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교재 연계 정책이 폐지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 중 하나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위의 사진은 올해 『수능완성 생활과 윤리』 42쪽에 나온 문항입니다.
발문을 보면 (가)를 주장한 사상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누군가 사상가가 있어야겠죠.

해설집 16쪽입니다(좌우가 분리되어 있어서 제가 사진을 합쳤습니다). 율곡 이이의 글이라고 하네요.
(가) 제시문의 두 글 중 두번째 글은 『격몽요결』 「접인」이 출전입니다. 따라서 두번째 글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첫번째 글이 율곡의 글 중 도무지 발견되지 않더군요.
위의 해설을 보면 아시겠지만, (가)의 첫번째 글과 두번째 글을 모두 활용하여 독해식으로 문항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즉 저 문항이 성립하려면 (가)의 두 글이 모두 율곡의 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첫번째 글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는 거죠.
한참 찾아봐도 안 나오길래,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EBS 관계자들이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해괴한 일까지 벌여 온 전례가 있으니, 나도 기상천외한 발상을 한번 해보자는 거였죠. 즉 율곡의 글이 아닌 다른 문헌에서 따 와서 섞어놓았을 가능성을 생각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사 범위를 율곡 문헌 바깥으로 넓게 개방하여 조사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래와 같은 원문이 걸리더군요.
"사람된 자는 마땅히 다섯 가지 일로써 친족을 가까이하고 공경해야 한다. 어떤 것을 다섯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베풀어주는 것이요, 둘째는 선하게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이롭게 하는 것이요, 넷째는 이익을 함께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속이지 않는 것이다. (夫為人者, 當以五事親敬親族. 云何為五? 一者給施, 二者善言, 三者利益, 四者同利, 五者不欺.)" [이상 『불설장아함경』권11 (T.No.n1 1p72a~b) 중]
연계교재의 지문을 다시 봅시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다섯 가지 일로써 친구를 가까이하고 공경해야 한다. 어떤 것이 다섯인가? 첫째는 베풀어 주는 것이요, 둘째는 착한 말을 쓰는 것이며, 셋째는 이롭게 하는 것이요, 넷째는 이익을 함께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속이지 않는 것이다." [이상 『수능완성』 42쪽 5번 문항 지문 (가) 중 첫째 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원문의 '친족'을 '친구'로 슬쩍 고쳐놓은 것이 눈에 띄네요.
저는 저 원문을 토대로 『율곡전서』 전체를 대상으로 재차 다양한 각도로 검색해보았지만, 낚이는 게 없었습니다.
저는 이상의 조사를 해두고 EBS에 문의를 넣었습니다. 속터지게 답변하리라는 예상이 뻔히 드는데도 뭐하러 문의를 넣느냐고 하실지 모르겠는데, 0.1%라도 제가 찾지 못한 출전이 있을 가능성은 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의를 넣는 것도 있고, 이런 기회에 저 사람들 출전 찾는 연습이라도 좀 시켜야겠다는 마음에 문의를 넣는 것도 있고 그랬습니다.
물론 정보를 공짜로 주고 싶지 않아서 제가 조사한 자료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간단하게 '내가 찾아보니 율곡 글이 아닌 다른 문헌의 글이던데 문항 자체를 폐기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하고, '문항을 유지하려거든 저 첫번째 글이 율곡 문헌 내에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했습니다.
과연 열심히 조사했는지, 한 달 걸려 답이 오더군요.
"안녕하세요. 회원님의 의견에 대한 답변을 드립니다.
해설에 ‘(가)는 율곡 이이의 주장으로,’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래 격몽요결(김학주 옮김(2013), 연암서가) 제9장 접인(接人)의 내용으로부터 (가) 제시문 윗 내용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p.209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마땅히 올바른 도리를 따라 얘기하고 토론하되 오직 글의 올바른 뜻에 대해서만 얘기해야 한다. …(중략)… 비록 점잖고 엄격하게 자기 몸 간수를 하되 절대로 잘난 체하는 기색이 있어서는 안 되며, 오직 좋은 말로 이끌고 도와주어 반드시 그를 공부하는 방향으로 이끌도록 해야 한다.
p.212 언제나 온순하고 공손하며 사랑하고 아껴 주는 태도로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 일이나 물건을 잘 되게 해주려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남을 해치고 일이나 물건을 그르치는 것 같은 일은 터럭만큼도 마음 구석에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p.201 같은 소리는 서로 호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찾아간다. …(중략)… 말로는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집안에 잡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시끄럽게 나날을 보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가 즐기는 일이 공부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특정 사상가의 주장 혹은 입장이라 하여 그 사상가가 사용한 문장 그대로를 제시문에 게재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사상가의 입장이나 주장을 왜곡하지 않은 내용이라면, 그 사상가의 언급 그 자체가 아니더라도 제시문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제시문은 이상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EBS 답변팀은 자기들이 율곡 사상에 맞게 임의로 구성한 글이 '우연히도' 불경 글의 모습과 딱 맞았다는 말인 모양입니다. 부처가 다시 환생해서 EBS에 들어갔다는 건지..
무슨 상황인지 다들 이해되시겠죠. 연계교재 집필자는 저 문항을 내면서 자기가 본 어느 불경에 그럴듯해 보이는 글이 있으니까 거기서 '친족'을 '친구'로만 바꾸면 자기가 만들고 있는 문항에 써먹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이 사례는, 연계교재 집필진이 독자들을 속이고 사실관계를 왜곡 및 날조해도 상관없다는 무책임한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연계교재 속에 이와 같은 거짓 정보가 얼마나 더 널려 있을까요? 제가 말은 안 했지만 올해 조사해본 몇몇 문항 지문들 보면 유사한 문제가 더 발견되더군요.
EBS 관계자들이 스스로 정직해질 가능성은 없는 것 같고, 연계교재 정책이 어서 폐지되는 것만이 답일 듯합니다.
그런데 저런 식으로 적절하지 못한 답변을 내놓아 빠져나가는 경우 어떻게 처단할 수 있는 대책이 없을까요? 지금 평가원도 그렇고 EBS도 그렇고 이의제기를 아무리 해봤자 '이상 없다'고 우기기만 하면 넘어가게 되어 있는데, 이 구조가 참 문제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첫댓글 교육부 민원이나 국민제안으로 올려보세요. 이 내용 그대로 올려보세요.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ebs애들이 긴장합니다. ebs 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 교육부입니다.
지금 님이 올린 저 글도, 윤리 팀 및 윤리 팀을 포함한 사회 팀만 알고 있을 거예요.
교육부에 올리게 되는 경우, ebs에서 이렇게 답변하더라, 연계교재에 오류가 무진장 많다, 이런 식의 글을 덧붙이는 정도면 될 겁니다.
저도 이제 심심할 때마다 연계교재 오류 지적하는 글을 교육부에 올리려고 합니다. 연계교재 정책을 폐지해야 한다는 취지로요.
교육부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삶 그리고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보지만, 혹시 교육부든 ebs든 윤리 연계교재에 오류가 무진장 많다, 는 지적에 증거 제시를 요구하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제가 윤사 수특, 수완 각각 오류가 70-80개씩은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니까요. 거기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선지라든가 중의성 선지 같은 것까지 합하면 각각 100개씩은 될 겁니다.
@힉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선은 저쪽 사람들이 윤리 과목을 잘 모를 테니까 글을 알아보기 쉽게 다듬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듬는 과정에서 연계교재에 다른 오류가 많다는 언급도 넣게 될 겁니다.
아울러, 저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리고 저렇게 답변하는 이유는,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 집필진에서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답변을 보낸 집필자는 별일 아니다는 식으로 하는 수밖에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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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2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태도지요. 한심을 넘어 정말 화가 납니다.
오~ 정말 멋지십니다. 좋은 지적이시네요.
올해 수능완성 생윤 집필진 좀 누가 올려주시겠어요? 어차피 책 앞에 공개된 것이니 누가 올려줘도 될 것 같은데요.
구체적인 담당 파트는 안 나와 있는듯 합니다.
@한삶 네. 그렇군요. 저 여섯분 중에 있긴 하겠죠. 그러고 보니. 참 저런 분들이 여기 저기 일을 많이 하시네요. 교과서도 쓰고 문제도 만들고. 잘 좀 하시지. 못하실 것 같으면 다른 분들에게 넘기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