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11월18일(수)흐림 간혹 보슬비
연경보살 운전하여 대원사로 가서 계곡 단풍 감상하다. 이어서 내원사 참배하다. 주지 소임 맡은 일광스님 뵙고 차 마시다. 대웅전 앞 기단에서 고려시대에 德山寺덕산사라고 명기된 기와 조각이 출토되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청정한 각성. 절대적인 사랑, 무한한 빛, 무한한 포용 가운데 살아간다. 다만 한참씩 이것을 망각하고 헤맬 뿐이다. 그러나 알아차리는 즉시 축복받은 평화에 다시 안긴다. 당신은 텅 빈 공간에 외로이 떠 있는 별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에 안긴 우주의 아이이다. 오직 감사할 뿐이다.
2020년11월20일(금)맑음
김해공항에서 비행기 타고 제주 가다. 지월거사 마중나오다. 산방산 바라보이는 곳 숙소 <두블랑>에 들다. 남강미락에서 점심 먹다. 마라 해양도립공원을 한 바퀴 산책하다. 바람이 세차게 불다. 멀리 가파도와 마라도 바라보다. 저녁에 명상하고 차 마시다.
房山兀然孤, 방산올연고
眉月出雲笑; 미월출운소
夜來暗橘香, 야래암귤향
心中旣濟度. 심중기제도
산방산은 외로이 우뚝한데
구름 벗어난 초승달 눈웃음 짓네
밤새 귤 향기 은근히 전해오는데
마음은 이미 벌써 세상을 건넜음이라
2020년11월21일(토)맑음
오전에 추사기념관, 오후에 꽂자왈 도립공원 산책하다.
-추사 선생이 유배지에서 부채에 쓴 시-
孟浩然맹호연《途中遇晴도중우청》가는 도중에 날이 개다-에서 영감을 얻어 짓다.
天開斜景遍, 천개사경편
山出晩雲低; 산출만운저
暢以沙際雁, 창이사제안
兼之雲外出; 겸지운외출
野老念牧童, 야노념목동
倚杖侯荊扉. 의장후형비
하늘 개이자 저녁 햇살 두루 퍼지고
산에서 나온 저녁 구름 낮게 깔린다
모래톱에 옹기종기 사이좋게 기러기 내려앉고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네
촌 할배 어린 목동을 염려하여
지팡이 짚고 사립문에서 기다린다
추사 선생을 그리며 - 원담
橘畔椰靑望海平, 귤반야청망해평
披雲落照一道光; 피운낙조일도광
風吹浪白思老秋, 풍취낭백사노추
遊藝究佛歲寒松. 유예구불세한송
귤밭 옆 푸른 야자수 아래서 수평선을 바라보니
구름 열치고 쏟아지는 한 줄기 광명이여,
바람불어 하얀 물거품 일어남에 추사 노인을 생각한다
예술에 노닐며 불교를 연구하던 겨울 소나무 같으신 분!
2020년11월22일(일)흐림 오후 늦게 바람불다
동백길 도립공원 산책하다. 왈종미술관 다녀서 정방폭포 구경하다.
잡히지 않는 것이 잡히는 영역으로 들어왔다가 잡히지 않는 것으로 물러난다.
텅 빈 것이 채워진 영역으로 들어왔다가 채움을 중지하고 텅 빔으로 돌아온다.
진리가 인간세계로 들어와 타자로 존재하면서 고통받는다. 그것은 은유의 눈보라 속에 서 있다. -첼란 시인
텅 빔은 아직 오지 아닌 것(not yet)이 아니다. 텅 빔은 언제나 이미(always already) 거기에 없이-있고(無有而有), 있이-없다(有無而無). 텅 빔은 항상 벌써 내 안에 있는 영원한 타자이다. 그것에 옷을 입힐 수 없다. 그것은 벌거벗은 주체이다. 그것은 자유이다.
2020년11월23일(월)맑음
제주를 떠나 김해공항에 도착하다. 정림한정식에서 점심 먹고 진주로 돌아오다.
밤에 몸살 증세에 시달리다. 한기와 열이 나다. 배 아프고, 머리에 열나고 땀이 나서 뒤척이다. 송계거사 와서 침 맞다.
2020년11월24일(화)맑음
송계거사 와서 침 맞다. 밤에 계지탕을 끓여와 마시다.
힐링은 가짜다. 개인의 심리적 고통은 심리요법으로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병리를 유발하는 구조를 개혁하는 정치요법과 병행할 때 가능하다.
인간의 마음은 정숙한 노처녀(super-ego)와 발정난 원숭이(libido) 사이에 끼여 신경질적이 된 은행원(ego)이 심판을 보는 어두운 지하실이다. -프로이트
인간의 마음에 깊은 무의식의 세계, 인류의 집단-무의식에 닿아 있다. 개별 인간의 생은 우주를 닮아있다. 무-시간의 영역인 무의식의 현현이 각자의 생이다. 무형상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로 뛰어든 최초의 사건이 탄생이다. 우리의 생은 불멸의 무한한 세계가 유한한 세계 속으로 뛰어든 사건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생은 끊임없는 성숙을 지향하는 과정이다. 그 지향이 바로 ‘개성화’이다. 생은 환희이고 생명은 경이로움이다.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펄럭거리며 비상하는 저 새를 보라. 새가 날기 위하여 얼마나 오랫동안 새가 되는 꿈을 꾸었을까? 우리는 인간이 되고 싶어 얼마나 긴 시간을 인간이 되려는 꿈을 꾸었을까? 인간으로 백 년을 살기 위해 백만 년 동안, 아니 무량한 세월 동안 꿈꾸어 온 존재이다. 백 만년 겨울잠이란 기나긴 제의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 주어진 것이다. 자기 인생의 밑바탕에는 백 만년의 지난한 세월을 견뎌온 뿌리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단지 백 년을 사는 삶이 아니다. 우리는 백 만년을 살아가는 푸른 생명-나무이다. 그 생명-나무가 가장 찬연한 열매를 맺는 순간, 그 절묘한 순간이 바로 지금의 생이다. 그러기에 생은 저 영원한 빛의 드러남이다. 또 지금의 생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구현(Individuation, 개성화=자아실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나아간다. -칼 융
페르소나persona는 자아ego와 외부세계를 연결해주는 중재자이고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는 자아와 내부세계를 연결해주는 중개역할을 한다. 자아는 페르소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 사회적 배역을 한다. 그러나 어느 한 페르소나에 몰두해서 그것과 과도하게 동일시하면 병이 된다. 페르소나 뒤에 숨은 그림자shadow를 알아차리고 이해하고 인정하여 변형해야 한다. 다양한 페르소나를 적재적소에서 썼다 벗었다 할 수 있을 때 자아(신의 형상을 닮은 자기 Imago Dei Self)를 실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