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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2월20일 (녹)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청주]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야고 2, 1 - 9
† 복음 : 마르 8, 27 - 33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며,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자세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라고 사람들이 말하는지 물으신다.
이어서 제자들 자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도 물으신다. 이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고 밝히시자 이를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복음).
◈ 오늘의 묵상
몇 년 전 이맘때 사랑하는 저의 외할머니가 선종하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에게 많은 사랑을 주었던 분입니다. 무엇보다 깊은 신앙으로 저에게 큰
모범이 된 외할머니에 대한 생각이 지금도 끊이지 않습니다. 임종을 지킬
때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고요히 내쉬던 순간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빈소에서 허전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회상하던
것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보다 더 깊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묘지에 외할머니를 안장하던 날의 풍경과 느낌입니다.
경기도 파주였는데, 아직 늦겨울이었지만 그날은 마치 봄날처럼 따스했습니다.
하늘도 아주 맑고 드높았습니다. 그리고 슬픔보다는 주님에 대한 감사함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품에 할머니가 안긴다는
사실이 너무나 ‘확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믿음을 그처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듯이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고왔던 할머니의 삶이, 고생도 많았지만 하느님께 충실했던 그
삶이 주님의 자비 안에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주님 곁에서 누릴 평화와 행복을 사랑하는 가족에게 나누어 준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본당 신부로 부임한 뒤로는 죽음을 앞둔 이들에 대한 병자성사나 교우들의
빈소를 방문해 연도를 바치는 일, 장례 미사를 봉헌하는 일이 잦습니다.
그러한 기회에 주님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온 분들이 조용히 주님께로 떠나며
슬픔 속에서도 표현하기 어려운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오롯한 자비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 이어지는 성경 구절에서는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고
말합니다(야고 1,13 참조). 참으로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며 충실히
살아온 사람에게 죽음은 심판을 이기는 주님의 자비를 만나는 자리일 것이며,
그 자비를 우리 또한 이 땅의 순례의 여정에서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2014년 가해 2월20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마르8,27-33)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마르 8,27-33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공자께서는 “아침에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 봉헌을 하고
성체를 모시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어야 하는데 돌아보면 후회도 많고,
말씀을 들은 사람인지?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모신사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속좁게 살기도 합니다.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주님을 모신
감사함을 성당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면 영락없이 주님의 마음을 상해드리고
맙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로마8,5). 그리고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8). 그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육적인 욕망을 따르고 있으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우선순위에’ 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앞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29).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베드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는 꾸지람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반박을
하였습니다. 사실 지금껏 스승을 믿고 따라왔는데 당신이 떠나시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는 마음도 있고, 당신이
불행한 길을 가신다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지금껏 걸어온 길이 성공적이라 생각하였는데 지금 계획이
바뀐다면 그것은 스승님에게도 자기들에게도 실패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스승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싶은데 수모와
배척을 당한다니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 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스승의 깊은 뜻을 아직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적인 것에 매이는 것, 진리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사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계획인데 그것을 반박하고 그 길을
가시고자 하는 예수님을 방해하였으니 베드로는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먼저
하려 한다면 우리도 역시 사탄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현실적인 나의 잇속을 챙김으로써 얼마나
자주 사탄이 되고 마는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희생과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고통 없이 영광
없습니다. 이 시간 쉽고 편한 일, 쾌락을 즐기며 돈 되는 일을 쫓고,
소유와 지배, 명예에 맛들이고자 하는 마음, 내 생각이 다 인양 남에게
주입시키려는 사탄의 마음을 주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사랑합니다.
# 참고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인데,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기름부음받은 사람’ 이란
뜻이다. 왜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메시아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약50년 후 유배가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간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들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리라
믿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이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다. (손희송신부)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나의 말과 행동의 기준이 과연
2014년 가해 2월20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마르 8,27-33
발명왕 에디슨을 아십니까? 이 세상을 변화시킬 많은 발명품을 만든
에디슨이지만, 그는 어렸을 때에 말썽꾸러기에다 공부는 뒤에서 일등이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에디슨을 바라보면서 “저 애는 수업을 못 따라가니
사람 구실하긴 틀렸어.”라고 수군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에디슨을
끝까지 믿었고 이런 말을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들아, 네가 너무 우수해서 학교 공부가 너를 따라오지 못하는구나.”
학생이 수업을 못 따라간다는 말, 또 반대로 수업이 학생을 못 따라간다는 말.
결과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천지 차이의 말이 될 수
있었고, 실제로 에디슨은 이 말에 힘입어 역사의 한 획을 긋는 발명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말 한 마디가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 수 있습니다. 즉, 말 한 마디가
기쁨도 또 반대로 좌절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거꾸로 하면
전혀 다른 뜻이 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힘들다’를 거꾸로
하면 ‘다를 힘!’이라는 말이 되고, ‘NO’를 거꾸로 하면 ‘ON’이 됩니다.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고, ‘역경’을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되고,
‘인연’을 거꾸로 읽으면 ‘연인’이 됩니다. 이처럼 바꿔서 생각하면 부정적인 상황도
긍정적인 상황으로 바꿀 수 있는 커다란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말과 행동은 부정적인 상황으로 이끌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힘이 되어
주기보다는 더 힘을 빼게 만들고,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지요.
따라서 세상의 말과 행동을 하기 보다는 주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는 주님의
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기준보다는 주님의 기준을 앞세워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으뜸 제자라고 말할 수 있는 베드로는 오늘 스승님의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이야기하시자, 그래서는 안 된다며 반박하기
시작하지요. 그때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다보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할
수도 있고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반대하는 ‘사탄’
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의 기준이 과연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입니까? 아니면 주님입니까?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지, 아니면 사탄이
될 것인지는 내가 세우는 기준에 따라서 바뀔 것입니다.
인사를 잘하는 사람은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인사를 잘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것을 뜻한다(김태광).
인천교구 새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생명평화미사가 있습니다.
당신의 하루(김선호, ‘좋은생각’ 중에서)
“자기야, 누가 자기 시간을 딱 하루만 사겠다고 하면 얼마에 팔 거야?”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어느 연인의 대화를 들었다. 순간 머릿속이 바빠졌다.
돈을 제일 많이 벌던 때를 생각하며 계산해 보았다.
쌀쌀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여자가 말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생각해 봐. 얼마에 팔래?”
“글쎄 한 이백만 원?”
아뿔싸! 나도 백 단위로 말할걸, 좀 더 큰 액수를 떠올리지 못한 걸 자책하다
뒤이은 남자의 대답에 나는 더 작아졌다.
“한 인류학자가 조사해 보니 유럽 사람 대부분은 자신의 하루를 팔지 않겠다고
했대. 액수에 상관없이 말이야.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품 가방의 가격을
기준 삼아 대답했대.”
“뭐야...”
“자기 대답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환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지. 그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없을 만큼 소중히 여기는 거잖아.”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많은 생각이 들었다. 덥석 하루를 팔겠다던 내
모습이 못내 씁쓸했다. 문득 한밤중에 칼국수가 먹고 싶어 가족과 포장마차에
가고, 휴일 저녁에 동생과 추억의 영화를 보던 순간이 떠올랐다. 정말 이렇게
소중한 하루를 팔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 나에게 그 질문을 한다면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나의 소중한 하루를 절대 팔지 않을 거야.”
나의 소중한 하루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의 하루를 가장 소중한 날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고팔고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귀한 날로 받아들이는 것. 그때 나의 삶은 더욱 더 의미 있고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그분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그분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선택하셨습니다.'
2014년 가해 2월20일 연중 제6주간목요일 복음묵상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코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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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황 수위권(首位權)을 받은 수제자 베드로,
천국의 열쇠를 받은 사도 베드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고백한 베드로. 그 베드로가 자기 욕심을
담은 한마디의 말로 인해서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볼 때, 악을 이기고 선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빙판
위를 걷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언제 깨질지도, 언제 미끄러질지도 모르는 살얼음판과 같은 삶.
악은 늘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 합니다.
우리는 늘 그러한 유혹에서 이겨내고자 싸워야만 합니다.
한 번 알았다고 해서 그 앎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게 하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믿었다고 해서 끝까지 믿는다고 장담 할 수도 없습니다.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해도 눈에 보이는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주어진 그날까지 넘어지고 일어서는 일은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실망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시는 것은 우리의 약함을 선택하셨음을 뜻합니다.
누구보다도 우리의 모든 것을 잘 이해하셨던 하느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의 조건은 같습니다.
그것은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가장 중요한 진실입니다.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의 마음을 산산이 부숴버린 세 번의 새벽닭의 울음소리.
베드로 사도가 몸서리치게 싫어했던 자신의 약함,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그 약함을 그 어느 것도 이길 수 없는 강함으로
이끌어주십니다. 그 강함은 바로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내어드리고 그분과
일치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얻어지는 힘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토록
싫어했던 자신의 비겁한 마음을 극복하고, 더 이상의 도망이 아닌, 장렬한
순교의 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강함을 이루어내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넘어지더라도 낙담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약함 때문에 자신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그 약함 때문에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말로 오늘 묵상을 맺을까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 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고린토후서12,9)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열린 마음으로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20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마르코 8장 27-35절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열린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정말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 내가 정말 사랑하고
있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대답이 이랬다면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뭘 새삼스럽게 그런 걸 다 물어봐? 넌 그냥 여러 친구 중에 한명이지.
그냥 친구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주길 바래?”
정말 듣고 싶은 대답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너는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야. 존재의 이유. 너는 내 인생의 의미야.
네가 없는 이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물음은 바꿔 말하면 네 인생에 나는 무엇이냐? 네 인생에
나란 존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 라는 말도 됩니다.
동작이 빨랐던 베드로 사도가 재빨리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간단하지만 참으로 명쾌한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승님은 나와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메시아이십니다. 스승님은 내 임금,
내 주님, 내 인생의 전부, 내 인생의 의미, 내 하느님이십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가 정말 대답을 잘 했습니다. 예수님 마음에 쏙 드는 정답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보면 상황은 조금 달라집니다.
안타깝게도 베드로 사도는 아직 깊이 있고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당시 대다수의 백성들이 기대하고 있던 힘과 권력의
세속적 메시아, 위엄에 찬 영광의 왕의 모습을 한 메시아가 아니라 고통 받고
수난 당하는 십자가의 메시아라고 스스로의 운명을 밝히십니다.
그 말씀 끝에 베드로 사도는 크게 실망합니다. 자신이 기대했던 세속적인
희망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느낌과 더불어 자신이 깊이 사랑했던
스승의 끔찍한 죽음을 예견하며 크게 안타까워합니다. 이런 이유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흔들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외칩니다.
곧 다가올 예수님 십자가의 신비를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했던 베드로 사도,
스승님 신원에 대한 파악이 아직 정확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베드로 사도,
그래서 아직도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세속적일 수밖에 없었던 베드로
사도를 향한 예수님의 질책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하는 데 있어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님과 함께 누릴 인간적 기쁨과 행복,
현세적 달콤함과 성공에만 연연했지 그분과 함께 겪어야 할 고통과 수난,
그분과 함께 지고가야 할 십자가는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한 몰이해의 결과가 “사탄아, 물러가라.”였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 많은 기쁨과 은총, 축복이 우리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입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그 선물들을 받아들이겠지요. 그렇다면 오늘도
예수님으로 인해 다가올 시련과 박해, 고통과 십자가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열린 마음으로 그 모든 인생의 부정적인 경험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차별하지 않는 게 사랑이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20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야고2,1-9 마르8,27-33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마르 8,27-33
차별하지 않는 게 사랑이다. -차별, 구별, 분별-.
오늘 1독서 야고보서의 긴 내용도 결국은 ‘차별하지 마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각자 ‘있는 그대로’ 보는 ‘구별’과는 달리 우열을 비교하여 ‘차별’하게
되면 이는 분명 죄가 됩니다.
구별에는 각자 특징에 따라 ‘차이’가 있게 되지만 차별에는 필시 ‘무시’가
따르게 됩니다. 그러니 구별하되 차별하지 않는 것은 진정 애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인간이라 해도 각자 모습은 얼마나 다른지요. 본원에서 공동체
참사회에 참석하며 사람의 신비에 대해, 공동체의 신비에 대해 감탄하게
됩니다.
개인도 놀랍지만 공동체도 놀랍습니다.
개인이 우물이라면 공동체는 바다입니다. 개인이 아무리 출중해도 공동체가
쳐주지 않으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어제 공동체 형제들이 어느 지인 댁을 방문하여 지인과 나눈 대화 중 깨달음이
깊은 묵상감입니다.
“수사님이 말씀하셔서 30년 이상 된 앞산의 전망을 가리고 있는 히말라야시다
세 나무를 베어버렸습니다.”
“잘 했습니다. 전망이 탁 트여서 좋습니다. 제가, 기도 중에 자꾸 생각나서
전화 드렸던 것입니다.”
지인 댁과 한 수사님의 대화가 참 신기했습니다. 난 이 지인 댁을 수차례
방문 했으면서도 히말라야 시다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하다. 왜 나는 히말라야 시다를 보지 못했지?”
정말 신기했습니다. 나는 전혀 히말라야 시다를 의식하지 못했고 앞산의
전망을 가린다는 생각도 추호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장님, 보이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합니다.”
이래서 사람이 정말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생각도, 마음도, 가치관도 타고 나는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이건 구별이지 차별이 아닙니다. 바로 이게 공동생활의 필요성이자
풍요로움입니다. 왜 나는 히말라야시다 세 나무를 보면서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가, 골똘히 생각하는 중 그 답을 찾았고 바로 그게 내 모습임을
알았습니다.
- 히말라야시다 나무 자체도 좋았고 자연 상태 ‘있는 그대로’의 각자와
전체의 모습을 받아드렸기에 나는 전혀 문제를 느끼지 않았는데 그 수사님은
전망을 가리는 그 나무들이 늘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그 수사님께는 문제가 됐던 것입니다.
집무실 창 밖 울창했던 초록빛 나무들의 풍요로움을 즐겼던 나와는 달리
그 수사님은 답답하다고 즉시 쳐냈던 분입니다.-
이렇게 수 십 년을 함께 살아도 서로 다르다는 차이점을 참 실감나게
깨달았습니다. 바로 각자의 타고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점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엄연히 받아드려야 할 생각 차이의 현실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서로 간 오해는 해소되고 차별의 죄도 짓지 않게 됩니다.
무지로 인한 차별과 무시이지 알면 알수록 이해와 수용, 존중이 뒤 따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위대함은 차별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공동체생활에 차별과 편애 무시보다 큰 해악은 없습니다.
이로 인해 받는 상처도 참으로 큽니다.
차별하지 않은 것이 진정 큰 덕인 데 이 덕 또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재산의 유무, 재능의 유무에 따라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진가를 인정하여 있는 그대로 구별하여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차별하기로 하면 누구보다 베드로를 우대했어야 하는데
오늘 베드로 대하시는 모습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스승 예수님의 진면목을 이해한 베드로이지만 당신의 수난예고에
강력히 반발하는 베드로에게 지체없이 철퇴를 가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참으로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공명정대했던 예수님이기에 가능했던 제자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사람의 일만을 생각할 때는 사탄이요 '차별'이지만 하느님의
일을 생각할 때는 있는 그대로 보는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차별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공평무사한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충만케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칭찬과 꾸지람은 종이 한 장 차이
2014년 가해 2월20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칭찬과 꾸지람은 종이 한 장 차이
사람의 기본적 관심사는 이 세상의 안녕, 물질적 안녕이라 봅니다.
영적 안녕, 하늘의 안녕,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이 두 관점, 하느님의 것과 세상 것을 잘 운영하는 게 가톨릭의 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선언하며 칭찬을 받았습니다만,
몇 초 만에 베드로의 태도를 보시고 곧바로 사탄이라며 꾸짖으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신앙인들을 칭찬도 하시지만 사탄이라며 야단도 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마르코 8,32~33)”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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