 말인가. 그러나 그 선線禪이라는 것이 살다보면 서서히 높아지며 경계가 뚜렷해지는 경우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확연히 보이는 선線이 분명 있다. 선禪의 경지에 이른 것도 이와 같다. 어느 사이 알 수도 없이 저간의 세월과 노력과 깊은 사유가 만들어 낸 사람에게서 느끼는 그 경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은은하게 베어들어 감동을 전해준다.
누구 집일까
대대로 감자밭 일구던 사람일까
이제 호미를 놓고 저린 무릎 펴며
들어간 무덤은 꽃밭이 되었다
삐비가 피고 유채와 장다리 씨앗이
풀씨처럼 날아가 꽃을 피웠다
타는 속 더 검게 할 수 없도록
검은 돌만 모여 경계 짓는 곳
낮게 엎드려 바람을 맞고
안개 헤치며 그리고 햇살을 받던
제주도의 꽃무덤은
생과 사가 둘이 아니었다
감자밭 속에서 감자들의 옹알이를
생전처럼 듣고 있었다
-「꽃무덤」에서
죽어서도 꽃무덤 속에 있다는 것은 생전에도 꽃 속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살아 천국이 죽어서도 천국이라면 사는 일에 더 애정을 가져야 한다. 비록 감자밭을 매고 감자를 캐며 힘들게 살았지만 그 저린 다리 펴고 누운 자리가 천국 아니던가. 더구나 평생 땀 흘린 감자밭에 영원의 자리 들었으니 이보다 더한 천국이 어디 있을까. 천국은 어림없을 것 같이 허황된 자리가 아니라 평생 내가 살던 감자밭이다. 이를 깨닫는 일이 벌써 이승과 저승의 경계마저 무너뜨려 놓는다. 이 정도 깊이라면 허말임은 이미 선線禪의 경계마저 넘어선 것이다.
진료 마치고 나온 노부부가
약국에서 처방전을 내고 있다
한쪽으로 기운 두 어깨 사이로
젊은 약사는 두 봉지의 약을 건넨다
약 먹기가 힘들다며
떨리는 손으로 더 움켜잡는 약봉투
기우뚱 약국 문을 나서는데
약봉투가 생의 끝자락처럼 흔들린다
그랬다. 무거운 것들 다 내려놓았는데
가벼워진 그 자리마다
옹이진 세월이 삐걱이며
휴우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따스한 겨울이 아닌 쓸쓸한 나날들이
이제 수천 번 걸러진 바람 속으로
노부부의 길을 위로 하는 것은
쌓여가는 약봉투들이었을까
뒤 따라 걷는 저 길 위에서
서로 기댈 수 있는 노을을 본다
아직도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는 얘기
도란도란 남아 있다는 거
슬프도록 다정하다
-「노을이 다정하다」전문
인생은 끝자락에 섰을 때 온전히 보이는 것, 노부부를 통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詩의 의미는 확인된 셈이다. 권력도 명예도 물질도 다 소용없는 나이, 그냥 노을 그 자체가 아름다운 시절이 왔을 때 두 손 꼭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슬프도록 다정한 장면이 어디 있으랴. 영화 한 장면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으랴. 마지막 행의 모순어법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이야기다. 그래서 더 강한 여운을 남겨 놓는다.
세상사 떠난 선禪의 경지가 무슨 소용이 있고 초월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세상사 하나하나 헤아리며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애틋한 사연들을 찾아 선의 경지에 올려놓는 모습이야말로 경지다운 경지임을 허말임의 詩는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詩 읽는 눈을 내내 밝혀 준다.
눈 뜬 것이 내 이권이나 욕심을 밝혀내기 위한 것이었다면 부끄러워할 진저, 눈을 밝힌다는 것은 나를 알고 내 이웃을 생각하며 나보다 남을 더 깊이 있게 생각하기 위함임을 깨닫는다면 이는 늦게 깨우쳐도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허말임은 네 번째 시집에서 그동안의 연륜과 시적 유비, 생각의 깊이와 해학의 여유, 깨달음의 경지를 편편히 수놓고 있다. 이러한 경지라면 그의 남은 시작활동에도 격려와 기대를 함께 가져도 결코 큰 욕심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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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세상사 떠난 선禪의 경지가 무슨 소용이 있고 초월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세상사 하나하나 헤아리며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애틋한 사연들을 찾아 선의 경지에 올려놓는 모습이야말로 경지다운 경지임을 허말임의 詩는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詩 읽는 눈을 내내 밝혀 준다.
― 배준석 시인의 「해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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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말임 시인∥
∙ 경남 진주시 수지면에서 아버지 허남숙, 어머니 김순득의 1남 6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 2005년『문학산책』봄호에 시 「봄비」외 2편으로 등단했다,
∙ 2011년 제5회 불교청소년 도서저작상(수상작품 『마음에 틈이 있다』)을 수상했다
∙ 시집으로『따라오는 먼 그림자』『저 낮은 곳의 뿌리들』『마음에 틈이 있다』
∙ 에세이집『달팽이집 같은 업을 지고 』가 있다.
∙ 현재『문학이후』자문위원, 문후작가회, 이후문인클럽, 안양문인클럽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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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시집 제목이 2006년도 김기연 시인의 시집 제목과 같고 이 "소리에 젖다"란 문장이 김기연 시인의 창작 시라는 것을
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