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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8월 15일 토요일
[(백) 성모 승천 대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올리셨습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도 기뻐하며,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승천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의 표징을 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의 맏물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다는 인사를 듣고 주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른다(복음).
제1독서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9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5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10 그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20-27ㄱ
형제 여러분, 20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
24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입니다.
25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27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성모님께서는 하늘로 불려 올림을 받으셨습니다. 소박하고 겸손하신 분께서 가장 높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그 비결을 오늘 복음의 성모 찬송에 나오는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비천함’으로 옮긴 그리스 말은 ‘겸손’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화려한 것은 우리 눈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겉모습을 보시지 않고 마음을 보시며(1사무 16,7 참조),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야고 4,6 참조). 성모님의 겸손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또한 우리는 성모님의 겸손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손이야말로 우리를 하늘로 이끄는 길임을 느끼게 됩니다.
‘겸손’을 뜻하는 라틴 말 ‘후밀리타스’는, ‘땅’이나 ‘흙’을 뜻하는 ‘후무스’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늘에 다다르려면 땅과 같이 낮은 곳에 머물러야 하나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재능이나 재산, 우리가 이룬 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보시기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신다.]”(루카 1,52)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겸손한가?’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기를,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고 노력하는가?’ ‘나는 성모님처럼 하느님 말씀을 귀담아들을 줄 아는가? 아니면 내 이야기만 하고 내 바람을 들어 달라고만 하는가?’
성모님께서 겸손한 마음으로 가장 높은 데로 오르셨음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성모 승천이 나와 상관없는 사건이 아니라 나도 그렇게 초대받을 수 있는 현실임을 기뻐합시다. 그렇게 오늘 대축일을 지내기를 바랍니다.(유청 안셀모 신부)
마리아의 18번곡 마니피캇!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승천대축일 복음은 우리를 엘리사벳의 집 아인카림으로 초대합니다. 마리아께서 힘차게 부르셨던 마니피캇(Magnificat)을 다시 한번 듣게 합니다.
성모님께서 지니셨던 겸손의 덕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특별히 마니피캇 전체의 흐름을 주도하는 분위기는 그녀가 평생 지니고 있었던 겸손의 덕입니다.
성 암브로시오 교부는 마니피캇에 대해 ‘성모님의 완벽한 겸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찬가’라고 강조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6-48)
마리아는 노래 서두부터 철저하게 자신을 낮춥니다.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신원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자신은 찬미를 받을 자격이 조금도 없는 존재이라는 것, 자신은 태생적으로 종이며 본질적으로 피조물이라는 것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주인이신 주님께서 종인 자신을 굽어보셨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굽어보심은 자신이 잘 나서가 아니라 주님 자비의 시선 때문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8-49)
마리아는 겸손을 가장하지도 않았으며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거절하지도 않았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값진 보물로 여기거나 신데렐라처럼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과분하고 크신 하느님 은총 앞에 두려워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영광과 위대함이 모두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것을 미리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겸손의 덕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겸손의 의미는 더욱 심오해집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겸손의 덕을 쌓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 또 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큰 것인가, 그분의 업적은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크신 하느님에 비해 나란 존재는 얼마나 작은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삼라만상을 좌지우지하시는 그분 앞에 나의 힘, 나의 능력, 나의 지식은 참으로 보잘 것 없구나, 참으로 초라하구나, 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체득해야 합니다.
그 결과 결국 내가 아무리 뛰어봐야 그분 손바닥 안이로구나, 결국 내가 살길은 그분 자비의 품안에 안기는 일이로구나, 하며 철부지 어린이처럼 그분께로 다가서는 것이 겸손의 참모습입니다.
겸손하지 못할 때, 우리 신앙의 눈은 멀어버립니다. 내 능력만 믿습니다. 내 건강만을 믿습니다. 내가 지니고 있는 통장 잔고만을 믿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의지처만 믿습니다. 그러다가 큰 코 제대로 한번 다치고 말 것입니다.
마니피캇은 그냥 흘려들을 노래가 결코 아닙니다. 교만한 자들, 그릇된 지도자들, 나눌 줄 모르는 부자들에게는 철퇴 같은 노래요, 마리아처럼 작고 겸손한 사람들을 칭찬하고 축복하는 찬가입니다. 마리아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큰 위로와 해방을 선포하는 승리의 찬가입니다.
마리아는 마니피캇을 엘리사벳 집 마당에서 딱 한 번으로 노래부른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애 내내 18번 곡처럼 수시로 부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께서 수시로 부르셨던 마니피캇을 따라부르면서, 자신의 인류 구원 사업의 계획서를 작성하셨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18번곡 마니피캇을 외우다시피 한 예수님께서 공생활 첫 시작 때 나자렛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희년을 선포하시며 이사야서를 봉독하시는데, 그 내용은 마니피캇과 일맥상통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다니던 중앙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에는 축구부가 있었습니다. 1980년 청룡기 축구대회에서 결승에 올랐고, 상대 팀은 남강고등학교였습니다. 효창운동장에서 결승전이 있었고, 전교생이 응원하러 갔습니다. 결과는 중대부고의 승리였습니다. 응원전에는 약간의 긴장이 있었지만, 큰 충돌은 없었습니다. 선수들은 열심히 뛰었고, 학생들은 목소리를 모아 응원했습니다. 그날의 응원은 선수들에게 힘을 주었고, 학교 공동체가 하나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응원전만으로도 큰 화제가 되는 학교가 있습니다. 연세대와 고려대, 고려대와 연세대의 응원전입니다. 응원은 선수들을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주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면 좋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조롱하고, 야유하고, 아픈 역사를 폄훼하는 응원은 응원의 품격을 떨어뜨립니다. 스포츠는 죽고 죽여야 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스포츠는 깨끗한 매너와 결과에 승복하는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응원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소리가 아니라, 함께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일으켜 세우는 소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원의 장면을 봅니다. 마리아는 자기 앞에 다가올 일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벳도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두 여인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놀라움과 두려움, 책임과 은총을 함께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저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응원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베푸신 은총을 알아보았고, 그 은총을 축복하며 기뻐했습니다. 엘리사벳의 응원은 마리아를 세워 주는 응원이었습니다. 마리아 안에 계신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는 응원이었습니다.
마리아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노래’, 곧 마니피캇이라고 부릅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나이다.” 마리아의 노래는 개인적인 기쁨의 노래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하는 노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며,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시는 분이십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가난한 이들의 희망이고, 억눌린 이들의 위로이며,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모든 이들의 응원가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교회가 선포한 성모님에 대한 믿을 교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순명’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들었던 성모님은 당혹스러웠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았을 때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순명은 내가 원하는 것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열정’입니다. 성모님은 조용하고 수동적인 분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어떤 세상을 원하시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를 기억하시고, 굶주린 이를 배불리시며, 비천한 이를 들어 높이시는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열정은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향한 열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열정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중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성모님은 그 부족함을 먼저 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성모님은 부족함을 보는 눈이 있으셨고, 필요한 것을 예수님께 청하는 믿음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요, 전구자라고 부릅니다. 성모님은 오늘도 우리의 부족함을 보시고,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 전구하십니다.
오늘은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성모님께서 영혼과 육신으로 하늘의 영광에 들어가셨다는 교회의 믿음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희망의 표징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품에 안기셨듯이, 우리도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안에서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온전히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성모님의 삶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기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고, 자신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는 더 많은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 민족에게는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광복은 어둠에서 빛을 되찾은 날입니다. 그러나 아직 분단된 조국은 절반의 광복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언젠가 분단의 상처가 치유되고, 하나 되는 조국으로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만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이 있습니다
눈물겹도록 정겨운 만남이 있습니다
가슴 시리도록 진한 만남이 있습니다
새 세상의 시작을 준비하는
마리아와 요셉의 만남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알리는
마리아와 가브리엘 천사의 만남
구원 역사를 경축하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마리아 태중의 예수님과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의 만남
하느님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아기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만남
구원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
구원의 큰 걸음을 내딛는 갈릴레아에서
예수님과 첫 제자들과의 만남
참 세상을 드러내는 예수님과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의
따뜻한 희망 가득한 만남
십자가 아래서의
예수님과 성모님의
가슴 무너지는 만남
부활하신 예수님과
막달라 여자 마리아,
그리고 제자들과의 만남
자랑스러운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의 만남
그리고 오늘
성모님과 아버지 하느님의
감격스러운 만남
온 삶 한 길을 걸어온 성모님을
따뜻하게 품에 안으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하느님 품에서 이제야 드디어
평온한 긴 숨을 내쉬는 성모님을 봅니다
가슴 졸이며 살아온 시간들
아기를 가지면서부터 걸어온 가시밭길
사랑하는 아들이 미쳤다는 소리를
가슴 깊이 간직해야 했던 순간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아들의 처참한 죽음에
함께 해야 했던 쓰라린 아픔들
이제 이 모두를 뒤로하고
아니 이 모두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드디어 그토록 간절히 소망했던
아버지 하느님 품에서의 평화
오늘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소중한 딸 마리아를
당신의 따스한 품에 안으십니다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오늘 아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당신의 영광 안에 품으십니다
빛나는 감미로운 만남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만남의
끝자리에 함께 합니다
끝자리에 함께 함으로써
새로운 만남을 시작합니다
하느님과 나의 만남
거룩하신 어머니와 나의 만남
믿음 안에서 벗들과의 무수한 만남들
하느님과 나의
아름다운 만남의 끝자리가
이젠 누군가에게
새로운 만남의 첫자리가 될 수 있도록
부족한 나를 주님께 봉헌합니다
오늘의 성인
성 타르시치오 (Tarsicius)
활동년도 : +3세기경
신분 : 복사, 순교자
지역 : 로마(Roma)
같은 이름 : 타르시치우스, 타르시키오, 타르시키우스, 타르치시오, 타르치시우스, 타르키시오, 타르키시우스
성 타르시키우스(Tharsicius, 또는 타르시치오)의 행적에 대한 것은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그에게 바친 "성체를 위한 소년 순교자"라는 헌시에 언급된 것이 전부이다. 교회의 전설에 의하면 그는 복사의 수호성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소년다운 용기와 신앙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관한 전설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그가 살던 3세기 말경에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다. 한번은 미사가 끝난 후 신부가 감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이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였으나, 아무도 감히 감옥까지 성체를 모시고 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가는 도중에 이교도들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어린 성 타르시키우스가 나서서 그 일을 자청하였다. 너무 어린 것을 걱정하는 신부에게 그는 자신이 어리기 때문에 경비병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신부도 이 말에 동의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체를 모시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감옥으로 가는 길에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은 성 타르시키우스에게 같이 놀자고 했지만 그는 급한 일이 있다며 거절하고 서둘러 가려 하였다. 그런데 한 친구가 그의 손에 있는 성체를 발견하고 빼앗으려 하자, 이를 거부하는 성 타르시키우스와 친구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급기야는 친구들이 돌로 그를 쳤다. 이때 지나가던 군인이 다가오자 친구들은 도망갔고, 그는 온몸에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을 주교에게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여 주교에게 성체를 감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하며 숨을 거두었다. 이 이야기는 영국의 추기경 와이즈먼(Wiseman)의 소설 "파비올라 혹은 카타콤바의 교회"(Fabiola or the Church of the Catacomb, 1854)의 소재가 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성 타르시키우스는 복사와 첫영성체하는 어린이들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타르키시우스(Tarcisius)로도 불린다.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Stanislaus Kostka)
활동년도 : 1550-1568년
신분 : 신비가
지역 : 폴란드(Poland)
같은 이름 : 스따니쓸라우스, 스타니슬라우스, 쓰따니쓸라오, 코스트가
폴란드 로스트코보(Rostkovo) 성에서 태어난 성 스타니슬라우스 코스트카(또는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원로원 의원의 아들이었다. 그는 개인교수로부터 교육을 받고 14세 때에 비엔(Vienne)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근면과 신심 그리고 고행으로 유명하였고 또 수 차례에 걸쳐 환시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회 회원이 되고자 했으나 비엔의 관구장은 너무 어린 나이 등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자 그는 집을 몰래 빠져나와 순례자의 복장을 하고 당시 독일의 예수회 총장인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Petrus Canisius, 12월 21일)가 있는 딜링엔(Dillingen)까지 350마일을 걸어가 입회를 청하였다.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는 그가 비록 17세의 어린 소년이었지만 착실하고 열성적인 모습에 반해 입회를 허락하고 로마(Roma)의 수련소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1567년에 예수회에 입회한 그는 더욱 엄격한 고행을 하였고, 미사 중에 자주 탈혼하였으며,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예수회 수련자로서 단지 9개월을 지낸 뒤 사망하였다. 그는 1605년 10월 19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12월 31일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서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